정태수(鄭泰守, 한보그룹)
대한민국의 前 공무원, 기업인, 한보그룹 창업주.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본명은 정태준이었지만 역술가의 조언을 받아서 정태수로 개명했다.
자는 충보(忠甫), 아호는 정암(亭岩)이다.
1923년 8월 13일 경상남도 진주군 미천면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정용석(鄭用錫) (1899. 04. 09 ~ 1969. 11. 03)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맹옥
(1904. 10. 05 ~ 1979. 07. 27)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소학교만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그리 넉넉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9년 김순자와 혼인 후 1951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초기에는 부산, 경남지역 세무서에서 일하다가 1959년경 서울로 전근했다.
1966년에 성주 이씨 이수정(李受貞) (1933. 03. 16 ~ 1983. 03. 29)과 재혼했다.
하지만 말단 세리로서의 일이 싫증이 나기도 했고, 이름을 태준에서
태수로 바꿀 정도로 역술에 관심이 많기도 했다.
그래서 1969년 가을 즈음에 친구와 같이 점쟁이를 찾았는데, "직장 그만둬,
사업을 하면 대한민국에서 첫째, 둘째 손가락에 꼽히게 될 것이야!",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성공한다!!"라는 점쟁이의 조언을 듣고 나서부터
귀가 솔깃하여 사업 대상을 물색하려고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돌을 수집했고
진짜로 몰리브데넘 광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치 월급 정도 되는 헐값으로 광산을 인수한 후 수백 배의 차익을 남기고
판뒤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에 한보상사를 설립함으로써 그 길로 사업가로 전직했다.
그게 한보그룹의 시작이었다.
한보그룹은 "땅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성공한다!"는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공무원 재직 시절 쌓은 인맥을 이용, 대출 받은 돈을 통해서
구로구에 영화아파트를 지어서 돈을 번 뒤 1979년 9월에는 은마아파트를 지었다.
헐값에 쓸모 없어 보이는 땅을 산 뒤 거액의 자금을 빌려서 4년 후에 건축된 미도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은마아파트의 완판으로 2,000억 원을 손에 쥐며 재벌로 거듭나게 된다.
은마아파트를 짓던 도중 부동산 규제가 걸려서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때 마침 2차 오일 쇼크로 화폐 가치 하락과 함께 부동산이 안전 자산으로 각광 받으면서
20일 만에 완판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1983년 3월에 강릉영동대학을 인수하였으며 1983년 11월에는 대치동 미도아파트를 건설했다.
한보의 건설업 성공에는 부인 이수정의 역할이 컸는데, 그녀는 1983년 암으로 숨지기 전까지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들에게 대접할 새참을 손수 나르고 자금 조달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태수 본인은 부인 이씨 사후 안장된 경기도 김포 묘소를 6개월 간 화려하게 꾸몄다.
쇠를 만지시오?
아파트 사업의 성공 후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서 해외건설 사업에 진출했고 1982년
한보탄좌개발을 세워 탄광사업에도 나섰으며 1984년 금호산업으로부터 철강부문을 인수했다.
1991년에 수서사건으로 경영에서 물러났지만, 1993년 총회장으로 추대된 후 경영 일선에 복귀해
상아제약도 인수해 제약사업에 나섰으며 1995년에 부실건설사 유원건설을 인수했다.
1996년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외에도 당진제철소 건설을 주도했다.
다만 무리한 사업확장이 독이 되어 1997년 2월에는 그룹이 부도나고
한보철강의 부도로 대한민국은 외환위기가 시작됐고 기아그룹, 한라그룹 등
굴지의 대기업이 부도나고 무너지게 되었다.
즉 공무원 붐을 불게한 장본인이다.
5월에는 공금 횡령 및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때 한보 리스트가 정치, 사회상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정태수 리스트와 관련된 은행장이나 여/야 정치인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기소되거나 감옥에 갔고, 청문회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개입 의혹까지 불거져 김현철 국정농단 사건으로도 번졌다.
청문회 당시 정태수의 별명이 자물쇠, 모르쇠로 자기에게 불리한 질문들은
"그 역시 재판중이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겠습니다."로 부인하였다고 한다.
특히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계열사 사장)이 뭘 압니까?"
이 발언은 당시 샐러리맨들의 자조 섞인 신세 한탄에 인용되곤 했다고 한다.
계열사 사장이면 그래도 샐러리맨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인데, 그룹 오너가 이들을 머슴으로 볼 정도이니,
당시 한국사회에서 재벌이 가진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준 발언이기도 했다.
심지어 청문회 출석 당시 휠체어를 타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7년 외환 위기를 일으킬 단초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모기업 (주)한보는
진흥기업 및 일본 야마토공업, 한보철강공업은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
대성목재는 동화기업, 한보건설은 미국 울트라컨, 상아제약은 녹십자 등에 각각 인수되었다.
사업 결정에 점쟁이의 조언을 곧잘 들었던 정태수였기에, 한보사태 후 세간에 "당신은
쇠를 만져야 큰 돈을 번다."는 조언을 듣고 제철 사업을 시작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세무에 밝고 사업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공직자
출신으로 대기업을 일굴 만큼 철저한 연구와 수완을 갖췄던 정태수의 면모를 볼 때
이 쇠는 사실 금속이 아니라 동전, 즉 금융업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실제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종금사들은 12개월 이내의 저이율 외채를 끌어들여
다시 동남아시아 등지에 0%의 이율을 얹는 방식으로 앉아서 떼돈을 벌었던 만큼,
차라리 금융업에 손을 댔더라면 1990년대 후반의 종금사 퇴출 사태를 비켜갈 만한
새로운 금융사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금산분리 때문에 한보그룹은 은행 등 주요 금융업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나마
최선이 한보선물, 한보상호신용금고 등 금산분리가 적용되지 않는 제2금융권에 한했다.
이후 5년 5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2002년 10월 고혈압과 협심증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의 교비 72억 원을 횡령하여 또 잡혔고,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2심 재판 도중 2007년 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그대로 해외로 도피했다.
그 뒤 아직도 잡히지 않은 상태다. 관련기사 나이를 고려하면 이미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2017년 6월 11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조용래를 통해 넷째 아들인 정한근이 "정태수가 아직 살아 있고,
자서전 초고를 만들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2019년 6월 11일에 정태수의 아들 정한근이 체포되었다.
검찰에게 "정태수가 1년 전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검찰은 그가 2019년 6월말 현재 기준으로 최근까지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렀다고 확인돼 국내 송환을 추진해 왔었다고 밝혔다.
어느쪽 말이 맞는지는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아들인 정보근이 아버지 도피를 도왔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동월 2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또다시 보도됐다.
정태수가 에콰도르에서 사망한 것이 검찰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징역형 등 형벌은 범인의 사망으로 형 소멸이 되었으나, 체납세액은 상속인에게 승계되었다.
2020년 4월 1일 정한근은 1심에서 징역 7년과 추징금 401억 3천여만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정한근과 검찰이 모두 항소하였으나 2021년 1월 22일 2심 법원은
양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여 1심의 형을 그대로 선고했으며 2021년 5월 13일에는
결국 정태수의 4남 정한근에 대한 징역 7년의 형과 401억여원의 추징금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