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본문: 히 6:13-7장
◇ 제목: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고 채워가는 삶이 되고 싶다
◆ 기도
며칠간 옥상방수와 마당손질, 원고작업을 하며 몸이 많이 고됩니다. 그래도 지난 꾸준한 운동의 결과, 오늘을 살아갈만큼은 거뜬한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도 이런 시간들을 통하여 단련하사 이전과 같은 일들이 와도 이전처럼 엎어지지 않도록, 거뜬한 힘을 기르는 시간으로 삼아주소서.
◆ 본문살핌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을 만물 위의 어떤 것보다 큰 존재로 바라본다(6:13). 그런 분께서 약속하셨으니 그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하나님은 거짓을(헛된 약속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니 그분의 유일무이하신 전능하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상기할때, 신자들은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6:13-18).
그러나 신자가 인간으로써 일관되게 약속을 붙든다는 것을 얼마나 힘든 일인가?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한 대제사장되신 예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말한다(6:19-20). 예수께서 레위 혈통이 아니심에도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것은 살렘 왕이자 대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의 뒤를 계승한 까닭이라 설명한다(히15:6,10,11,6:1920,7:1- 17). 시편 110편이 근거이며 이 시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와 동등한 위치의 보좌를 차지하신 또다른 '주'가 등장한다. 이는 예수님 께서도 언급하신 바있다. 본 시편은 애초에 유다지파의 왕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기도할 뿐더러, 110편의 저자가 다윗임을 미루어 그가 선견으로 본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 역시 유다지파의 계보를 따라 태어나셨으며 다윗에게서 이어진 혈육을 지녔다. 7장 전체는 이 홀연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신비에 대하여 언급하고 예수께서 그 뒤를 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7:1-24)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고 이야기한다(7:25-26).
◆ 묵상
새로운 제사직분(예수 그리스도)과 함께 율법도 반드시 바뀐다 했다(히 7:12). 새로운 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통과한 이웃사랑이다. 이는 출석교회에 충성하여 거기를 통해서만 교우들과 이웃을 돌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된다. 잘만 사용한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언제나 사람이 문제다. 왕의 제도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을지라도 사울왕 같은 이가 나왔는가 하면 다윗 같은 이도 나왔다. 하나님이 반대하셨던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제도가 애초부터 선하고 아름다웠던 제도였던 것은 아니다.
묵상할수록 고민은 명확하게 드러나고 응답도 조금씩 보이는듯 하다.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게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인 것처럼, 교회조직 안에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조직도 안에서만 교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무교회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조직의 효용성은 인정하나 조직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 전이해적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논외로 하더라도, 나의 독립적 성향을 논외로 하더라도, 내게 교회조직은 필수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편의성을 위해 마련된 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삶을 살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답은 생각보다 쉽게 떠오른다. 뭘 어떻게 사랑해. 그냥 사랑하면 되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혹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만큼, 나와 그가 녹아 없어지지 않고 서로 존재하며 교제하는 그대로 서로 나누고 돕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면 그게 사랑 아닐까. 사랑하는 거 아닐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문헌은 현대적인 겸손은 우월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워 주었다. 아마 사랑의 개념도, 용서의 개념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하나님께 천 달란트 빚 탕감받고 이웃에게 백 데나리온 독촉하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인간이란 서로서로에게 백 데나리온어치 빚을 지고 얽혀있는 고만고만한 존재들임을 알려 준다. 서로 도긴개긴이다. 서로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다투고 미워하고 정죄하는데, 너희들 받은 큰 탕감의 은혜를 생각할 때 너희끼리 그런 것으로 정죄하고 미워하고 용서치 않으면(탕감치 않으면) 되겠느냐 반문하신 것 같이 느껴진다. 천달란트 탕감받는 Amazing 한 경험을 한 이 내가, 겨우 백데나리온 어치 문제도 못 풀어서 꼴사나운 너를 하해와 같은 맘으로 용서해 주마. 이런 게 잘못된 겸손 아닐까. 괴물같은 사랑 아닐까. 이게 사랑이기는 한 건가???
더 깊은 것,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은 사랑을 말함에 틀림없다고 더욱 믿어지는 날들이다. 사랑...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고 채워가는 삶이되고 싶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주신 계명이 사랑이거늘 저는 그동안 무엇을 세우려고, 무엇을 통해 주의 나라 이뤄드리겠다고 했던 것일까요. 사랑과 겸손을 더욱 배우게 하소서. 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