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의 ‘강감찬 출생’
강감찬은 대평(송나라 태종 년호) 7년 (고려 성종 원년)의 과거시험에서 갑과( 甲科) 장원에 급제했다. 현종 통화(글안 성종의 년호) 27년(고려 목종 12년)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해 11월에 글안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이 땅을 침공해 들어왔다.
임금은 금성(지금의 전라도 나주)으로 피난가고 허공진을 시켜 글안군이 회군하도록 강화를 맺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글인의 성종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시실 이 모든 책략은 강감찬에게서 나왔다.
임금은 강감찬의 묘책을 칭찬하여 시를 지어 위로했다.
경술년에 오랑케 난리가 있어
적군이 한강 가에 깊숙이 처들어 왔네
그때 강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케가 되었으리.
강감찬의 출생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세상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에 들어갔는데, 마침 큰 별이 어느 백성의 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신은 아전을 시켜 그 별이 떨어진 집을 살펴보도록 했다. (*강감찬 948-1031)
그 집에서는 마침 부인이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 사신은 이것을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며, 뒷날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송나라 사신 가운데 학식이 매우 깊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강감찬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문곡성(문운을 주관한다는 별이름, 문창성이라고도 한다.)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 별이 어디에 있는지 궁굼했는데 오늘 뵈오니 공이 바로 문곡 성이시군요.”
그리고는 곧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큰 절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매우 황당하지만 고금의 벼슬아치들이 서로 전하여 왔고 또 임상국 댁에 이런 기록이 있으므로 여기에 실어둔다.
-최자의 ‘보한집’에서-
*최자(崔滋 1188-1260)
고려 문인으로 호는 동산수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국학학유에 이르렀다. 이규가가 그를 인정하여 자신의 문필 후계자로 추천한 일이 있다. 저서에 가집(歌集)은 전하지 않고 보한집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