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구원론
제4장 중생(重生)-1
重生은 글자 그대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을 들으면 니고데모 이야기와, 어느 목사의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바리새人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모태에 두 번째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영적인 재탄생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육신적 재탄생으로 생각해서 어떻게 자기를 다시 임신해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는 자신의 책에 잘못된 구원관을 썼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구원파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구원파는 1960년대에 미국 방패선교회의 딕 욕, 우리말 이름으로는 덕인용이라는 선교사와 네델란드 세계복음선교회의 선교사 케이스 글래스, 우리 말 이름으로는 길기수가 한국에 들어와서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며 대구를 중심으로 퍼뜨린 기독교 이단입니다.
구원파는 권신찬과 유병언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의 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의 기쁜 소식선교회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권신찬과 유병언은 세월호와 관련 있던 사람들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딕 욕이나 케이스 글래스 등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지 않고 선교사로 왔다고 합니다.
구원파의 주장을 간단하게 봅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함으로 구원받지만, 이방인은 죄 사함의 복음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은 구원파 교회를 예정하셨고 개인은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일단 죄 사함을 받으면 육신으로는 어떻게 생활하든 관계없다.
모든 종교 행위와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이 맞는지 살펴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고, 이방인도 역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마 22:37,3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면 예수님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으니 하라고 거짓말을 하신 불의한 분이시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대상으로 교회를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예정하셨다는 말씀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일단 죄 사함을 받으면 육신적으로는 어떻게 생활하든 관계없다고 하는데, [롬 8:1]을 보면 일단 구원받은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즉 구원받은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죄로 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짓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원받고도 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마구잡이로 될 대로 되라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영혼에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찔림이 있습니다. 그 찔림에 따라 죄를 짓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사실은 마음대로 죄를 짓고 싶어도 그것을 말리는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며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입니다. 구원파는 이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체가 아이로니컬하게도 구원파이면서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는 말씀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방종하는 것은 안 된다고 경계하셨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방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구원받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구원파의 주장은 잘못이라는 증거입니다.
제1절 중생이란 단어의 의미
앞에서 말한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겐나오 아노센’이라는 두 단어인데, ‘겐나오’는 ‘아기를 배다, 태어나다’, ‘아노센’은 ‘다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을 육신적으로 어머니가 임신해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아서 다시 태어난다면 나이 먹은 육신의 나와 갓 태어난 영적인 나, 이렇게 두 명의 내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 두 명의 내가 죄와 생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롬 7:22~24]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롬 8:1,2]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외칩니다. 나이 먹은 육신의 나를 갓난 영적인 내가 이겼는데,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뚱맞은 얘기 같지만, 여름이면 오이지를 잘 먹습니다. 돌로 꾹 눌러놔서 꼬들꼬들하게 된 오이지를 쭉 찢어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이 참 좋죠?
이렇게 꼬들꼬들하게 된 오이지를 다시 덩굴에 달린 싱싱한 생오이로 만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오이지를 다시 생오이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더더구나 오이 덩굴에 붙어있게 만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 쪼그라든 인간을 다시 싱싱한 죄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역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 쪼그라든 인간을 싱싱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이지가 다시 오이 덩굴에 달린 생오이로 변한 것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기적적인 일이고 더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것은 이전의 나는, 쪼그라든 오이지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뜻이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지금의 내가 단순하게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갓 태어난 아기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重生’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거듭나는 것뿐만 아니라 회심과 성화까지도 포함한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구원의 서정(과정) 면에서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개혁교회의 표준적 신앙고백서들에서는 중생을 죄인이 거듭나서 새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중생은 죄인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하고, 새 생명의 원리를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는 용어는 영적 새 생명을 인간 안에 심어주시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하나님께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다시 태어났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제2절 중생의 본질적 성격
중생의 본질적인 성격은 세 가지로 말합니다.
1. 중생은 근본적 변화입니다.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가 인간 생명 안에 심어지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서 근본적으로 죄인이 변화되는 성령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생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 중에서 어느 한 면만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全人이 거듭나게 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죄적인 성향을 일시에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사람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거듭남과 동시에 완벽하게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남있는 죄성(罪性)이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새사람으로 변화합니다.
2. 중생은 순간적인 변화입니다.
중생은 갑작스러운 변화이며 동시에 초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중생이 언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인은 서서히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거듭납니다. 그 순간적인 변화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뿐입니다.
또한, 거듭나는 변화는 도덕적 설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3. 중생은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중생은 은밀하고도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들을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영적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에 거듭남의 변화를 느끼는 정도도 각기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