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afeattach/17psi/83cbcd1e8f8872949c565d2dd0f22816a19227be)
![](https://t1.daumcdn.net/cafeattach/17psi/8c41cced3de218641db0c3efd637943e6ea31ae5)
🔎능력이 출중했던 대군들
세종대왕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가 8명, 영빈 강씨가 1명, 신빈 김씨가 6명,혜빈 양씨가 3명등 자녀들 가운데 딸이 귀하고 왕자는 참 흔하디 흔한편이다
여기에 세종 집권 후반에 새롭게 창제되는 문물에 왕자들이 저극적으로 참여를 한다.
조선왕조는 개국 이후 바로 정도전등 신진 사대부들의 의하여 왕족은 정치 참여를 금지하며 왕실의 가까운 직계나 방계들은 과거나 벼슬등 현정치 참여에 금하여 그들 대부분이 한량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세종의 정비 소생의 왕자들은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새롭게 창제 되는 문물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고 여기서 배우고 익힌 학문과 여러분야 의 다양한 지식을 가진 인재들이 많았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자손중에 가장 영특한 왕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첫째 문종과 둘째 세조인 수양대군은 워낙 잘알려져서 생략하고 나머지 대군들을 포스팅한다
세종의 삼남 안평대군(1418~1453)
세종과 정비 심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외 여러개 ,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좌언대부정언의 딸과 결혼하고 1430년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고,황보인 김종서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단종 즉위 이후 조정의 문신세력과 긴밀한 사이로 수양대군측의 무신세력과 맞서며 조정의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했다. 1452년 단종이 즉이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난 뒤에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이에 안평은 반발하여 황표정치의 부활
을 주장했고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등이 살해당하자 안평은 강화도로 귀향을 갔다가 교동으로 옮겨진 뒤에 36세의 나이에 사사를 당한다.
안평은 어려서 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시.서.화.등에 능해 모두 삼절로 불리며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원나라 문인인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체가 크게 유행 하기도 했다.
몽유도원도 발문과 아래는 안평의 꿈을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그림이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세종대왕 영릉신도비문이 안평의 글씨이다.
임영대군(1419~1469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이 네째 아들로 이름은 구 자는 헌지 ,1428년에 임영대군에 봉해지고 1430년 안평과 같이 성균관에 입학했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에 원윤이되고 1445년에 왕명으로 총통 제작을 감독하고 , 문종의 명으로 화차를 제작하였다.
세조의 집권이후 그를 보좌하여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광평대군(1425년 ~1444년)
세종과 소헌왕후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1336년 신자수의 딸과 혼인하고 그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광평은 효경.소학.사서삼경.좌전 등에 능틍하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음률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7남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장자 방번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었다.
이듬해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강화 및 풍습교화를 위해 한양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주관을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으며 서예등에 능통했다고 한다. 아깝게도 2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금성대군(1426~1457년)
세종과 소헌왕후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결혼했고, 그해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8번째 왕자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양
되었다.
1452년 단종이 즉이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 받으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 하자 이에 반발하다가 삭녕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영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 (정조 15년)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평원대군(1427~1445년)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번째 아들로 이름은 임,자는 진지이다.
1434년 평원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종학에 입학 ,호군 홍이용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 학문에 힘쓰다가 1445년 1월 천연두로 죽었다. 광평대군이 죽은 이후 이듬해 그의 갑자스런 죽음은 세종을 무척 힘들게 했으며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세종은 아들들의 죽음이후 불교를 숭상하여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 한동안 누구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후손이 없이 죽어서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이 그에게 입양되었다.
영응대군 (1434~1467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번째 아들로 이름은 염이다.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사랑이 지극했고 1450년 세종
은 영응대군의 자택인 동별궁에서 승하 했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했고,그림과 글씨에 능했고,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세종대왕때 북방의 4군6진을 개척할때 지휘장군외 왕실의 대군들도 북방에 머물며 같이 참여하게 했다.
세종은 아들들인 여러 대군들을 세종의 새로운 학문과 과학기술 음악등에 아들들의 적극적인 참여 시켰다.
실제로 세종 집권 후반기에 새롭게 창제된 신문물이나 불경출판 한글장체등에 여러대군들의 책임하에 사업이 진행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지속에 다양한 문물참여를 했었던 여러대군들과 왕자들.이들은 세종대왕 사후에 수양대군의 왕권 탐욕에 연관되어 단종을 위해 죽어간 대군들과 왕자들 혹 세조가 된 수양대군
지지층으로 나름 영화를 누린 대군등으로 나누어진다.
신생국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후계자 자리를 두고 피를 부르는 비극을 경험했고 그 승자인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 결정에 장자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자질부족 이유로 세째 충녕대군으로 바꾸어 세종이 왕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본 세종의 의지였고 왕조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장자 승계원칙을 굳게 다지고 같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싸우는 모습을 경계했던 세종인데, 그의 사후 얼마 안되어 조선왕실은 같은 부모를 둔 형제들 사이에 서로 죽이는 비극이 되풀이 되니, 세종의 그 많은 아들들도 결국 여기서 벗어날 수없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BF1224A73B9F37D)
자료 더보기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6A3444F114C0D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