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光州李氏) 이인손(李仁孫)
- 지인주부사공 휘 원보는 외조부(전농판관공 휘 승은 외삼촌)
이인손(1395.태조 4 ~ 1463.세조 9)은 세조(世祖)대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이다.
시호(諡號)는 충희(忠僖)이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이며, 청백리(淸白吏)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이지직(李之直)은 지인주부사 휘 이원보(慶州李氏 知仁州府使 李元普)의 따님 슬하(膝下)에 3남 3녀를 두시었다.
공의 형은 장손(長孫)이고 예손(禮孫)은 아우이다.
공은 차남으로 나시어 별장(別將) 노신(盧信)의 따님 교하노씨(交河盧氏) 슬하(膝下)에 다섯 아들을 두시었다.
長子는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영의정(領議政)
이극배(李克培, 1422.세종 4 ~ 1495.연산군 원년),
次子는 광성군(廣城君) 형조판서(刑曹判書)
이극감(李克堪, 1427.세종 9 ~ 1465.세조 11),
아들 이세좌(李世佐)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인 폐비윤씨(廢妃尹 氏, 1445~1482)에게 사약(死藥)을 전달(傳達)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로 42세에 사사(賜死)됐다
三子는 광천군(廣川君) 이.호.형조판서(吏.戶.刑曹判書) 이극증(李克增)
황해도진휼사(黃海道賑恤使)로 빈민(貧民)들을 구제(救濟)했고 63세에 병사(病死)했다.
四子는 광원군(廣原君) 좌찬성(左贊成)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 17 ~ 1503.연산군 9),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켜서 사림파(士林 派)로부터 비판(批判)의 대상(對象)이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편 찬(編纂)하고 5대손이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이첨(李爾瞻)이다.
이이첨(李爾瞻)은 무오사화에 원인을 제공한 이극돈(李克墩)의 5대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효행으로 참봉이 되었고 임진왜란(壬辰 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宣祖) 말에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여 대북(大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광창부원군 (廣昌府原君)으로 진봉됐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 의 폐위(廢位)를 주장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했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숙청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도망(逃亡)가던 중 체포(逮捕)되어 처형 (處刑)당했다.
五子는 광남군(廣南君) 좌의정(左議政)
이극균(李克均, 1437.세종 19 ~ 1504.연산군 10)이다.
우의정이 되어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상소(上疏)했고,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의 황음(荒淫)을 지적(指摘)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流配)되어 사사(賜死)됐고,
5대손이 영의정(領議政)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1429년(세종 11)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1436년(세종 18) 예조좌랑을 지내고,
1440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1444년(세종 26) 사헌부 집의에 올랐으며,
1447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냈다.
1448년(세종 30) 예조참의(參議)에 올랐으며,
1449년(세종 31)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다.
1452년(문종 2) 예조참의(禮曹參議), 형조참의(刑曹參議)을 지냈다.
1452년(단종 즉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랐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되었고,
1455년(세조 즉위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지고
이조판서(吏曹判書)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1456년(세조 2)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1457년(세조 3)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랐으며,
1459년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1459년(세조 5)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판호조사(判戶曹事)에 올랐고
1459년(세조 5)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묘(墓)는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236-3번지(새미실마을)의 북쪽으로 뻗어 내린 북성산의 나지막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2012년 7월 11일 여주군(驪州郡)의 향토유적(鄕土遺蹟)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인손의 무덤은 세종대왕의 영릉 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이인손(李仁孫)의 분묘(墳墓)는 이계전(李季甸)의 분묘 옆에 있다”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영릉의 청룡(靑龍)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현재의 영릉에서 이장(移葬)할 때 유명(有名)한 일화(逸話)가 있는데,
1463년 윤7월 13일 영상 이인손이 세상을 하직하니 묏자리를 잡아 준 지관이 유족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봉분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다섯 아들 중 셋이나 정승을 지낼 정도로 번성한 집안이니 지관의 당부를 잊고 묘역을 정비했는데, 세월이 흘러 1469년 예종(睿宗)의 어명(御命)으로 묏자릴 찾아 나선 상지관(相地官) 안효례(安孝禮)가 찾아 낸 곳이 바로 현재의 여주 영릉인데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 계속되는 비극에 영릉 천장을 결정하고 각지에 지관을 파견하여 배산임수의 명당을 찾던 중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 지더니 천둥벼락이 치며 소나기가 세차게 퍼 부었다. 가까스로 나무밑에서 소나기가 멋기를 기다렸는데 비가 멋고 하늘이 열리며 한 기의 분묘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 산세와 지맥 등을 따져보니 앞에는 북성산(北城山)이 산하부 복형의 모습으로 엎디어 있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있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요, 봉황이 알을 품은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용이 똬리를 튼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명당이 아니던가? 몇달을 찾아다닌 끝에 명당을 찾아내 방위표시(方位標示)를 하고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였다 한다.
이인손의 묘를 파내자 유해(遺骸) 아래에 비단(緋緞)에 쓰여진 글이 있었답니다. "이 자리의 주인(主人)이 새로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墓)를 옮겨라"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글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려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그곳이 바로 이곳이랍니다. '연이 떨어졌다'고 연당(蓮堂) 혹은 연주리라고 부르며 현재의 세종대왕면 신지리가 되었다고 한다.
여주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영릉(英陵)은 현재 강남 서초구 내곡동 헌릉주변에서 여주로 천장이 결정되면서 한산이씨(韓山李氏) 이계전(李季甸)의 묘는 이장을 하게되었고, 주변 십여리(4km) 이내의 모든 묘들도 법도대로 이장하게 되었다. 지관이 찾은 분묘는 한산이씨 목은 이색선생의 손자인 이계전 묘(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7일 계축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 )였고, 우상 이인손의 묘는 주변에 있어 함께 이장했다고 한다.
1450년 세종 승하(世宗 昇遐) 후 10년 사이에 1452년에 문종(文宗 昇遐), 1457년 단종(端宗 昇遐), 1457년 의경세자 요절(懿敬世子 夭折). 1463년 인성대군 요절(仁城大君 夭折) 등 비극(悲劇)이 어어지자, 잘되면 내탓이고 못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처럼, 이곳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일어, 이미 있는 다른 사람의 명당(明堂)에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 승하(昇遐) 19년만인 예종(睿宗) 1년에 현재의 여주로 옮겨 영릉(英陵)이라 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로 산(山)을 등지고 앞으로 물을 내려다보는 지세(地勢)를 갖춘 터가 명당(明堂)의 기본이라던데, 여강(驪江.남한강)이 그 역할(役割)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왕릉이 자리하자 당시 지명(地名)이었던 여흥군(驪興郡)은 인접해 있던 천령현(川寧縣)과 합쳐져 현재의 이름 여주(驪州)로 승격(昇格)된다.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7일자에 "천릉(遷陵)할 땅을 여흥(驪興) 성산(成山)의 이계전(李季甸)의 분묘(墳墓)로 정(定)하고 술자리를 베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7일 계축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
이인손의 무덤은 세종대왕의 영릉 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이인손(李仁孫)의 분묘(墳墓)는 이계전(李季甸)의 분묘 옆에 있다”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영릉의 청룡(靑龍)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1일 병진 3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명(明)나라 사신이 근시일 내로 오기 때문에 이극배의 부모묘의 이장을 늦추다. 권감에게 명하여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낸 사람들에게 전지하기를, "부모를 천장(遷葬)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있어 매우 애절(哀切)한 일이니, 평안도 관찰사 이극배(李克培)를 체대(遞代)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등이 아뢰기를, "지금 명나라 사신이 오는 것이 이미 가까이 다가왔고,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원릉(園陵)의 청룡(靑龍)북쪽에 있으니, 마땅히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당도하기를 기다려서 체임하고 천장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극배에게 치서(馳書)하게 하기를, "경의 부모의 무덤이 천장하게 되었으므로, 저번에 경에게 유시하여 속히 돌아오게 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이 또한 이르를 것이니 경은 그 곳에 우선 머무르며 여러 가지 일들을 조처(措處)하고 판비(辦備)하며, 사신에 대한 제반사(諸般事)를 지대(支待)하도록 하라."하였다. |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윤7월 13일 경오 1번째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우의정 이인손의 졸기 우의정(右議政)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227) 한 이인손(李仁孫)이 졸하였다. 자(字)는 중윤(仲胤)이니, 광주(廣州) 사람 이집(李集)의 손자로서, 총명하고 지혜롭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영락(永樂)신묘년228)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정유년229)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임(補任)되었다. 선덕(宣德)갑인년230) 에 사헌감찰(司憲監察)에 제수되고, 누차 벼슬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게 되자, 뽑혀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고, 을해년231) 에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겸 판호조(兼判戶曹)에 승했다가 의정부(議政府)의 우찬성(右贊成)과 우의정(右議政)으로 옮겼는데, 얼마 아니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병(病)으로 졸(卒)하니, 나이가 6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이미 물건을 내려 주어서 예대로 부의(賻儀)하였는데, 또 특별히 쌀· 콩 아울러 30석(石)· 종이 1백 권(卷)을 하사(下賜)하였다. 충희(忠僖)라고 시호(諡號)하였으니, 청렴(淸廉)하고 방정(方正)하여 공정(公正)한 것을 충(忠)이라고 하고, 소심(小心)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을 희(僖)라고 한다. 성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강하고 과감하여 관가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한결같이 경계하고 삼갔으며, 담백(淡泊)한 것을 좋아하고 성색(聲色)과 분잡(紛雜)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가할 때 전고(典故)를 익히고 일에 임하면 결단력이 있었다. 아들이 다섯 있으니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 이극균(李克均)인데, 모두 과거에 올랐다. 해마다 그 부인(夫人)에게 쌀 20석(石)을 내려 주었다. 이극배· 이극감은 또한 공신(功臣)으로 봉군(封君)되었다. [註 227] 잉령치사(仍令致仕) : 국가의 원로대신(元老大臣)으로서 70살이 넘은 종2품 이상의 대신이 벼슬에서 물러날 때 현직 벼슬을 그대로 띠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던 것.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조회에도 참여하였고, 또 녹봉(祿俸)도 그대로 지급하여 대우하였음. [註 228] 신묘년 : 1411 태종 11년. [註 229] 정유년 : 1417 태종 17년. [註 230] 갑인년 : 1434 세종 16년. [註 231]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庚午/右議政仍令致仕李仁孫卒。 字仲胤, 廣州人, 集孫。 聰慧好學, 永樂辛卯中成均試, 丁酉中文科, 選補藝文檢閱。 宣德甲寅拜司憲監察, 累官至刑曹參判。 及世祖輔政, 擢爲戶曹判書, 乙亥, 世祖卽位, 陞判中樞院事、兼判戶曹, 轉議政府右贊成、右議政, 未幾致仕。 至是, 以病卒, 年六十九。 訃聞輟朝三日, 旣賜例賻, 又賜米豆幷三十石、紙一百卷。 諡忠僖, 廉方公正 ‘忠’, 小心畏忌 ‘僖’。 性沈毅强果, 處官居家, 一以戒愼, 好淡泊, 不喜聲色、紛華, 閑練典故, 臨事有斷。 有五子, 曰克培、克堪、克增、克墩、克均, 皆登第。 歲賜夫人米二十石, 克培、克堪又以功臣封君。 |
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 7월 16일 을미 1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아들 5,6인이 과거에 오른 판중추원사 이인손과 한성부 윤 이사관을 포상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인손(李仁孫)의 아들 이극배(李克培)·이극감(李克堪)·이극증(李克增)·이극돈(李克墩)·이극균(李克均) 등 5인이 과거(科擧)에 올랐으며, 졸(卒)한 한성부 윤(漢城府尹) 이사관(李士寬)의 아들 이의장(李義長)·이예장(李禮長)·이지장(李智長)·이함장(李諴長)·이효장(李孝長)·이서장(李恕長) 등 6인이 과거(科擧)에 올랐는데 부모(父母)가 모두 별세(別世)했으니, 청컨대 그전에 내린 전지(傳旨)에 의거하여 이인손(李仁孫)에게는 해마다 쌀 20석(石)을 내려 주고, 이사관(李士寬)에게는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소재읍(所在邑)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乙未/禮曹啓: "判中樞院事李仁孫子克培、克堪、克增、克墩、克均五人登科, 卒漢城府尹李士寬子義長、禮長、智長、諴長、孝長、恕長六人登科, 而父母俱歿。 請依曾降傳旨, 仁孫歲賜米二十石, 士寬追贈, 令所在邑致祭。" 從之。 |
첫댓글 유익한 자료 감사 드립니다 잘 계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