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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 장성군 서삼면 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통명산 (通明山)
6·25 종군 여기자의 외침 “한국은 자명종이다” |
1951년 첫 여성 퓰리처 수상자 히긴스 “전쟁 덕에 미군 약체 알려져 철저히 무장” 지금도 한국은 전체주의·북핵에 맞서 자유세계 시민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 |
마거릿 히긴스 6·25전쟁 종군기자. 이달 초 발표된 2023년 퓰리처상은 단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보도에 모아졌다.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AP 사진팀이 대상 격인 공공서비스 부문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는 부차에서 자행된 러시아 공수부대의 ‘전쟁 범죄’를 파헤쳐 국제보도상을 받았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퓰리처상의 관심은 한반도였다. 국제보도상 수상자 여섯 명 모두 한국전쟁을 보도한 기자들이다.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 마거릿 히긴스는 6·25 발발 이틀 후 서울로 날아와 한강철교 폭파부터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철수 등 숱한 특종 기사를 쓴 당시 31세의 유일한 종군 여기자이자 첫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였다. 그가 1951년 초 출판한 한국전쟁 르포 ‘War in Korea’가 2009년에 이어 올해 다시 번역돼 나왔다. 1951년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으로, 최근엔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히긴스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7차례나 한국을 오가며 만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등의 인터뷰가 덧붙여지면서 제목이 달라진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선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히긴스의 책을 보면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는 데 새삼 가슴을 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방미 때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자식과 남편, 그리고 형제를 태평양 너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보내준 미국의 어머니들과…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미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썼다.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편히 지내다 한국에 파견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대원 다수가 총기 조립조차 할 줄 모르고 애꿎게 죽어갔다. 희망 없는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정부를 저주하며 무기를 버리는 것도 봤다고 했다. 히긴스는 ‘반역자’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런 현장을 기사로 써 보냈다. 그래야 병력과 무기가 신속히 지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라진 것은 군기가 살아나면서부터였다. 7월 29일 미8군 월턴 워커 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라”는 사수 명령을 내리면서 전선은 지켜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히긴스가 알려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은 무용지물이고 국익은 냉정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히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속임수라는 것을 미국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건 지금도 유효하다.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 30년이 결국 사기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좌파 정권들이 모르고 당했는지, 알고도 속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중국이 잘 살게 되면 민주화할 것이라고 미국은 믿고 싶었겠지만 틀렸다.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트루먼은 6·25 때 적을 완전 소탕하는 것을 금했고, 그리하여 중국에 패배를 안길 기회와 한국 주도의 통일을 놓치게 했다. 그렇다면 북핵 위협에 노출된 현재, 우리는 일본같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못 하고 마냥 미국만 바라봐도 괜찮은가. 히긴스가 남긴 세 번째 교훈은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세계인을 잠에서 깨우는 국제적인 자명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나라는 핵을 지닌 북한과 머리를 맞대고 자유세계와 전체주의세계를 각각 대표하는 체제로서 자유시민을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여 년 전에는 소련이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있다.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믿는 시대착오적 세력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좋든 싫든 참 독특한 K-모델이다. 군기가 살아나자 6·25 때 미군은 일어났다. 시민정신이든 용기든 애국심이든 북이 도발할 경우 무기를 들고 나설 결기든, 우리 국민의 정신이 살아나야 자명종도 울릴 수 있다. 김순덕 대기자 입력 2023-05-25 00:00 |
한국전쟁 컬러사진
권총을 든 미군 앞에서 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북한 소년들의 사진.
1950년 9월 20일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에는
매복 중이던 미군에게 붙잡힌 북한 소년들이 담겨 있다.
권총을 겨눈 미군 뒤로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탱크가 보인다.
1950년 8월 부산 방어선 전투에서
다친 군인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 미군 병사들.
1950년 9월 미 해병대가
널브러져 있는 적군의 시체를 지나치는 모습도 보인다.
반자동 소총을 메고 가슴까지 흠뻑 젖은 미군이 논두렁을 달려가고 있다.
죽음이 일상인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1950년 11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2주간의 혈투 끝에 중국군에게 패해 퇴각하던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제7연대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총을 들고 탱크에 올라 있는 사진 속 8명의 영국 군인은
중국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임진강을 건넌 600명의 영국군은
중국군 1만 명을 사살하고 59명의 사상자를 냈다.
인천상륙작전중인 모습.
한 소년이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1950년 여름, 인천상륙작전을 향해 가는 미 해군 상륙함.
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
탈환과 재탈환의 과정 속에 수원은 크나큰 피해를 입는다.
연합군의 주요 수송로가 수원을 통과했기 때문에
많은 군인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하곤 했다.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폭격으로 파괴된 기차들.
철로 끝으로 서울역이 보인다.
국군 부대원들.
미 군사고문단의 감독하에
국군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그들은 여덟 내지 아홉 발 정도를 쏴본 뒤 부대로 배치되었다.
초창기 휴전 회담이 열렸던 개성의 모습.
영국군 왕실기갑연대 대원들이
전투에 임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51년 1월 중공군의 2차 공세를 앞둔 시기로 추정)
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유엔 측이 1951년 초반에 세운 이 수용소는
총 28개 시설에 최대 17만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1951년 봄, 재탈환된 서울 시청 앞에 어린이들이 서 있다.
사진으로는 피해 상태가 경미한 듯 보이지만,
연희고지 등 북한군의 저항이 극렬했던 일부 지역은
유엔군의 집중포격으로 폐허가 됐다.
대구에서 만난 아이들.
한국전쟁 동안 약 10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는데,
그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물자나 시설은 거의 전무했다.
헬리콥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아이들과 어른들.
강가에 모여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전쟁 중에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생필품만 챙겨 어디론가 떠나는 피란민 가족.
어머니의 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 남자는 징집 당했고, 이는
피란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철로변에서 물건을 파는 소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당선자가
1952년 12월 2일부터 12월 5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전차에 치장한 환영 현수막과 플래카드(placard)
후암동 고갯길
물건팔러 나온 아낙네들
6.25 동란 당시 시장통의 막걸리 대포집
6.25 동란 당시 부산 구덕산 아래의 중구 부평동 시장과
보수천 주변에서 금붕어를 팔러 다니는 금붕어 장수(1952년)
드럼통을 잘라 해머로 두드려 펴서 용접시킨 후 페인트를 발라 제작한
택시 대용의 운송 수단이었던 마차 객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껍게 입고
나무상자로 만든 가판에서 장사하는 모습
집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더위에 지친 피난민 가족(1951년8월16일)
유엔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철로 옆에 들어선 부산의 공구상들(1951년)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어르신의 가판 잡화점
을지로 입구 광통관 앞의 교통사고 수습
5사단 본부앞 나무 팻말
지금 현재 우리은행 전신인 조선상호은행 종로지점과 여물을 먹고 있는 소
당시 소방차가 출동하여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1951년 11월 30일 부산시 부전동 제일조병창 대화재로
화약고 1동 및 민가 100여 채가 전소된 모습(4명 사망, 6명 중상)
- 1951. 12. 1. 동아일보
진열장을 콘크리트와 타일을 붙여 제작한 옛날의 시계포
거리의 담배 노점상
당시는 담배 제조기술이 없어서 미국 양담배를 받아 팔았는데
꽁초를 주워 봉지에 넣어 파는 봉초도 팔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우체국이라고 불렸던 옛 중앙 우체국
적벽돌의 청동 지붕으로 제작된 르네상스식 건물이엇던 이 건물은
미적 가치가 있었으나 1년 뒤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 신천변에
피난민들이 만든 방천뚝 피난촌
종로 화신백화점
일제 강점기 화신그룹의 박흥식씨가 세운 이 백화점은
장안의 명소였습니다.
6.25 동란 1년전까지 온전했었던 남대문
삼각지 근처의 미8군 기지 주변
물을 받기위해 줄을 길게 세운 양동이
서울역 앞의 대동 예식장과 사진관
미군에게 초콜릿을 나눠받는 아이들
6.25 동란 당시 경기도 수원 화성 장안문(1953년8월11일)
성벽에 올라가 놀고 있는 해맑은 모습의 어린이들
서울역 앞 대동예식장과 멀리보이는 남대문 모습
6.25 동란 당시 대구시내의 중국집 유흥원(1952년)
부산 황령산 아랫동네 (1953년)
부산 황령산 아랫동네 중국집 귀영루(1953년)
동란이 지난 1년 후 서울 영등포의 중국집 영등각(1954년)
부산의 중국집 복해원(1953년)
6.25 동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 평화로웠던
인천 도원동 배다리 마을 장터 풍경(1949년)
노르웨이 여의사가 찍은 한국 전쟁 당시 컬러사진
6.25전쟁 때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병원 '노르매쉬(RMASH)' 소속의
잉에르 슐스타드(1920-2010) 라는 여의사분이 찍은 사진
올해 한국-노르웨이 수교 6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이 열렸다고 함
사진이 엄청 고화질이라서 기분이 이상해짐.
가난과 고생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서 가슴이 아픔
특히 양손 잃고 화상입은 아이 ㅠ ㅠ
아이들이 받은 선물은 무엇일까(학용품) ?
받은 선물을 머리에 이고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아이
서울시 병원에서 온 간호사들이
노르매쉬 여의사 잉에르 슐스타드 박사를 만나고 있다.
[사진=주한노르웨이대사관]
초소 옆에 통행금지(晝間通行 夜間不通) 팻말이 세워져 있네요~
책가방을 손에 든 하굣길의 학생들
혼례상을 마주하고 서있는 잔뜩 긴장한 표정의 신랑 각시와
하나같이 웃고 있는 하객들의 모습이 넘 대조적~
전란을 겪으면서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미군부대에서 나온 모포 쪼가리로 아동복을 지어 입혔다.
주판알을 튕겨 점치는 길거리 역술가(曆術家)
탈곡기로 벼 타작하는 모습
1951년 6월 고양시 행주산성 부근에서
남동생을 등에 업은 남한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M-26 탱크 앞에 서 있는 모습 역시 인상 깊다.
1950년대 서울 도심에서 바라본 한강의 전경사진.
푸르른 강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옛 정취를 갖게하는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다.
Ballad of the Green Berets performed by The U.S. Army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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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 장성군 서삼면 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통명산 (通明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