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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산행(무박)후기 스크랩 재미가 쏠쏠한 암릉과 조망, 거기다 선현들의 숨결까지 더한, 오정산(‘15.12.12)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167 15.12.17 05: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정산(烏井山, 804.9m)

 

여행일 : ‘15. 12.12()

소재지 : 경북 문경시 호계면과 마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문경대학교바위공원791m(헬기장)오정산791m삼태극전망대고모산성토끼비리진남휴게소(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산보다도 산이 품고 있는 주변 경관이 더 입소문을 탄 산들이 있다. 오정산(烏井山)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정산이 어디 있는 산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많아도 경북팔경(慶北八景)’ 중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거기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옛길 영남대로(嶺南大路)’ 중에서 가장 험하다는 토끼비리와 고모산성까지 합한다면 그야말로 빼어난 관광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세(山勢)가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791m봉에서 오정산 정상까지의 암릉은 자못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길 자체만 해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데, 거기다 사방으로 뻥 뚫린 조망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이 아닐까 싶다. 하다못해 주변 관광지에 놀러왔다가 올라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문경대학교(문경시 호계면 별암리)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이용해서 문경(점촌)방면으로 달리다가 불정1(문경시 호계면 견탄리)를 건너기 직전에 만나게 되는 교차로에서 34번 국도로 갈아타고 문경(점촌) 방면으로 잠시 들어가면 명문 가마솥식당(호계면 호계리)’이 나온다. 식당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문경대학교에 이르게 된다. 19963문경전문대학으로 개교한 문경대학교(Munkyung College , 聞慶大學校)’2011년 현재의 이름으로 교명(校名)을 바꾼 사회·실무계 전문대학이다. 1999년 관광특성화 대학 및 전문대학 재정지원 대학으로 선정된 이래, 현재 유아교육과, 사회복지과, 부사관과, 보건행정과, 간호학과, 호텔조리과, 도자기공예과, 축구과 등 8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속기관으로는 도서관, 정보전산원, 언론사, 국제교육원, 학생생활관, NCS지원센터, 취창업지원센터 등이 있다. 부설기관은 학생생활연구소, 평생교육원, 교수학습센터 등을 두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대학 건물의 뒤로 나있다. 하지만 곧장 들머리로 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본관 건물의 앞에 멋진 바위공원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잔디, , 연못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책로와 만물상(萬物相) 바위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구름다리, 그리고 바위 정상의 토론 광장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바위공원의 풍경을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혹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물개사랑바위, 두꺼비바위, 소라바위, 돌고래 바위 등등 각각의 바위들에 붙여진 이름과 바위들의 생김새를 비교해가며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산행 진입로는 오정산을 바라보며 본관건물의 오른편 벽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산자락으로 곧게 뚫린 임도가 보일 것이다.

 

 

임도로 들어서면 잠시 후 길이 왼편으로 크게 휘는 곳에서 등산안내판을 만난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코스를 숙지하고 난 뒤에 산행을 이어갈 일이다. 지도를 보면 토끼비리를 가기 위해서는 능선을 따라 곧장 하천까지 내려가도록 그려져 있다. 그런데도 난 이를 알지 못하고 중간에서 오른편 사면길로 내려서버려 토끼비리를 완주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 버렸다. 만일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게 아니겠는가.

 

 

임도는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한다. 주위는 잣나무 조림지, 조림을 위한 차량들이 올라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않았나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잣나무 숲은 끝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 근처에서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오정산 정상1시간30, 진남교반/ 물탕골)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로 접어들고 나서도 길은 고운편이다. 곧장 산자락을 치고 오르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우회(迂廻)를 시키면서 경사(傾斜)를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솔길로 들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영강의 물줄기가 곡선을 이루면서 흐르고 있고, 그 주변에 나름대로의 들녘을 만들어내고 있다. 문경대학이 있는 위치의 왼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천주봉일 것이다. 그 옆에 있는 것은 공덕산일 것이고 말이다.

 

 

능선에 올라서면서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더욱 더 누그러뜨린다. 그러나 800m를 넘기는 산을 오르는 길이 어찌 평탄할 수만 있겠는가. 잠시 후에는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산길은 위로 오를수록 삭막해져 간다. 능선엔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로 그득하다. 옛날 60년대에 사방사업 때 심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들이 태반이다. 그것도 산불이라도 났었던지 나이들도 얼마 들어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볼품이 없는 길이란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길도 좋은 점은 있다.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 사이로 나타나는 헌걸찬 산릉들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가까이 되면 능선에 돌출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바위들은 뛰어난 눈요깃감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전망대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해 낸다.

 

 

정확히 1시간 만에 첫 번째 전망바위에 오른다. 발아래에는 산기의 산업단지는 물론이고 문경시가지까지 잘 내려다보인다. 또한 문경 들녘을 첩첩이 둘러싼 산릉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연거푸 펼쳐진다.

 

 

 

5~6분 후 또 다른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조금 전에 올랐던 전망바위보다 한층 더 시야가 넓어졌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 잠시 후 고모산성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삼거리(이정표 : 오정산 정상30, 대미산 23.5Km/ 태극마크전망대1시간, 진남교반 2시간/ 문경대학교40, 호계리 쌍샘마을 1시간)를 만난다. 하산 지점을 진남교반으로 할 계획이라면 오정산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아무튼 삼거리를 지나면 곧이어 791m봉에 올라서게 된다. 오정산은 세 개의 비슷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 중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봉우리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791m봉이다. 봉우리 위로 오르면 오정산 상무봉(800m)’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상단에는 상무라고 씌어 있고, 雖死不敗(수사불패)百鍊千磨(백련천마)라는 글귀가 좌우에 적혔다. '백 번을 단련하고 천 번을 갈고 닦는다''죽을 순 있어도 질수는 없다는 내용이니 군인들의 용어로 안성맞춤이겠다. 그러고 보니 국군체육부대인 상무가 오정산 아래로 옮겨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저 글귀들은 상무부대의 표어일지도 모르겠다.

 

 

상무봉, 아니 내가 찾아낸 지도에는 791m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난 791m봉을 고수하겠다. 상무봉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간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791m봉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사방이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데, 그중 가장 또렷한 것은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일 것이다. 사방을 둘러본다. 백화산과 뇌정산은 물론이고 희양산도 나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이화령을 넘고 있는 조령산과 주흘산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참고로 이곳에도 삼거리임을 알리는 이정표(오정산/ 진남교반/ 문경대학)가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지나왔던 삼거리까지 내려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 곧바로 진남교반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봐야 두 길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791m봉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바윗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잠시 후 헛웃음을 짓고 만다.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바윗길이 짧게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암릉을 만들고 있는 바위들이 험상궂다거나 거대하지도 않다. 실망스러움을 안고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른다. 작은 돌들이 널려있는 정상에 오르면 건너편에 오정산이 나타난다. 높이가 얼추 비슷한 것을 보니 이곳 가운데 봉우리의 높이도 800m쯤 되는가 보다.

 

 

 

가운데 봉우리를 내려서면서 본격적인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왜 오정산으로 가는 길을 일러 바윗길이라고 했는지가 금방 이해가 간다. 험상궂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윗길을 걷는다.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위들을 오르내리다가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우회(迂廻)를 하면 된다. 짜릿한 스릴의 연속이다. 하지만 결코 위험하지는 않다. 바윗길임에도 아무런 안전시설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이 구간이 오정산 산행의 백미(白眉)임은 분명하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눈요기만 즐기면 된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는 맛도 좋지만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놓쳐서는 아니 될 일이다.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아까보다 더욱 절실해졌던가 보다.

 

 

 

791m봉을 출발한지 20분쯤 지나면 오정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서너 평쯤 되는 정상에는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804m)과 삼각점(점촌22/ 1980 복구) 외에도 소요시간이 지워져버린 이정표(문경대학, 진남교반/ 부운령)와 이정표의 역할을 가미한 정상표지판(부운령 3.75Km, 운달산 13.3Km, 대미산 22.5Km/ 문경대학교 2.0Km, 진남교반 6.0Km)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오정산(烏井山)을 풀어보면 검은 우물이 있는 산이란 뜻이 된다. 우물에서 검은 뭔가를 끄집어낸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건 석탄(무연탄)이 될 것이다. 이 부근이 바로 한때 우리나라 석탄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문경탄전(聞慶炭田)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당시 굴만 뚫었다하면 검은 석탄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이니 오정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오정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 또한 뛰어나다. 하지만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북쪽 방향의 고산준령들이 조금 더 또렷하면서도 넓게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다시 791m(헬기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진남교반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탄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 능선은 오래지 않아 유연하게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791m봉을 내려선지 14분 후에는 또 다른 상무부대 팻말이 세워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상무 소속 선수들의 등반훈련 코스에 설치한 팻말로서, 부대와 정상의 한가운데임을 알리기 위해서 세워 놓은 모양이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으니 그냥 통과해도 좋은 봉우리이다.

 

 

 

이어지는 능선도 급경사 구간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주변 풍광 또한 특별한 것이 없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풍경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또렷하지도 않을뿐더러 아까보다 시야까지도 훨씬 더 좁아졌다.

 

 

하산을 시작한지 20분 조금 못되어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쳐버린다. 다만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봉우리 바로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하나 나뉘지만 개의치 말고 그냥 지나쳐버리라는 것이다. 이어서 7분 후 세 번째 봉우리, 그리고 또 다시 18분 정도를 더 걸으면 네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623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또 다시 조망이 열린다. 시원스럽게 뻗어나가 3번 국도가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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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던 집사람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넋을 놓은 채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다가가보니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태극문양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 부근을 삼태극전망대라고 적고 있다. 삼태극(三太極)이란 산과 물, 그리고 길이 각각 만들어 내는 세 개의 태극문양(太極紋樣)을 이르는 말이란다. 즉 낙동강 상류의 영강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 그리고 옛 국도3호선이 각각 ‘S’자로 돌며 태극문양을 낸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해서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태극문양 뿐만이 아니다. 이 부근의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도 시야가 활짝 열린다. 희양산과 주흘산 등 백두대간을 이루는 헌걸찬 산들이 줄을 이어 도열하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삼태극(··물태극)전망대라고 적힌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이름 없는 전망대보다 한참을 못 미친다. 아무래도 전망대의 위치 표시를 잘못 했지 않았나 싶다.

 

 

 

삼태극전망대에서 또 다시 가파르게 내려선다. 그렇게 1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능선을 아닌 오른편의 사면길을 가리키고 있다. 무심코 표시지대로 내려서고 만다.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토끼비리를 걷고 싶었던 점을 감안할 때 무조건 능선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결정 때문에 난 이곳 진남교반(鎭南橋畔) 인근에서 꼭 담아가야 할 풍경들 중 하나를 놓쳐야만 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을 내려선지 10분 남짓 지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돌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는 언덕배기가 나온다. ‘돌고개또는 꿀떡고개로 불리는 고갯마루이다. 돌고개는 돌을 많이 모아두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꿀떡고개라는 이름은 요 아래 주막거리에서 팔던 꿀떡이 하도 맛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늙은 당산나무가 수문장(守門將)처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에는 금줄이 쳐진 성황당이 들어앉아 있다. 여느 성황당 주변이 그러하듯이 이 이곳에도 돌무더기가 많이 쌓여 있다. 이렇게 돌무더기를 쌓아두는 것은 외침에 대비하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그나저나 저 당집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들어앉아 있을까? 서슬 시퍼런 토끼비리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감사의 인사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뭔가 간절한 염원을 한바탕 풀어놓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이번 장삿길의 이문(利文)이었을지, 아니면 장원급제(壯元及第)였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성황당을 지나 큰 돌이 깔린 길을 조금 내려가니 정갈하게 복원된 초가(草家) 두 채가 나타난다. 옛날 주막거리를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근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고모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토끼비리로 가려면 맞은편에 보이는 진남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고민이 시작된다. 두 곳을 모두 둘러보려면 점심식사를 생략해야 할 판이니 어느 곳이던지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진남문으로 향한다. 길을 잘못 들어 놓쳐버린 토끼비리를 그냥 빼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막거리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성문과 문루(門樓)를 가운데 놓고 좌우로 성벽이 날개를 펼치듯 유연한 자태로 서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진남문이다. 그리고 성벽은 선조 29(1596)에 축성한 석현성(石峴城)이다. 석현성은 고모산성의 외성(外城)으로,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축성된 것이라 전하며, 고모산성의 남문 치성부에서 토끼비리까지 약 400m를 연결하고 있다. 진남문은 외성의 성문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성의 문들보다도 더 활용도가 높았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성 밖으로 나오면 오른편 산허리를 감고 있는 높다란 성벽이 나타난다. 고모산성(姑母山城)이다. 고모산성은 예로부터 그 위치와 역할로 인해서 관방(關防)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상 좌 우도에서 모여든 길들이 남쪽 인근인 호계면의 견탄(犬灘?개여울)에 이르러서 한 길로 합쳐지고, 토끼비리를 지나 고모산성 옆 돌고개를 넘어서며 마침내 평탄지로 내려서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고모산성은 본성 1,256m에 외성 390m를 합해 총 1,646m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으로서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특징이라고 한다. 축조연대는 156년 이후, 2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서쪽과 남쪽은 영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조정산(810m)에서 뻗어 내린 험한 산등성이가 있다. 따라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다.

 

 

진남문을 나서면 지형은 남쪽으로 더욱 낮아지면서, 좌우로 길 두 개가 보인다. 왼쪽 길은 진남교나 휴게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신현리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나같이 토끼비리로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왼편 성벽 아래로 난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 길은 그다지 넓지도 그렇다고 잘 닦여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난 그냥 휴게소 방향으로 내려서고 만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길 찾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철로를 건넌다. 오른편에 터널이 보이지만 입구가 막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로인 모양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레일바이크(rail bike, 軌道自轉車)’ 출발역이 있었다. 문경시청의 초대를 받고 지역을 둘러보는 길에 시승(試乘)해봤던 시설이기에 기억이 난다. 레일바이크라는 게 폐()철도를 재활용하는 시설이니 이곳 또한 열차가 다니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1989년 경제성이 떨어지는 탄광들을 정리했던 석탄합리화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문경은 우리나라 석탄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저 터널은 수많은 열차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검은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석탄을 가득 실은 채로 말이다.

 

 

철로를 지나자마자 이정표(고모산성/ 오정산 정상 4.5Km, 토끼비리, 영남대로 옛길)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토기비리로 연결되는 길을 지나쳐버렸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까 석현성(진남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왼쪽 성벽을 따랐어야하는데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하긴 이정표가 세워지지 않은 갈림길이니 미리부터 길을 알아두지 않았다면 그 누구라도 길을 놓쳤을 것이다. 별 수 없이 토끼비리를 향해 산자락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잠시 후 토끼비리의 입구에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에 올라선다. ’위치도(位置圖)‘와 길을 걸을 때 낙석을 주의하라는 경고판 외에도 1744년 권응신이 그렸다는 토끼비리(봉생천)’ 그림을 첨가한 옛길(토천)구간 안내도와 명승 31호인 토끼비리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 찾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영강을 가로지르는 진남교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 일대를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 부른다. ‘진남교반(鎭南橋畔)’이란 진남교 다리 주변을 이르는 말이다. 이 일대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이어지고 강 위로 철교·구교·신교 등 3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人工)의 조화를 이룬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대구일보사에서 경북의 승경지 여덟 곳을 선정해서 경북팔경이라 이름 붙인 일이 있었다. 그때 이곳 진남교(鎭南橋) 주변()이 당당히 경북지역 승경 중 제1경으로 뽑혔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무다리였던 기존의 회연교(回淵橋)를 헐어내고 자기들이 새로 만든 시멘트다리인 진남교를 내세우기 위한 일본인들의 꼼수였다고 말하기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절정의 풍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영강 물과 오정산 어룡산 등 산자락이 빚어낸 자연미가 분명한데, 어째서 갑자기 일제에 의해 개축된 콘크리트 다리가 그 대표성을 가져갔느냐는 것이다. 나머지 7경이 모두 제 각각의 이름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일대의 경관이 빼어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빨려드는 미감은 차라리 도발적이다. 특히 역사적 가치를 지닌 여러 유적과 특이하면서도 뛰어난 자연 풍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저런 가설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에 그저 빠져 볼 일이다.

 

 

토끼비리의 탐방에 들어간다. 벼랑을 헤집으며 난 길이지만 잘 닦아 놓은 덕분에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경고판의 글귀대로 벼랑에 신경을 써가며 걸어야 할 것 같다. 벼랑이 날카로운 탓에 돌이라도 떨어질 경우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토끼비리는 경북 문경의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이다. 층암절벽 사이로 난 길이 1에 폭인 1m인 이 벼랑길은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토천(兎遷)’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비리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이곳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이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과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산간 협곡을 S자 모양으로 파고 흐르면서 동쪽 산지를 침식해 만든 벼랑에 형성된 길이다. 돌벼랑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6, 7리 나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험하다. 권응신이 1744년에 토끼비리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는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산허리를 지나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면곡 어변갑, 권근, 서거정 등이 이 곳을 지나며 시를 남겼다. 그만큼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진남휴게소

아쉽지만 토끼비리 걷기는 중간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철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이 생각나서이다. 위험한 구간이라고만 알고 있을 그녀이기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질 경우 행여 사고라도 났을까 걱정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삼거리, 휴게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저만큼에 휴게소 건물이 나타난다. 산행이 종료되는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난 오늘 그런 준비를 해오지 못했다. 전날 오후에야 오정산산행을 결정한 탓에 준비할만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 문경의 관광지들을 돌아보았다는 어설픈 자신감이 더 큰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때문에 난 크게 두 가지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 첫 번째는 토끼비리의 전 구간을 걸어보지 못했고, 나머지 하나는 경북 팔경의 첫째라는 진남교반의 풍경을 한눈에 담지 못한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가슴에 담으려면 아까 삼태극 전망대아래에서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내려서지 말고 계속해서 능선을 탔어야만 했다. 그리고 능선의 끄트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토끼비리를 걸을 다음 진남문을 통해 석현성의 안으로 들어와 이번에는 성벽(城壁) 위를 걸었어야만 했다. 서문지(西門址) 근처의 성벽 위에서 바라봐야만 진남교반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일이니 어쩌겠는가. 오늘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져 가는 게 인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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