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노고엔
えび野高原
- 강 문 석 -
숙소가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탓에 가고시마현에 있는 가라쿠니다케韓國岳의 입구격인 에비노고엔えび野高原까지는 차량으로 길게 이동해야만 했다. 거리만큼이나 시간도 걸렸지만 이번 여행에서 처음 찾는 코스이자 가을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기대에 일행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깨끗한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다 보니 곳곳이 온천이다. 가고시마현에는 2천7백 개가 넘는 온천이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온천이 많은 고장이 되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해발 1200미터 에비노고엔에 도착했지만 여행정보를 통해서 예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조용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인지라 설악산처럼 산을 찾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잡상인들까지도 북적이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차량에서 내려 정상인 가라쿠니다케로 향하는 등산객이 겨우 몇 사람 보일 정도였다. 그들마저도 아주 조용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에비노고엔은 화산이 만든 아름다운 산으로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 된 곳이다.
미야자키현과 가고시마현 경계에 위치했지만 미야자키현에 속한 에비노고엔에는 다양한 원시림과 각양각색의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에비노고엔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산가스가 분출되는 가혹한 환경 탓이라고 한다. 가스로 인해 억새가 새우 색깔로 변하는 것을 두고 '에비'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고원은 크게 북쪽의 시라토리야마白鳥山와 북동쪽의 코시키다케 그리고 남쪽의 에비노다케와 동쪽의 가라쿠니다케로 둘러 싸여있다.
가을의 서정을 말해주는 억새꽃이 무리지어 피어나 화려하게 눈부신 자태를 뽐내며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기리시마 화산의 최고봉으로 해발 1700미터인 가라쿠니다케를 오르는 문제로 일행 다섯 명이서 토론을 벌이는 동안 난 억새를 배경으로 산 정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여행 참가자 중에는 연로하여 산을 오르기 힘든 분이 있어서 평탄한 에비노고엔 둘레길을 돌기로 결정이 났다. 이번 가고시마 여행의 목표였고 그래서 꼭 올라보고 싶었던 정상이다.
하지만 일행을 두고 혼자서 이탈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정상 가라쿠니다케는 한국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오늘 정상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했으니 이제 가라쿠니다케를 찾는 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니 아쉬움을 내려놓기로 한다. 에비노고엔에서 정상까지는 2.5킬로미터 거리. 안산암 현무암 등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발을 디딜 때마다 돌이 미끄러지는 험준한 돌산이라지만 북알프스 주등산로만 할까 싶다.
13년 전 북알프스 종주에서 체력이 바닥나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악몽이 고개를 든다. 가끔씩 청명한 가을하늘은 연한 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선선한 기온과 해맑은 공기 속에 곱게 물든 단풍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쪽빛 호수는 하얀 뭉게구름을 품었다. 순간순간 햇살이 적당히 구름에 숨을 땐 햇볕가리개도 필요 없이 트레킹하기엔 그저 그만이지만 단풍사진은 햇볕이 없다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될 수밖에 없으니 긴장하게 된다.
이곳 지리와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우리 일행 속에 있는데도 사진촬영에 매달리느라 일행을 앞서거나 뒤처지면서 해설을 놓친 게 못내 아쉽다. 코스에는 후도이케不動池와 롯칸논미이케六觀音御池 뱌쿠시이케白紫池 등 호수가 차례로 위치한다.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호수답게 쪽빛으로 호변의 가을풍광을 비추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마지막에 만난 뱌쿠시이케호수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시냇물처럼 밋밋한 색상이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호수란 명칭은 좀 과장된 느낌이 들고 연못 정도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이들도 생각을 해보고 붙였을 터이니 시비할 일은 못될 것 같다. 둘레를 도는 2시간 반 동안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에서 온 사람들은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국민인 일본인들은 심심찮게 만나졌고 그들은 하나같이 ‘곤니치와’란 낮 인사말이 빠지지 않았다. 청장노년까지를 아우른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부부였다. 열 명 가까이 단체로 찾은 여행객은 딱 한 팀을 만났다.
사용법이 간단하질 않아 셀프 카메라 촬영도구인 긴 막대를 잡고도 힘들어하는 부부의 사진촬영을 서너 팀 도와준 것만으로도 난 보람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도 경주나 설악산과 같은 관광명소가 있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신세대 젊은 주부 3명은 나의 인터넷카페에 자신들의 사진을 올려주겠다는 말에 금세 반색을 하며 포즈를 취했다. 순간적으로 활짝 웃었지만 얼굴 생김은 우리 낭자들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령이 5백년을 넘었다는 거대한 삼목 앞에서 젊은 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실패작일 게 뻔했다. 굵기가 2미터에 가까운 나무에다 여자를 붙여 세우고 바짝 붙어 서서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를 나무의 양쪽가로 배치시키고 카메라는 3미터 이상 뒤로 물러서 찍으면서 그렇게 몇 장 더 찍어보라고 일렀다. ‘아까마쓰’ 군락지 팻말이 나타났다. 일본은 일찍부터 많은 식물들을 자기나라 말로 먼저 세계 식물도감에 등록했다.
그 바람에 심지어 우리나라에 먼저 분포했던 것마저도 일본 명칭이 붙은 것들이 많다. 아까마쓰는 일본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상록의 침엽수로서 큰 것은 높이가 40미터나 되며 수피의 색깔이 연하게 붉은색을 띠는 게 특색이라고 했다. 나무로 만든 아주 소박한 팻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예절 바르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기로 이름난 일본인들인지만 이런 명승지에선 허점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팻말은 자기나라 글자로만 쓰여 있었다.
‘이곳은 국립공원이니 동식물, 토석 등을 허가 없이 채취할 수 없습니다. 1.화기는 주의하시오. 2.쓰레기는 가지고 돌아가시오. 환경성 ․ 미야자키현’ 드넓은 주차장을 갖춘 휴게소가 들어선 곳에선 가라쿠니다케 정상이 탁 트인 시야로 조망된다. 기념품 매장까지 갖춘 대형 상가건물의 2층을 올랐다. 오늘 점심은 어제 숙소에 붙은 필드에서 치룬 그라운드골프대회에서 홀인원을 한 골퍼가 아사히 생맥주에다 일본의 대표음식인 ‘소바’와 돈가스까지 일행들에게 쏘았다.
먹는 즐거움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이라니 늘그막에 이보다 더 짜릿한 여행의 즐거움이 있을까 싶었다. 나에게도 시원한 아사히 생맥주 한 잔을 권했지만 오후의 일정을 소화하자기 위해 마시고 싶은 욕구를 꾹 눌렀다. 우리 일행이 에비노고엔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 하늘은 청명했고 오르지 못한 가라쿠니다케로 향하는 등산로에선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햇살에 은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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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회장님 해외 여행 수기를 읽는 중에 제도 그 여행객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갑니다.
자연의 운치에 취해보기도 하구요(가상 턴넬을 만들어서)
잘 다녀 오셨지요. 가신 김에 그 정상까지 오라 가 보셧더라면 더욱 수기가 빛을
발할텐데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요. 수기 감사합니다. 환절기에 건강 잘 ㅐㅇ기십시요.
오늘 주왕산 갔다가 안동에 머물고 있습니다. 내일 문경 둘러보고 귀가할 예정입니다. 가라쿠니다케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