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평택 85코스 제2부
대안4리구진마을-기산3리마을-석화봉-
권관3리마을-한국소리터광장-모래톱공원-
평택호소리길-현충사광장-우경삼거리-
권관길-방아다리들-금댕이골-염막골-장수마을
20240508
1.코스 소개
서해랑길 85코스는 길이 22.3km, 소요시간 7시간 30분, 난도 보통이다. 두루누비에서는, 평택호의 맑은 물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관광포인트는 다양한 조형물과 포토존으로 조성된 호반공원 '평택호예술공원'과 전통예술의 육성을 목적으로 개관한 '한국소리터'라고 안내한다. 시점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산21-9(구룡교 북단 동측 정자 옆)이고, 종점은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570-3(평택항국제여객터미널 앞 삼거리)이다. 주요 지점과 경로는, 노양마을회관정류장 1.5Km - 평택국제대교 8.9Km - 평택호예술공원 6.4Km - 신영2리마을회관 5.9Km - 평택항이다.
서해랑길 85코스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2개 리(里)(노양리, 신대리), 현덕면의 6개 里(덕목리, 신왕리, 대안리, 기산리, 권관리, 장수리), 포승읍의 3개 리(里)(신영리, 희곡리, 만호리)를 통과한다. 평택시 2개의 읍과 1개의 면, 전체 11개 리(里) 지역을 통과하는 먼 거리이다. 아름다운 아산호와 평택호 관광단지의 예술공원, 그리고 여러 조형물들에 가슴이 요동쳤다. 탁 트인 아산호 풍경, 그 건너편의 아산시를 병풍처럼 두른 산봉들, 예술공원의 설치 미술과 여러 조형물을 살피고 감상하는 데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두루누비에서 소개하는 '한국소리터' 관람은 제한 시간 안에서는 관람하기가 어렵다. 대안리와 기산리, 장수리와 신영리의 드넓은 간척농지와 들녘의 풍경은 인위적인 관광단지와 예술공원 조형물과는 다른 인간의 원초적 마음의 고향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포승읍 희곡리 일대에 들어선 경기 경제 자유구역 포승지구와 만호리 평택항의 글로벌 물류 중심 기지는 평택의 눈부신 발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름다운 들길과 물길, 산길을 걷고 눈부신 산업 발전의 현장을 살핀 85코스 탐방을 3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2-1.구진개 나루를 상상하며
제2부 : 현덕면 대안4리 구진마을 명품 느티나무 아래서 요기를 마친 뒤 대안길을 따라 드넓은 구진개 간척농지로 나갔다. 하얀 돛배들이 구름처럼 정빅해 있고, 갈매기들이 포구의 공중을 날아다니거나 돛대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구진포 나루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구진포의 풍어제는 마을에서 주민들이 당제사를 지내고, 어민들은 배 위에서 뱃제사를 지냈으며, 용신제는 마안산 정상 팽나무 아래서 지냈다고 전해진다. 옛 구진개(鷗津浦)의 모습을 상상하며 드넓은 간척농지로 변한 구진개 농로를 따라간다. 논에 설치된 모판에서는 모들이 영롱한 초록빛으로 자라나고 논에는 써레질을 위하여 물을 모아 두었다. 넓은 논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이 마음도 찰랑거리게 한다. 농로에는 지칭개 홍자색 꽃이 바람에 날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활짝 열려 있는 들길,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들녘을 가로질러 아산호를 건너고 아산호 건너편의 병풍처럼 에워싼 산줄기가 포근하다.
신청한 날짜에 맞춘 써레질 트랙터가 신청자의 논에 들어가 써레질을 한다. 봄날 남쪽 서해랑길을 탐방하면서 보아서 익숙한 써레질 풍경을 중부 지방의 평택에서 다시 만난다. 농부의 일손이 기계 농기구의 발달에 힘입어 농부의 고된 노동력이 많이 줄어 들었다. 이제는 한 해 농사의 시작에서부터 추수까지 농기계가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문제는 농기계로 인해 농토가 오염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고안되고 있다고 한다.
드넓은 간척농지 사이로 소하천이 흐른다. 이 소하천을 경계로 현덕면 대안리와 기산리로 나뉜다. 기산리(岐山里)는 원기산(元岐山)에서 지명이 유래하였으며, 3개의 里 지역으로 나뉜다. 기산1리는 천곡(泉谷, 샘골) 마을, 기산2리는 수산(水山) 마을, 물가에 위치해 ‘물미’, ‘물뫼’라고도 불리며, 기산3리는 원기산 서쪽에 자리하여 원기산 마을이라 불린다고 한다. 기산리는 일제강점기 때는 현덕면의 면소재지였지만, 현재 현덕면 면소재지는 기산리 북쪽의 안중읍과 인접한 현덕면 인광리 지역이다.
서해선 아산고가교 아래를 통과하여 기산3리 원기산 마을로 들어갔다. 원기산 마을 벽화에 '풍년가' 노랫말이 적혀 있다. 모내기를 하는 철에 가을 추수기의 풍년가를 부른다. '풍년가'는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 가세."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추수철 농민들의 힘든 노동을 즐거운 놀이로 승화하며 봄날의 꿈을 꾸게 하는 노동요가 '풍년가'라고 생각한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기산리에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구 좋다/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 가세." 인생길 노년기에도 풍년가를 부르며 꿈을 꾸어야 풍요한 삶이 될 것이다. 청춘의 열정과 방황, 장년의 원기왕성한 세상살이의 확장, 노년기의 풍요한 결실과 향수(享受)가 순조롭게 이어지는 것이 삶의 행복이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
2-2.평택호 관광지의 아름다움과 혜초기념비 단상
-국악의 거장 지영희 선생을 기리는 '한국소리터'
이팝나무 하얀 꽃이 흐드러진 기산길을 따라서 현덕면 권관리로 넘어갔다. 나즈막한 석화봉을 돌아서면 왼쪽의 너른 들녘이 펼쳐지는데 권관3리 문곡(文谷) 마을이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벌이 펼쳐지고 황새들이 날아들어 '황새울'로도 불리는 곳이다. 권관3리 황새울을 지나면 하얀 지붕의 '평택농악마을 야외공연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평택호 관광단지로 들어간다. 평택호 관광단지는 '평택호 예술관', '한국소리터', '평택자동차극장', '평택호 예술공원', '모래톱공원', '평택호 소리길' 등으로 현덕면 권관리 평택호 호반에 조성되어 있는데, 앞으로 관광단지를 권관리 동쪽의 기산리와 대안리, 권관리 서쪽의 아산만방조제 서쪽 해안 지역까지 확장한다고 한다. 앞으로 평택호 관광단지가 화려하게 변화될 것 같다.
현재 평택호 관광단지의 중심지는 '한국소리터'라라고 볼 수 있다. '한국소리터'에는 우리나라 민족음악의 거장 지영희 선생을 기념화한 곳으로 5개 지역을 이른다. 상모를 돌리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 공연장인 '지영희홀(실내공연장)', 전통 공연 등 다양한 퍼포먼스가 가능한 공연장인 '농악마을 야외공연장', 지영희 국악관과 한국 근현대음악관이 있는 '어울림동', 사무실과 연습실, 스튜디오가 있는 '두드림동', 버스킹 공연 및 부대 행사를 하는 '어울림 광장' 등이 있다. 이중 '어울림동'과 '두드림동'은 우리나라 전통음 율계인 12율려(律呂)를 이미지화하여 배치한 건물동인데, '한국소리터' 광장에서는 '두드림동'에 디자인된 12율려(律呂)가 멋지게 보인다. 12율려(律呂)의 명칭은, 황종(黃鐘)·대려(大呂)·태주(太簇)·협종(夾鐘)·고선(姑洗)·중려(仲呂)·유빈(蕤賓)·임종(林鐘)·이칙(夷則)·남려(南呂)·무역(無射)·응종(應鐘)으로, 홀수인 황종·태주·고선·유빈·이칙·무역을 양률(陽律)이라 하고, 짝수인 대려·협종·중려·임종·남려·응종을 음려(陰呂)라 한다고 한다. 서해랑길 탐방길에서 평택이 낳은 국악 현대화의 아버지 지영희 선생을 기리는 '한국소리터'를 통해 국악과 관련되 몇 가지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누리게되었다.
'평택농악마을 야외공연장' 아래 한국소리터 광장 왼쪽의 평택자동차극장 입구를 거쳐 모래톱공원 입구로 나갔다. 여러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는 모래톱공원 끝까지 가보았어야 하는데 입구의 '휘모리' 의자와 '평택강' 지명 지정 설명안내판 앞에서 아산호와 아산고가 아치교, 그 건너 호반 아산시 지역의 풍경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 모래톱공원에 2009년 5월에 혜초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혜초기념비에서 평택섶길 3코스 비단길은 끝나고 평택섶길 4코스 원효길이 시작된다고 한다. 멍청하게도 혜초기념비가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위쪽에 가볼 욕심도 내지 못했다. 탐방을 마치고 나서 '혜초기념비'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서 몹시 약이 올랐다. '혜초기념비' 사진을 찾아 보고 그 비문을 읽어 보았다. 혜초(慧超, 704~787) 스님의 인도여행기「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실려 있는 ‘月夜浮雲’(월야부운, 달밤에 뜬 구름을 보며)’도 읽어 보았다. 혜초 스님이 인도(천축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듯 '혜초기념비'를 그리워했다. '혜초기념비' 때문인지 멍청함을 꾸짖는 혜초 스님 때문인지 며칠 밤 깊이 잠들지 못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쳐다보니(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뜬 구름만 홀연히 돌아가는구나.(浮雲颯颯歸부운립립귀)/ 바람 가는 편에 편지라도 부치고자 하나(緘書參去便함서참거편)/ 바람은 듣지도 않고 급히 가네.(風急不聽廻풍급불청회)/ 내 나라는 하늘 가 북쪽에 있고,(我國天岸北아국천애북)/ 남의 나라는 땅 모퉁이 서쪽에 있네.(他邦地角西타방지각서)/ 남쪽은 따뜻하여 기러기 오지 않으니(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누가 계림(고향)으로 날아가 소식 전해주리오.(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 혜초 스님의 '月夜浮雲’(월야부운, 달밤에 뜬 구름을 보며)’ 전문
직접 살피지 못한 혜초기념비를 사진으로 보고 비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혜초기념비를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아산호변에 조성한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헤초기념비 : 혜초는 단장의 향수를 읊은 시편에서 "내 나라는 하늘 가 북쪽에 있고(我國天岸北) ...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신라)으로 날아가리(誰爲向林飛)"라고 하여, 자신이 신라인임을 밝힌 바 있다. 704년 경 신라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섯의 나이에 구도의 푸른 꿈을 안고 당나라로 건너가, 723년에 다시 천축(인도)을 향한 위험천만한 대장정에 나섰다. 장장 4년간에 걸쳐 천축과 서역을 두루 답사하고, 727년에 당나라로 돌아와서 세계적 문명 탐험기이며 한국 최고(最古)의 서지로서 불후의 국보급 진서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찬술하였다. 그 후 50여 년간 장안의 여러 명찰에 주석하면서 궁중 원찰인 내도량의 지송승(持誦僧)으로서 도화원력(道化願力)이 지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780년 한 생의 마감을 예감한 듯, 노구를 이끌고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로 옮겨 역경본을 적다가 조용히 붓을 놓은 채 입적하였다. 당대 동아시아에서 아시아 대륙의 서단까지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와 현지견문록을 남긴 것은 일찍이 없었던 장거이다. 혜초는 이역만리 험난한 여정에서도 구수지심(丘首之心)을 내내 간직한 채 고국과 겨레 사랑의 얼, 극기와 창의의 넋, 탐구와 구지의 슬기를 만방에 과시한 위대한 한국의 첫 세계인이다. 1200여 년이 지나, 이제 후손으로서 불초의 응어리를 풀었다는 후련함 속에 온 국민과 평택 시민의 한마음 한뜻을 모아 여기 서해(西海)를 오간 구법고승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평택 땅, 서기(瑞氣) 어린 이곳에 그의 업적을 새긴 기념비를 세워 영원토록 기리고자 하는 바이다. 2009년 5월 28일
'평택섶길'에서는 3코스 비단길을 '고대 통일신라 전후시대 경주에서 당나라로 가는 실크로드'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4코스 원효길을, '평택호 관광지 혜초비에서 원효대사 오도성지인 수도사까지 가는 코스', '원효, 의상대사가 걷던 길에서 평택항 주변의 산업발전상 체험'이라고 안내한다. 과연 원효, 의상, 혜초가 평택섶길 비단길과 원효길을 통하여 걸었을까? 학계의 고대사 전공 박사에게 문의하니, 그들이 당나라로 간 포구는 분명하지 않다. 추정하면 원효나 의상은 남양만의 경기도 화성의 당항성일 가능성이 높고 혜초는 완도의 청해진을 통해 출항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 이동한 경로는 경주, 문경, 충주, 여주, 죽산, 화성 당항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고 한다.
자신의 고장을 관광지화하기 위해 역사적 근거나 사실, 실증적 연구를 거치지 않은 혜초기념비 조성이나 비단길과 원효길 코스는 탐방객들을 자칫 멍청이로 만들 수 있다. 멍청이로 며칠을 보내다가 명청이에서 깨어나 평택섶길과 혜초기념비를 명로하게 판단하게 되고 그 길에 부여된 상상의 즐거움만 누리기로 하였다.
'한국소리터'의 어울림동에는 지영희국악관과 한국근현대음악관이 자리한다고 하는데 탐방길에서 관람하기란 그림의 떡이다. 어울림마당에 지영희 선생 동상과 장고 조각상, 지영희 선생 소개글이 적혀 있는돌의자 등의 조형물만 간단히 살폈다. 평택호 관광단지 평택호 소리길을 따라 아산만방조제 방향으로 진행한다. 여러 흥미 있는 조형물을 대충으로 넘기며 급하게 걷는다. 평택호길 가로수 이팝나무 하얀 꽃은 배고픈 시절의 아픔을 피워 올리고 아산호 드넓은 호면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그려진다. 농가 창고 벽화에 적힌 정지용의 시 '호수'가 그리운 얼굴들을 더 사무치게 한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만 하니/ 눈 감을 밖에." 눈을 감아야만 달래지는 그리움이 얼마나 큰가? 눈을 뜨고서 현실적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아산호와 호반의 병풍처럼 둘러친 산줄기 풍경의 아름다움에 재촉하는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 같다.
평택시의 현충 시설이 모두 모여 있다는 인상을 주는 계두봉 아래의 평택 현충 시설 앞 광장을 통과한다. 현충 시설 하나하나를 살펴보려면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될 것이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도 않고 멀리서 일별만 한다. 현충탑, 평택 3.1독립운동 기념비, 평택 독립운동선열추모비, 6.25 참전공적비, 평택3.1운동 100주년 기념 '그날의 함성'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충탑과 '그날의 함성' 조형물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순국하신 영령들을 기리는 현충탑과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의 함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역사적 삶의 가치를 무겁게 느끼게 한다.
2-3.들길에서 부르는 노래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경기도 서쪽과 동쪽을 잇는 도로)를 따라간다. 평택호 관광단지 주차장과 그 주변의 상가는 허르스름하고 평일이어서인지 숨죽은 듯 고요하다. 서동대로는 대형 공사 차량들이 질주하여 그 옆을 걷는 탐방객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우경삼거리를 조금 지나서 매연과 소음과 두려움으로 그득한 서동대로와 헤어져서 숙박시설이 즐비한 권관길을 따라간다. 권관길 끄트머리에서 경기경제자유구역 현덕지구로 지정되어 있는 드넓은 들녘으로 나간다. 경제자유구역은 대한민국이 복합단지개발을 통하여 외국기업의 국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설치한 경제특구로서 전국에서 경기경제자유구역 등 9개소가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라고 한다. 경기경제자유구역은 평택항을 중심으로 제조·물류의 평택 포승(BIX)지구, 유통·상업 복합개발 현덕지구, 연구·실증의 시흥 배곧지구 등 3개 지구로 개발되고 있는데, 현덕지구는 현덕면 권관리와 장수리, 포승읍 신영리 일원에 이른다.
경기경제자유구역 현덕지구로 나가 드넓은 방아다리들 농로를 따라가니 서동대로에서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차량도로에서 벗어나 들길에 나오니 자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들길은 길게 이어지고 걸어온 들길을 뒤돌아보면 살아온 인생길과 빛났던 순간이 추억처럼 가슴을 달군다. 긴 들길은 장수리 마을 입구까지 이어진다. 삽교천방조제, 당진 삽교호관광지, 맷돌포선착장, 매산해안공원, 음섬포구, 아산산업단지 부곡지구, 송악산 등 이미 탐방한 서해랑길 지역의 아산만 남서쪽 당진시 해안 풍경이 어림된다. 저 아산만 당진 지역을 서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삽교천방조제를 건너 동쪽 아산시 지역으로 넘어왔다. 아산호 남쪽 호안을 돌아 평택으로 넘어와 아산호 북쪽 호안을 돌아서 아산호와 헤어져 이제는 아산만 동쪽 내륙 평택시 현덕면 장수리 들길을 걷고 있구나.
현덕면 장수리 입구에는 오리 솟대가 세워져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는 역할도 하며,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는 오리 나무 솟대가 앙증스럽다. 오리 솟대를 지나 장수리 금댕이골 들길을 따라간다. 금댕이골 들길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평화와 고요의 길, 이 들길에서 박인희의 '들길' 노래를 부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보자/ 내 눈에 먼지들이 씻어지리니/ 무명옷 갈아입고 들길을 가자/ 내 발에 고운 흙이 밟혀지리니/ 한때는 미워했던 사람들마저/ 겨레의 이름으로 생각하면서/ 무명옷 갈아입고 들길을 가자/ 내 발에 고운 흙이 밟혀지리니" 그냥 좋다. 무명옷은 갈아입지 못하였지만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보고, 내 눈의 먼지를 씻어낸다. 들길의 고운 흙을 밟으며 미워했던 사람들도 겨레의 이름으로 생각하자. 들길에 사랑과 평화가 그득히 넘쳐 흐른다.
다시 나즈막한 언덕길로 올라서 염박골 입구에 이르렀다. 현덕면 장수리 장수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는 더 가까워졌다. 아산만 남쪽의 당진시 송악읍을 대표하는 송악산은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처럼 솟아 있다. 장수리 염막골 들길을 따라 내려간다. 한 아주머니가 나즈막한 언덕길을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으며 올라온다. 부드러운 꼬부랑길을 아주머니는 끝까지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또 힘껏 밟아 돌린다. 인생길의 고난을 헤치는 모습처럼 아름답다. 아주머니에게 응원의 소리를 보내니 아주머니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페달을 밟는 발에 더 힘을 준다.
염박골 들에는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있고, 모판의 모들이 줄지어 서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농촌 들녘의 풍경이 논물처럼 찰랑찰랑 맑게 아름답다. 이 들길처럼 살아가야 하는데 이 순간을 지나면 다시 도회지의 삶속에 마약처럼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그냥 좋다. 들길의 풀, 논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경쾌한 도랑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감각을 일깨운다. 물이 길게 이어진다는 장수마을에 들어섰다. 느티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마을의 나무들이 무성한 푸른 잎과 맑은 초록잎을 팔랑거리며 길손을 맞이한다. 걸어온 길들이 뒤에서 당기는 듯, 걸어갈 길들이 앞에서 끄는 듯.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돌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 문정희(1947~)의 '시(詩)가 나무에게' 전문
3.탐방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1km 중 15.9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13분 중 4시간 32분
맨 왼쪽 구진마을 연자방아 앞 대안길을 따라 호림농원 앞으로 나와 마안산과 구진마을을 뒤돌아본다. 느티나무는 명품이다.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갈매기들이 많이 날아 구진개라 불리던 곳을 바라본다. 서해랑길은 왼쪽 농로로 진입하여 구진개 간척농지를 가로지른다. 맨 오른쪽의 석화봉, 서해선의 아산고가 아치교, 그 뒤의 입암산, 맨 왼쪽 뒤의 영인산을 확인한다.
대안4리 구진마을 연자방아 앞에서 대안길을 따라 화훼재배 호림농장 앞을 거쳐왔다. 호림농장 뒤 숲 뒤쪽으로 대안2리 사랑현과 뱀골 마을이 있는 것 같다.
서해랑길은 대안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구진개 간척농지 농로로 진입하여 농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구진개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 서해선 철로 아래를 통과한다. 오른쪽에 기산3리 마을, 왼쪽에 석화봉이 보인다.
구진개 농지에 모내기 준비를 위해 논물을 받아 두었다. 아산호 건너편 중앙 앞에 원랑산, 왼쪽 뒤에 고용산, 오른쪽 뒤에 영인산이 솟아 있다. 원랑산 오른쪽이 백석포 지역으로 청나라 군대가 44일 동안 주둔했으며 일본군이 승전비를 세웠던 곳이다.
농로를 따라오다가 뒤돌아서 마안산과 대안4리 구진마을을 뒤돌아본다. 왼쪽의 비닐하우스는 화훼재배 호림농장이다.
논물이 찰랑거리고 지칭개꽃들이 피어 있다. 아산호 건너편 왼쪽에 고용산, 오른쪽에 영인산, 중앙 앞에 원랑산이 보인다.
현덕면 대안리에서 작은 개천의 다리를 건너 현덕면 기산리로 넘어간다. 오른쪽 뒤에 원기산(元岐山)이 솟아 있다.
농로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대안리(大安里)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 지역은 대안2리 사랑현과 뱀골인 것 같다. 왼쪽 뒤의 산은 원기산(元岐山)으로 기산리 지명을 유래한 산이다.
대안리(大安里)는 마안산을 중심으로 작은박골(1리), 사랑현과 뱀골(2리) 큰박골(3리), 구진개(4리)로 형성되었다. 대안2리 사랑현은 옛날에는 부유해 사랑(난간)만 딛고도 건너다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고, 뱀골은 본래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배움골이라고 했던 것을 소리 나는 대로 뱀골이라고도 했다. - 평택시史
마안산 서쪽 아래에 구진마을이 자리하고 오른쪽은 구진개이다. 논을 써레질하기 위해 트랙터가 논으로 진입했다.
왼쪽에 기산리 지명을 유래한 원기산이 솟아 있고, 북쪽 위는 안중읍 지역일 것이라 가늠한다.
소하천은 안성천 아산호로 유입한다. 아산호 건너편 왼쪽 뒤에 고용산, 중앙에 원랑산이 확인된다.
무논에 써레질을 마친 트랙터가 다른 무논을 써레질하기 위해 이동한다. 오른쪽의 원기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펼쳐져 있다.
기산리(岐山里)의 기산이라는 지명은 기산3리 원기산에서 왔으며, 원기산은 남쪽으로 안성천 하류(평택호)가 바라보이고 큰길에서 깊숙이 들어가서 피난곶이라고 불렸다. 천곡泉谷은 기산1리의 자연지명으로 좋은 우물이 있어 ‘샘골’이라고 했는데, 기산리의 샘골이라는 뜻으로 '기천곡(아랫샘골)'이라고도 부르며, 일제강점기 때는 현덕면의 면소재지였다. - 평택시史
서해선의 아산고가 아치교가 아산호를 건너고, 그 뒤쪽에 영인산, 중앙에 입암산, 맨 오른쪽에 평택의 석화봉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맨 오른쪽 현덕면 기산리 기산3리 마을로 들어가 기산리 지역을 왼쪽으로 통과하여 맨 왼쪽 현덕면 권관리의 석화봉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서해선의 아산고가교는 남쪽 아산호를 건너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로 이어간다.
북쪽 원기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낮은 구릉 동쪽에 기산3리 마을이 자리한다. 서해선은 기산리 지역을 남북으로 통과한다. 서해랑길은 서해선 아산고가가교 아래를 통과하여 기산3리 마을회관으로 이어간다.
원기산 남쪽은 기산3리, 그 북쪽은 기산2리 지역인 듯. 서해선이 북쪽 황산리에서 기산리를 가로질러 아산시로 이어진다.
작은 하천의 다리를 건너 현덕면 기산리로 넘어와 농로를 따라왔다. 건너편에 마안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마안4리 구진마을, 왼쪽은 대안2리 사랑현과 뱀골 마을, 오른쪽은 안성천 구진개이다.
오른쪽의 기산3리 마을회관 옆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기산3길을 따라 이어간다.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아래를 통과하여 기산3리 마을회관 옆을 지나 기산3길로 들어왔다.
기산3길을 따라 기산3리 마을을 통과한다. 마을 창고 벽에 풍년 벽화가 그려져 있고, '풍년가' 노랫말이 적혀 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기산리에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구 좋다/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 가세.
기산3리 마을을 지나서 기산3길에서 왼쪽의 기산길로 진입하여 기산길 농로를 따라간다.
기산3길을 따라서 기산마을을 지나 맨 왼쪽에서 평택섶길 비단길 코스로 들어와 기산길 농로를 따라오고 있다.
오른쪽에는 기산길 간선도로가 지난다. 비단길은 기산길 농로를 따라가 앞의 농가를 지나서 기산길 간선도로로 나가 앞쪽의 석화봉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왼쪽에 서해선 아산고가 아치교가 아산호 위를 통과하고 건너편 중앙에 영인산이 보인다.
농가의 밭에 대파와 마늘이 자라고 있다. 대파는 꽃을 피웠고, 마늘은 수확기를 맞은 것 같다. 농민들은 일손이 바쁘다.
왼쪽 뒤에 고등산, 오른쪽에 마안산,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현덕면 기산리 들녘 위를 가로지른다.
오른쪽 뒤 기산3리 마을회관에서 기산3길을 따라 기산3리 마을을 지나서 기산길 농로를 따라오고 있다.
기산길에 조성된 가로수 이팝나무 하얀 꽃들이 흐드러진다.
서해랑길은 현덕면 기산리에서 기산길을 따라 권관리로 넘어가 석화봉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왼쪽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아산호 호변을 따라 평택호 예술공원으로 이어가야 더 멋질 것 같다. 왼쪽 서해선의 아산고가 아치교가 아산호를 건넌다.
기산길을 따라 석화봉을 오른쪽으로 돌아 평택호2길로 들어왔다. 왼쪽은 현덕면 권관3리 지역인 듯. 권관3리의 자연 지명은 문곡(文谷)이며, ‘황새울’이라고도 불리는데, 바닷물이 들어오고 갯벌이 발달했을 때 황새들이 날아들어 '황새울'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중앙 뒤에 고등산이 보인다.
평택호2길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한국소리터' 방향으로 진입한다. 앞에는 평택농악마을 야외공연장 건물이 보인다.
평택호예술관 옆을 지나 '한국소리터'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야외공연장 주차장이 왼쪽 뒤에 있다.
정면에 '한국소리터' 두드림동(사무실, 연습실) 건물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음 율계인 12율명(律名)을 이미지화하여 배치한 건물이라고 한다. 12율명은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이라고 한다.
'한국소리터' 농악마을 야외공연장 계단에는 '웃다리 평택농악' 중 역동적인 상모돌리기 이미지를 모자이크로 연출하였다. 계단 오른쪽에 한국소리터 안내이정표, 왼쪽에 한국소리터 시설현황&안내도, 평택시 관광안내도와 주요관광지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한국소리터는 2010년 명칭 공모를 통해 '한국소리터'로 결정되었으며, 한국 전통의 소리 공연을 통해 국악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09년 3월 2일 공사 착공, 2010년 4월 13일~27일 농악마을(가칭) 명칭 전국 공모, 2010년 10월 12일 명칭 공모 '한국소리터' 결정, 2011년 11월 11일 한국소리터 개관식. 한국소리터에는 우리나라 민족음악의 거장 지영희 선생을 기념화한 곳으로 상모 돌리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 공연장인 지영희홀(실내공연장), 전통 공연 등 다양한 퍼포먼스가 가능한 공연장인 농악마을 야외공연장, 지영희 국악관과 한국 근현대음악관이 있는 어울림동, 사무실과 연습실, 스튜디오가 있는 두드림동, 버스킹 공연 및 부대 행사를 하는 어울림 광장 등이 있다. - 한국소리터 시설현황&안내도
평택호 관광단지 모래톱 공원으로 나간다. 왼쪽에 평택호자동차극장이 있다.
오른쪽에 오후 5시 이후 주차가 금지되는 평택호자동차극장 공간이 있다.
맨 오른쪽 첨탑처럼 솟은 평택호 예술관 뒤쪽에서 맨 왼쪽 평택농악마을 야외공연장을 돌아서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진 뒤쪽의 평택자동차극장 입구를 지나 모래톱 공원으로 나왔다.
모래톱 공원에 '휘모리' 의자를 비롯한 여러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바로 앞 '휘모리' 의자는 '평택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의 상모를 모티브로 제작하였는데, 평택농악에서 가장 신명나는 가락 '휘모리'를 역동적이며 아름다운 선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아산호에는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아산호 위를 가로지르고 맨 오른쪽 뒤에 고용산이 솟아 있다. 모래톱 공원 왼쪽 뒤에 '혜초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혜초기념비'에서 평택섶길 3코스 비단길이 끝나고 4코스 원효길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서해랑길은 경기둘레길 45코스와 평택숲길 원효길과 동행한다.
모래톱공원 입구 왼쪽에 '휘모리' 의자, 오른쪽에 '평택강' 지명 지정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아산호를 건너는 서해선의 아산고가 아치교가 멋지다. 맨 뒤 왼쪽에 고용산, 중앙에 송신탑이 서 있는 금산이 확인된다.
평택은 바다와 맞닿은 강의 하류로 예부터 기름진 퇴적 평야를 자랑하여 들판에는 올벼와 메벼가 넉넉하고, 수많은 나루와 포구는 국가의 조세를 운반하고 바다와 접한 지형적 특성으로 수산물도 풍부하여 어업도 발달하였다. 이렇듯, 평택은 부족한 산에 비해 풍부한 물줄기로 농업과 더불어 포구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였다. 평택을 흐르는 물줄기는 우리 평택시민의 뿌리이고 생명이며 미래이다. 지명은 땅에 대한 정체성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귀속성까지 나타내는 지리학적 언어이기 때문에 '진위천, 안성천 두 강물' 이 합쳐지는 곳부터 '평택호' 까지 20km 구간을 평택강으로 부르고자 한다. - '평택강' 지명 지정 안내글
왼쪽에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지나고, 왼쪽 뒤에 금산, 중앙에 영인산, 오른쪽에 채석장 상처가 남아 있는 입암산을 확인한다.
아산만방조제가 안성천 하구를 가로막고 있으며 오른쪽에 배수갑문이 보인다. 맨 왼쪽에 입암산, 그 아래 신풍산, 그 앞에공세리성당이 있는 대내삼을 가늠한다. 중앙 맨 뒤에 연기가 솟는 동화기업 아산공장이 흐릿하다.
평택호 호반에 조성된 1.2km 뎈길에 소리의자들이 설치되어 있어 평택호 소리길이라고 명명된다. 앞쪽 뱃머리 전망대가 있는 곳은 노랑바위라 불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매년 가을 구진개(鷗津浦)에서 행해졌으나 지금은 사라진 풍어제를 재현한다고 한다.
그 옆에 조형물 '하모니'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조형물은 의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경기도는 예부터 한국문화의 중심지였고 특히 평택은 민속음악과 무속음악의 온상지였다. 이런 평택이 낳은 천재 음악가 지영희선생의 업적과 얼을 그리며 본 의자를 제작하였다. 민족음악 수호영웅, 지영희(池瑛熙, 1909-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본명 지천만(池千萬) :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유신정권의 위기 속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리를 평생 지키고 발전시킨 민족음악 수호영웅이다. 국악의 대중화, 현대화, 세계화를 이끈 전무후무한 예인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국악을 최초로 오선지에 옮겨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게 하였고 전승되도록 했다. 해금산조와 피리산조에 있어 한국 최고의 명인임은 물론 국악관현악단을 창시해 최초로 국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유럽과 미국으로 진출해 성공적으로 공연을 이끌어 해외에 국악의 우수성을 알린 위업을 달성했다. 이 외에 음악교육가, 고전무용음악작곡가, 고전영화음악작곡가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지영희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 국악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지영희선생은 전무후무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근대국악의 아버지다. - 설명안내판
평택호 뎈길을 따라간다. 여러 조형물들 중 특히 다양한 모양의 소리의자들이 설치되어 있어 '평택호 소리길'이라 이른다.
500년 전 경기도는 한국문화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돈과 물자가 모이고 새로운 문화가 생기는 곳, 열려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국악하면 당연 경기음악을 으뜸으로 여겼다. 경기음악의 중심지는 경기 아산만(평택호) 일대였다. 바다와 강이 만나 물이 풍부하고 논이 발달해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자리한 '펑택'은 산이 없는 '핑평한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평택은 굿과 농악, 민요가 크게 발전했다. 평택은 지역의 자랑거리인 전통음악을 활용하여 낭만과 풍류의 메카, 평택호 소리길을 조성했다. - 설명안내판
'한국소리터' 표석 바로 뒤 건물은 두드림동, 맨 왼쪽 건물은 어울림동, 두 건물 사이가 어울림 광장, 그 뒤에 지영희홀이 있다.
한국소리터는 평택호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기도 내의 대표적인 관광 휴양 공간인 평택호관광단지에 27,187㎡(8,223평) 규모로 조성된 공연장입니다. 평택 출신의 지영희 선생을 기념하는 569석이 갖춰진 지영희홀과 야외공연장(평택농악마을), 두드림동(사무실, 연습실, 스튜디오)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행복한 한국소리터를 만들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운영됩니다. - 한국소리터 종합안내도
'한국소리터' 어울림동 옆 어울림 광장 앞에 해금을 켜는 지영희 선생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소리터 어울림동 1F은 지영희국악관이고, 한국소리터 어울림동 3F은 한국근현대음악관이라고 한다.
평택에는 일제 침략과 서양 문물에 자리를 잃어가던 전통음악을 지금의 우리 품까지 안겨준 ‘근대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1908-1980)’ 선생이 있다. 지영희 선생은 최초의 근대 국악 교재 저술, 국악관현악단 창단, 국악 창작곡(꼭두각시 무용곡) 발표 등 전통음악의 현대화를 이룬 근대 국악의 아버지이다. 그의 다양한 업적을 지영희국악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한국근현대음악관은 평택이 낳은 근대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 선생의 유산을 계승하고 우리나라 근현대 음악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설립했다. 국내 최초, 최다의 음악 특화자료 6만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악과 양악, 근대와 현대, 대중과 민중이 공존하며 한국 음악의 정체성과 진실한 역사를 담아 조성하였다. ‘역사’를 '음악'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 한국소리터
'한국소리터' 어울림광장 앞에 해금을 연주하는 지영희 선생의 동상과 장고 조각상, 그 앞에 지영희 선생의 소개글이 윗면에 적혀 있는 둥근 돌의자 모형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지형희 선생을 안내하는 글이 둥근 돌의자 모양의 조형물 윗면에 적혀 있다.
국악 현대화의 아버지 지영희(池瑛喜, 본명 지천만池千萬/ 1909-1980) :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1973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통음악가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 음악을 연구·개발하여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또한, 한국축제무용곡 '꼭두각시 무용곡'을 만들었으며 일제강점기 전설의 무희 최승희와 세계순회공연, 국내 최초 뉴욕 카네기홀 국악공연, 영화 '사도세자'를 비롯해 한국 고전 영화음악에도 손길을 남기는 등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업적 중 백미는 우려 음악의 교육체계를 바꾼 것이다. 그동안의 교육법은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전수되었는데 그는 최초로 서양의 오선보에 국악을 채보하고 이론과 역사 등 악기별 특성을 정리하여 최초의 근대 국악교재를 만들어 우리 음악의 맹점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근현대시기 서양문화에 자리를 뺏겨 사라져 가는 우리 민속 음악들이 보존되고 계승될 수 있었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사후 40여년 만에 2017년 12월 8일 정부로부터 '문화유산 유공훈장'을 받았다. 명실공히 오늘날 그는 국악 현대화의 아버지를 넘어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아산호 위를 달리는 아산고가 아치교가 아산호를 빛낸다. 왼쪽 뒤에 고용산, 중앙 오른쪽 뒤에 송신탑이 솟은 금산이 보인다.
드넓은 아산호가 출렁거리고, 남쪽에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맨 왼쪽에 금산, 중앙에 영인산, 오른쪽에 입암산이 있다.
평택호 뎈길은 평택호 소리길이라 명명되었다. 뱃머리 전망대가 있는 노랑바위와 아산만방조제의 배수갑문이 보인다.
국내 최초의 소리의자 : 1.2Km의 평택호 데크길에 다양한 모양의 의자들이 있다. 의자의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2014년 공모를 통해 선정된 미술가들이 평택의 4대 소리를 모티브로 만든 소리의자이다. 평택이 낳은 국악 현대화의 아버지, 지영희(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보유자)와 평택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평택민요(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8호), 국민동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낭만과 풍류의 메카, 평택호 소리길을 감상해 보자. - 설명안내판
평택민요(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8호)를 모티브로 제작, 민요의 가락을 8분 음표로 응용하여 조형성과 음악성을 표현하였다.
평택호길 권관2리 고잔 마을의 창고 벽화에 정지용의 시'호수'가 적혀 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아산호를 바라보면 시심에 젖을 듯. 고잔(高棧)은 권관2리의 자연 마을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곶(串)이 발달해 고잔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맨 뒤에 마안산, 앞에는 석화봉이 있다. 그 서쪽 모래톱 공원 입구에서 뎈길인 평택호 소리길을 따라오고 있다.
'노랑바위' 지명으로 불리는 곳에 뱃머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뱃머리 전망대 앞에 해금 모양의 조형물 아래 '해금(奚琴) 벤치' 소리의자가 조성되어 있다.
해금의 형상을 모티브로 하여 현대적 구조 속에 전통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녹아드린 디자인을 기획하였다. 경기도는 예부터 한국문화의 중심지였고 특히 평택은 민속음악과 무속음악의 온상지였다. 이런 평택이 낳은 천재 음악가 지영희 선생의 업적과 얼을 그리며 본 의자를 제작하였다. - 설명안내판
노랑바위에 풍어제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현덕면 대안리 구진개는 현재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해방 전후만 해도 아산만 어장의 대표적인 어항이었을 뿐 아니라 농업과 더불어 어업이 발달했던 곳이며 그래서 마을 이름도 갈매기 나루라는 뜻의 구진개(鷗津浦)이다. 일제 초기에 태어난 기산리 노인들에 따르면 4월 어장철이 되면 구진개 나루에 하얀 돛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구진개에서 잡히는 고기는 숭어, 강다리, 병어, 깡치 (거물치) 같은 것들이었는데 특히 숭어가 많이 잡히는 이른 봄이면 강화도, 옹진군 일대의 어선들까지 새카맣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구진개의 풍어제를 살펴보면 서해안 지역 풍어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마을의 특성 때문에 '당제사'와 '뱃고사'를 함께 지냈다는 것이다. 음력 10월 3일에 지낸 '당제사'는 마을의 공동제의로 정결한 사람을 제주로 뽑았고 마을 주민들이 돈을 걷어 재원을 마련했으며 소머리를 제물삼아 제를 올렸다. '뱃고사'는 섣달 그믐에 어민들만 따로 지냈는데 용왕을 섬기는 '용신제'는 마안산 꼭대기에 있던 팽나무 아래에서 올렸고 '뱃고사'는 배 위에서 지냈다고 한다. 1960년대 신왕골에는 4~5척의 어선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큰 배는 한 척 뿐이었고 대부분은 선원 2~3명이 승선할 수 있는 작은 배였다. 큰 배들은 어업에만 종사하던 전문 어선들로 안경 틀이라는 어구로 아산만뿐 아니라 어청도까지 가서 강다리, 거물치, 뱅어, 새우, 조기 등을 잡았다. 하지만 먼 거리 조업을 할 수 없는 작은 배들은 투망, 사들, 쪽대와 같은 원시적인 어구들을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숭어, 거물치, 준치, 황새기 같은 어종들만 잡아 올렸다는데 잡은 고기는 주민들에게 나눠준 뒤 가을에 곡식으로 받았다고 한다. 현재 이곳 노랑바위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가을에 옛 풍속을 재현하고자 풍어제가 열리고 있다.
노랑바위의 뱃머리 전망대가 보인다. 맨 뒤에는 마안산, 아산호에는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아산호 위를 횡단한다.
모래톱공원에서 이곳까지 한국소리터와 뱃머리전망대를 거쳐 1.2km를 걸어왔다. 현충탑 방향으로 이어간다.
'I ♡평택호' 조형물 뒤 평택호에 유람선선착장과 그 오른쪽에 평택호관광안내소가 있다. 아산호 건너편 아산시 지역에 맨 왼쪽에 금산, 중앙에 영인산, 오른쪽에 입암산이 확인된다.
왼쪽은 공사 중인 서부내륙고속도로, 오른쪽은 국도 제39호선 평택호대교. 중앙 뒤에 입암산, 그 왼쪽에 영인산이 솟아 있다. 이 풍경을 조망한 뒤 평택호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아산방조제 배수갑문교 앞쪽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국도 제39호선 평택호대교, 오른쪽의 수상보도교는 국도 제38호선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교로 이어진다. 왼쪽 뒤에 입암산이 솟아 있다.
아산만방조제는 서해 아산만으로 흘러들며 충남 아산과 경기 평택의 경계를 이루는 안성천 하구에 1974년에 축조된 방조제이다. 본래 축조 목적은 간척 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늘리고 홍수 및 염해 피해를 줄이는 것이었지만, 경관이 아름다워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이 방조제는 서쪽에 서해 바다, 동쪽에 아산호(평택호)가 위치하여 방조제 위에 건설된 국도 39호선을 따라 바다와 호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드라이브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1980~90년대에는 수학여행 단골 코스로 각광받기도 했으며 일몰 시 노을이 특히 아름답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가 모두 가능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최대 9.6m로 세계적인 수준이라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갯벌도 장관이다. 최근에는 배수갑문에 대형 수조창을 설치해 통선문 가동 시 어류가 이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배수갑문 관리동에는 공원, 전망대, 전시관 등의 시설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주차장, 배수갑문, 숙박시설, 음식점, 편의점 등이 있는 북쪽의 경기 평택호관광단지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주변에는 아산호의 쌀조개섬, 공세리성당, 삽교천방조제, 평택호예술공원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하기 좋다. - 두루누비
수상보도교와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교를 살핀 뒤 평택호와 헤어져 뒤돌아서서, 수상보도교 앞의 경기둘레길 이정목을 따라 평택호길로 나간다. 평택항 마린센터까지 10.7km가 남아 있다. 인천횟집 옆 솔밭식당 왼쪽으로 이어간다.
현덕면 권관2리 사무소에 평택호 관광지개발 보상대책위원회 사무실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 현충사 광장으로 이어간다.
현충사 앞 광장에서 앞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의 육교를 건넌다.
육교로 오르는 계단에서 뒤돌아서 계두봉(鷄頭峰)과 평택현충시설을 바라본다. 현충탑, 평택 3.1독립운동 기념비, 평택 독립운동선열추모비, 6.25 참전공적비, 평택3.1운동 100주년 기념 '그날의 함성'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덕면 권관리(權菅里)는 조선후기 수원부 가사면 가사곶(佳士串) 지역. 1914년 권관리·고잔리를 통합해 권관리라고 했다. 권관(權管)은 지형이 닭의 머리를 닮아서 ‘닭이머리’ 또는 ‘계두(鷄頭)’라고 하던 것을 벼슬 관(官)을 써서 권관(權官)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한자가 권관(權管)으로 바뀌었다. - 평택시史
서해랑길은 육교를 건넌 뒤 서동대로를 따라 우경삼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아산만방조제와 이천시 장호원읍 장호원교를 잇는다. 경기도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다는 의미로 '서동대로'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가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교로 진입한다. 왼쪽 맨 뒤에 영인산이 솟아 있다.
육교를 건너 평택호 관광단지 주차장으로 내려와 상가 뒤쪽으로 나와 아산만을 조망한다. 왼쪽에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동화기업 아산공장 건물이 솟아 있고, 중앙에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인주산업단지가 보인다. 그 오른쪽 뒤에 삽교천방조제, 오른쪽에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 삽교호국민관광지가 가늠된다. 그 맨 뒤에 송악산이 어림된다.
서동대로의 육교를 건너서 오른쪽 뒤 평택호 관광단지 주차장과 상가 뒤를 거쳐 상가 앞으로 나와 서동대로로 나왔다.
우경삼거리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서동대로 동쪽 보도를 따라간다. 이곳은 권관1리 지역인 것 같다.
권관리의 옛 지명은 가삿골로 마을의 지형이 곶(串)이어서 ‘가사곶’ 또는 ‘가사고지’라고 했던 데서 유래됐다. 권관리(權菅里)는 지형이 닭의 머리를 닮아서 ‘계두(鷄頭)’라고 하던 것을 벼슬 관官을 써서 권관(權官)이라고 했다. 나중에 한자가 바뀌어 권관리(權菅里)가 되었다. 권관리는 상하동(上下洞, 1리), 고잔(高棧, 2리), 문곡(文谷, 3리), 가사(佳士, 4리)가 있다. 상하동은 상부동(上部洞)과 하부동(下部洞)으로 나뉘어졌다가 합쳐지면서 형성된 지명이고, 고잔(高棧)은 바닷물이 들어오고 곶(串)이 발달해 유래되었다, 문곡은 ‘황새울’이라고도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갯벌이 발달했을 때 황새들이 날아들어 유래되었으며, 가사는 갑오개혁 뒤 수원군 가사면의 소재지에서 유래되었다. - 평택시史
평택항 마린센터와 노양리 마을회관 버스정류장 거리 표시가 뒤바뀌어 있다. 평택항 마린센터 10km라고 표시되어야 한다. 이곳은 권관1리 상하동(上下洞) 지역인 것 같다.
서해랑길은 서동대로와 헤어져 오른쪽 권관길을 따라 블루힐 모텔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서해랑길 이정목 방향으로 이어간다. 이 이정목에도 거리 표시가 뒤바뀌어 있다. 종점 9.6km 지점이다.
권관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녘으로 나가 농로를 따라간다.
논에는 써레질을 위해 물을 모아 두었고, 갈대습지 앞에서 백로 한 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언덕 뒤쪽은 권관4리 지역인 것 같다. 권관4리의 자연 마을은 가사(佳士) 마을이라 불리는데, 갑오개혁 뒤 수원군 가사면의 소재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언덕길 아래에 희귀 농작물을 재배하는 듯한 비닐하우스 농장이 있다.
비닐하우스 농장 언덕을 넓으면 드넓은 방아다리들이 펼쳐진다. 농로를 따라 앞의 언덕 갈림길로 이어간다.
방아다리들 농로를 따라 언덕의 갈림길에 이르니 전신주에 매달린 경기둘레길 진행 표지판에 평택항 마린센터 8.5km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원효길 표지판과 서해랑길 진행 방향 표지가 붙어 있다.
왼쪽 방아다리들 농로를 따라 언덕의 갈림길로 올라왔다. 중앙 맨 뒤에 아산의 영인산과 그 오른쪽에 입암산이 보인다.
갈림길 언덕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장수리 논들과 서동대로 뒤쪽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아산만 바다 건너편의 신평면 부수리 맷돌포구와 매산리 매산해안공원이 가늠된다. 맨 오른쪽에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 그 왼쪽 뒤에 송악산이 어림된다.
갈림길 언덕에서 왼쪽의 현덕면 장수리와 경계를 이루는 도랑 옆 권관리 농로를 따라 앞쪽의 금댕이골 입구로 이어간다.
권관리와 장수리 경계를 표시하는 솟대에 원효로 표지판이 붙어 있다. 현덕면 장수리 금댕이골로 넘어간다. 오른쪽 안내판을 보니 이 지역은 경기경제자유구역 현덕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경제자유구역은 대한민국이 복합단지개발을 통하여 외국기업의 국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설치한 경제특구로서 현재 전국에 경기경제자유구역 등 9개소가 지정, 운영되고 있습니다. 경기경제자유구역청은 서해안경제벨트 중앙 평택항 마린센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택항을 중심으로 제조·물류의 평택 포승(BIX)지구, 유통·상업 복합개발 현덕지구, 연구·실증의 시흥 배곧지구 등 3개 지구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현덕지구는 현덕면 권관리와 장수리, 포승읍 신영리 일원에 이릅니다. - '경기경제자유구역청'
장수리 들녘에 모들을 키우는 모판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중앙 뒤에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가 아산만 바다 위를 가른다.
권관리 방아다리들 농로를 따라 언덕의 갈림길로 올라와 도랑 옆 농로를 따라 솟대 앞으로 왔다. 농로 왼쪽은 현덕면 권관리, 오른쪽은 현덕면 장수리 지역이다. 왼쪽 맨 뒤에 영인산, 그 오른쪽에 입암산, 그 오른쪽 뒤의 삽교천방조제를 어림한다.
금댕이골 입구의 솟대가 서 있는 곳에서 현덕면 장수리 금댕이골 농로를 따라 왔다. 맨 뒤의 영인산과 입암산이 확인된다.
금댕이골 농로에서 지선(支線) 서동대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맨 오른쪽에 현덕면 장수리 장수마을, 바로 앞은 장수리 들녘, 그 뒤쪽 국도 제38호선 서동대로가 지나는 곳의 마을은 포승읍 신영리 지역이다. 중앙 뒤에 서해대로와 그 왼쪽에 당진시 송악읍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동대로 지선(支線)길에서 전봇대 왼쪽 현덕면 장수리 염막골 농로로 진입한다.
현덕면 장수리 염막골 농로를 따라 장수마을로 이어간다. 왼쪽 뒤의 들녘은 자리들, 오른쪽 지역은 염막골이라 이른다.
장수리(長水里)는 조선시대에 양성군 승량동면, 갑오개혁 뒤에는 수원군 가사면 지역이었다. 1914년 ‘두메리라고 했다가, 1938년 주민들의 요구로 장수리로 바뀌었다. 두메는 장수리의 옛 지명으로 산너머 후미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 석화진은 장수리에 있었던 옛 나루이다. - 평택시史
장수리 염막골 들에는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보인다. 논물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가 예쁘다.
장수길을 따라 장수마을로 진입한다. 현덕면 장수리는 예전에 언덕 넘어 해변가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두메라고 불러오다가 두메산골 지명이 좋지 않다고 하여 긴 해변을 끼고 있는 마을을 뜻하는 장수리(長水里)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장수길을 따라 장수리 입구의 마을을 통과하여, 장수리 안쪽 마을의 장수안길로 이어진다.
장수안길 왼쪽에 장수보건진료소, 그 뒤에 장수리마을회관, 오른쪽에 장수리자율방범위원회 건물이 있다.
정면 앞에 장수보건진료소, 오른쪽에 장수리마을회관, 왼쪽에 장수리 자율방범위원회가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