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대가 박 동 진(朴東鎭)] 국창 일대기
"최고 소리꾼 "우리 것은 소중한 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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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창하는 박동진님의 모습)
하늘도 그의 목소리가 듣고싶었나?
판소리의 거목이 갔다.
8일 별세한 박동진(朴東鎭) 명창은 걸쭉한 해학과 입담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국악계의 별이었다.
1998년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도 국립국악원(원로사범실)에 늘 새벽같이
출근해 후진들에 귀감이 되더니 “충남 공주에 마련한 판소리전수회관에서
별세 전날에도 북을 잡고 소리를 놓지 않은”(제자 김양숙) 참 소리꾼이었다.
박 명창은 지금은 일상적 무대로 자리잡은 ‘완창 판소리’를 최초로 시도,
꺼져가던 판소리를 다시 불지핀 선구자라고 국악인들은 입을 모은다.
박 명창은 68년 국립국악원에서 5시간에 걸쳐 완창한
"흥보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춘향가’, 70년 ‘심청가’, 72년 ‘수궁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차례로 완창했다.
중간에 날계란 두어개 깨먹고 쉬지 않고 소리를 이어가는
완창 판소리는 말 그대로 초인적 무대.
20~30분짜리 토막소리 판치던 당시만 해도 획기적이어서,
"미국의 소리" 방송이 공연을 중계하고
"한국전통음악계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도했다.
그의 소리는 6시간을 앉아서 들어도 지루하지 않아 판소리가
재미있는 예술장르임을 인식시켰고,
수많은 명창들이 완창에 도전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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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창은 판소리의 사설을 자유자재로 비틀고 바꾸면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그의 소리에는 ‘봄날 꽃바람 같고 늦가을 솔바람 같으며
한여름 소낙비 같은’ 아우라가 감쌌다 .
전통 소리에만 그치지 않고 창작 판소리에도 힘을 쏟아
‘예수전’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을 작창했다.
한번 읽거나 들으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타고난 소리감각 덕분이었다.
박 명창은 늘 “내 머릿속에는 180여시간 분의 판소리가 입력돼 있고,
이를 잊지 않으려 늘 연습하고 되뇐다”고 말했다.
박 명창의 구수한 목소리로 방송광고를 탄 "제비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는 아이들조차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운 ‘국민 멘트’였다.
소리판의 음담패설은 삶 속에 그대로 진을 박아
거침없는 육담(肉談)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TV 오락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와 “국악은 정신으로 하는 것”
“먹는 것은 양놈 것, 노래 반주는 일본 가라오케니,
우리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꾸짖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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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창은 1916년 7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16세 때 이화중선·이동백·장판개 명창이
협률사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작정했다.
군청서기를 하면 호강할 텐데 뭣하러 광대가 되려 하느냐는
부모님의 불호령을 듣고 무단 가출,
당대 명창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추운 겨울날 쌀 서 말을 지고 몇십리를 걸어 찾아간 박동진에게 정정렬은
‘제자가 많아 받아줄 수 없다’며 퇴짜를 놓았다.
목에서 피를 쏟고 오물을 들이키는 고생 끝에 김창진·정정렬·유성준·조학진·
박지홍에게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다.
1933년 ‘춘향가’로 서울 동양극장 무대에 올랐고,
조선음악단·조향창극단에서 활약했다.
박동진이 본격 명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 가면서 부터다.
당시 국악원 원장이 ‘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 타는 곳 ’
이라고 한 말에 감동받아 매일 새벽에 출근,
득음을 위한 훈련에 매달렸다.
1967년 국립창극단에 입단,
1973년 ‘적벽가’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생활은 검소했으며,
술·담배를 하지 않고,
누구든지 청하면 달려가 소리를 들려주었다.
오랜 세월 박 명창과 호흡을 맞춘 고수 김청만씨는
“박 명창만큼 왕성하게 국악 대중화에 기여한 분은 없었다”며
“우리 시대 최고 명창,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 인철(현대자동차 미국법인 근무)
인수(현대해상화재보험 이사)
인석(평산공업 개발부장)씨 등 3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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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朴東鎭)명창은 판소리의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 인기의 소리꾼이었다.
1968년 9월 '흥보가'로 국내 최초로 판소리 완창(完唱)무대에 도전한 데 이어
이듬해부터 '적벽가' 등 나머지 4편도 차례로 완창해 다섯 바탕 완창 기록을 수립했다.
요즘엔 꼬마 명창들까지 완창 도전에 나서지만 당시엔 인기있는 대목만 불러 제끼던
토막 소리가 판치던 터라 판소리 완창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날 공연은 무명 소리꾼에 불과했던 박옹의 소리 인생을 바꿔 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판소리 꽤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쯤 완창에 도전해야 명창 대접을 받게 됐다.
요즘엔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하려면 1회 이상 완창 발표회를 해야 한다.
박일훈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실장은 "고인은 귀명창(판소리 애호가)들이 부르는 곳이면
대공연장이든 사랑방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의 품으로 달려가
판소리 한마당을 펼쳤다"며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엔 다른 곳에서 아무리
답례를 많이 준다 해도 만사를 제쳐 놓고 국악원 관련 행사부터 챙기는 등
공직자의 모범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박동진 판소리의 특징은 욕설과 음담패설까지 동원한 특유의 재담과 즉흥성에 있다.
최동현(군산대 국문과)교수는 "부를 때마다 사설이 바뀌어 제자들은 힘들지만
관객들은 무척 좋아한다"며 "목 풀기 위해 단가(短歌)를 부르는 대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가사를 지어 판소리로 불렀다"고 말했다.
"아, 그런디 요새 여자들은 말여.
아, 쓰까똔가 원 갓가튼가
그놈의 서양 치마를 딱 입었거던.
서양치마를 입고,
그 속치마 어트케 기냥 걸레같은 거 하나 입고,
요렇게 하고서는, 요기다가 꼭 요맨헌 것, 쬐간헌 것 딱 둘르고는 앉아서…
한 십분만 앉었으면 요짝 다리가 저린깨,
요 놈이 차차차 내리와서 요렇게 된다 그 말여…"하는 식이다.
고인은 무대에서 욕 잘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특히 못생겼다든지 성격이 고약하다든지 하는 설명은 모두 고수(鼓手)같다고 떠넘겼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인간문화재라도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 "눈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
소리만 잘 혀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라고 대화가 오갔다.
공연이 끝나고 고수와 입씨름을 벌이기도 예사였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옹은 대전중학에 다닐 때 가출,
권번에서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하면서 국극단을 따라다니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고향집 뒷산 절터에 움막을 짓고 똥물을 마시면서 백일 독공(獨工)한 일화는 유명하다.
46세 때 비로소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직'한 그는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밤낮 없이 소리 공부에 전념한 연습 벌레였다.
1970년대초에는 '이순신 장군''예수전' 등 창작 판소리를 직접 지어 불렀다.
박옹이 무대에서 가장 즐겨 불렀던 판소리는 '변강쇠 타령'이었다.
기업 연수나 특강에선 최고 인기였다.
초청받아 가면 옛날식으로 "어느 소리할까요""뭐하면 좋겄소"라고 물어 보았기 때문이다.
질펀하고 화끈한 내용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졸음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남성적 기백과 혼이 살아 있는 '적벽가'를 판소리 중 백미(白眉)로 꼽았다.
5년전 고향땅 공주에 판소리 전수관을 지어 놓고 후학들을 지도하던 고인은
틈이 나면 인근 저수지에서 낚시를 즐겼다.
2000년 6월부터 중앙일보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내 인생 소리에 묻고'
라는 제목으로 회고담을 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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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생가가 있는 충남 공주시 무릉동에 박동진 판소리전수관을 짓고 생활해온
박 명창은 오전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두 시간 동안 땀이 흥건할 정도로 창을 한 뒤
목욕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왔다.
함께 생활해온 제자들은 “돌아가신 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욕실에 들어가셨는데
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았더니 욕조에 누우신 채 의식이 없으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명창은 중학시절 우연히 당대의 명창인 이화중선 이동백 등이 출연하는 ‘협률사
무대를 보고 ‘인간인가 신선인가 눈깔이 홀랑 뒤집히는’ 희열을 경험한 뒤 집을 나왔다.
춘향가의 대가 정정렬을 찾아 계룡산으로,
수궁가의 유성준을 찾아 경주로 가는 등 전국을 유랑하며 명창을 찾아다녔다.
그는 “꾸지람도 매도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짐 싸서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나올까봐 가장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젊은 소리꾼으로 제법 대접받던 20대 후반,
그는 무절제한 생활로 소리를 잃고 만다.
목소리를 찾기 위해 충남 대덕군(현 대전 유성구 원내동)의 토굴에서
생쌀을 씹어 먹으며 독공에 열중했다.
40여일 동안 소리만 질러댔더니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소리독에 똥물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부친이 가져다 준 삭은 똥물을 마시니
거짓말처럼 부기가 빠졌다는 일화는 국악계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100일을 채운 뒤에야 토굴에서 내려왔지만 예전의 소리를 되찾지 못한 그는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고수 무대감독 등의 잔일을 했다.
6·25전쟁 직후 만난 두 번째 부인의 내조 속에 하루 10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공부에 전념한 그는 결국 소리를 되찾아 쉰이 넘은 1968년
일생일대의 실험인 ‘흥부가’ 완창무대에 도전한다.
국악 관계자들마저 ‘말이 안 된다’며 제지하는 바람에 무대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지만,
다섯시간반 동안 이어진 ‘흥부가’ 완창은 당시 눈대목(하이라이트) 위주로
공연되던 기존 판소리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그는 72년까지 판소리 다섯마당을 차례로 완창했고,
이를 계기로 오정숙 명창이 ‘심청가’ 완창을 시작하는 등 완창 시대가 열렸다.
뒤늦게 독실한 믿음을 갖게 된 박 명창은 1970년 다섯시간반짜리 판소리
‘예수전’을 완성한 후 ‘충무공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 등 성서인물과
위인을 소재로 한 창작 판소리 발표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3년 ‘충무공 이순신전’의 9시간40분 완창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꼽힌다.
같은 해 그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다.
그는 평소 “양악은 악보가 없으면 헛것이지만 국악은 오로지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고 강조해왔다.
또 한때 소리를 잃었던 경험을 토대로 “얼굴 팔리는 공연에나 힘쓰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소리꾼은 망한다”며 후진들의 분발을 당부하곤 했다.
97년 홀연히 고향 공주로 내려간 그는 사설 부분을 축약한 4시간짜리 적벽가 완창무대에
서는 등 체력이 허용하는 한 무대를 사양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에도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열린 ‘인간문화재 대축제’에 출연했다.
무대 위에서 걸쭉한 입담을 자랑했던 그는 최근에도 한 무대에 올라
“진즉 뻗었을 나이인데 하나님이 더 살다가 오라고 해서…
뻔뻔하게 나온 내가 미친 놈이여”라며 농을 하기도 했다.
위성채널 KBS 코리아는 ‘박동진 명창 추모 특별 판소리 기획’을 긴급 편성해
9일 낮 12시 ‘적벽가’(5시간반), 10일 낮 12시 ‘춘향가’(7시간반)를 방송한다.
국악방송(서울 경기 FM 99.1MHz, 남원 FM 95.9MHz)도 8일부터 2주 동안
오후 7시∼7시30분 고인의 삶과 국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추모 다큐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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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계 전문가 2인이 말하는 명창 박동진
'창조적 판소리의 대가 박동진'
고(故) 박동진 명창은 일반적으로 판소리계에서 분류되는 소리의 계보를
갖고 있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는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아 직속 제자로 이어지는 정형화된
형태의 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창조적 판소리 개척자로서
고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창조적 정신은 1968년 국내 최초로 5-6시간에 걸친
판소리 완창 공연을 시도해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자 및 국악계 관계자들은 당시 박 명창의완창 공연을 꺼져가던
판소리의 불을 다시 지핀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군산대학교 국문과 최동현 교수, 전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낸 최종민
동국대 교수로부터 박 명창의 삶과 업적 등에 대해 들어봤다.
▲최동현 군산대 국문과 교수 = 박동진 선생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판소리가 완전히 사라져갈 무렵이었다.
1968년 여섯시간에 걸친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통해
판소리가 다시 일어나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완창 발표회라는 것은 박 선생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였다.
공연장에서 다른 국악 장르와 함께 중요 대목 몇편을 뽑아 부르는게 고작이었다.
박 선생의 완창 발표회는 처음과 끝을 갖춘 판소리의
완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됐다.
더구나 박 선생의 완창 판소리는 여섯 시간을 앉아서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아 일반 관객들에게 판소리가 재미있는 예술장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사라져가던 판소리가 대중속에 다시 살아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박 선생이 다른 명창들과 구별되는 또하나의 특징은
그만의 재창조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이어지는 계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는 여러 스승들로부터 조금씩 배워 익힌 소리를 조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로 재창조해 낸 독창적인 소리꾼이다.
때문에 제자들도 그리 많지가 않다.
박 선생의 소리는 굉장히 즉흥적이고 일정한 형태가 있지 않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가 되지 않는다.
그는 전통에기반을 두면서도 그만의 독창성을 가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명창 중 한 사람이다.
▲최종민 동국대 교수 =
박 선생은 어려서 전국의 유명한 선생들을 스스로 찾아 다니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때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이 송만갑, 정정렬등 당대 명창들이었다.
이들로부터 조금씩 소리를 배워나가다 본격적인 명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당시 국악원 원장이 '국악원은 공부하면서 월급타는 곳'이라고 한 말에 감동을 받아
매일마다 새벽에 출근, 득음을 위한 훈련에 매달렸다.
박 선생은 생활이 무척이나 검소하고 깔끔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청하면 달려가서 소리를 들려줬다.
국악 대중화에 그만큼 기여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210.95.200.104%2Fcgi-bin%2Fdata%2Fnews1%2Fparkdj.jpg)
《박 동 진(朴東鎭) 이력사항》
생년월일 : 1916. 7. 12
주민번호 : 160712-1000918
본 적 : 서울 종로구 원서동 76-46
주 소 : 공주시 무릉동 370번지 박동진 판소리전수관
전화번호 : 041)856-7770, 7705 ※유족 박인수(2남) 연락처: 016-9294-7068
경 력 :
1933 김창진 문하 판소리 심청가 사사
1934 정정열 문하 판소리 춘향가 사사
1935 유성준 문하 판소리 수궁가 사사
1936 조학진 문하 판소리 적벽가 사사
1937 박지용 문하 판소리 흥보가 사사
1962.1.24 국립국악원 국악사 임명
1968 판소리 흥보가 5시간 완창
1969 판소리 춘향가 8시간 완창
1970 판소리 심청가 6시간 완창
1970 판소리 변강쇠타령 5시간 완창
1970 서울신문사 문화상 수상
1971 판소리 적벽가 7시간 완창
1972 판소리 수궁가 5시간 완창
1972 창작판소리 성서 4시간 발표
1972 판소리 배비장타령 발표
1973 판소리 이순신장군 일대기 창작발표
197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지정
1973 국립창극단 단장 취임
1974 판소리 숙영낭자전 발표
1974 판소리 성웅 이순신 장군 4시간 취입
1975 판소리 구약성서 요셉발표회
1977 판소리 옹고집 발표 공연
1980 은관 문화훈장 수상
1985.7.18 국립국악원 판소리사범 임명
1989 서울시 문화대상(음악부문)
1989 판소리 5바탕 음반 취입(선경)
1990 변강쇠타령 완창공연, 취입(신나라)
1991 KBS 춘향가 완창
1991 변강쇠타령 완창발표회
1991 한국방송공사 주최 국악대상 수상
1996 조선일보사 방일영국악상 수상
1998.11.23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개관(공주시 무릉동 소재)
2001 국립국악원 개원50주년기념공연 '우리시대 예인의 무대' 출연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박동진옹](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ngjuw2.kongju-e.ac.kr%2F%257Ekongju%2Fimage%2Fpan_1.jpg)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를 늘 즐겨 쓰는 판소리의 대가 박동진옹 (인간문화재 제5호)은 우리 고장 무릉동 출신으로 천신만고의 역경을 딛고 한평생 예혼을 불태운 불사조이다.
이제 팔순을 넘긴 박동진옹이 출생지인 무릉동에 판소리 전수관을 건립하고 후진양성과 판소리의 맥을 이어주기 위해 교육의 장을 열게 되었다.
![전수관 조감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ngjuw2.kongju-e.ac.kr%2F%257Ekongju%2Fimage%2Fpan_2.jpg)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은 현재 건립작업이 진행중으로 부지면적 2,441평에 전수관, 생활관, 기숙사, 주차장, 화장실등의 시설을 갖출 계획이며 올('99년) 12월 공사를 완공할 계획이다.(거의 완료됨)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은 광주, 서울, 경기도에서 배우러 오며, 수강료는 150,000원으로 어른, 아이 모두 같다. 지금 수강생은 거의 20~3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개인 레슨도 받고 단체도 받는데 거의 개인 레슨을 많이 받는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2~3번 레슨을 받고, 멀리 사는 사람들은 주말 위주로 토요일날 배우고 전수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요일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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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박동진 판소리전수관 약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ngjuw2.kongju-e.ac.kr%2F%257Ekongju%2Fimage%2Fpan_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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