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제1공화국/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한미동맹의 초석을 닦은 불세출의 지
도자였다. 더불어 그는 1941년 12월 제국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기 5개월 전에 [일본의 두 얼굴/Japan Inside Out]이란
책을 통해 일제의 대미 침공을 조야에 경고한 탁월한 세계적 정치인이자 국제전략가이기도 했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시절의 장면 총리(내각수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민주당 구파, 상징적 국가원수).
이들의 불편한 동거 그리고 민주당 신-구파의 치열한 대립과 끝없는 권력투쟁은 훗날 YS(구파)와 DJ(신파)의 분열로까지 이어진다.
당시 장면 총리가 거주하고 있던 반도호텔 8층(현 을지로 롯데호텔 자리).
장면은 5-16 새벽 반정군의 총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오자 혜화동 칼멜수녀원으로 도피하여 3일간 모든 연락을 차단한 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국란을 진압해야 할 총책임자가 국무을 외면한 사이 천하 대세는 이른바 [장군의 시대]로 바뀌고 말았다.
5-16 반정(군사혁명) 이후 제3공화국을 영도한 박정희 장군.
여기서 기획총책 김종필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라는 혁명공약을
기민하게 발표하여 미국의 불안을 해소하려 노력하였고 실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박정희-캐네디 회담으로 이어짐)
비운의 얼굴마담 장도영 육군중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군사혁명위 의장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육참총장에게 보낸 친필 서한
5-16을 주도한 박정희 소장과 박종규 소령(왼쪽 두 번째), 이낙선 소령(안경), 차지철 대위(수류탄)
1961년 5월 18일 오전, 육사생도 8백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은 5-16을 군사혁명으로 기정사실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 와중에 전두환 대위(서울대 학군단 교관)는 강영훈 당시 육사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박장군의 눈에 쏙 들어버린 전두환은 계속 군문에 남아 요직 중의 요직을 두루거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의 주역 박정희 의장과 풍운아 김종필 중정부장.
여기서 김종필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재건복을 입는 등 다방변에 걸쳐 천부적인 재능을 과시한다.
동상이몽의 박정희와 장도영
얼굴마담인 줄 모른 채 각처에 자신의 세포를 심으며 실권(권능)을 행사하고 있는 장도영.
결국 장도영 일파는 김종필의 중정에 의해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실각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장도영을 계호하는 육군방첩대 노태우 대위
공판 중의 장도영
4-19에서도 살아남은 거물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일당은 5-16 군사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사형선고를 받은 거물 가운데 유지광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훗날 [대명]이란 소설을 남겼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장군
우익 거두 김두한이 그의 부친 [김좌진 장군]을 대신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후 박의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그리고 박태준
1970년 4월 1일 포철 착공식에서 박대통령, 박태준 사장, 김학렬 경제부총리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박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파월장병 위문공연에 참가한 연예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파안대소하는 박대통령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 노태우 경호실 행정차장보.
이들 3인이 청와대 경호실에서 함께 근무한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희귀한 사진이다
1978년 1월 박대통령이 노태우 장군에게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그는 진급과 동시에 경호실 작전차장보(전두환 후임)에
임명되었다. 왼쪽은 전두환 전임 작전차장보, 맨 오른쪽은 전성각 경호실 차장. 전성각은 1979년 10-26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었고 그 후임 사령관이 바로 1979년 11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임명한 장태완 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