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이야기5*
피리 부는 사나이
고유진
허공을 가르던 지휘자의 팔이 멈추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지휘자는 다시 팔을 들어 올린다. 아차! 곡이 끝난 게 아니었다. 엉뚱한 데 박수를 치고 나면 서로가 머쓱해진다. 무대란 관객과 함께 완성해 가는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관람한 적이 있다. 관객이 함께 박수 치며 즐기기도 하는 유쾌한 곡인데, 그날따라 객석이 조용해 간간이 들리던 박수 소리마저 이내 잦아들었다. 그러자 지휘자가 뒤돌아서서 유도했다. 그제야 모두 한마음이 되어 신나게 리듬을 타며 박수를 쳤다. 그 순간 지휘자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것이다. 관객은 그 사나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박수는 대체 언제 쳐야 할까.
연주 프로그램에는 곡목과 순서가 나와 있다. 단락마다 치고, 지휘자가 들어갔다 나올 때 치면 된다. 보통 한 스테이지가 끝나면 연주자가 무대 뒤로 퇴장한 후 다시 나온다. 그때 박수를 치는 것이다. 관현악곡인 경우 악장마다 쳐서는 안 된다. 가끔 이해 부족으로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는 관객이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음악회는 내내 부담스럽게 흘러간다. 모르겠으면 남들 칠 때 묻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보통 음악에 조예가 있는 관객이 “브라보!”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고 나간다. 그런 관객도 연주회에서는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에 있어 지휘자는 어떤 존재일까. 단순히 박자대로 휘젓기만 하면 될까. 수십 명의 연주자가 미리 합을 맞춘다고 해도 속도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음역도 악기마다 천차만별이다. 곡을 해석하고 중심을 잡아줄 리더가 필요한 것이다. 지휘자는 속도와 곡의 흐름을 지시하고, 악기마다 나오는 타이밍을 짚어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능력과 스타일은 지휘자 역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현악단에 있어서 지휘봉을 든 이는 절대적이고도 중요한 피리 부는 사나이다.
카라얀이 지휘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카라얀 시절에는 전통적인 관현악단 색깔을 고수했다. 기본에 충실하고 선율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를 추구했다면,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활기찬 리듬감이 돋보였다.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젊은 감각으로 생동감 넘치는 연주 스타일을 지향했다. 같은 오케스트라여도 이렇게 지휘자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합창에서도 지휘자 영향으로 음색이나 곡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똑같은 곡을 어떤 지휘자는 곡 전반에 걸쳐 최고의 성량을 끌어내길 원한다. 지휘도 힘이 있고 강렬하다. 완급 조절을 중요시하는 지휘자는 섬세한 표현에 집중한다. 가파른 상류의 물줄기같이 휘몰아치다 완만한 하류에 당도하듯 자연스럽게 이끈다. 소리의 강도나 속도의 차이는 그런 변화를 표현하기에 유용하다. 같은 부분을 포르티시모(ff)로 강조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피아노시모(pp)의 여리고 긴장감 있는 소리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강한 것도 강하게 느껴지고, 극한 여림도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연주 도중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도 대처해야 한다. 이를테면 협연자가 악보를 건너뛴다든지 악기에 문제가 생기는 변수 등을 말한다. 반주할 때 그런 경우가 있었다. 평소 독주자가 자주 놓치는 부분이면 대비를 해놓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데서 건너뛰니 당황하여 헤매는 것이다. 독주자는 계속 직진하고 반주자는 벌게져서 악보를 뒤적이다 겨우 찾아내어 합류한다. 몇 마디를 즉석 작곡하며 찾아서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관객이 모르게 수습하면 짜릿하기는 하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혼자서도 진땀을 빼는데 수많은 단원을 이끄는 지휘자는 오죽하겠는가. 뒤로 훌쩍 넘어간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어긋나는 순간, 순항하던 배는 난파되기 직전이다. 이런 위기에 지휘자는 방향 지시등을 켜야만 한다.
건조함에 취약한 팀파니가 연주 도중 찢어진 사례가 있었다. 음의 높낮이가 있는 타악기라 더욱 난감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 <1905년>을 연주할 때였다. 노동자들의 시위와 유혈 사태를 표현한 격정적인 곡이다. 팀파니 주자는 그 두려움과 공포를 한껏 고조시켜야 했다. 그런데 절정에 이르는 부분에서 네 개의 팀파니 중 하나가 쩍 갈라지고 만 것이다. 머리가 하얘졌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수습한다. 어떻게든 연주를 이어가야만 했다. 우선 찢어진 악기를 뒤로 빼내고, 나머지 악기를 계속 조율하면서 진행했다. 연주는 무사히 끝이 난다.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간 지휘자도 안도의 웃음을 내뱉었다. 팀파니스트를 기립시켜 소개하자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생쥐의 순발력이 빛을 발한 연주였다.
각종 악기가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려면 우선 음부터 맞춰야 한다. 그때 맨 앞자리 바이올린 주자가 눈에 띄게 일어나 지시한다. 그가 바로 악장이다. 지휘자가 따로 없던 시절에는 악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을 만큼 책임이 막중하다. 공연 전 튜닝(조율)을 지시하고 지휘자와 악수하며 연주회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다. 중재 역할 뿐 아니라 현악 연주자의 활 긋기 방향을 통일시킨다. 활 방향이 다르면 음색이 고르지 않고 산만해져 완성도가 떨어진다. 전면에 나서는 지휘자 다음으로 중요한 피리 부는 사나이다.
튜닝할 때는 라(A)음으로 맞춘다. 이때 A 소리를 내는 악기가 바로 오보에다. 악장이 나와 지시하니 바이올린으로 음을 맞출 거라 예상하지만, 현악기는 온도나 습도에 약하다. 음정이 잘 변하는 악기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금관악기는 부는 강도에 따라 음이 달라지고 지속해서 음을 길게 빼는 것도 쉽지 않다. 다른 악기 역시 소리가 작다든지 저음 악기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에 반해 오보에는 겹 리드 악기로 소리가 잘 전달되고 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음색도 아주 깨끗하다. 오보에라는 이름은 프랑스어 ‘오브와(hautbois)’에서 나온 말이다. ‘음이 높은 나무 피리’라는 뜻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오보에도 그 자리에 피아노가 있다면 양보해야 한다. 단연코 피아노 음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88개 건반을 어찌 현장에서 다 맞추겠는가.
연주자들이 나와 악장의 지시로 오보에가 내는 기준 음에 소리를 맞추고, 지휘자 손끝을 따라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면, 함께 호흡하고 즐기는 관객.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조합으로 공연은 매끄럽게 완성이 된다. 클래식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바위문을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클래식 공연 표를 예매해 보라. 옷을 단정히 입고 연주회장에 들어선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가 환해지면 그곳엔 피리를 불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들이 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제 그 소리를 따라가자.
* 여기서 ‘사나이’는 성별을 특징짓는 말이 아니다. ‘이끌다’, ‘인도하다’의 상징성을 나타낸 것이다.
첫댓글 유진샘 덕분에 많은것을 알게 되었네요 공연 볼 기회가 있으면 이글을 읽어보고 가야겠어요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흔적 남겨주셔서 작은 행보지만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넘 감사합니다. (음악회 알고 가면 더 보이고 더 들리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