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일하고
그는 19살 무렵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주방보조, 밤에는 대타가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23살부터 서울에 정착하고 라이브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레슨을 받고 곡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국수가게 주방보조를 할 때는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빨라 몇 달만에 주방장급 실력까지 갖출 정도였다. 그 외에도 회계, 바텐더, 홀 관리, 공사장 막노동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호떡장사를 했을 때는 사람들이 줄을 서 사먹을 정도로 호떡 맛이 좋았다고. 다단계 상품을 팔고 정수기 필터 가는 일을 하면서 저녁에는 대타가수로 네다섯 타임씩 뛰었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다음날 라이브카페에서 부를 노래 30곡 가사를 외우면서 완벽하지 못한 상태로 무대에 서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단한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로지 ‘음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죠. 음악 하나만 해도 될까 말까인데 저 혼자 다 해보겠다고 하다가 너무 돌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하루에 라이브를 여섯 타임 연속으로 하다 보면 ‘이러다 죽는 것 아냐?’ 싶을 만큼 목이 아프고 성대 결절이 심할 때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몸이 아파 못하겠더라고요. 그럴 때면 ‘아버지 말 듣고 대학가서 용돈 받으면서 노래할 걸’ 후회도 해봤죠.”
부모님 앞에서
그가 집을 떠나 홀로 음악을 하기로 한 이유는 자신의 꿈이 아버지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故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를 들으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하고자 했던 뮤지션의 정신에 반해 그와 같은 록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래뿐만 아니라 공부, 웅변, 축구 등 다방면에 뛰어났던 그가 공부에 열중해 검찰총장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아버지의 뜻대로 공부하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중학교 때 접한 개리무어, 할로윈, 감마 레이 등 고전 메탈 록 거장들의 노래는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거장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앉아 세상을 울려버릴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노래했다. 그리고 박완규, 김경호가 데뷔했을 때 ‘한국에서도 이런 톤의 목소리가 성공하는구나’ 하고 그의 꿈을 본격적으로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면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라’고 유독 그에게 엄격했고 그는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서울로 떠나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한때는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음악 활동을 하는 지금은 그런 아버지의 채근과 걱정이 있었기에 다재다능했던 그가 한눈파는 일 없이 음악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혼자 고생할 때마다 아버지 뜻대로 살아볼 걸 하고 후회도 했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앨범을 내고
32살 되던 2011년, 그는 지난 10년 동안 번 돈으로 1집 앨범을 냈다. 내친 김에 뮤직비디오까지 찍었다. 갖은 노력 끝에 혼신을 다한, 총 9곡이 실린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앨범을 내면 조금이라도 인기를 얻을까 했지만 역시나였어요. 그때부터 6개월 동안 모든 방송사 음악프로그램 담당자들을 찾아가 ‘신인가수 디케이소울입니다!’ 하고 앨범CD를 드렸어요. 방송에서 제 노래를 틀어주지 않았지만 결과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책상위에 CD를 두고 올 때마다 제 마음을 담았어요. ‘누군가는 내 노래를 듣고 좋아하거나 혹평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빨리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서울 홍대와 인천 등지로 라이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처음에 ‘누구지? 유명해?’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노래에 담긴 자신의 스토리를 진중하게 말하고 열정으로 노래하는 무대에 점차 감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토리텔링 공연은 곧 소문이 나서 다른 곳에서도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연습무대 같았던 공중파 방송
그리고 작년 가을, KBS에서 실패한 가수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이하 내마오)>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는 이미 다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들로부터 섭외요청이 온 상태였다.
“예선에서 스타가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와서 제 노래를 좋아해주셨어요. 그런데 그분들도 스타가 되기까지 저와 같은 어려운 굴레를 지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마오>가 저한테 어울리겠다고 느꼈죠. 그리고 방송출연하면서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를 편안하게 즐겼어요. 여러 후배와 선배님들을 만나면서 같이 공연하고 경연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아직 연습생 같은 제 모습도 많이 봤어요. 제가 가진 열정을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 하고 방송 룰도 잘 몰라서 미숙한 점도 많더라고요. 그때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내마오>는 제 가수 인생에 충분한 연습무대가 됐어요.”
<내마오>에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되고 파워 있는 가창력으로 승부했고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호평을 받았다. 비록 그의 도전은 12회에서 멈췄지만 방송 이후 그의 노래를 찾는 팬들이 늘어났다. 2013년에는 싱글앨범을 발표했고 홍대에서 인기리에 단독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내마오> 참가자들 중 가장 활발한 공연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본명은 김동규.
항상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새로운 곡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태권도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갈 만큼 남다른 운동 실력과 주방장 수준의 요리 실력을 가졌지만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음악이다. 현재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석사과정 공부 중이며 백제예술대학교에서 20대 시절의 자신처럼 음악에 들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 | 전진영 기자 인물 사진 | 홍수정 기자
첫댓글 음악을 들을 수 없어요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