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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2006년 4월 한국에 오셔서 수행을 지도하신 우 빤디따(U Pandita) 사야도의 법문으로, 빤디따라마 위빠사나 명상센터에서 운영하는 카페(cafe.daum.net/pandita)에 게시되어 있는 것을 옮겨왔습니다. 1개월간 매일매일 법문하신 매우 금쪽 같은 내용입니다.
원래 게시물은 빨리어나 한문을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는 이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원어를 병기하는 정도만 제가 손을 댔습니다. 예) 담마 --> 담마(dhamma), 일으킨 생각 --> 일으킨 생각(尋). 나머지는 빤디따라마 서울분원의 게시물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참고로 우 빤디따 사야도는 마하시(mahashi) 사야도의 상수제자로서 1982년 마하시 사야도 입멸 후 제2대 마하시 명상센터 선원장에 취임하셨고, 현재는 쉐 따웅 공(shwe taung gon) 명상센터의 원장으로 취임하셔서 쉐 따웅 공 사야도라 불리고 계십니다. 찬메(chanmyay) 명상센터 원장이신 우 자나카(U janaka) 사야도와 사제(師兄師弟)지간으로, 두 분은 우안거(雨安居) 3개월을 제외한 기간에 전세계를 누비며 위빠사나를 확산시키고 계십니다.
사야도의 법문을 매일 1~2편씩 게재할 예정입니다.
설촌 합장
오늘 2006년 4월 15일 토요일입니다. 오늘 한국이라고 불리는 코리아라는 곳, 봉인사라는 이 장소에서 두 번째로 큰 스님(우 빤디따 사야도)께서 부처님의 방법에 따라서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위빠싸나 집중수행을 여시겠습니다. 이번에 방문하신 것에서 큰 스님께서는 보통 때보다 더 풍부하고 강한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법을 바라는 사람들, 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앎이라는 법과 그리고 수행이라는 법으로 충족되고 구족된 사람들은 발전하고 번영하고 행복하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담마(dhamma), 법이라고 하는 것은 빠리야띠(pariyatti)라는 교학적인 법이나 빠띠빳디(patipatti)라고 하는 수행이라는 법 그것들 하나씩 뿐만이 아니고, 읊거나 읽거나하는 그러한 법만도 아닙니다. 법이라는 것은 바른 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제로 바른 법을 수행하는 것까지를 이야기합니다.
담마라는 말, 법이라는 말을 풀이하자면 수행하는 이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저급한 곳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법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받쳐주고 그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을 바라는 사람을 빨리어로는 담마까마(dhamma-kamma)라고 부릅니다. 즉 이 두 가지 법, 바르게 이해한 법과 그들 그 방법대로 바르게 수행하는 법. 이 두 가지 법을 바라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이러한 담마까마라고 하는 두 가지 법을 바라는 사람은 번영하고 행복하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종류가 되는 법을 바라는 오래된 친척과 같은 분들을 다시 한 번 도울 기회를 가지게 되셔서 큰 스님도 매우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방금 전 개회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큰 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시기 전에 적경스님과 빤디따라마 서울분원 회장님께서 잠깐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그 때 큰 스님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많은 좋은 이익이 있기를 바라시면서 메따(metta), 즉 자애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빨리어 가타라는 것은 빨리어 게송인데요. 빨리어 게송으로 메따를 보내셨는데 그 내용은 ‘버와뚜 삽빠 망갈랑 락칸뚜 삽빠 데와따 삽빠 붓다 누바웨나 사다 수키 바완뚜 떼.’ 그 의미는 모든 축복이 생겨나기를, 모든 천신들이 보호해 주기를,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언제나 행복한 이들이 되어지기를 그런 뜻이고 다음 하나는 ‘버와뚜 삽빠 망갈랑 락칸뚜 삽빠 데와따 삽빠 담마 누바웨나 사다 수키 바완뚜 떼.’ 이번에는 모든 법, 모든 담마의 위신력으로 언제나 행복한 이들이 되어지기를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와뚜 삽빠 망갈랑 락칸뚜 삽빠 데와따 삽빠 상가 누바웨나 사다 수키 바완뚜 떼’ 즉 의미는 모든 축복이 생겨나고 모든 천신들이 보호하여 모든 상가(sangha) 즉 승단의 힘으로 바르게 수행하는 성인들, 상가의 위신력으로 언제나 행복한 이들이 되어지기를 축원, 메따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방금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불, 법, 승 각각에는 그 각각의 미덕과 공덕, 위신력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덕과 위신력에 의해, 그것의 힘으로 인해서 지금 여기 모인분들처럼 앎이라는 법과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법, 그 두가지를 정말 바라는 분들을 위해서 좋은 이익들이 있고 행이 항상 있을 수 있기를 하는 의미로 이렇게 메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신력에 의해서 여기 모이신 분들이 언제나 행복하실 수 있고 법 안에서 언제나 행복을 찾을 수 있어서 마지막으로 닙빠나(nibbana), 열반이라는 행복까지 얻으실 수 있기를 하는 의미로 메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 종류의 피로 연결된, 법라는 피도 있을 것이고 윤회의 과정을 거쳐서 한 번도 친척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기에 이와 같은 혈연 관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혈연관계로 연결된 친척과 같은 분들을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것에 대해 마하시 사야도께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신 방법대로 도와드릴 수 있게 되셔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여러 종류로 연결된 친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단 여섯 개의 대륙으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즉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세계의 일부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존재한다는 의미로 같은 세계인으로써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고, 같은 피로 연결된 친척이라고 또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 스님 분들과 이곳의 청중 분들께서 의지하는 분이신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삼사라(samsara)의 친척, 윤회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사라는 매우 많고 우리는 많은 생애를 살아왔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혈연관계로 연결되지 않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고 말할 만큼 그렇게 우리는 삼사라라는 윤회에서 깊이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형제자매이건 부모 자식이건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보았다는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친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래된 친척들을 예전에 만났듯이 지금 또 다시 만나서 혈연관계와 같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고귀한 혈연, 피로 연결된 것은 담마, 법의 피로 연결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과 스님들께서는 이 세상에 출연하신 부처님을 믿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믿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대로 바르게 수행한 성인들 상가, 승단을 믿는 분들이실 것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가 가장 가깝게 믿는 것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에 의해서 생겨난 불법과 불법을 믿는 신심이 우리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방식들은 다를 수 있겠지만 믿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친척들이 서로의 이익이나 번영을 위해서 서로를 돕고 친근해야 할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척들이 서로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서 도와야하고 친근하게 지내야할 의무가 있듯이 특별히 가장 고귀한 법의 피로 연결된 여기 모이신 오래된 친척 분들에게 법의 선물을 주고자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 큰 스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법의 선물을 기쁘게 그리고 밝게 완전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다면 매우 기쁘실 것 같고 그리고 그렇게 밝게 완전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으실 것이라고 또 기대하시고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스승들께서 주시고 싶은 법의 선물은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선물은 아무리 그것이 훌륭하다고 해도 최대 한 생애만 그것의 이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스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법의 선물은 그것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진실하게 열심히 노력해서 수행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는 삼사라, 윤회의 길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고 가지고 갈 수 있는 선물이며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선물을 받으실 수 있고 이러한 선물을 받아가실 수 있게 된다면 큰 스님께서도 여기 오신 보람이 있으시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선업의 결과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불교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불교와는 만나지만 부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 진정한 법을 만나고 얻을 기회는 매우 귀하고 드문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께서는 예전 선업들이 매우 특별하고 훌륭해서 불교와 만나고 진정한 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어떠한 훌륭한 선업 공덕으로 인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이렇게 불법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불법에 대해서 아는 것, 그러한 앎이라고 하는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을 수 있도록 불법 만났을 때 그 법을 알고 그것에 따라서 바르게 수행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과 만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계,정,혜라고 하는 삼학이 완성될 수 있을 때까지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카(sikkha)’. 우리는 ‘학(學)’이라는 말을 씁니다. 빨리어로 ‘식카’ 라고 합니다. 이것의 뜻은 바른 법을 배우고 배운대로 그것을 실제 수행하여 완성될 때까지 노력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식카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실라(sila) 식카 ‘계’
두 번째 사마디(samadhi) 식카 ‘정’
세 번째 빤냐(panna) 식카 ‘혜’
이 식카 세 가지 중에서 실라 식카, 계학은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기에 좋지 않고 말하기에 좋지 않은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행하기에 좋지 않고 말하기에 좋지 않은 것을 금한다면 이 실라 식카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실라 식카를 배우고 공부하고 수행하며 또 다시 배우며 수행해야합니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최소 5계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계라는 것은 죽이는 것, 훔치는 것, 간음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금하는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지키게 되면 아주 극단적으로 험한 번뇌들이 제거되어져서 몸과 입이 극단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청정해 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과 입이 극단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난다면 다듬어졌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자의 경우에는 이 오계정도면 계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이 오계 정도면 계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고귀한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에는 8계를 지키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팔계라는 것도 오계 중에서 세 번째 계율(간음하는 하는 것을 피하고 금하는 것)이 일체 삿된 행위를 금하는 것으로 대체되는 것과 이외에 세 가지 계율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오계 중 세번째 계율은 ‘까메수밋짜차라(不邪淫)’ 자기 이외의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계에서는 ‘아브랏마짜리야’ 즉 자기의 소유의 것도 금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그 다음에 늘어난 세 가지 계율은 정해진 시각이 아닐 때에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 것, 노래하고 치장하고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 높고 화려한 침구나 좌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들이 더해져 팔계가 됩니다.
오계를 지켰을 때에도 몸과 입이 다듬어지고 청정했다면 이렇게 팔계를 지킬 때에는 몸과 입이 다듬어지고 청정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가자이건 제가자이건 계율이 완성되어져 있다면 위숫디(visuddhi) 즉 청정함 일곱 개 중에서 첫 번째인 실라 위숫디 계율(戒淸淨)의 청정함이 완성되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실라 위숫디 계율의 청정함은 제일 먼저 있어야 하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실라 위숫디 계율의 청정함이 충족되어야만 이것을 바탕으로 사마디 선정과 빤냐 지혜를 수행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라 위숫디-계율의 청정함으로 완성된 것도 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하기에 좋지않은 것과 말하기에 좋지않은 것을 금함으로 이렇게 계율을 지키고 있을 때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친 번뇌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겨나는 좋지 않은 행위를 행하고 싶거나 말하고 싶거나 생각하는 등과 같은 빠리윳타나 낄레사(pariyutthana kilesa)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종류의 거친 번뇌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거친 번뇌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 사마디 식카, 정학 즉 선정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메따 즉 자애를 보냄으로써 마음을 모아서 다스릴 수 있는 것과 삼보의 공덕 중 하나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모인 분들처럼 위빠싸나 수행을 통해서 생겨나는 모든 대상들을 알아차림하고 인식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 모인 분들이 수행하시고자 하는 위빠싸나 수행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띠(sati)’라고하는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두는 만큼 마음이 청정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두는 순간에 마음이 번뇌로부터 방어가 되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첫 단계인 실라 위숫디 계의 청정함에서 한 단계 올라간 두 번째 �따 위숫디(citta visuddhi), 마음의 청정함을 주시함. 즉 사띠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 위숫디, 마음의 청정함을 생기게 하는 일을 알고, 마음의 청정함이 생기는 일을 안다면 이것이 좋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함이 생기는 것이 좋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청정해지기를 바라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청정함이 생기는 것이 좋다고 믿고 그것을 바랄 때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은 생겨나는 모든 대상을 빠짐없이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대상에 조절을 통해서 조준을 하고 거기에 위리야라고 하는 힘을 실어서 대상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매 순간 주시하게 되어 대상에 마음이 확고하게 머물러 확고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되면 이 확고한 주시를 사띠라고 부릅니다. 확고한 주시가 계속해서 한 순간 한 순간 연결됨으로써 한 대상에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을 사마디 즉 집중, 선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조금 전 이야기한 사마디 식카, 정학이라고 하는 것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마디 식카 안에 들어가는 위리야-노력, 사띠-알아차림, 사마디-집중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디 식카(선정)를 통해서 세간의 선정이나 세간의 신통을 얻는다고 해도 이것은 마음의 고요함을 얻는 정도 뿐일 것입니다. 실라 식카(계학)의 수행을 통해서 출가자는 출가자의 계만큼의 이익을 얻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계 만큼의 이익을 얻고 사마디 식카(정학)의 수행을 통해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사람이다, 짐승이다, 나이다' 라는 중생이 있다는 집착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빤냐 식카(혜慧)라는 학의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빤냐라는 것은 구분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 안의 육문(六門)에서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매 순간 따라서 바르게 알아차림 하지 않으면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 그, 나, 영혼, 중생 등이라고 잘못해서 알고 잘못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의 바른 특성, 본질적 특성들을 아직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견해가 아직 청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따라가 바르게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딧티 위숫디(ditthi visuddhi), 즉 견해의 청정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서 바르게 물질과 정신적 특성을 알게 되는 것을 앎, 빤냐 식카 즉 혜학이라고 부릅니다.
물질과 정신의 특성을 주시해서 알게 되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잘못된 견해가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연결일 뿐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면 원인이 없다는 등으로 의심하거나 잘못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창조주나 범천들이 자신을 창조했다는 등으로 잘못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주시해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지면 이러한 의심이 사라지게 되고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결과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인 물질 현상을 계속해서 주시하게 되면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 무상한 것[無常]과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고통스러운 것[苦], 그리고 각각 특성대로 되어지며 내가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것 내가 아니라는 것[無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을 위빠싸나 냐나(vipassana nana), 위빠�나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 위빠싸나의 지혜라는 뜻은 생기고 사라지고 항상하지 않는 것. 그리고 고통스러운것, 그것들 특성대로 되어지는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상황을 특별하고 분명하게 구별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지혜가 기초부터 시작해서 단계별로 생겨나게 되면 매우 미세한 번뇌인 아눗싸야(anusaya) 낄레사라고 하는 것도 순간순간 잘려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빠싸나 냐나, 위빠싸나의 지혜가 단계별로 성숙하게 돼서 마지막으로 막가(magga) 냐나-도의 지혜와 팔라(phala) 냐나-과의 지혜를 얻게 되면 이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로 잠재된 번뇌까지 완전히 자를 수 있게 됩니다. 뿌리 뽑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에 사악도(四惡道)의 끌어당기는 힘, 사악도의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이렇게 잠재된 번뇌까지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게 되어 사악도의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되고 인간으로써 불법과 만나게 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식카 세 가지. 삼학을 알고 수행하고 노력함으로써 몸과 입과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질 수 있습니다. 최소한 첫 번째 도를 얻게 되면 거친 번뇌는 완전히 제거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거친 번뇌가 완전히 제거되어 질 수 있게 해주는 이 삼학을 빨리어로는 싸사나(sasana) 즉 불법이라고 부릅니다. 싸사나라는 것은 가르침이라는 뜻인데 누구의 가르침이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붓다 싸사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붓다 싸사나 불법이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자기에게 머무르게 되고 이것이 곧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불법을 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사띠빳타나(satipatthana, 四念處) 수행, 위빠싸나 수행은 자기 자신에게 불법이 머무르게 하고, 불법이 펼쳐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삼학이라고 부르는 불법을 수행하는 방법은 이미 오늘 위빠싸나 수행이라는 테이프를 통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스스로 불법을 행할 때, 즉 수행을 할 때에 있어서 장소를 정하는 것이라든가 마음을 어떻게 대상에 두어야할 것인가 등을 더 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저 앞에서 들으신 대로 노력하시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 혈연으로 연결된 이런 오랜 친척 분들에게 이 만큼의 법의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이익과 행복함과 축복들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이라고 축원해 주셨습니다.
< 출처 : 빤디따라마 서울분원(cafe.daum.net/pandita) >
설촌 주 :
우 빤디따 사야도께서 1984년 미국 IMS(Insight Meditation Society) 주최로 3개월간 수행을 지도한 법문을 모은 것이 'In this very life'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고, 국내에는 '바로 이번 생에(불광출판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 책 1페이지는 "명상을 하는 것은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세계와 평화를 나누려 함이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계(戒, sila)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계가 없이는 수행 역시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http://blog.daum.net/fourdeva/6479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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