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릉(高麗王陵)을 찾아서 — ‘강화도읍기(1232~1270) 시절’을 다시 생각함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도 秋草(추초)ㅣ로다 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쳐시니 夕陽(석양)에 지나는 客(객)이 눈물계워 하노라 <청구영언>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사(隱士) 원천석(元天錫, 1330∼ ? )이 개성을 지나며 읊은 시조입니다. 오백년을 번성한 고려왕조였는데 만월대엔 잡초만 우거지고 목동의 피리소리에나 왕조의 옛 자취가 남았다는군요. 원천석은 객(客)이라 표현함으로써 스스로의 감정을 객관화한 듯 보이지만, 객관화시키는 자신은 애써 뒤에 숨음으로써 결국 주관적으로도 슬프다는 말입니다.
약간 복잡한 이야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14세기에 쓰여진 텍스트(text)를 읽어 우리가 고려시대와 또 원천석의 슬픈 심정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먼저 해석학적인 단절을 극복해야 합니다. 과거에 쓰인 텍스트를 이해하자면 그 시대의 지평(地平, 어떤 당대의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배우는 지적전통, 세계관, 가치관 등의 선입관의 체계)을 먼저 알아야만 하는데, 우리의 지식과 선입관으로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해석학적 지평을 알 수가 없고, 그래서 해석학의 근본원리는 ‘당대는 당대의 지평을 벗어날 수가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과학과 합리주의의 교육을 받은 21세기 우리의 지평으로 아무런 갈등 없이 14세기 고려시대의 인식과 지평 속으로 쉽사리 건너가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비유하자면 ‘천동설(天動說)의 지평’으로 세계를 이해하던 시대를 지동설(地動說)을 알고 있는 현대의 지평으로 해석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상상해보면 이 두 지평 간 실체감의 괴리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세계-속의-나)는 단지 오늘 ‘나의 지평 수준’에서 제각기, 제 나름대로, 자기의 지평만큼,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고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원천석의 시조를 읽으며 고려시대를 상상하는 순간, 14세기 과거와 21세기 현재의 ― 또한 원천석과 저의 ― ‘지평의 융합’ 과정이 발생하였습니다. 7백년의 간극과 시차를 넘어 제가 위 시조 속에 드러난 역사를 읽고 이해하려는 것은, 이렇게 14세기와 21세기의 시간과 지평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는 ‘해석의 전승과정 상자’ 속에 이미 제가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저는 이 상자 속에서도 7백년 전의 고려시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운대로 14세기의 원천석과 21세기의 제가 ‘같은 종(種) 같은 민족’의 ‘공통감’이 있다는 것을 요청하여(Kant, 칸트는 이렇게 ‘인류’라는 ‘공통감’을 ‘이념 ideology’으로 요청합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인식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 이런 과정을 거쳐온 이제서야, 겨우, 저도 牧笛(목적)에 부쳐시는 고려시대가 슬픕니다. 그리고 더욱 용기를 내어 위 시조는 객관적으로도 눈물겨운 노래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휴~ 복잡하게 살지요? 앎과 삶이란 원래부터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時間)와 세계(空間)를 이해하고 공부한다는 것이, 이와 같이 결코 만만한 과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저는 감히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강화나들길’과 연관된 향토사에 대한 몇 편의 글을 우리 카페에 올린 바 있습니다. 졸필(拙筆)을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조선시대의 이야기들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강화도와 관련된 고려시대의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강화도와 관련된’ 이라는 말에 주목해 주십시오. 저의 독서와 사유는 일반적이고 보편타당한 역사인식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생각함에는 시간과 기록들을 처리하는 방법에 관한 역사학 고유의 객관적이고도 전문적인 학적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저 소박한 ‘향토사가(鄕土史家)’의 관점에서 제가 다시 생각해 보는 강화 향토사의 어떤 부분들을 찾아 단지 제 지평의 수준으로 정리해 놓으려는 것입니다. 다분히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향토사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이나마,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가 조금 더 풍요로워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고려태조 왕건이라는 인물과, 강화도읍기 시절, 그리고 강화에 남아있는 고려왕릉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왕건이라는 인물
역사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을 읽는 사람으로, 저는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현재의 분단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한 ‘역사의제’가 되어야한다고 믿으며, 이 의제를 충족시키는 인물로 단연 왕건과 그가 세운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흥망이 유수하여 좁은 한반도에 적지 않은 왕조들이 역사 속에 명멸하였으나, 왕건(王建, 877~943, 사진)이 세운 高麗王朝(918~1392, 475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들이 ‘한핏줄 한겨레’라는 단일민족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고려태조 왕건이 외세(外勢)에 의존함이 없이 반도 내의 여러 지방호족들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전략으로 통일제국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들의 여러 지방에서 왕건과 결혼한 부인이 29명(자녀 25남 9녀)이나 되는 것도 나름대로 왕건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단일민족 의식이 자리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왕조 초창기의 이러한 제국통합 노력들에 이어, 이제 각 지방에서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된 여러 호족세력들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었겠지요. 대표적인 사건이 이자겸의 난(1126)입니다. ‘고려 7대어향’(七代御鄕,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1047~1126의 기간에 7대 80여년 동안 경원이씨가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음)으로 불린 仁川은 경원(仁州, 지금의 인천)이씨 가문이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곧 뒤이어는 묘청의 서경(평양)세력과 김부식의 동경(경주)세력이 서로 싸워(묘청의 난, 1135년) 동경세력이 승리하자, 김부식의 경주김씨들은 고려의 역사를 신라중심의 사관으로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는 고려의 모든 문벌세력들을 제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경주세력의 승리기념 저작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이후의 고려역사는 무인집권시대 백년(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최우-최항-최의-김준-임연-임유무, 1170~1270)과 ‘元’간섭기(1270~1351)의 ‘권문세족시대’라는 험난한 고개를 넘고, 공민왕(재위 1351~1374)의 자주 반원정책 노력, 우왕-창왕-공양왕 시기의 쇄락기(1375~1392)를 거쳐, 이윽고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건국(1392년)함으로 5백년 고려 왕업이 스러져간 것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우선 왕건의 왕업을 이루게 한 최초의 세력이 강화만을 중심한 해상세력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내남이 다 아는데로, 장보고(張保皐, ? ~ 846)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우리 역사의 위대한 해양제국의 시대가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해양활동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시기인 신라말에, 왕건 가문은 강화만을 중심한 서해에서 유력한 해양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왕건이 성장하기까지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장보고 해상 활동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건 가문(작제건-용건-왕건)은 해양과 관련하여 많은 재화를 얻을 수 있는 활동, 즉 해상 교역에 종사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통해 쌓아올린 재화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강하류, 예성강·임진강 유역, 강화, 교동 등을 포함하는 서해의 유력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겠지요. 이것은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수군을 이끌고 펼쳤던 활동(나주정벌, 909년)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강화만에서 축적한 해상세력의 신뢰와 힘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고(918년), 궁예와 견훤과의 오랜 싸움에서 승리한 후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936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을 처음부터 도왔던 박술희(朴述熙, ? ~ 945)가 3대 정종 즉위 시에 반대세력인 광주(廣州)지방 호족출신인 왕규(王規)에 의해 강화도 갑곶(甲串)에서 살해당했다는 것도 강화도와 관련된 향토사입니다. 박술희는 943년(태조 26)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태조의 정치이념인 ‘훈요10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던 고려초기의 중요 인물입니다.
강화도읍기(1232~1270) 시절
고려창업 후 11~12세기에 고려는 거란족 요(遼, 916~1125), 여진족 금(金, 1115~1234) 들의 이민족과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강감찬, 서희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13세기 초에는 몽골족 군대가 고려를 쳐들어왔습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라 도저히 대적하기가 어려워 개경정부는 재추회의(宰樞會議, 고려시대 中書門下省의 宰臣과 中樞院의 樞臣이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 끝에 가까운 강화섬으로 일단 피신하여 훗날을 도모하기로 결정하고 개성의 승천부에서 강화로 피난해 왔습니다. 당시의 국왕은 고종이었고 실권자는 최우(최충헌의 아들)였습니다.『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당시의 정황이 정확히 기록되었습니다. 강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節要의 원문을 그대로 한 번 옮겨 보겠습니다.
“乙酉,王發開京,次于昇天府,丙戌,入御江華客館,時霖雨彌旬,泥濘沒脛,人馬僵,達官及良家婦女,至有跣足負戴者,鰥寡孤獨,失所號哭者,不可勝計”
"을유에 왕이 개경(開京)을 출발하여 승천부(昇天府)에서 머무르고 병술에 강화도의 객관에 입어(入御)하였다. 이때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려,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서 안마가 쓰러지곤 하였다. 지체 높은 집안이나 양가의 부녀들로서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서 갈 바를 잃고 호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 환(鰥)·과(寡)·고(孤)·독(獨) : 아내 없는 홀아비, 남편 없는 과부, 부모 없는 아이, 늙고 자식 없는 사람)
여기에서 일진(日辰, 음력날의 간지干支. 해의 간지처럼 曆日에 대하여 60일의 주기로 반복됨)을 보아 날짜를 환산하면, 을유(乙酉)일을 7월 6일이고 병술(丙戌)일은 7월 7일입니다. 따라서 음력 7월 6일 개성을 떠나 다음날인 7일에 강화객관으로 건너왔습니다. 저는 1232년의 음력 7월 7일이 오늘날의 양력으로는 어떤 날짜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 찾아보는 김에 더욱 확실히 하고자 ‘한국천문연구원’이라는 기관에 문의하여(042-865-3332), 이 날들이 양력으로는 몇월 몇일인지를 문의해 보았습니다. 1232년 임진년의 7월 7일은 양력으로는 7월 26일이라는군요. 그 곳 연구원과 을유·병술의 일진까지 재차 확인하였으니 7월 26일이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위 <고려사절요>의 기사에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렸다니 양력 7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는 마침 장마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실 귀족들과 대소신료, 백성들이 비 내리는 승천포 뻘밭을 건너오느라 죽도록 고생들을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꼭 열세 갑자전인 780년 전의 일입니다.
1232년 임진년(壬辰年) 7월 하순 — 지금의 송해면 ‘고려고종사적비’(사진)가 서있는 지점에서 보이던 강화도의 한 슬픈 풍경이지요. 여기서 ‘슬프다’ 는 형용사는 저의 개인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그제나 이제나 풍경은 말이 없이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올해 7월 제헌절 무렵에, 혹시 <고려사절요>에서처럼 장마가 오지 않을지 공연히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새 도읍으로 천도를 했으니 궁궐과 관아를 짓고, 또 내성 중성 외성을 쌓으며 이후 39년간(1270년까지) 강화도는 고려의 임시 수도였습니다. 이 시기를 역사용어로는 ‘강화도읍기 시절’ ‘강화경시대’ ‘강도시절’ 등으로 부릅니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일제 36년이 길었다고 하지만, 강도(江都)시절은 그보다 더 긴 39년에다 삼별초의 항쟁 4년을 더하면 햇수로 44년이나 되는 길고 긴 세월인데, 당시 세계최강의 몽골제국에 대항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세계역사에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헝가리와 폴란드의 동유럽까지 유라시아의 드넓은 대륙을 남김없이 제패한 몽골제국에게 — ‘강화경시대’는 강화도에 조정을 두고 ‘고려(高麗)’라는 국명을 지켜 끝까지 보존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자랑스런 코리아, 우리의 高麗 (고려, Korea)입니다.
‘강화도읍기 시절’(1232~1270) 동안의 많은 정치 외교 군사적인 의미들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1) 금속활자 조판 2) 팔만대장경 조성 3) 고려 상감청자의 완성 이라는 대표적인 세 가지의 문화적 업적만 간략히 언급토록 하겠습니다.
금속활자 조판
고려 인종 때 펴낸바 있던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강화도 정부에 와서 “주자본(鑄字本)으로 28부를 인쇄하여 여러 관청에 나누었다”는 기록이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문명사 최초의 금속활자(金屬活字) 조판기록입니다. 조판 후 1234~1241년 사이에 실제로 사용되었으리라고 보는데 다만 실물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금속활자라 말하면 조금 멀리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늘날로 하면 진짜 ‘책’이 아니겠습니까?
세계에서,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처음의 ‘책’이 강화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780여년 전 우리 강화도 어디에선가 찍었을테고 또 누군가 분명히 갖고 있었을 터인데 잃어버린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야말로 정말 안타까운 유물입니다. 계산해보니 ‘예문禮文’은 서양보다(구텐베르그, 1436) 200년을 앞섰습니다. 이것이 만약 발견된다면 바로 그 날로 세계의 Top 뉴스가 되겠지만, 우왕 3년(1377년)에 인쇄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약칭 ‘직지直指’, 사진) 만으로 만족할 밖에요. ‘직지直指’만으로도 고려의 뛰어난 문화적 역량을 증명하고도 남겠지요.
팔만대장경 조성
고려초기에 침입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1011)을 판각하고, 이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장경들이 몽골의 2차 침입(1232)으로 모두 불에 타 소실되자 강화도 정부에서는 ‘대장도감’이라는 특별관청을 두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약 16년 간에 걸쳐 다시 제작한 것이 ‘재조대장경’(속칭 ‘팔만대장경’, 사진)입니다.
이 대장경은 지금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 있고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작년 ‘강화역사박물관’ 에서 “대장경, 고려의 혼을 새기다”는 제목으로 기획전시를 하였으니 둘러보신 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레니엄(Millennium)! — 江山이 백 번이나 바뀐, 천년이나 된, 우리의 고려대장경과 관련해서는 실로 엄청난 콘텐츠(contents)들이 있으니, 이들 모두에 대해 카페의 짧은 지면에서 언급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의견을 조금만 붙여 보겠습니다. 2천5백년 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1세기 경 (후한 명제 때) 중국으로 건너오고, 이후 도가·유가와의 습합(習合)과정과 1천년의 오랜 문화적 성숙(수·당·송 시대의 화엄불교와 선학, 현장법사와 구마라즙 등의 불경번역)을 거친 모든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결과물들이 이 땅 강화도에서 축적·정리·집약되었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일대 대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사도 바울이 ‘서쪽’ 방향 로마(Rome)로 가서 전도기행을 한 후 유럽 천년의 중세 서양문화를 낳았고, 불교는 6세기 달마대사가 ‘동쪽’ 방향 중국으로 가서 새로운 불교문화의 싹을 틔우고 이후 유교와 함께 동양문화를 대표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깊고 유장한 동·서문화의 흐름에서 중국 송대까지의 모든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정화(精華)가 강화의 팔만대장경 판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거시적인 문화사의 관점에서 세계의 문화가 서로 모이고, 소통하고, 분기되는 어떤 한 결절점에 우리 강화도와 ‘강화도읍기 시절’이 위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제각기 발전되어온 동·서양의 메이저(Major) 문화는 거대한 몽골제국에 힘에 의해 다시 종합되고 재배치되는 양상(‘Pax Mongolicana’)으로 — 이후의 세계사가 진전되어 왔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의 ‘강화경시대’를 ― 우리가 비록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 몽골의 ‘유라시아(Eurasia) 체제’라는 거대한 세계사의 맥락에 편입되어, 최초로 우리 민족적 상상력의 최극점을 미리 성취하고 또 예견한 시대였다고도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 강화도 정부 16년의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은 “13세기 세계문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黃金페이지”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상감청자
숙종 삼년 시월 상달 휘영청히 밝은 날. 고려땅에 죄수는 하나도 없어 감옥 속은 모조리 텡텡 비이고, 그 빈자리 黃菊(황국)처럼 피는 햇살들. 그 햇살에 배어나는 단군의 웃음. 그 웃음에 다시 열린 하늘의 神市(신시)! 그 신시에 물들어 구운 청자들! 雲鶴文(운학문)의 고려청자들 ― 서정주 시, <高麗好日>
고려 공예문화의 절정은 아마도 청자(靑瓷), 그 중에서도 바탕흙으로 그릇을 빚은 다음 마르기 전의 겉면에 그림이나 무늬를 새겨넣고 여기에 백토(白土)나 자토(赭土)를 메워 초벌구이를 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발라 구워내는 상감청자(象嵌靑瓷)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청자문화가 발달한 것은 처음부터 불교의 차(茶)문화의 발달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달마스님이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행할 때 졸음을 쫒기 위해 눈썹을 하나씩 뽑아 버렸는데, 그 떨어진 자리마다에 차나무가 생겨났고, 달마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스님네들은 이 차를 끓여 마시며 선(禪)수행을 하신거지죠. 그러자니 자연히 다완(茶碗, 찻사발) 등 각종 다기구들이 발달했을 밖에요. 중국 광동성이나 복건성의 차들이 유명하고, 이런 차들의 수입과 함께 다기(茶器)들도 들어오다가, 이제 고려만의 독특한 청자기들이 탄생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려중엽 이후는 순청자에서 상감청자로 더욱 화려하게 발달하였는데 순청자는 문신귀족문화의 상징이고, 상감청자는 무신귀족문화의 상징이라 합니다.(유홍준)
이런 상감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은 일제시대 강화도의 최항(崔沆, ? ~ 1257, 최우의 아들)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도굴되어, 곧바로 三星家로 흘러들어온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국보 제133호, 사진) 입니다. 1963년에 강화도 어디(?)에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명품 ‘진사표형주자’의 감상평은 인터넷의 여러 곳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봄 나들길의 벗님들과 용산의 ‘리움(LeeUm) 박물관’에 가서 직접 친견한 바 있는데,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복잡미묘했던 감정을 뭐라 잘 표현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이 가서 직접 보셔야지요. 곁에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시면, 이 상감청자가 “너는 내가 살던 강화도에서 왔니? 참 반갑구나! 단군할아버지께서도 잘 계시지?”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神市(신시)에서 보내는 ‘사랑의 인사’라 할까요? 아니면 천년의 달빛과 햇살에 배어나는 단군의 미소라고 할까요?
이상 ‘강화도읍기’ 시절에 이루어졌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상감청자의 대표적인 3가지 문화유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또한 고려시대 전체를 대표할만한 문화현상이었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이 시절을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의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애플(Apple)이나 페이스북(Face-book) 등 ‘실리콘벨리(Silicon Valley)의 신화’에다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와 애플사의 i-Phone 이 놀랍고 대단하기야 하지만, 저는 이런 물질적 상업문명의 가치보다야 우리 강화도의 위 3개의 문화가 위에서 살펴본 바 문화사적 맥락으로나, 또 정신적인 측면의 상징성으로 보나, 더욱 품위 있고 격조 높은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의견을 보세요. 이것은 단지 저의 개인적인 이미지충격의 경험이지만, — 창조성과 상상력으로 무(無)에서 유(有)로 급격한 상승의 감정을 주는 문화현상들이 있습니다. 윈도우(Window)체계나 스마트-폰 같은 것이지요. 다른 한편, 인고(忍苦)와 고통 속의 사(死)에서 생(生)으로의 부활적 전회(轉回)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문화현상들을 조우하기도 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고려청자 빛깔 같은 것들입니다. 전자는 공격적이고 직선적, 즉물적이지만, 후자는 내포적이고 곡선적이며 우원(迂遠)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직지나 팔만대장경이나 고려청자 빛깔들을 생겨나게 한 그 역사와 시간들을 상상하자면, 이런 것들이 — 오랜 세월을 구도(求道)하다 열반하신 어느 노스님의 몸에서, 평생의 수도(修道) 결과물로 생겨난 한 알 빛나고 영롱한 사리(舍利)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江華京, 黃金페이지...에 서린 영롱한 사리... 얼굴이 뜨거워지려고 합니다. 저의 수사(修辭)가 일정한 도를 넘기 전에, 서둘러 고려왕릉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왕릉(高麗王陵)을 찾아서
<고려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접한 적이 있습니다.(2012. 3. 30) 현재 고려왕릉은 강화지역의 가릉, 석릉, 곤릉, 홍릉 등 4기와 고양시의 고릉(공양왕) 등 남한에 5기가 있으며, 북한지역에 24기의 왕릉을 포함하여 총 29기의 고려왕릉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42기의 능(북한 2기 포함)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2009. 6. 30 등재) 자랑스런 일이지요. 관계 전문가들과 담당 행정가들이 힘을 모으면 이제는 우리의 <고려왕릉>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오리라 믿습니다. 그런 날이 와서 우리 강화나들길 3코스(‘능묘가는 길’ : 이규보묘~석릉~곤릉~가릉 16.2km)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코리아의 ‘King & Queen 코스’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강화에 있는 4기의 고려왕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고려왕릉의 전체적인 구조나, 그 구조들로 파악할 수 있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는 등의 일은 하지 않고, 오직 이 왕릉의 주인들의 관계만 찾아보려고 합니다. 능에 가보면 설명문들이 붙어있기야 하지만, 조금만 기록들을 더 찾아보면 한결 가깝고 친밀하게 강화의 고려왕릉을 느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화남 고재형선생도『심도기행』에서 이 4기의 능마다에 느낀 당신의 소회를 읊기도 했습니다.
능을 모신 순서대로, 1) 가릉(嘉陵) 2) 석릉(碩陵) 3) 곤릉(坤陵) 4)홍릉(洪陵)의 차례입니다.
가릉(嘉陵)
양도면 길정리, 고려 24대 원종(元宗, 1219~1271, 53세 卒, 재위 16년/1259∼1274)의 왕비 정순왕후 김씨(金氏, ? ~ 1236)의 능. 후에 아들 충렬왕이 왕에 오르자 순경태후로 추존하였다.
이분의 며느리는 몽골의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 칭키즈칸의 손자인 원세조 쿠빌라이 칸(Kublai Khan,1215~1294, 사진)의 딸, 방계가 아닌 직계이다.그러므로 순경태후는 쿠빌라이 칸의 안사돈이 된다)와 정신부주 왕씨(정화궁주, 전등사에 玉燈을 시주한 그 분)가 있다. 경주김씨 김약선(金若先)의 딸로 고종의 며느리이다. 김약선은 최우의 사위였다.
一便鎭江碧幾層 진강산 한쪽 편에 겹겹의 푸른 기운 감돌고 白雲多處是嘉陵 흰구름 많은 곳에 가릉이 있다네 年年杜宇東風淚 해마다 두견새는 동풍에 눈물 짓고 每向開花百感增 개경을 향할 때마다 만감이 더한다네
석릉(碩陵)
양도면 길정리, 고려 21대 희종(熙宗, 1181~1237, 57세 卒, 재위 8년/1204~1211)의 능. 희종의 딸이 고종과 결혼함으로(안혜왕후) 희종은 고종의 장인이 된다. 희종은 31세에 개성에서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자연도(지금의 인천 용유도)로 이배되었다. 다시 강화도로, 또 교동으로 내몰렸다가 용유도에 있는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사망하였다.
碩陵知在鎭江巒 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獨閉空林月影寒 빈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倚我聖朝封築謹 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年年奉審地方官 해마다 지방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곤릉(坤陵)
양도면 길정리, 고려 22대 강종(康宗, 1152~1213, 62세 졸, 재위 3년/1211~1213)의 비(妃) 원덕왕후 유씨(劉氏, ? ~ 1239)의 능. 유씨는 고종의 어머니로,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태후에 봉해졌다.
德庄南麓白雲深 덕장산 남쪽 기슭 흰 구름이 덮였는데 指是坤陵屹到今 이 곤릉이 지금껏 우뚝하게 서있네 短草萋萋松未老 풀들은 우거지고 소나무도 안 늙어서 猶含舊國可憐心 고려왕조 가련한 마음을 아직도 머금고 있도다
홍릉(洪陵)
강화읍 국화리, 고려 23대 고종(高宗, 1192~1259, 68세 졸, 재위 46년/1213~1259)의 능(사진). 1259년 6월에 고종이 사망한 뒤 3개월 뒤인 9월에 축조되었다. 원래는 원래 강화읍 대산리 연화봉에 능소를 지었다가 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麗朝如夢鳥空啼 고려시대 꿈 같은데 새만 부질없이 울어대고 春雨洪陵草色齊 봄비 젖은 홍릉은 풀빛이 가지런하네 北望雲中松岳樹 북쪽의 구름 속에 송악산 숲이 있고 猶自靑靑漢水西 절로 푸른 한강물은 서쪽으로 흘러가네
저는 4기의 고려왕릉 주인들의 생몰년과 재위기간, 인척관계 등을 찾았습니다. 정순왕후와 원덕왕후 두 분 왕비는 태어난 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강화의 왕릉을 고종 중심의 가계로 보자면, 며느리(가릉, 1236) → 장인(석릉, 1237) → 어머니(곤릉, 1239) 의 차례로 상(喪)을 치루었군요. 이것은 고종 나이 45세부터 48세까지의 기간들입니다. 고종의 부인인 안혜왕후 유씨도 고종이 41세 때 마침 강화도로 천도하던 해에 사망하였습니다.(1232. 6. 1, “경술에 왕비 왕씨가 훙(薨)하였으므로, 백관이 검은 관을 쓰고 사흘 동안 소복을 입었다.” “六月, 庚戌朔, 王妃王氏薨, 百官玄冠, 素服 三日” <고려사절요>/ 이를 보면 고려조정은 왕비‘國喪’ 중에 천도하였군요. 이분 능은 개성에 있겠지요? 안혜왕후는 근친혼의 원래 王씨인데 母.姓을 따라 劉씨로 바꿔 기록도 하는 모양입니다. 헷갈립니다.)
그리고 고종은 아버지 강종과 어머니 원덕태후 사이의 독자였으므로, 고종 노년에는 가까운 ‘피붙이’들을 특히 그리워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고종은 아들이 둘(세자 元宗, 안경궁 창 : 두 왕자가 물 마시고 놀았다는 <王子井>이 고려궁지 옆에 있습니다. 지금은 '묵밥집'이 더 유명합니다) 있었습니다. 돌아가시던 1259년에 몽골과의 화의조약으로 세자가 몽골에 입조하자(1259. 4월), 개경이 보이는 견자산(見子山, 원래는 亭子山이라 함)에 올라 매일 아들을 그리워하다 죽었다고(1259. 6월) 합니다.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볼 見 . 아들 子. 저승에서나마 고종은 그리운 아들을 만나셨기를 바랍니다.
이러고보니, 고려 고종과 조선의 고종이 비슷한 운명을 겪은 걸 알 수 있습니다. 두 분 재위시 모두 몽골과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였고, 아들(원종, 순종황제)은 볼모가 되었습니다.
고려 고종은 22세에 왕에 올라 68세까지, 역대 고려왕 중 가장 오랜 45년 10개월을 재위한 왕이었습니다.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고려왕들의 평균 재위기간은 약 14년입니다.)
다시, 조금, 덧붙이는 말
고려시대와, 우리의 39년 강화도읍기 시절을 돌아보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맞닥뜨린 이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간(人間)이 만들어놓은 자취와 흔적들(歷史)에 대해 궁금한 일이 많습니다. “나는 역사를 어느만큼까지 볼 수 있는가?” “역사를 보는 일은 주관인가 객관인가?” “역사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하는가?” “역사공부가 현실에 대해 어떠한 현재적 가치를 줄 수 있는가?” 등이 이 글을 쓰기 전 저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건 뭐, 청춘(靑春)도 아니고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지났는데, 이런 의문을 가지는 자체가 남세스럽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는 어느 것 하나 명쾌한 답을 못 구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러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걸음은 겨우 나아갔다.”고 자위해보려 합니다.
그것은 저 한강하구(漢江河口) — 우리가 ‘할아버지의 강’이라 부르는, 조강(祖江)에 대한 인문적 상상력입니다. 저 조강(祖江)으로 밀려드는 물결을 따라 5세기의 백제인, 6세기의 고구려인, 7세기 신라인의 거친 숨결들이 제각기 여기에 머물다 갔습니다. 그리고 밀고 썰며 뒤채이던 조강의 강물이 한껏 부풀어 올랐을 때, 10세기의 왕건은 조강 기슭 개성에 민족을 통합하는 ‘高麗,고려(Korea)'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13세기 고려는 조강을 사이에 두고 몽골인들과 대치하며, 강화도의 고려정부에서 참성단의 단군 할아버지께 천제를 올리며 놀라운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습니다. 이 시절의 조강(祖江)이란 곧, ‘단군 할아버지의 강’이라 부를만도 합니다. 남한강, 북한강, 예성강, 임진강, 한탄강, 내륙의 여러 물들이 조강에서 모두 만나 통합되고 더욱 넓어지듯이, 조선시대에서의 한강하구는 황해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모든 세곡이 집합되어 능청능청~ 뱃노래 부르며 한양의 마포나루로 올라가는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물길의 상징이었습니다.
분단 이후의 조강은 이 모든 파란만장(波瀾萬丈)의 기억들을 그의 가슴 안에 품고, 이제는 인적끊긴 D.M.Z 초병(哨兵)의 발아래 적막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강과 바다, 밀물과 썰물, 자연과 역사, 고구려와 신라, 남한과 북한, 전쟁과 평화... 이 모든 질곡(桎梏)과 고통(苦痛)을,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으로 끌어안고 흐르라는 듯 — 오늘도 우리 ‘할아버지의 강’은 붉은 노을 번져가는 일몰(日沒)의 서해로 천천히, 그리고 광막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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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의 정점에 있었던 획기적인 문화유산들이, 강화도읍기 시절 강화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놀라운 일이네요
제 기억속 고려의 편린들이 한 고리안으로 엮어지는 좋은 정리의 계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독자가 있는 것은 글 쓴 사람의 보람이지요. 감사합니다. 노랑저고리님!
강화의 역사적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계기를 주셨군요 잘 읽고갑니다.
지나간 글을 보아주신 분이 계셨군요. 혜연님! 감사합니다. 닉네임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위 글의 마지막 부분 - 5세기 백제 6세기 고구려 7세기 신라를 --> [4세기 백제 5세기 고구려 6세기 신라]로 수정합니다.
(제 카페는 수정했는데 스크랩한 글이라 수정이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