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이제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에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였구요. 보통 이제 우리는 불교 공부를 한다. 수행을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경험에 의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수행자, 수행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열심히 기도를 참석하고, 열심히 염불도 하고, 독경도 하고, 또 사시불공에도 참석을 하고, 이것이 이제 기도이고 수행이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구 이제 스님들이 하는 수행은, 우리들은 기복적인 기도를 한다면, 스님들은 뭐 열심히 좌선을 하고, 수행을 하고, 위빠사나, 조사선, 간화선을 닦아가고, 이런 것을 이제 불교 수행이다. 그것이 불교이다. 그래서 그것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불자인지 아닌지, 내가 훌륭한 수행자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면서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냐? 바른 불교신자냐? 라는 것을 보려면,
내가 얼마나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기도에 참석하는지. 염불, 독경, 절 수행을 많이 하는지, 참선을 많이 했는지, 이제 그런 거에 따라서 수행자들의 근기를 판단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런 얘기 많이 하지요. “아, 저는 어느 선방에서 몇 처를 났습니다.” “뭐 참선을 한 번 시작하면, 저는 3시간, 5시간을 앉아서 있습니다.” 신도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세요.
“나는 금강경 독송을 한 몇 천 독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 10만 독 20만 독 이상 했습니다.” “절을 하루에 천 배, 삼천 배씩 몇 번을 며칠 동안 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그런 얘기를 하면 다들 다시 봅니다. ‘와아,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대단하게 수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엄청 많이 했던 사람들을 가만히 한 번 살펴보세요. 그 사람이 정말 생사 해탈을 했느냐?
어떤 삶이 가벼워졌느냐? 괴로움이 소멸되고 있느냐? 그런 걸 한 번 살펴보면, 아닌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지요. 똑같이 전혀 공부가 별로 안 된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수행은 엄청 잘하는데 화도 엄청 잘 내고, 뭐 이런 사람도 많이 있지요. 고집도 엄청 세고, 집착도 엄청나고, 그런데 수행은 엄청 잘해요. ‘그럼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엇이 수행이라고 하셨는지,
무엇이 마음공부라고 하셨는지를 보니까, 우리들의 편견이 그동안 잘못된 것들이 많았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수행법이 뭐냐 하면, 중도와 팔정도입니다. 사성제잖아요? 사성제의 도성제거든요. 도성제는 중도와 팔정도입니다. 중도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구요. 팔정도를 오늘 말씀을 드릴 건데, 팔정도라는 것을 한번 보세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면,
팔정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면, 『중아함경』에서 고를 소멸하기 위해서 또 무명을 끊기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팔정도다. 그리구 『잡아함경』에서는 애욕을 끊기 위해서 삼독을 끊기 위해서 하는 것이 팔정도다. 또 『증일아함경』에서는 생사의 어려움을 건너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한다. 즉, 팔정도야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 팔정도야말로 가장 중요한 수행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자들을 만날 때 중도와 팔정도를 잘 실천하느냐?
이제 그것을 보는 게 그 사람의 안목, 그 사람의 수행력을 점검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거는 보지 않고, 팔정도를 잘 닦아가고 있느냐는 보지 않고, 염불 많이 했느냐, 다라니 몇 독했느냐. 절을 많이 하느냐, 절에 자주 나와서 기도를 참석하느냐, 이런 것들을 많이 봤다는 것이지요. 그게 잘못됐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을 먼저 알고 핵심이 먼저이고 나머지 방편은 그다음 차례가 돼야 되잖아요.
사실은 그런 것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한 겁니다. 염불, 내가 오십 시간, 오만 시간을 했다. 그건 막말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절을 내가 수천만 번 내가 절을 했다. 그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겁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절대적인, 그것을 많이 했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내 수행력이 높아졌다. 이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중도와 팔정도의 바른 안목을 갖춘 뒤 그런 수행을 하면,
뭐 몇 만 시간을 안 하고 몇 시간만 해도 그 수행력이 고스란히 공부로 이어질 수가 있겠지만, 바른 안목을 갖추지 않은 채 수행을 한다면, 입만 아프고, 다리만 아픈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수행은 뭐냐 하면, 팔정도입니다. 염불, 독경, 좌선, 이것을 많이 했느냐, 이게 아니고. 팔정도, 팔정도가 뭡니까?
정견(正見), 세상을 바르게 보는, 통찰하는 안목을 갖추었느냐? 정사(正思), 바르게 사유할 수 있는 ‘바르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생각하는지, 이 방법을 아느냐? 정어(正語), 바르게 하는 말, 바른 말을 하느냐? 수행은 정말 열심히 잘 하는데 정어가 되지 못한다면. 막 욕하고, 화내고, 짜증 내고, 극단적인 말을 하고, 남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다. 그 사람은 삼천 배를 밥 먹듯이 해도 정어(正語)가 되지 않으면, 전혀 수행자가 아닌 것이지요.
바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삿된 말들, 남들을 이간질 시키고, 남들을 괴롭히고 하는 말을 한다면, 그건 전혀 수행자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염불 많이 했느냐, 독경 많이 했느냐, 절을 많이 했느냐가 수행이 아니고. 바른 말을 했느냐. 바른 생각을 하느냐. 정업(正業), 바른 삶을 사느냐. 바른 행동을 하느냐. 정업. 정명(正命), 바른 직업생활. 직업생활을 할 때 회사에서 내가 어떻게든 진급하려고 저 사람을 내려 누를 생각을 하면서 직업생활을 했느냐.
혹은 내가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그냥 이런 편법을 쓰면서 직업생활을 했느냐. 아니면 내가 설사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내가 그렇게 욕심을 채우지 못할지라도, 이 세상에 내 직업을 통해서 세상의 빛이 되고, 내 직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어떤 직업생활을 하고 있느냐? 그것이 수행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하루하루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그 직장생활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했어요.
정명(正命), 바른 직업생활, 그것이 수행입니다. 자기 직업을 내가 바르게만 하고 있다면, 그 직장에서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고. 그래서 이 중도를 바르게 정진하고, 바르게 매 순간 깨어있고, 정념(正念)과 정정(正定), 정정진(正精進), 꾸준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을 이제 팔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수행을 잘 했느냐 못했느냐를 보기 위해서 팔정도를 점검해야 돼요. 중도와 팔정도를 점검해야 됩니다.
내가 중도의 자리에 늘 있느냐? 팔정도를 늘 실천하고 있느냐? 그게 먼저잖아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니까. 그런데 예를 들어, 염불수행,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아니지요. 부처님이 “내 이름을 계속 반복해 외워라.”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지요. 이게 뭐 제가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염불수행은 나중에 만들어진 방편이지요.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한참 뒤에 만들어진 수행입니다.
진언은요, 부처님 초기에는 “진언은 외도이니 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나중에 가서 “어떤 방편에 따라서는 해도 좋다.” “방편으로써는 뭐 차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래요. 다라니 수행 같은 것도 능엄주니 이런 것들도 한 천이백 년 넘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거든요. 그것도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선(禪)의 깨달음이 활활 발발하던 시기에는 스승님이 그 절의 주지 스님이, 주지 스님을 거의 부처님으로 생각했어요. 5세기, 6세기, 7세기, 선의 황금기 때는.
그래서 행자가 갑자기 주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30년, 40년, 50년 수행하던 스님들을 재끼고 이제 막 들어온 행자가 주지 스님이 될 수 있었어요. 육조 혜능 스님도 비슷하잖아요. 쉽게 말해, 그 당대 차기 종정, 차기 종정을 바라보는, 쉽게 말해서, 신수 스님 같은 이런 분을 재끼고 이제 막 들어온 행자가 종정이 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육조 혜능 스님의 그런 파격이 가능했습니다. 왜?
법이 있으면, 법을 보는 바른 안복을 갖추고 있으면, 불지견이 있는 사람이 공부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래서 ‘언하대오(言下大悟)’ 법문이 가장 중요한 공부였지요. 바른 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의 법문을 들으면 그냥 저절로 깨어나기 때문에. 저절로 공부가 되기 때문에. 다른 공부가 딱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때는 따로 수행이 없었습니다. 법문 듣는 것이 수행이었고. 하루하루 일과를 사는 것이 수행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바른 법을 갖춘 사람들이 자꾸 줄어들고 사라지고. 이제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주지를 국가에서 임명하고 이러다 보니까, 이제 저 수도(임명하는 곳)에 가가 지고 쉽게 말해서, 아부 잘하고 이러는 사람들이 주지로 임명이 되고 하니까, 임명이 돼도 중간(임명하는 곳)에 가서 자꾸 이렇게 해야 되니까, 절을 지키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을 지키지 못하고, 절에 있어도 법을 설하는 안목을 갖추지 못해놓으니까 자꾸 스님들에게 숙제만 주는 겁니다. 왜?
내가 절을 비워야 되고, 내가 법문을 설하지 못하니까 좌선을 해라, 다라니 독송해라. 능엄주 독송해라. 이런 수행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때가 그 시기와 같이 합니다. 그래서 신기하잖아요. 선불교잖아요. 선불교는 선(禪)이잖아요. 다른 무수한 방편들을 과감하게 가차 없이 ‘파사현정(破邪顯正)’ 완전히 깨뜨리는 게 선이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한국불교의 특징을 얘기할 때 통불교라는 말을 써요. 그런데 이게 그런 말을 공부하면서도 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한국불교 전통이 선불교라 했는데, 왜 이렇게 선(禪) 적이지 않은 요소가 많지? 선불교 안에서 능엄주 독송이 유행한다. 이게 사실은 가능한 얘기입니까? 선의 본류, 본래 선이 활활 발발했던 그런 시기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경전도 보지 말라고 했고, 좌선하는 것도 막 혼을 냈습니다. 좌선하는 스님 옆에 가가 지고 거울을 갈고 깨우쳐주기 위해서 거울을 갈았더니,
“좌선하는데 방해되니까 좀 비켜라” 했더니만, “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네가 몸으로 앉아 있는다고 부처가 되겠느냐?” 유명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좌선도 혼을 내고. 모든 수행 방법? 방편에 치우친 모든 것들을 다 깨뜨리는 게 선의 정신이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은, 선 공부 한다 이러면서, 염불도 하고, 다라니도 하고 무수히 많은 것들을 여기서 했던 것이 역사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선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서, 이 선에서 다양한 수행 방법들을 우후죽순으로 그냥 다 받아들여서 그걸 다 닦도록 했던 거예요. 즉, 깨달음이 없어진 시대. 법이 사라지던 시대. 그런 시대에는 수행법, 방법론, 이런 게 무성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는 되게 좀 불편한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왜? 지금까지 나는 그걸 해왔는데, 그게 아니다,라고 얘기를 하니까, 기분 안 좋을 수 있고 불편할 수 있지요.
사실은 이 얘기가 어찌 보면, 한국불교 전체에서도 상당히 듣기 싫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저만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깨어있는 많은 스님들께서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이고, 이제 서서히 어떤 식으로 공론화도 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떤 학술 세미나라든지, 이런 곳에서 아주 냉철하게 공론화가 되면서 상당히 불편해하는 부류들도 많았구요. 또 그것이 바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라고 하는 부류도 많아었구요.
그래서 지금이 어찌 보면, 조금 과도기입니다. 이제 그런 어떤, 예전에 우리가 맨 날 해오던 그런 신행의 패턴들이 지금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고, 이제는 바른 안목이 서서히 갖춰지는 시기에요. 여러분들도 이해하실 겁니다. 옛날에 10년, 20년, 30년 전만 해도 우리가 무수히 많이 염불하고, 독경하고, 다라니하고, 기도만 하던 시대를 거쳐 왔습니다. 그때는 기도 열심히 안 하면 아주 수행자가 아닌 것처럼 여기던 시대, 그때 우리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기도수행을 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의 시대가 점점 바뀌는 게 느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서서히 이제 초기불교로 돌아가자. 초기 선으로 돌아가자. 이런 어떤 운동들이 지금 불교 안에서도 상당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점점 방편들은, 이제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에 천착해 있던 불교는 조금씩 이제 깨뜨려지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조금 듣기 불편하고 이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앞으로의 불교는 이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류이고 초기 생생하게 살아있던 선, 그 자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거든요. 이 법은. 뒤늦게 오염됐던 법들은 다시 본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려 시대 불교가 너무 많이 이렇게 오염되기 시작하니까, 그게 그냥 왕창 무너졌었던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조금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제가 이 경전을 가지고 자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제 얘기만 자꾸 떠들면, “저 젊은 스님이 제가 뭘 안다고 저렇게, 저 노스님들이나 여태까지 내가 공부해왔던 그분들도 그렇게 얘기 안 하는데, 제가 뭘 안다고 저렇게 얘기하느냐?” 이렇게 얘기하실 까봐. 제가 ‘선어록과 마음공부’니, ‘육조단경과 마음공부’니, ‘불교경전과 마음공부’니, ‘반야심경’ ‘금강경과 마음공부’니, 하면서 자꾸 경전과 어록을 해설하는 책들을 내고, 이런 걸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왜?
선어록과 불교 경전에서는 구구정념 하게 늘 이 얘기만 하고 있거든요. 동일한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금강경』『반야심경』『육조단경』에 염불해라. 독경해라. 기도해라. 뭐 이런 얘기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공부한 팔정도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에요.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느냐를 보려면 팔정도를 잘 실천하느냐? 이걸 보면 된다. 그러면 지난 시간에 제가 중도를 말씀드렸는데, 중도에 대해서는 이제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고. 이제 유튜브에도 올릴 거니까 보시도록 하시구요.
팔정도(八正道)에서 8가지 정도(定道), 바른 길이라는 거예요. 8가지 바른 길. 전 처음에 불교를 처음 접하면서 불교의 최고의 수행, 이래서 팔정도라는 거지요. 중도라는 거지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중도는 ‘치우치지 않는 길’ 이렇게 얘기를 해요. ‘뭔 소리지?’ 팔정도를 보니까 더 황당한 겁니다. 바르게 말해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해라. ‘야, 이런 얘기 나도 하겠다.’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분께서, 뭐가 바르게 하는 거지?’
제가 공부할 때는요, 불교학과를 다니고 불교 공부를 했지만, 바르게 말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게 바르게, 바른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게 바르게 보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게 바르게 사유하는 것인지, 바른 게 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누가 얘기를 안 해주더라구요. “그냥 팔정도는 바르게 보는 거야.” 이렇게만 얘기를 하더라구요. 이 팔정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른 게’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이거든요.
뭐 제가 좀 공부를 대충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때는 그거를 이렇게 딱히 얘기를 안 해줘서 되게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었어요. 이 바른 길이라는 것. ‘정(正)’이라는 것은 중도에서의 ‘중(中)’과 같습니다. 즉, 중도라는 가르침은요. 또 팔정도의 바르다,라는 가르침은 뭐를 얘기하느냐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뭔지를 알아야 됩니다. 중도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이 곧 중도입니다.
초기불교 교리가 뭐냐고 물어볼 때, 연기법이다. 자비사상이다. 불교의 핵심이 뭐냐고 물어보면, 다들 헷갈려 해요. 많이 공부한 불자들에게 불교 핵심이 뭡니까?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자비지요. 어떤 사람은 연기법이지요. 어떤 사람은 무아지요. 어떤 사람은 사성제지요. 어떤 사람은 삼법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사상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다 다르게 얘기를 해요. 그 도대체 뭐가, 해탈 열반이지요. 참나 지요, 뭐. 불성이지요, 뭐. 다 다르게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다 다르게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 얘기가 다 다른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측면들입니다. 다 똑같은 이야기예요. 중도가 바로 연기법이고 연기법이 바로 자비이고 자비가 바로 무아이고 무아가 바로 공사상이다. 이것을 제가 아주 단순한 비유로 그동안 말씀을 많이 드렸는데, 제가 이 비유를 많이 들었지요. 죽비를 비유로 많이 들었으니까, 저라는 사람을 놓고 봤을 때,
나라는 사람은 키가 큰가? 작은가? 알 수가 있겠습니까? 키가 크다,라고 해서도 안 맞고, 작다,라고 해서도 안 맞지요. 키가 큰 사람들 사이에선 저는 작은 키고, 작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큰 키가 되겠지요. 즉, 제 키 자체를, 저라는 존재 하나만을 놓고서 이게 큰지 작은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도 똑같애요.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의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비교해야만 가능해요.
그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 능력 있는데, 난 그 사람이 능력 있다,라는 걸 아는데.라고 얘기해도, 그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의 그 사람의 능력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정해진 실체는 없습니다. 특정한 사람과 비교하면 능력이 있는 것이고, 또 특정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난 돈이 많을 수도 있고 돈이 적을 수도 있어요. 인도에서 다 죽어가는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일 수도 있구요.
또 엄청난 부자에게 비하면 나는 가난할 수도 있지요. 나를 그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잘났는지 못났는지. 능력 있는지 없는지, 돈이 많은지 적은지, 키가 큰지 작은지조차 우리는 사실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는데, 그 사람. 그 사람은 능력 있고 돈 많고 잘 났고 학벌도 좋고 그걸 가지고 그 사람을 안다,라고 여깁니다. 그거는 우리의 망상이지요. 분별이 만들어낸 생각. 망상. 왜 그럴까요?
그것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앎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능력 있고 없을 수 있으려면, 인연 따라 주변의 어떤 사람과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과의 인연에 따라서는 능력이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인연이 오면 능력이 없기도 하고. 이것이 볼펜 옆에서는 긴 것, 전봇대 옆에서는 짧은 것이 되는 것처럼. 이건 길다거나 짧다,라는 실체도 없는데, 우리는 인연 따라 얘는 길다. 인연 따라 짧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난 이걸 안다,라고 생각해요. 알 식(識) 자, 알음알이를 가지고. 그래서 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은 분별망상이라고 불교에서는 부르는 겁니다. 알음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항변합니다. 난 아는 게 맞는데. 이 죽비는 길잖아. 이게 긴 게 확실해. 이걸 난 100% 알아, 이렇게 생각해요. 그 앎이 맞다,라고 생각해요. 이거는 전봇대 옆에 가면 짧은 겁니다. 내가 아는 게 아니지요.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많은 걸 알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이것과 똑같애요. 이걸 가지고 길다,라고 고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사람이 잘났는지 못났는지, 능력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머릿속으로 판단 분별한 알음알이를 가지고 옳다,라고 고집하고 집착해서 그 사람은 ‘이래’ ‘저래’라고, ‘난 그걸 알아’라고 집착하고 고집을 합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이건 좋은 일이고 저건 나쁜 일이야. 내 인생은 이렇게 되면 좋은 것이고 저렇게 되면 나빠. 내 인생은 이렇게 펼쳐져야 돼. 자식의 인생은 이렇게 돼야 되고. 내일 이런 일이 벌어져야 돼. 비가 오는 건 나쁜 일이야. 햇빛 나는 건 좋은 일이야. 내가 돈 버는 건 좋은 일이야. 뭐 이런 식의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규정을 정해놓아요. 그게 맞다,라고 생각하고. 안다,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이 사고가 나서 몸이 아팠다. 다리가 좀 부러졌다. 아니면, 어디가 다쳐가지고 병원 신세를 졌다. 그게 나쁘다,라는 걸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없잖아요.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제가 아는 많은 분들은 절망적인 병을 얻어서 한 1년, 2년, 3년씩 앓아누워 계시거나, 큰 수술을 했거나, 이런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그 병 덕분에, 그 수술 덕분에, 그분은 다시 더욱더 옛날보다 더욱더 건강해지고, 생활방식이 훨씬 더 옛날보다 건강해지고, 꾸준히 운동하고, 좋은 음식을 챙겨 드시고,
또 마음공부를 하고, 이러는 분들을 많이 뵀어요. 특히, 절에 나오는 분들 가운데 상당 분들은 이런 분들이 계세요. “나는 죽어도 종교 같은 건 믿지 않을 거야.”라고 얘기했던 분들 가운데, 불교에 확 빠져드는 분들 중에는 인생에서 너무나 큰 괴로움, 절망, 아픔을 겪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 마음공부를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십니다. 그 괴로움이 없었다면, 나는 이 불법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저에게 정말 그때,
10년 전에 그 괴로움이 없었으면 저는 불교, 종교라는 건 제 인생에서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때 그 괴로움 때문에, 이 귀한 불법을 만났습니다.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지요. 즉, 내 인생에 괴로움이 없어야 된다,라고, 우리는 분명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앎이 분명한 것이냐? 확실한 것이냐? 자식에게는 무조건 좋은 일만 있어야 되느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슬프고 괴롭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경험을 통해서 더 딴딴해지고 더 강인해질 수가 있습니다.
보통 외국에서는 그런답니다. 회사를 일으켜가지고 한 번, 두 번, 세 번, 망해본 사람들? 그런 사람들, 한 번 회사 일으켜서 망해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채용을 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많답니다. 왜냐면, 회사를 일으켰는데 망해본 것 자체가 하나의 경력이라는 것이지요. 그걸 통해 이 사람은 이제 드디어 성공할 수 있는 자산을 쌓았겠구나,라고 본다는 거지요. 그런데 신기하게 한국은 한 번 두 번 세 번 망해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자산이 많다,라고 보지 않고 저 사람은 실패자야. 실패한 사람이야. 그렇게 봐서 쓰지 않는다는 거지요. 알 수 없습니다. 사실은 정말 성공한 사람은 정말 몇 번씩 실패하고 절망하고 무너져보고 그러구 나서 성공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절망이 그 실패가 정말 딛고 일어나기 위한, 정말 필요했던 것이라는 것을 우리 알음알이는 모르지요. 그러니까 성공만을 바라지요. 그런데 이 우주법계는 또 다른 뜻이 있었던 겁니다.
내가 실패하던 그것이 내 인생에 꼭 필요했었다면, 그 실패를 우리에게 보내주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 알음알이 와는 상관없이.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래서 여러분 인생에 나는 이런 인생이 펼쳐졌으면 좋겠는데, 다른 인생이 내 인생에 자꾸 등장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나를 돕기 위한 무한한 자비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한한 삶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진실, 제법실상이라는 삶 자체가 바로 그대로 부처라는, 진실이라는,
더 큰 진리를 내 작은 생각, 마음, 의식으로 담을 그릇이 안 되니까, 내 생각을 믿는 겁니다. 삶을 믿지 않고. 삶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법신 부처님을 믿지 않고, 내 알음알이, 분별심, 이 생각을 믿는 겁니다. 생각이 맞다,라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내 식대로 살려고 하잖아요. 진리 식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삶의 식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그거는 이것과 똑같애요. 이 죽비를 보고 길어,라고 집착하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이거는 길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길거나 짧다,라고 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건 길다,라고 하면 극단입니다. 짧다,라고 해도 극단입니다. 이걸 중도로 보면 있는 그대로 볼 뿐. 길다거나 짧다,라고 말로 어떻게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게 중도 사상이에요. 즉, 이것은 왜 중도냐? 인연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만 길어지거나 인연 따라서만 짧아질 수 있거든요. 이걸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얘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데, 연기법에 따라서,
인연 따라 얘는 길다,라고 규정되기도 하고, 짧다,라고 규정되기도 합니다. 즉,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 즉,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우리는 전부다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잖아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비 실체성입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이다’라고 내가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알음알이 분별심은 ‘이거야’라고 규정짓고 싶겠지만, 그것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비 실체성이다.
비 실체성은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사상’ 이럽니다. ‘공(空)’ 공하다. 텅 비었다. 비 실체성, 실체가 없다. 이걸 길다,라고도 할 수 없고, 짧다,라고도 할 수 없으니, 그것이 중도적인 안목이고 그게 연기적인 안목이고 그게 공사상입니다. 극단이 아닌 것이지요. ‘무분별’ 분별하지 않는 것이고. ‘무집착’ 그러니까 길다,라는데 집착도 안 하고, 짧다,라는데 집착도 안 하는 겁니다. 그게 무집착이에요. 이것은 인연 따라 계속 변화거든요.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니까 이걸 실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걸 공정된 실체적인 자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정해진 실체적인 자아라는 게 없어요.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갈 뿐이지. 그래서 무아라고 합니다. 이걸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이 의식이 맞다,라고 집착하는 것 때문에, 내 의식이 특정한 것을 옳다,라고 과도하게 집착하게 됐을 때, 그걸 내가 갖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괴로움에 빠져요.
옛날 여러분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면 난 죽을 것 같은 상사병에도 걸려 본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때 그 사람 아니면 죽을 줄 알았는데, 그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잊혀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옛날에 그 사람이 진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당신이 진짜네요. 내 인생에 진짜네요. 난 이것이 내 인생에 천직인 거 같애. 이 사람 아니면 절대 아닌 거 같애. 이거 아니면 절대 아닌 거 같애,라는 것은 전부다 망상입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그런 정해진 무언가 실체는 없어요.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를 집착해요. 그걸 집착하고 나면, 그것이 없어지면 괴롭다,라는 망상이 생기기 시작해요. 왜? 내가 A라는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이 진짜일까요?
진짜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안 돼,라고 집착했기 때문에 그게 괴로움이라는 환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진짜 괴로움이 아니라, 내가 허망한 망상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인 것처럼 착각된 것이지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은 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이런 자리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나는 저 사람, 저놈한테는 내가 이겨야 돼,라고 생각을 한 것과 동시에 내 현실이 비참해지기 시작합니다.
내 남편이 무능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나는 돈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과 비교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처럼 생각에서, 생각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의 사성제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은 실질적인 있는 그대로의 실제 괴로움이 아니라, 생각이 분별이 망상이 만들어놓은 즉, 중도를 중도라고 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중도를, 이걸 길다,라고 착각하고. 나는 가난해,라고 착각하고. 나는 능력 없어,라고 착각하는 그 생각이 만든 허상의 괴로움을 붙잡고 쥔 다음에, 나는 ‘진짜 괴로운 사람이야’ ‘나는 진짜 무능한 사람이야’라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허망한 망상이 시작됐다는 겁니다. 이게 고집멸도 사성제예요. 괴로움이라는 것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허망한 망상으로 괴로움을 실재화했을 뿐이다. 모든 괴로움이 이와 같습니다.
즉,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이구요. 그런데 보세요, 인연 따라 생겨났다 인연 따라 사라지고, 연기법에서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습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하고, 저것이 멸하면 이것도 멸하는 관계입니다. 즉, 연기법의 관계라는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잖아요. 그건, 저것과 이것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소리입니다. 서로 연기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걸 길다, 라거나 짧다,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뭔가 옆에 얘가 와야 얘가 갑자기 길어지잖아요. 연기적으로만 얘는 길다,라는 게 성립되지. 얘가 사라지면 얘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그런데 얘가 딱 연기가 돼버리면 갑자기 얘는 긴 게 돼버려요. 이게 남자고 이게 여자면, 얘 혼자 태어나서 그냥 얘 혼자밖에 없을 때는, 이 우주에 얘 혼자밖에 없을 때는, 얘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어떤 말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여자라는 존재가 딱 생겨나면, 갑자기 얘는 남자가 돼버려요. 즉, 남자라는 실체는 없는데, 여자라는 인연이 오면 갑자기 남자가 돼버리는 것이지요. 능력 있다,라는 어떤 실체가 없는데, 능력 없는 어떤 사람을 보면 ‘아, 내가 그래도 능력 있구나!’ 이런 망상이 생겨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생겨났고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두 개가 두 개가 아니라, 서로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는 동체, 한 몸. 동체 대비심. 본래 한 몸이다. 온 세상, 온 우주 전체는 본래 둘, 셋, 넷으로 쪼개질 수 있는 뭔가가 아니라, 본래 하나의 바탕, 하나의 성품, 하나의 자성, 하나의 고향, 하나의 진실, 불자라고 하잖아요.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잖아요. 불자. 하나의 부모. 본성이라는 하나의 부모 아래서 태어난 우리는, 바다의 무수한 물결과 같습니다. 한 나무, 한 뿌리에서 피어난 여러 가지 가지와 같애요. 우리 모든 존재들은. 그러니까 둘이 아닌 것이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니까 동체 대비심. 상대방을 돕는 것이 상대방을 돕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돕는 것과 똑같습니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인과응보가 고스란히 나에게 미치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게 되구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래가 펼쳐집니다. 내가 남들의 돈을 뺐어갔다. 그럼 내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벌어지구요.
내가 누군가를 도왔다. 지혜와 복덕을 나누었다. 그럼 내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더 복덕 구족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자비심을 얘기할 때는 억지로 자비를 펼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배고플 때 평생 여러분 손은, 여러분 몸은, 여러분 배고플 때 평생을 입에다가 맛있는 걸 넣어줬지요. 그런데 여러분 손보고 여러분 입이 고맙다,라고 얘기합니까?
여러분이 여러분한테 “야, 내가 배고플 때마다 나한테 밥을 줘서 고맙다.” 얘기하지 않잖아요. 그건 당연하게 받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힘들고 괴롭다면, 그 사람에게 그냥 자연스럽게, 그가 바로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바로 그이고 그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순간, 제 개인적으로 여담입니다. 졸지 마시라고, 지금 깜짝 놀랐네요.
제가 법회 할 때마다 정말 열심히, 열심히 듣는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눈에서 레이저를 쏘면서 너무 열심히 듣는 분이 계셔서, 한 번은 요쪽에서 앉아 들으시고, 한 번은 저쪽에 앉아 들으시고, 한 번은 뒤에 앉아 들으시고. 너무 열심히 들으시는데. 아, 지금 처음 알았네요. 저는 그분이 한 분인 줄 알았거든요? 제가 보기에 너무 똑같이 생기신 분, 두 분이 계셨구나!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웃음)
야, 한 분이 이쪽에 계시고 한 분은 저쪽에 계셔서 깜짝 놀랐네요. 분명히 좀 전에 여기서 봤는데, 이쪽에 또 계시길래. 아, 이렇게 닮으신 분이, 똑같이 열심히 또 들을 실 수가 있네요. 저는 우리 군무님들이나 올해 나오신 보살님들을 보더라도 제가 되게 놀랍습니다. 우리 금련사에 오래 나오신, 열심히 나오시는 불자님들 보면, 이미지가 너무 비슷하셔 가지구 제가 구분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너무 이미지가 비슷하시더라구요.
제가 부산 강의를 이렇게 할 때, 정말 열심히 듣는 분들이 이렇게 제 눈에 이렇게 들어올 거 아니에요. 이제 서울에 가서 강의를 하면요.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분 엊그제 부산에서 봤는데, 서울에서 또 보는 거 같은. 되게 이미지가 비슷하신 분들, 참, 신기하게도 자꾸 만나는 거 같애요. 여담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요, 연기법, 사성제, 중도, 공사상, 무아, 자비, 무상, 무아, 무집착, 무자성, 이게 전부다 다르지 않은 얘기예요. 다 같은 얘기입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말하는 ‘중’이라는 것은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과 같은 얘기이고. 그것이 바로 연기, 무자성, 공, 무아, 이 부처님의 바른 안목으로서 보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견에서 바르게 본다,라고 할 때, 도대체 어떻게 보는 게 바르게 보는 거야? 법회 들어오기 직전에 미국에 계신 어떤 할머니가 연락이 오셨어요. 유튜브로 설법을 보고 있는데. 유튜브로 설법을 보고 있는 많은 분들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운 삶에 허덕이다가 순간,
이 괴로움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돈 버는 일만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돈 버는 일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공부하는 건 비생산적이다,라고 생각해요. 마음 공부하는 거는 괜히 돈 쓰고 다니는 거고, 시간 버리고 다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보세요,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그러다가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요즘 같은 시대는 연예인들도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뭐 공황장애가 온다든지.
정신적인 어떤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많구요. 제가 잘 아는 친구들 중에도 또 아는 부모님들 중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요, 자식들이 서울대를 갔거나, 아주 유명한 대학을 갔거나, 공부를 어마 무시하게 잘 하는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큰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특히나 지금 특목고라든지, 뭐 유명한 대학교, 얼마 전에 누가 그런 얘기도 하더라구요. 요즘에 서울대나 카이스트 나온 사람보다도 오히려 뭐 서강대나 성균관대나 예를 들면, 제가 대학의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 너무 위에 있는 거보다도 약간 중간에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회사들이 있다. 뭐 이런 얘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어요. 그게 그렇다는 것이지요. 너무 앞만 보고 너무 하나에만 사로잡혀서, 공부 하나에만 그냥 몰두하고 몰입해서 미친 듯이 달려온 사람보다,
놀 땐 놀 줄 알고, 즐길 땐 즐길 줄 알고, 도울 땐 도울 줄 알고, 삶을 누리고 느끼고 감동하고 좋아할 줄 알며 살아갔을 때, 내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아이들 있잖아요. 그런 아이들이 실질적으로 성공을 합니다. 제가 중, 고등학생들도 학생회들 만나봤었는데요. 그냥 공부밖에 모르고 앞만 보고 그냥 오직 성적, 성적만 하고 달려가는 친구들은, 그런데다가 그것을 부모님이 조르기까지 하는 아이들은요, 정말 너무나도 불쌍해 보이고.
스스로가 어려움을 감당했을 때 해쳐 나올 수 있는 자산이 전혀 없어요. 왜? 부모님에게 기댈 수 없지요. 왜? 부모님은 계속해서 공부를 조르기만 했으니까. 부모님에게 그 얘기를 할 수조차 없습니다. 전 오히려, 어떤 보살님들은 이런 분들이 계세요. 중, 고등학생 된, 안마하고, 내가 평생 지금 이놈하고 싸우며 산다. 그래서 왜 그러냐 물어보면, 어떤 보살님들은 이제 이런 얘기를 하지요. 야, 그걸 가만 놔둬? 확, 그냥. 이렇게 서로 확 눌러가지고 자식이 엄마한테 꼼짝 못 하는 경우도 있구요.
그럼 그 자식들은 엄마 아빠에게 결코 대들지 않습니다. 그냥 꽉 눌려서 스트레스를 제 혼자 풀거나, 혼자 안으로 삭히거나. 그런데 어떤 보살님은 그러더라구요. 아, 나는 도저히 얘를 감당할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아이가 막 말이면, 말로 막 얘기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논리로 막 하는데, 난 이길 수가 없다. 너무너무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 얘기를 또 가만히 들어보면, 한편으로는 제가 그 보살님을 보면서,
그 보살님은 당신을 위로한다고 하는 얘기라고 얘기를 하시던데. 위로가 아니라, 보살님 한 편으로 보니까 보살님이 그렇게 아이와 씨름하고 싸우면서 사는 게 보기 좋습니다. 왜 보기 좋으냐? 아이가 엄마한테 대들 수 있고, 그런 말을 막 하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게 엄마가 그만큼 받아주고 동등한 관계에서 같이 싸워주고 하니까, 뭔가 제가 힘들 때, 엄마한테 와서 풀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자원이 있는 거 아니냐?
그처럼 예를 들어, 내가 뭔가 막 좋아하는 게 있잖아요. 어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무슨 힙합을 좋아하고 이러면, 공부할 시간에 그런 걸 한다 막 이렇게 한다는데. 어떤 부모님은 한편으로는 공부를 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그 음악을 좋아하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거지요. 왜? 자기도 뭔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걸로써 뭔가 이렇게 풀 수가 있으니까. 친구들과 막 노는 거. 노는 거를 잘 놀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놀 줄 알아야 공부할 때도 이걸 오래 롱 런(long-run)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즉, 이 말은 뭐냐 하면, 내면, 마음공부, 스트레스 해소하는 방법,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고 있는 사람은요, 어마어마한 삶에서의 큰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공부하라고 하면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 비생산적인 일을 뭐 하러 합니까? 돈 벌기도 바쁜데. 그렇게 돈만 벌다가 주저앉고 무너지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이런 자질, 이런 어떤 자원들이 내적인 마음의 자질들이 풍부한 것이지요.
조금 전에 전화 왔다는 미국에 계시는 그 할머니는, 노보살님은 당신이 어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을 하고 계셔요. 외국 사람들도 오고 뭐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데, 각종 문제가 있을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말 내가 지금도 나이가 있는데, 이런 걸 하는 게 너무 힘들지만, 내가 정말 오래 못 살 거 같고, 너무 힘들고 너무 괴롭다는 것이지요.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이제 이 마음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툭하면 미국인데 그렇다니, 불이 나가 정전이 되기도 하고, 에어컨을 너무 많이 써서 뭐 이러기도 하고. 또 툭하면, 갑자기 물이 끊기기도 하고 그러면, 와 있는 사람들이 목욕도 못하고. 때로는 밥도 못 주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답니다. 그러고 사람들이 올 때 예를 들면, 게이 같은 사람들이나, 동성 연애하는 사람들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분별심이, 저런 사람들 오면 우리 집이 소문이 나면 괜히, 매출이 떨어질텐데 서부터 시작해서,
또 사람들 인상만 보면은 저 사람은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가겠구나. 저 사람들은 괜히 조금만 잘못하면 스트레스 엄청 받겠구나. 온갖 분별망상 때문에 일한다는 게 너무너무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이게 전부다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내 안에서 끊임없이 분별을 일으킨 것 때문에 내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이라는 거지요. 정전이 딱 오게 되면, 나는 갑자기 공항이 온다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너무 정신이 없고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정전이 오는 건 어쩔 수 없구나. 그러고 정전이 온다,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아, 이건 어마어마한 문제 상황이 아니라,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일반 상황이고,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고, 그냥 아, 큰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이 생기고. 그러고 나니까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더라는 거예요.
막 정신이 없고 막 혼란스러워지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괜히 화만 내면서 왔다 갔다 하게 됐는데 이제 그냥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보고 나니까 그냥 냉정하게, 아, 그냥 사람들에게 일 인당 얼마씩 줘서 나가서 밥을 사드셔주세요, 부탁하면 되겠구나. 아니면 목욕비를 드려서, 오늘은 목욕비를 드릴 테니까 어디 가서 목욕을 해주세요. 오히려 간단하게 답이 나오더라는 것이지요.
즉,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고, 이 일을 한다,라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냥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서 보니까, 그것이 오히려 문제 상황이 아니더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니까, 그것을 내가 훨씬 더 지혜롭게 통찰하고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안목이 나에게 생겨나더라. 이것이 이제 사실은 마음공부를 했을 때, 훨씬 삶의 지혜를, 팔정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며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바른 안목이 갖춰지고 정견이 갖춰지게 됐을 때, 나머지 정어, 정업, 정명, 저절로 갖춰질 수밖에 없지요. 바른 직업생활, 바른 말, 바른 생각, 바른 견해가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저절로 생겨나요. 즉, 여러분들이 생각해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참, 신기하잖아요. 야, 저 스님은 얼마나 대단한 지혜가 있으셔서, 저렇게 모든 어려움들을 저렇게 지혜롭게 말씀해주실까? 신기하잖아요?
우리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싶잖아요? 이 마음공부를 하면, 법륜 스님의 말씀을 이렇게 들어보면요? 이제 공부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마음공부의 안목, 중도의 안목, 팔정도의 안목이 있으면 제가 말씀드렸던 연기, 자비, 공, 무아, 무자성이라는 이 마음공부의 안목이 갖춰지면, 그냥 저절로 그런 답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문제, 하나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저절로 지혜로운 답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찌 보면, 법륜 스님에게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의 내용도 기도하다가 수행하다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팔정도에 대한 질문이지요. 삶에 대한 질문이고. 그 삶에 대한 질문을 마음공부로서 풀어주는 겁니다. 그게 팔정도에 대한 어떤 답인 것이지요. 그걸 쉽게 풀어준 것일 뿐이지요. 교리를 막 용어로 얘기 안 해서 그렇지. 이와 같이, 바른 중도의 안목, 연기, 중도, 공, 무자성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게 되면,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 견해가 달라지기 시작하고. 내 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이 마음공부를 통해서 내 삶이 훨씬 더 지혜로워지고. 사실은 훨씬 더 생산적이 되지요. 한 번 정신이 어긋나가서 무너지게 되면, 돈을 버는 게 되겠습니까? 병원 신세를 져야지요. 그런데 이 마음공부를 함으로서 내 스스로 미리 예방을 할 수 있지요. 정신적인 공황의 상태이지요. 어떤 힘든 상태를 미리미리 예방을 할 수가 있고 닦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의 시대가 연예인들만 그렇게 공황 장애가 오고, 뭐 회사 CEO들만 그런 일이 생기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치닫는 시대가 되면 될수록 점점 더 어떤 정신적인 문제가 더욱더 대두가 될 수밖에 없고. 이제 미래의 시대에서는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승리하는 시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조복 받는 사람. 자신의 내면을 잘 가꾸는 사람. 어떤 스트레스나 괴로움에 대한 대처능력이랄까요?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안목을 갖춘 사람. 지혜의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삶에서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게 되는 시대인 것이지요. 오늘 이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박수
첫댓글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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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_()()()_
왜 그렇게 다 다르게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 얘기가 다 다른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측면들입니다.
다 똑같은 이야기예요.
중도가 바로 연기법이고 연기법이 바로 자비이고 자비가 바로 무아이고 무아가 바로 공사상이다.
감사합니다.
대목이 길어 않읽었는대 너무 좋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