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
성 명 |
재임기간 |
초 대 |
김 민 채 |
1980년 ~ 1984년 |
2 대 |
김 형 규 |
1985년 ~ 1989년 |
3 대 |
김 윤 택 |
1990년 ~ 1994년 |
4 대 |
김 한 용 |
1995년 ~ 1997년 |
5 대 |
김 재 희 |
1998년 ~ 2000년 |
6 대 |
김 수 현 |
2001년 ~ 2003년 |
7 대 |
김 대 환 |
2004년 ~ 2008년 |
8 대 |
김 효 전 |
2009년 ~ 2013년 |
9 대 |
김 영 학 |
2014년(2013.5.25) |
* 위 회장님께서는 대종회 조직의 조기정착과 대동단결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촛불 정신)으로 본인을 불살랐던
거룩하신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분들을 영원히 기억합시다.(카페지기)
(이하는 공사중입니다. 카페지기 )
초대 : 김민채 회장님
- 재임기간 :1980년 ~1984년
- 학력 : 경희대학교 대학원
- 경희대학교 정경대 경제학과 교수
- 영광김씨대동보 추진위원장
- 대종회설립 산파역할
보당의 거병이 실패한 후 영광김씨는 각지로 분산하여 근촌끼리만 세거하면서 각 계파
간에는 상호간의 교류가 없었고 시조에 대한 관심도 희박했다. 오직 영광에 세거해온
영광파만이 문안공의 출생지인 영광읍 월평리에 사우를 짓고 시조를 봉향해 왔다.
뿐만 아니라 전술한 여러 계파중 장흥파가 가장 벌족해서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
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 만성보(萬姓譜) 등에 태용(台用)이 영광김씨의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타파에서 문안공(文安公)을 공동의 시조로 하는 대동보 편찬을
열망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장흥파에서는 이에 호응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완고한 어른들은 장흥파 족보에 시조가 휘 태용(문경공)으로 되어있고, 시중의 문헌에도영광김씨의 시조는 태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환부역조(換父易祖) 할 수 없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추측건데 전기한 여러 문헌 중에서 제일 먼저 출판한 회사의 편집자가 여러 성씨의
시조를 조사할 때 그 취재 대상이 영광김씨 중에서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사람
이었을 것이고 그 사람은 가장 벌족한 장흥파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광김씨 재경 장흥종친회장이었던 경희대학교교수 김민채박사는 학자적
양심에 비추어서 고려열전에 분명히 "김심언은 정주현영광인(靜州縣靈光人)" 운운하여
출생지를 본관으로 하는 당시의 관례로 보아서 영광김씨의 시조임이 분명함에도 불
구하고 충렬왕조의 태용을 시조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일 뿐 아니라 고려의
명신이요 대유학자로 그 이름이 역사에 빛나는 위인을 시조로 받드는 것은 종문의
크나큰 영광임에도 불구하고 극력 반대만 하는 어리석음을 개탄하고 몸소 장흥에 가서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토의한 결과 일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합보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 이하 생략 -
출처 : "영광의 후예"(대종회 발간자료) 147~148페이지.
제 2 대 : 김형규회장님
- 재임기간 : 1985~1989
- 금홍염업회장,
- 신동아진흥(주)회장
- 전 이리극장대표이사
제 3 대 : 김윤택회장님
- 재임기간 : 1990년~1994님
- 대광흥산(주)회장
- 신동아진흥(주)회장
- 전 이북5도민 회징
- 양천장학회 이사장
67. 종친회 발전을 위해 -제10장- 이산가족으로서 숭조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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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1925년부터 1950년 월남하기까지 26년간은 조상을 숭모(崇慕)하고 그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제치하에서는 민족 말살정책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에 의해 숭조(崇祖)사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월남 후 나는 내내 불효자란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런 까닭에 남한에서 적극적으로 뿌리 찾기에 관심을 둔 것이었는지 모른다. 경제적 기반이 잡히면서 나는 본관인 영광(靈光) 김씨 종친회에 참여했고, 종원(宗員)간의 단합과 숭조사상 현양을 위해 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해서 그랬는지, 1992년 9월 종친회 정기총회를 앞두고 열린 이사회에서 나는 김형규 종친회장의 추천으로 차기 회장에 내정되고 말았다. 극구 사양했으나 이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1992년 10월 18일에 열린 영광김씨 종친회 정기총회에서 나는 제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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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6월 영광김씨 중앙종친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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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에서 나는‘종친회 상호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종문(宗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헌신할 것과, 종무를 처리함에 있어 공명정대하게 민주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재임 중에 전체 종원들의 숙원인 시조(始祖) 문안공(文安公)의 실록을 편찬 간행할 것’을 공약사업으로 발표하고, 숭조효친사상의 고취를 위해 다른 사업도 전개할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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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영광김씨 대종회 정기총회를 마치고 태충문(台充門)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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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종친회 사업에 정성을 다하게 된 것은, 그러한 노력이 이북에 두고 온 할머님과 부모님에 대한 하나의 작은 효도가 되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런 정성으로 종친회장의 책무를 맡아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95년, 제4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나는 재임동안 종친회가 중흥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와 있음을 선언하고 종친회를 육성발전 시키는데 근간이 될 4대 종강으로 숭조(崇祖), 애종(愛宗), 참여, 화합을 제창했다. 또 영광의 기천사 및 시조 김심언(金審言)의 동상, 파주의 선산, 장흥의 설암산 신도비 제막식 등의 참석과 사인정(舍人亭), 설암각(雪巖閣) 등 유적을 순례하는 행보로 영광, 광주, 진해, 대전, 군산, 여주 등 경향각지의 종친 유지들과의 친교를 도모했다. |
68. 김심언과 영광김씨 실록 발간 -제10장- 이산가족으로서 숭조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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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장으로 선임된 1992년부터 내가 가장 주력했던 사업은 시조인 문안공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조사하여 그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4년 5월 1일, '김심언(金審言)과 영광김씨(靈光金氏)'라는 책명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사학자이며 씨족연구 대가인 3분의 교수(김갑동, 윤용혁, 이해준)가 집필한 이 실록은 사료수집이나 고증에 있어 심혈을 기울인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문안공 실록의 머리말에 쓴 나의 감회어린 발간사 이다. 이 글을 통해 영광김씨 시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는 동시에 그간의 종친회 활동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우리 영광김씨는 영광지방의 토족(土族)으로 고려조 전기에 문벌귀족으로 성장했다. 영광김씨의 시조 문안공 김심언은 고려조 성종, 의종, 현종조의 명신으로 3대에 출사하여 높은 학문과 덕행으로 왕조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성종에게 올린 봉사이조(封事二條)는 대유학자의 탁월한 경륜과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고려사에 나온 기록으로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현종이 공(公)의 서거를 애도하여 조회를 3일간이나 중지한 사실로도 그의 덕망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김씨는 고려중엽 정중부가 의종(毅宗)을 축출하고 무인정권을 수립하자 이에 김보당(金甫當)이 의병을 일으켜 왕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실패로 끝나니, 후손과 종문이 멸문하는 화를 당하고 후대에 와서 세계(世系)를 살펴볼 길마저 없게 되었다.
다행히도 근래에 이르러 영간공(英簡公)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굴되어 시조 문안공으로부터 병마사(兵馬史) 보당(甫當)에 이르기까지 7세가 분명히 밝혀짐에 따라, 그때까지 중시조(中始祖)를 내세워 파보(派譜)를 간행했던 각 계파 대표들이 합의하여 1979년에 처음으로 대동보(大同譜)를 편수하게 되었고, 1980년에 중앙종친회가 조직되어 초대 회장에 고(故) 김민채(金民彩) 박사가 취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종친회 결의로 무령서원(武靈書院) 중수, 기천사 보수, 서원강당 신축 등 활발한 종문 중흥사업이 전개되었으며, 1987년에는 장재필(張再必) 영광군수의 발의에 따라 거군(擧郡)적으로 문안공의 동상을 영광군의 관문인 무량면 삼학공원에 건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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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친회 김수현 상임부회장과 영광군 무량면 삼학공원의 문안공 동상을 찾았다 (2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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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10년간에 걸쳐 종문 중흥사업을 완수한 종친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조의 위업을 기리는 김심언전(金審言傳)의 발간을 논의하던 차에, 제가 1992년 제3대 종친회장에 취임할 때 선임자인 김형규(金亨圭)명예회장으로부터‘종친회의 숙원사업은 문안공전을 편찬하는 일’이란 말을 듣고, 총회에서 임기 내에 이 사업을 완수할 것을 다짐했다.
다행히 향토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 영광군 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이기태(李其兌)씨의 도움으로 원광대학교 김갑동 교수, 공주대학 윤봉혁 교수, 목포대학 이해준 교수의 공동 집필로 이 책자가 발간된 것을 종친 여러분과 함께 경하해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 책자의 출판을 위해서 김두현 고문님을 비롯하여 김재희, 김수현 회장 및 김세환 총무의 수고가 많았음을 밝혀두며, 본서의 산파역인 이기태 씨와 원고를 집필해 주신 사학교수 세 분에게 종문의 이름으로 특별히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시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파란 많은 영광김씨 역사가 담긴 실록은 출간 후 모든 종원들에게 깊은 감회를 주는 필독서가 되었다. 더욱 보람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문 사이에 대단한 호평을 얻어 초판(1500부 발행)이 나오고 4개월도 지나기 전에 매진되어 재판에 들어간 것이었다. |
69. 사우(祠宇) 기천사(岐川祠)재건 -제10장- 이산가족으로서 숭조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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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는 종친회장이 되면서 시조를 모시는 사우 재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광김씨가 어느 씨족에 못지않은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시조의 후손이면서도 시조의 위상에 걸 맞는 사우가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95년 3월 15일, 기천사 춘향제(春享祭)에서 나는 여러 종친 유지와 유림들에게 다음과 같이 사우 재건을 위한 협조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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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4월 2일 기천사 춘향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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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3월 15일, 기천사 춘향제(春享祭)에서 나는 여러 종친 유지와 유림들에게 다음과 같이 사우 재건을 위한 협조를 부탁했다.
‘영광김씨의 시조이신 문안공 김심언 할아버지께서 이 땅에 오신지 1천년이 흘렀습니다. 회고하건데 우리 영광김씨는 시조 이후 4대가 연이어 재상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당대의 대표적 문벌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안공 시조께서 성종(고려 6대왕) 9년에 왕께 올린 봉사이조(封事二條)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봉사이조는 당시 중앙 및 지방관리의 복무자세를 명시한 지침으로써 부정부패를 해서는 안 되며, 국민을 위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새마을 운동의 공무원 교재에 천년 전의 봉사이조가 인용되고 있음을 볼 때, 문안공 선조께서는 대유학자이기도 했지만 대정치가로서 그의 사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 문화, 제도 등 여러 분야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광김씨는 어느 씨족보다도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시조의 후손이면서도 시조의 위상에 걸 맞는 사우가 없습니다. 현재의 기천사(시조를 모신 사우)는 70여 년 전에 영광유림들의 주동 하에 영광지역 종친들의 후원으로 건립된 사우로서, 경내가 협소하고 건물이 초라할 뿐 아니라 지은 지 오래되어 누차 보수하였는데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차마 눈뜨고는 보기 민망할 정도 입니다. 이 어찌 자손 된 도리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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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건사업으로 새로 단장된 기천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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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호소는 범(汎)종친의 공감을 얻었다. 그 여세로 종친 개인 부담금 총액 2억원(기혼자 1인당 및 30세 이상 미혼자 3만원)과 종친유지 특별성금 1억원을 목표로 1995년부터 예산 확보에 나섰다.
그러던 1996년, 임기가 만료된 나는 5대 김한용 회장에게 시조 사우 재건 사업을 인계하게 되었다. 퇴임 후에도 나는 명예 회장으로서 막후에서 재건사업을 도왔다. 모금이 부진하여 실무진이 애로를 호소하는 등 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때마다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조언도 하면서 사기를 높여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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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천사 앞에서 아내와 장남, 정환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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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수시로 진척 상황을 보고 받고 있던 중 김수현 상임부회장이 찾아와 그간의 경위와 더불어 재건사업이 일단락되어 1998년 11월 22일 재건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고, 나는 1억7천여만 원이 투입된 6개월여의 공사를 총지휘한 김상임부회장의 노고에 경의를 표했다.
준공식에는 수도권을 비롯하여 장흥, 여수, 고창, 광주, 전주, 군산, 파주 등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향각지에서 영광 김씨 각 종파 대표를 위시하여 종원 유림 등 400여명이 참석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영광향교 전교인 이기태씨는 축사에서‘기천사 중건은 영광김씨의 영광이자 영광 땅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영광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는 의의 깊은 날이라고 천명했다.
기천사 준공이 끝난 얼마 후 대종회로부터 기천사 사우 마당에 전임회장들의 공적을 기록할 기공비를 건립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숭조함양과 종친회의 중흥을 도모한다는 일념으로 소임을 다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극구 사양했지만 대종회 차원의 뜻을 끝까지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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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대 : 김한용회장님
- 재임기간 : 1995년~1997년
- 육군소장 전역
- 전 대한석탄공사부사장
그러던 중 6.25사변이 터져 파주선산이 전쟁터로 변하여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파주군 월롱면 일대에 포진지를 구축해야 했는데 하필 우리 선산에 구축
예정이던 것을, 포병 1대대를 지휘하던 김한룡장군(당시 대대장)이 "영광김씨문경공"이라는 비문을
발견하고 나서 아무에게도 그 사연을 말하지 아니하고 진지를 묘역 밖으로 이동, 구축하도록
하였으니 천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한룡 장군님은 경파(京派)중 충청도 충경공파 후손이시니 기묘한 인연으로서,
비단 일족(一族)의 정(情)뿐만 아니라 우리 장흥파 후손들에게는 선영을 구해주신 큰 은인으로서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장흥파 '영광김씨 참판공필파연원실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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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대 : 김재희회장님
- 재임기간 : 1998년~2000년
제 6 대 : 김수현회장님
- 재임기간 : 2001년~2003년
- 육군대령 전역
![](https://t1.daumcdn.net/cfile/cafe/2623AF43522CF52119)
제 7 대 : 김대환회장님
- 재임기간 : 2004년~2008년
- 시조협회장
제 8 대 : 김효전회장님
- 재임기간 : 2009년 ~ 2013년
- 청소년선도협의회사무총장, 서울시립청소년회관장
제 9 대 : 김영학회장님
- 2013. 5.25일 취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