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올리브 동산의 유다인 공동묘지
820m의 올리브산 중턱에는 유다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성당과,
겟세마니 동산의 키드론 계곡엔 그리스도 신자들의 무덤이 있으며,
예루살렘 대성전 옆의 성곽 앞에는 이슬람신자들의 공동묘지이다.
이처럼 예루살렘 대성 전과 올리브 동산에는 3대 종교의 공동묘지가 있는 셈인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대성전과 올리브산 사이에는 키드론 골짜기가 있는데
키드론 계곡 동쪽 언덕(올리브 동산)을 유다인들은 '여호사밧' 언덕이라고 부른다.
여호사밧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유다인 들의 전설에 의하면
최후 심판 때 모두들 무덤에서 나와 선한 이들은 이 키드론 계곡을 넘어 대 성전에 모이게 될 것이고,
악한 이들은 이 계곡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떠난 이들은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데,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침묵할 줄 모른다
빛 바란 묘지들을 바라보며 더이상 눈물이 없는, 영원한 평화를 기도한다.
예루살렘은 주인이 수없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주인들은 이미 잠든 이들까지 가만 두지 않았다.
신전이, 성당이, 모스크가 가차없이 파괴되었다면 인간들의 무덤쯤이야.....
19년에 걸친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통치 기간 중 올리브 산의 유태인 공동묘지의 파괴를 목격한 증언이다.
"묘지가 파헤쳐지고 뼈가 흩뿌려졌습니다.
수많은 비석들이 부서지거나 또는 요르단 병사들에 의해 옮겨져
요새, 도로, 막사 또는 화장실을 만드는 데 쓰여졌습니다.
아랍 예루살렘 자치회는 묘지를 파괴하고 비석을 건축업자들에게 판 상인들에게 특혜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올리브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인터콘티넨탈 호텔의 초석은
이때 팔린 비석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은 요르단의 위임통치 기간 중에 지어진 호텔)
막혀진 황금사원의 문...예루살렘 대성전으로 직접 통하는 골든 게이트...지금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마르 11,1-11) 이 성문을 통과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 성문이 6세기경에 만들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성문은 1530년 터키군에 의해 봉쇄 되었고, 1540년 슐레이만에 의해 성벽이 보수될 때 완전히 폐쇄되었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영원의 문, 심판의 문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쌍동이 문인 이 문 중 북쪽 문은 "통회 의 문", 다른 남쪽의 문은 "자비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 성문을 봉쇄시킨 신학적인 이유로 에제키엘 44,1-4절의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성문을 통과 하셨기 때문에 이제 봉쇄 되어져야 하고,
종말에 심판하러 오실때 이 문은 다시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에제 44,1-3 : 그 사람은 나를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다시 데리고 갔는데, 그 대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잠가 둔 채,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겨 있어야 한다.
다만 제후는, 그가 제후이므로 여기에 앉아 주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는 대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한다.”
오른쪽에 있는것이 즈가리야 예언자의 묘(왼쪽은 압살롬의 묘)
겟세마니 성당 앞쪽 키드론 계곡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묘지(그림 우)
유다인들은 지금도 죽은 다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올리브산에 인접한
기드론 골짜기의 경사진 지역에 가장 묻히고 싶어 한다.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올리브 산에 내려와
공동묘지의 중앙의 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집트 왕들의 묘지인 피라미드는 모두 나일강의 서쪽에 세워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해가 지는 서쪽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란 영혼이 몸을 떠나 새로운 영원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삶보다 영원한 죽음 뒤의 세계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들에게 평생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자신들의 묘지인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만일 육체가 훼손되면 정신과 재결합할 수 없게 된다고 믿어
시신을 약품으로 방부 처리하여 미이라를 만들었다.
죽은 시신도 사후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눈을 감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후 세계를 신성시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인간이 죽게 되면 땅 밑에 거처하다 종말이 되면 하느님 앞에 불려 나와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에게 죽음은 여기서 결코 소멸이 아니다.
육체가 현존하고, 최소한 뼈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동안에
영혼은 극도의 허약한 상태에 있을 뿐이었다고 믿었다(욥 26, 5 참조).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지만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느낀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유다인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시신을 소중히 다루었고,
예를 갖추어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미덕이자 선행으로 받아들였다.
장사를 치르지 못해 들에 방치되어 공중의 새나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도록 버려지는 것을
가장 큰 저주로 생각했다(1 열왕 14,11 참조).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게 되면 반드시 24시간 안에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신명21, 23 참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될 수 있으면 빨리 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창세 3,19 참조).
그래서 시신을 무덤에 안치할 때 세마포로 싸거나 나무 관을 이용한 것도
시신이 빨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런 조기 매장 풍습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이 매우 무덥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숨을 거두게 되면
임종을 지키던 아들이 직접 두 눈을 감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내세로 들어가는 길을 볼 수 있게 눈을 감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이집트의 풍습과는 전혀 달랐다.
죽은 시신에 입을 맞추기도 하는데(창세 50,1), 이런 풍습은 지금도 중동 지역에 남아있다.
눈을 감기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처럼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물로 깨끗이 닦아주고, 냄새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향료를 발랐다(루가 24,1).
그리고 유다인들은 임종시에 몇 가지 절차에 따라서 그 슬픔과 고통을 나타냈다.
먼저 가족가운데 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었다(창세 37,34).
옷을 찢고 난 후 상을 당한 이들은 누구나 굵은 삼베로 허리를 묶고 재나 흙을 머리에 뿌렸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그 마음의 아픔이 극심하다는 의식적인 표현이었다.
그리고 시신 앞에서 가족이 가슴을 치면서 눈물 흘리고 곡을 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창세 37,35).
이 곡소리는 상당히 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곡소리를 듣고서 초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또한 가족이 흘리는 눈물은 작은 병에 따로 모아두었다가
시신과 함께 무덤에 안치하기도 했다(시편 56,9).
시신은 땅에 매장하거나 동굴을 묘지로 사용했다.
동굴 묘지는 입구 바닥에 홈을 파고 둥근 돌로 가로막아서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다.
장례식은 무덤의 입구를 닫고 인봉을 한 뒤에 회칠을 하는 것으로 모두 끝났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곡은 대개 30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유족들은 사흘 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흘이 되어서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흘째부터 시신이 부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명절이 돌아오면 가족의 무덤을 찾아가 다시 회칠을 해서 깔끔하게 단장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죽음과 이별에 대해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비록 민족과 나라마다 관습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리라.
- 허영엽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이슬람들의 공동묘지
예루살렘 대성전 성곽 앞에는(올리브 동산 방향) 이슬람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예루살렘 대성전이(지성소) 있던 자리에는 현재 이슬람들의 "바위돔 사원"이 있는데,
이곳은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이며,
솔로몬이 지은 성전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자리였다.
바위돔 사원은 685년에 완공된 8각형의 웅장한 건물로서 이슬람교의 전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이 거룩한 바위에서 알라의 마지막 계시를 받기 위해 천국에 다녀왔다고 하는 곳이다.
이슬람 신자들에겐 5대 의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메카 성지순례(Hajj,하즈)에 대한 의무이다.
평생 한번은 메카나 메디나를 순례해야 하는데 예루살렘은 의무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라는 여호사밧 계곡..키드론 계곡...으로 통하는 예루살렘 동문 밖에서 최후의 심판을 할 것이며,
이때 메카와 메디나가 충성스러운 종복처럼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와서 신에게 경배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메카와 메디나가 최고의 도시이지만 심판과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이 최후 심판과 부활을 보게 될 도시라는 믿음이 강화되면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죽은 사람을 시온산에 묻었는데,
이들의 묘지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황금 문 밖,
신이 선악을 심판하러 오실 곳이라는 여호사밧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많은 이슬람 통치자들과 귀족들이 이곳에 묻혀있다.
사자 성문쪽에서 양 옆으로 이슬람들의 무덤이 있음, 여긴 오른쪽..
사자 성문은 스테파노 성문이라고도 하는데, 이 성문 근처에서 스테파노 성인이 순교했기 때문
철구조물로 보호되고 있는...예루살렘의 통치자였지 않았을까....
황금문...골든게이트....자세한 설명은...유다인들의 공동묘지를 참조하세요...
이슬람 공동묘지에서 바라본 올리브 동산...앞에 겟세마니 성당도 보이네요...
올리브 동산 중턱에 버스 두대가 있지요...오른쪽으로 쭉 따라가면...사진 중간에 우뚝 솟은게 있는데...이건 이슬람 사원이구요.
이쪽으로 조금 더 가면 나자로의 무덤이 있는 베다니아 마을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무덤-시온산
성서에서 시온은 야훼의 집(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곳이다.
오늘날 시온산으로 통용되고 있는 곳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성지이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발상지로서 최후 만찬과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곳이며,
제자들이 성모님과 함께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곳은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했을때, 기념 선물로 이 부지를 황제에게 기증했고,
베네딕도회에 넘겨져 마리아 영면 기념 성전이 들어섰다.)
시온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묘지이다.
현재 이곳은 가톨릭, 아르메니안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의 무덤이 위치해 있는데
유대인의 공동묘지나 이슬람의 공동 묘지 규모에 비하면 아주 작은편이다.
그러기에 현재는 납골묘 형식으로 바꾸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가톨릭의 경우. 그리고 정교회도 일부분...)
대문의 문양은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교구 문양이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지수호 관구의 문양이 십자가 다섯개의 모양이듯이...
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바라보이는것이 "성모님 영면 교회" - 베네딕도회 건물이다.
왼쪽이 마리아 영면 성당이고...오른쪽 건물은 수도원이다. 성모님 영면 교회 뒤편으로 최후의 만찬 자리가 있다.
이곳 납골묘에서 깜짝놀랐습니다....저는 분명히 그리스 정교회 묘지에 들어왔는데 ..
우리 한국 개신교 신자의 묘지가 두 구 있었기 때문이지요....김제창 집사님과...권사 이정숙님의 비석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고개숙여 먼저 떠나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돌아섰습니다.
이곳 무덤의 서쪽편은 프로테스탄트 무덤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인가 봅니다.
하늘에서 본 이스라엘 - 올리브 동산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먹었던 만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