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서영처
파란시선 0142
2024년 6월 2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09쪽
ISBN 979-11-91897-78-4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시간이 지나가는 곳 사라지는 선율들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은 서영처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북해 」 「털실 고양이」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등 45편이 실려 있다.
서영처 시인은 2003년 [문학/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 [가만히 듣는다]를 썼다.
서영처 시인은 산문집 [노래의 시대] 프롤로그에서 “모든 감각의 근원은 소리”라고 말한다. 특히 노래는 “마음의 가장 깊숙하고 후미진 곳까지 침투해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킨다”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존재의 의미는 개인적 층위의 단독자적 자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세계와 맺는 공동체적 관계에 의해 유연하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노래는 개인의 기억과 추억을 지배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기억과 추억을 지배하”며 시대적 맥락을 양식화한다. 이를 내면화한 개인에게 노래 및 음악은 사적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사유를 야기하고 사회와 세계로 주체의 시선을 넓힐 계기를 제공한다. 시인은 “예술이 주는 환희와 황홀은 인간의 감성과 의식을 변화시키고 보다 확장된 무한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진술함으로써 이에 응답한다. 이는 서영처 시인이 이전 시집 [피아노 악어]와 [말뚝에 묶인 피아노]를 통해 형상화한 세계에 대한 시적 감각의 기원을 짐작하게 하는 유의미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시적 감각은 세 번째 시집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에서도 반복, 재생된다. 그것은 피아노를 전유해 ‘세계의 원리’를 거칠게 형상화한 시 「피아노의 세계, 세계의 원리」에 잘 드러난다. 피아노 건반의 형상을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환원하며 시작하는 이 시는 이 코드를 “실득실득실실득”과 “공색공색공공색”, “모자모자모모자”로 변주함으로써 얻고 잃음, 허무와 욕망, 파편화된 언어적 질서 등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원리를 비교적 간단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접한 우리는 어떤 정동적 동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음악적 감성과 의식을 통해 “얼어붙은 흰 들판”에서도 “흑백 논쟁”에 매몰되어 있거나 “이해(利害)를 따지”는 세태를 비판하고 소비주의적 사회의 기만적 폭력성이 삶의 배면에 놓여 있음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시인은 “어디로 가는가 파이드로스여”라고 묻는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아가 “아름다움은 두 얼굴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전언을 시의 끝에 배치함으로써 ‘0’과 ‘1’의 세계, ‘흰색’과 ‘검은색’이 분리된 것이 아닌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지시킨다. ‘실’과 ‘득’, ‘공’과 ‘색’, ‘모’와 ‘자’는 각각 이중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나 분리 불가능한 원리로써 작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피아노의 음악적 감각을 전유하여 저 바깥의 세계에 공명함으로써 내적 울림을 가능케 하는 데로 이어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문학의 음악’ 혹은 ‘음악의 문학’이라는 시공간을 서영처라고 할 수 있지만, 저간의 사정은 간단치 않다. [피아노 악어]를 비롯한 전작들과 [노래의 시대] 등의 산문집에서 서영처는 음악의 이미지를 문장 곳곳에 배열했다. 이 개성적인 문학장에서 이왕의 리듬과 소리까지 다채롭게 호명할 수 있지만, 음악/문학에 대한 시인의 탐구는 이제 음악/문학 너머에 자주 머물려 한다. “눈물, 연꽃, 배임, 횡령, 사기 같은 단어를 섞으면 한 마리 악어가 나타난다/생각이 복잡한 가방 속에서 불쑥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악어의 관능은 여전히 주요한 모티브이지만(「콘트라베이스」) “마음을 휘감는 선율을 따라 너는 남고 나는 바다를 건너 떠나오고”처럼 명징한 장소성 또한 중요해졌다(「라 팔로마」). 첫 시집의 표제작 「피아노 악어」에서 “피아노 뚜껑을 연다/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악어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여든여덟 개의 면도날 이빨이 덥석 양팔을 문다/숨이 멎는다”부터 시인의 행로는 예감된 바 있다. 하지만 어찌 쉽사리 가늠하겠는가. 음악과 문학이라는 평행선을 따라가는 서영처의 여정은 문학의 발전(發電)과 암전(暗轉)이라는 측면에서 정치한 예측이 쉽지 않다. 이번 시집에서도 음악 요소가 여전히 유효한 시적 통점인 것은 다르지 않지만(「콘트라베이스」), 시적 좌표는 생과(「베를린 천사」) 생활과(「털실 고양이」) 그리고 세계에(「난민 캠프」) 대한 관점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감각의 근원을 소리라고 믿는 시인에게 기표/이미지는 소리의 종속 갈래이다. 시인은 산문에서 자신의 음악 지향성을 ‘더 견고하고 체계화된 세계 속에서의 충만한 영혼’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진즉에 서영처의 문장 단위가 “울렁거리는 지층에서 태어”난 “검은 줄과 흰 줄의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영혼의 표면이라고 조금 짐작해 본다(「얼룩말」).
―송재학(시인)
•― 시인의 말
고양이가 턱을 묻고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장미 이파리를 바라본다.
시간이 지나가는 곳
사라지는 선율들,
•― 저자 소개
서영처
2003년 [문학/판]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 [가만히 듣는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지하철역에서 – 9
폭설 – 10
다시 봄, – 11
콘트라베이스 – 12
북해 – 14
라 팔로마 – 16
털실 고양이 – 18
환상수림 – 20
난민 캠프 – 24
여름 음악 캠프 – 25
얼룩말 – 28
수렵도 – 29
도시의 규격 – 30
여배우 – 32
그믐 – 34
경계 – 36
베를린 천사 – 38
아시아의 밤 – 40
이후의 해변 – 41
해변 – 42
삼월 – 44
건기 – 46
필름 – 48
달리의 해변 – 50
종이 피아노 – 52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54
한여름 밤의 숲 – 55
비단길 – 56
가뭄 – 58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헌화 – 60
장미의 세계 – 62
골짜기의 백합 – 64
우리 동네 – 66
장미맨션 – 68
이 어둡고 깊은 우물 – 70
바코드 – 72
나쁜 피 – 73
마술 피리 – 76
그해 가을 – 78
피아노의 세계, 세계의 원리 – 80
이 시간 – 82
Mississippi Blues – 84
아마도 – 86
프레임 – 88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 89
해설 이병국 시적 공명, 그 수행의 울림 – 91
•― 시집 속의 시 세 편
북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함선을 보며 함순을 생각한다
그와 나 사이, 함순과 새순 사이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지만
눈보라를 헤치고 그가 쇄빙선을 몰고 온다
굶은 지 오래된 사람처럼 움푹 팬 볼, 함구하는 입
얼어붙은 갑판 위에 자작나무 빗자루처럼 선 다리가
으르렁거리는 얼음의 두께를 감지한다
얼음이 움직인다
안개 속으로 부딪힐 듯 지나가는 얼굴들, 선박들
눈처럼 하얀 냅킨과 포개 놓은 빵
그의 신부가 던진 부케가 떠돌아다니는 북해를 지나
한 가지 연료만으로 견디는 쇄빙선 위에서
그의 기관도 식초에 절인 청어만으로 견딘다
바람 없는 날이 계속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날에도
퀴퀴한 선실에서 함순은 책을 읽는다
이따금 하모니카를 분다
침묵으로 허구한 말을 함축하는 함순
누군가는 시인이라 하고
누군가는 혁명가라 하고
누군가는 떠돌이라 했다
소문은 항구에서 항구로 유빙처럼 떠다닌다
겨울바람을 머플러처럼 두른 바닷가 마을
일각고래의 항로를 따라 여름은 오고
사는 일이 슬퍼 더는 공동묘지를 배회하지 않으리라
함몰호 같은 눈을 한 그가 오랜만에 입을 열어 함수초처럼 웃는다
언제든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는 듯
매서운 추위와 긴 밤을 끌고 그가 온다
*얼어붙은 갑판 위에 자작나무 빗자루처럼: 크누트 함순, [굶주림]. ■
털실 고양이
겨울 해는 보푸라기가 많다
털실 꾸러미처럼 천천히 굴러간다
고양이가 양지바른 곳에서 털을 고른다 존다
잠의 동굴 깊숙이 굴러들어 온 해를 쫓아다니며 장난을 친다
쥐를 잡았다 놓았다 놀리는 것처럼
두 알의 개복숭아를 달고 꼬리를 바짝 세우고 걸어온다
꼬리로 물음표를 만든다
고양이 왈츠를 들으며 피아노 위에서 잠든다
햇살은 하늘을 할퀸 자국
앞발을 핥는 입가에 향기로운 수술이 돋는다
털실과 먼지, 정적으로 이루어진 고양이
눈 속 깊은 곳으로 분자구름이 떠다닌다
고양이가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학교에 간다
햇살을 발톱에 걸고 뛰어다닌다
풀어낸 햇살로 그새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짠다
스웨터를 풀어 바지를 짜고 바지를 풀어 장갑을 짜고 나를 풀어 아이를 짜고
닳고 닳도록 코를 걸어 떠 내려간 내력
아이가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매듭과 문양의 이야기를 듣는다
잠이 많은 겨울 해가 눈꺼풀 속 괴발개발 찍어 놓은 발자국
낚아챌까 말까 낚아챌까 말까 고양이는 해를 훌쩍 낚아챈다 ■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동물보호구역에 62세의 람 두안이 산다
펄이 자주 방문해서 연주를 한다
먼 산맥엔 바람에 헤진 룽다가 펄럭이고
그만큼 헤진 귀를 펄럭이며 두안은 음악을 듣는다
밀려오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긴 코를 흔들며 피아노 곁을 서성거린다
삶이 빈 요새처럼 적막으로 가득 차서 흘러나오는 선율
펄이 평균율을 치는 동안
쇠꼬챙이와 사슬이
서커스의 눈부신 조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벌목장의 나무가 허리를 덮치고
두안이 제 몸에서 울부짖는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무거운 보따리들을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
코끼리의 꿈이 투영된 환영 같은 날
두안은 강물인 듯 바위인 듯 생각이 많은 채로 서 있다
밀림엔 검은 피아노 한 대,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숲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저녁 속으로
두안은 신전의 기둥만 한 다리를 천천히 옮긴다
밤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곡예하듯 한 발로 서서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나무들
코끼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