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마화성(魔花城)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세며, 원숭이는 슬피 우는데…….
물은 맑고, 모래는 희고, 새들은 날아다닌다.
끝없이 늘어선 나목(裸木)들은 쓸쓸히 잎만 떨어뜨리고, 기나긴 강은 줄기차게 용솟음치고 있도다!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廻,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고향을 만 리나 떠나 이 슬픈 겨울에 나그네 되어,
병든 몸을 끌고 홀로 언덕에 오르노라!
쓰디쓴 괴로움에 머리는 눈 맞은 듯 희어졌고,
실의 때문에 즐기던 술조차 잊었노라.
萬里悲冬常作客, 百年來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首, 倒新亭濁酒杯忘.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에는 가없이 너르고 푸른 겨울 하늘을 담고, 손아귀에는 마른 억새풀을 휘어 쥐었으며, 발 아래에는 눈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이끼더미를 밟고 있었다.
"높군."
그는 거대한 산영(山影)에 몸을 묻고 있었다.
삼십육봉(三十六峰)이 하나하나 선경(仙境)이라는 안휘성(安徽省)의 절대명산 황산(黃山)에는 삼십육봉 이외에도 삼봉(三峰)이 있다.
석고(石鼓), 시신(始信), 천도(天都).
일컬어 황산삼봉.
이 세 개의 준엄한 봉우리들을 삼십육봉 연잎이 꽃술을 휘감듯이 아름다운 자태로 휘감고 있다.
멀리서 황산을 보면 하나의 연화(蓮花)였다.
조금 더 들어가면 무너질 듯한 벼랑이 하늘가에 닿고, 원숭이도 오르지 못할 천 길 만 길 벼랑 아래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왜소함을 느끼게 된다.
백운(白雲)은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아무도 다 보지 못했다는 황산! 그 거대함과 준엄함은 이미 하나의 신(神)이었다.
회삼(灰衫)을 걸친 섬약(纖弱)한 청년, 그는 오랫동안 천도봉 위를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다. 그의 눈은 별빛이 떨어져 내렸다가 도망치지 못하고 잡혀 있는 듯이…….
아아, 고혹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과 코.
그는 뒷짐을 지고 천도봉을 올려다본다.
"저 안에 야망의 나래를 펼 터전이 준비되어 있단 말인가?"
그윽하기까지 한 목소리, 여장을 한다면 어떤 미녀보다도 더 아름다울 것이다.
저벅-!
그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의 한 걸음이 미처 바닥을 딛기도 전에 사방에서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눈 속에서, 얼어붙은 바위 뒤에서, 벌거벗은 나무등걸 속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 둘, 셋, 넷…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정확히 오백이었다.
모두 눈보다 흰 백의(白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들의 눈은 놀랍게도 모두 죽어 있었다.
감정이 전혀 없는 눈들, 이들의 눈은 청년의 몸과 그 근방만을 샅샅이 살핀다.
오백 인은 청년이 걸어감에 따라 진세를 바꾼다.
청년이 개울 가에 이르면 물 속으로 들어가고, 바위가 많은 곳에 이르면 즉시 바위 뒤에 숨고, 숲에 이르면 즉시 숲 안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저벅- 저벅-!
청년은 걸으며 중얼거렸다.
"자네들은 변도 보지 않는가?"
그는 묘하게 웃었다. 여인이라면 그 미소에 입을 맞추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가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지요. 제일위검대(第一衛劍隊)의 비밀을! 저희들은 용변을 보지 않기 위해 식사 대신 벽곡단(碧穀丹)을 취합니다. 처음에는 괴로웠으나, 이제는 이골이 나서 괜찮습니다. 벽곡단의 찌꺼기는 삼매진화로 태워버리고, 소변 역시 내장에서 태워버립니다!"
말하는 자, 그는 잔풍(殘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일위검대의 수석검(首席劍)이었다. 그는 가슴에 한 자루의 보검(寶劍)을 품고 있다.
천뢰전룡검(天雷戰龍劍).
그 보검은 신기(神氣)를 띠고 있다.
잔풍은 벌써 보름째 검을 안고 청년을 뒤따랐다.
마무정(魔無情)인가?
아아, 그가 나타난 것인가?
'고마운 사람들. 늘 나를 따르며 호법을 서 주다니! 처음에는 귀찮았으나, 이제는 괜찮다.'
마무정은 오백 위사를 충심으로 고맙게 여겼다.
'자네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늘 내공을 연마할 것이네. 내가 강해야 자네들의 호법 일이 한결 쉬워질 테니까. 늘 나의 내공을 닦겠네!'
마무정은 본시 위사를 거느리고 다닐 작정이 아니었다. 한데, 삼천 리 밖에서 헤어진 마박사의 간곡한 조언으로 인해 그는 일천 위사 중 오백을 거느리고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아무리 급한 경우라 하더라도 오백 위사는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깨어질 수 없는 율법(律法)입니다. 천하정세를 수소문하는 데에는 오백이면 되니, 나머지 오백은 대총수를 따르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냉동되었습니다. 술도 참고, 욕망도 참고, 대총수의 그림자가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바라는 일입니다!
마박사의 간곡한 권유로 인해 마무정은 오백 위사를 그림자로 대동하게 되었다.
마무정은 천도봉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노을을 정면으로 받으며 하산길에 올랐다.
황산진(黃山鎭), 황산 일대의 물자가 바뀌어지는 장소이다.
황산진 일대에서 가장 크다는 녹원객잔(綠園客棧)!
마무정은 그 곳을 사흘 간 통째로 세를 내었다. 그 역시 대총수의 법도에 따른 것인데…….
<대총수는 혈화삼이 누릴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늘 언행에 체통이 있어야 합니다!
가신(家臣)들을 찾으실 때에는 한 가지 예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그것은 가신들이 직접 나와 구배(九拜)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법도는 매우 엄했다.
일반 강호인들은 마가를 패륜집단으로 알고 있다. 하나, 마가 내부에 있다 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가의 법은 정파에 비해 현격히 엄했다. 그 이유는 하나, 마가는 작은 것을 노리는 집단이 아니라 큰 것을 노리는 야망의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새벽이 될 때, 마병야(魔兵爺)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눈 덮인 까치집을 한 봉두난발에, 허름한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그는 마무정이 수석검 잔풍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자, 미소를 지었다.
'하인들과 스스럼없으시니… 장차 하인들은 저분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칠 것이다. 물론, 저분은 바라지 않을 것이나…….'
마병야, 그는 사흘 전 단신으로 천도봉 위로 올라갔다.
그는 마무정이 마화성(魔花城)을 찾아가기 이전,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단독으로 산상에 오른 것이다.
마병야는 안개가 흐르듯이 마무정 뒤쪽으로 다가섰다.
"자네가 졌어. 이제는 투석할 수밖에 없어!"
마무정은 흰 돌로 한 곳을 점하고 있었다.
화룡점정!
마무정이 놓은 자리는 잔풍의 대마(大馬)가 죽은 자리였다.
잔풍의 바둑은 과거 국수(國手)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 점을 붙이고도 벌써 아홉 판 내리 졌다.
"대마불사(大馬不死)도 아니군요?"
잔풍은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위검대 소속무사들이 다 그러하듯, 그도 앙상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허름한 흰 옷을 걸치고 있어, 바람이 분다면 날아갈 정도로 약해 보였다.
그가 열다섯 가지 쾌검(快劍)에 능하며, 열여덟 가지 암기를 한 손으로 쳐내며, 서른여섯 가지 은신술로 물 속이건 바위 속이건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몸을 감출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을 외모로는 알지 못할 일이었다.
슷-!
잔풍은 한 걸음 옮기는 찰나, 사라졌다. 그는 천장 위쪽으로 슬쩍 숨어든 것이다.
이제부터는 마병야도 목을 조심해야 한다. 마병야도 이제부터는 위사들로부터 일단 의심을 받는다.
만에 하나, 쓸데없는 동작을 한다면 사방에서 검이 날아들 것이다.
제일위검대!
마무정이 갖고 있는 유일한 조직이고, 고금에서 가장 강한 호위조직이었다.
두 잔의 차(茶)를 나르는 사람은 나이 어린 중노미였다.
그는 하품을 하며 황산 특산인 설록선향차(雪綠仙香茶)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귀 같은 늙은이가 신선 같은 청년과 함께 있다니… 세상은 요지경이다.'
중노미는 알지 못한다.
그가 며칠 간 조석으로 대한 미남자가 바로 천하의 고수이고, 장차 천하에 파란을 일으킬 사람이라는 것을…….
"더 시키실 일은?"
중노미 왕소오(王少五)가 하품을 참으며 묻자, 마무정은 흰 손으로 왕소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얘야, 가서 자거라!"
또 한 손으로는 은자 한 냥을 왕소오의 코 묻은 손에 가볍게 쥐어 주면서.
왕소오의 볼은 와락 붉어졌다.
이 년 전, 열병에 걸려 죽은 그의 형이 하나 있다.
왕소사(王少四), 그는 왕소오에게 정말 잘해 주었었다.
왕소오는 마무정의 손에서 죽은 형의 손을 느낀다.
'고마워요. 이런 따뜻한 손길은 처음입니다.'
"속하, 놀라운 것을 여러 가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숨어 보다가 이제 내려온 것입니다!"
마병야는 차가 다 식도록 마시지 않았다. 대신, 마무정은 차를 한 주전자 거의 다 비웠다.
"이상한 것이라니? 성(城)이 없기라도 하던가, 노야?"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마무정도 흠칫하고 만다.
마화성(魔花城).
그 곳은 대총수의 야망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곳의 제사비천검대장은 제오나찰검대장(第五羅刹劍隊長)의 위치를 말해 주는 역할도 한다.
성이 없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대종사가 가져야 하는 일곱 가지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있는 것은… 초막(草幕) 하나였습니다!"
"초막?"
"여인이 혼자 사는 초막이었습니다!"
"……!"
"백수란(白水蘭)이라 하는 미녀인데, 늘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 피리 소리는 평범한 강호지곡(江湖之曲)이었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새 떼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새?"
"수천 마리 매가 떴습니다. 매는 너무 높이 떴는지라 그 위, 사람이 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외?"
"일대에는 약을 캐는 심마니 무리가 촌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강호방파의 정경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이었습니다!"
"흠……!"
"괜히 속하가 대총사를 따른 듯합니다. 마박사였다면 속하보다도 자세한 것을 알아 냈을 텐데……."
마병야가 부끄러워하자, 마무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시다!"
"예? 가다니요?"
"나의 성(城)을 찾아서!"
"예… 에?"
"훗훗… 내 짐작대로라면 아마도 마병야는 진세로 인해 환각을 봤던 것 같소!"
"환각이라니요?"
"훗훗… 나는 마병야가 위를 뒤지고 있을 때 아래서 위를 봤소. 그 때 나는 강한 기운을 느꼈소!"
마무정은 문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기운을……?"
"거대한 마의 기운을! 쓸쓸한 겨울 나그네를 쉬게 할 그런 기운이었소!"
마무정은 빙긋 웃고 있었다.
ꠑ천도봉(天都峰) 정상(頂上)이었다.
바람이라도 강하게 불면 무너질 듯한 초막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장소는.
삘리리- 삘리리-!
새벽은 안개와 더불어 피리 가락을 타고 깨어나고 있었다.
바람을 춤추게 하고, 눈을 얼리는 피리 소리가 천년설(千年雪)의 절봉(絶峯) 위를 휘감는다.
조금 열려 있는 초막의 문틈으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흑삼을 걸친 몸집이 작은 소녀, 그녀는 고서 한 권을 펴 놓고 거기 적힌 대로 박자 음률을 맞춰 피리를 불고 있었다.
눈썹이 반달같이 휘어져 눈썹 끝에 닿았고, 코끝은 마늘쪽처럼 오똑한 채 지금 기울어져 있었다.
피리 불기가 힘든 듯 콧등에는 땀방울이 매달렸다.
미소녀 백수란(白水蘭),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살아왔다. 하는 일이라고는 피리를 부는 일이 전부.
그녀의 피리 소리는 일대의 심마니들을 즐겁게 했고, 눈과 바람을 춤추게 했다.
이 날 새벽에도 그녀는 피리를 분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아름다운 눈이 두 개 있었다.
초막에서 일 마장 떨어진 곳, 회색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거리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미남자가 있었다.
"대단하오. 상상 이상이오. 가히 완벽이오."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청년.
그의 등 뒤에는 구부정한 계피학발의 노인이 하나 서 있었다.
'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그것인데,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청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능히 십만(十萬)이 날개를 펼 수 있는 철옹성이오. 마화성(魔花城)은 첫 상봉부터 나를 기쁘게 했소!"
"성… 성이 어디에 있는지오?"
"저기 있지 않소?"
"예?"
"훗훗… 흙이 성을 묻어 버렸고, 심마니들이 피리 곡조에 맞춰 운용하는 변환진(變幻陣)이 성을 휘감고 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오!"
"예… 에?"
"핫핫… 가서 알리시오, 대총사가 왔음을. 제사장로와 휘하고수들을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듯하지 않소이까?"
마무정은 그야말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가 보고 느낀 것, 그것은 천년마고에서 본 어떤 것보다도 거대한 힘이었다.
아아, 거대한 성(城).
마화성은 지하에서 기나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마병야, 가긴 가되 조심해야겠소!"
"왜요, 대총사님?"
"훗훗… 가면 알 것이오."
"예?"
"가면 알게 될 것이라 하지 않소?"
翁읜꼭?조각된 비취적(翡翠笛)!
백수란의 손은 비취적을 휘감은 고운 눈(雪)이었다.
너무나도 희고 아름다운 손!
백수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여짐에 따라 피리 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봉비용무지곡(鳳飛龍舞之曲).
그것은 가히 신의 음색.
일곱 빛깔의 채운이 내려앉고 별무리가 떨어져 내리는 듯, 지금 천도봉 주위에는 미세한 기(氣)가 흐르고 있었다.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심오한 기운의 흐름은 팔괘(八卦)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움직임, 그것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보라! 수천 마리의 새가 떼지어 움직이는 것을!
놀랍게도 새 떼는 피리 소리에 맞춰 방향을 바꾼다. 어떤 때에는 날개가 꺾어지기라도 한 듯 급박히 떨어져 내렸고, 또 어떤 때에는 꾸우… 하는 울음소리를 끌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가끔 가다가는 깃털을 날리며 허공에서 급선회를 했고, 잘 단련된 정병들이 도열을 하듯이 하나의 병진(兵陣)을 치며 허공을 누비고 날아다녔다.
일컬어 만익금쇄지괘(萬翼禁鎖之卦)!
두 번째 움직임은 일대를 돌아다니는 심마니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채약(彩藥) 호미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듯하나, 대오가 일정했다.
그들 역시 피리 소리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돌아다녔다.
그것은 팔방풍우괘(八方風雨卦)에 따른 절묘한 움직임이었다.
세 번째 움직임은 약사(藥師) 차림을 한 일단의 마의인(麻衣人)들에게서 있었다.
그들은 주로 송하(松下)에 있는데, 그들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진세를 설치하고 있었다.
봉황포란괘(鳳凰抱卵卦)!
약사들은 봉황이 알을 감싸는 듯한 형세로 산정을 휘감고 있었다.
네 번째 움직임은 나무 사이 누워 자는 초부(樵夫)들에게서 있었다.
큰 도끼를 하나씩 쥔 사람들, 수는 이십팔(二十八).
이들은 무궁이십팔숙(無窮二十八宿)의 괘(卦)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의 괘(卦)는 허무괘(虛無卦)였는 바, 그 기운은 가장 신비로웠다.
나무 뒤나 눈 속, 외부인이 보기에는 자연물로 보이는 일단의 은둔자(隱遁者)들이 있었다.
그들은 드넓은 방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이 설치한 진의 중점은 바로 백수란이 머무르는 초옥이었다.
여섯 번째의 괘는 설마풍(雪魔風).
높은 산에는 으레 머물러 있는 날카로운 바람, 그 바람이 이 곳에서는 하나의 진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백수란의 피리 가락에 따라 방향을 달리했다.
어떤 때에는 서북풍(西北風)으로, 피리 가락이 고조될 때에는 남동풍(南東風)으로… 바람은 촌각(寸刻)마다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일곱 번째의 괘, 그것은 허무괘와 마찬가지로 눈에 언뜻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심극지중괘(心極地中卦).
초막의 지하에서부터는 온기가 일고 있었다.
아아,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땅 속을 오락가락거리고 있었다. 그 수는 가히 일천(一千)이었다.
거대한 돌덩이 아래에는 인공의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백수란의 피리 가락이 살조(煞調)로 바뀐다면 그들은 즉시 정해진 진도에 따라 땅거죽을 찢고 튀어나올 것이다.
일대는 그 순간 도산검림(刀山劍林)으로 화할 것이고, 오백 장 안은 천참만륙검세(千斬萬戮劍勢)에 의해 사납게 누벼지리라.
여덟 번째의 괘, 그것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피리를 불고 있는 백수란도 마지막 괘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삘리리- 삘리리-!
물이 흐르듯이 어떤 흐름을 갖고 굽이쳐 나가는 그윽한 피리 소리, 그 소리는 걸찍하고 창노(蒼老)한 목소리로 인해 일순 끊어졌다.
"고약한 아해(兒骸)들이로군."
천도봉 위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답허능공(踏虛凌空)이라는 절묘한 보법을 써서 허공을 딛고 가는 계피학발의 노인, 그는 며칠 내내 일대를 살펴본 바 있던 마병야였다.
"끌끌… 노부를 무안 주어도 유분수지. 어이해 진세를 그리도 심오하게 감추어 정말로 오랜만에 강호에 나온 노부를 무안스럽게 하느냐?"
마병야(魔兵爺)는 일진선풍(一陣旋風)을 일으키며 진도 안으로 날아들려 했다.
그가 초옥에서부터 백오십 장 떨어진 곳에 이를 때였다.
"왔… 왔는가, 대총사께서? 오오, 드디어 오셨는가?"
백수란의 눈빛이 아름답고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 위대하신 마도대총수의 출현이신가?'
백수란의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농익었다기보다는 설익어 보이는 여인, 어딘지 모르게 풋풋한 내음이 나는 미녀 백수란은 마병야가 흰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오는 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보라! 마병야의 가슴에 안겨 있는 신패(信牌)를.
호화찬란한 오색수술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칠보주옥패(七寶珠玉牌)!
그것은 바로 전 마가 대총수의 신패로, 상대(上代)의 혈화삼들이 권능을 인정한 것이다.
백수란은 감격에 겨워 칠보주옥패를 바라본다.
'마침내 오신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마도의 대총수께서!'
그녀의 눈빛이 격동으로 심하게 일렁거렸다.
그녀의 무릎이 절로 굽혀지려는데, 그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결처럼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는 기이하게도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심령을 통해 전해졌다.
-마가의 법을 잊었는가? 후후, 주인을 맞이하는 법이 있을 텐데… 설마 그것을 잊었단 말인가?
타인의 목소리가 귀를 통해 들리지 않고 가슴 속에서 울려 나오다니… 마치 꿈에서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환청이 들리다니… 아아, 그나저나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백수란은 절을 할 듯하다가 허리를 폈다.
마병야는 그 사이 오십 장 더 다가서서 진세의 정중앙에 이르렀다.
"별일도 없군. 클클……!"
그가 은발을 바람에 경쾌히 휘날리며 초막 쪽으로 접근하기 다시 십 장.
돌연, 백수란은 잠깐 입술에서 떼어냈던 비취적(翡翠笛)을 다시 입가에 댔다.
"율법에 따라 건곤살조(乾坤煞調)로 대총수를 마중합니다!"
너무나도 그윽한 목소리였다.
바람의 넋과 같은 미소녀 백수란은 운발(雲髮)을 바람에 흩트린 채 눈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
"아해야, 무엇 하는 게냐? 어서 절하거라. 아주 귀엽고 공손히 절해야 한다. 한데 왜……?"
마병야는 다가서다 말고 움찔하는데…….
"죄송합니다만 무공을 시험해야겠습니다. 시시하더라도 참고 참관해 주십시오!"
백수란의 볼에 오목한 볼우물이 두 개 패였다.
삐이이- 익-!
갑자기 백수란의 피리 소리가 허공을 깨뜨렸다.
미친 바람이 만학천봉을 스치고 지나가듯이, 돌연 회오리바람이 불며 사위가 먼지에 휘감기듯이, 매우 예리한 피리 소리와 더불어 여덟 군데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허공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만익금쇄(萬翼禁鎖)!"
허공에서 수천 마리의 매들이 날아 내리며 바람을 일으킨다.
수백 수천 마리의 거대한 매들, 매의 등 뒤에는 사람이 간간이 타고 있었다.
"진세에 따라 날아들라!"
"대총사께 우리가 그간 나태히 소일하지 않았음을 보여 드리자!"
끄으으… 윽… 끅……!
수천 마리의 거응이 우레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그 찰나.
"팔방풍우(八方風雨)!"
"봉황포란(鳳凰抱卵)!"
"무궁연환수(無窮連還手)!"
"허무쇄(虛無鎖)!"
꾸역꾸역 모여드는 검은 그림자들!
약사(藥師), 초부(樵夫)와 괴검사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면서 검은 바람을 일으켰고… 설마풍(雪魔風)이 일순, 선회역풍(旋廻逆風)으로 돌변해서 마병야 주위를 얼음 바람으로 차단했다.
파- 파- 팟-!
가공할 한기가 몰려들며 사위는 설막(雪幕)에 잠긴다.
"이… 이게 웬 조화(造化)냐?"
마병야의 은발에 얼음 조각이 주렴처럼 매달렸다.
아아, 뼛속까지 삭혀 버리는 가공할 한기.
기류는 달팽이 껍질처럼 핑그르르 돌며 돌 조각과 얼음 조각을 이십오 장 높이로 휘말아 올렸다.
어디 그뿐인가?
돌이 쩌억 갈라졌고, 흙벽이 병풍 쪼개지듯 찢겨져 나가며 푸른 빛줄기가 수백 개 솟구쳐 올랐다.
"지중검대(地中劍隊)!"
"하아- 앗-!"
이번에는 땅 속에서부터 일단의 고수들이 솟구쳐 올랐다.
수는 거의 구백(九百). 그들은 검을 쥐는 대신 지행차(地行叉)와 단극자(斷極刺)라는 기문병기(奇門兵器)를 손에 쥐고 있었다.
삽시간에 삼천 고수(三千高手)가 마병야 주위로 다가섰다.
물방울 샐 틈도 없는 전율스러운 진세가 드넓게 펼쳐지는데에는 탄지지간도 걸리지 않았다.
휘휙- 휙-!
하늘과 땅(天地)! 천지가 암흑에 휘감기며 마병야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제기랄, 대총수령을 쥐고 호가호위하다가… 개죽음이로군!"
마병야는 감히 저항하려 하지도 못했다.
혼비백산(魂飛魄散)!
진세가 일어나는 찰나, 그는 경맥이 마비되는 통증을 느끼고 이 장 허공에서 끈에 달린 허수아비 마냥 멈추고 말았다.
콰앙-!
무자비한 폭음이 잇따라 터지며, 마병야의 얼굴은 점점 샛노래졌다.
"이 곳은 과거 노부의 바둑 상대였고, 술친구였던 절대마가의 뇌마공(腦魔公)이란 괴물의 후예들이 머무르는 곳임에 틀림없는데… 제기랄, 뇌마공의 아해들에게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마병야는 죽는 시늉을 하면서도 최후의 저항만은 잊지 않았다.
그는 회선마룡표(廻旋魔龍飄)라는 절기를 시전해 몸을 회전시키며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하는데… 그의 몸이 칠 장 정도 떠오를 때 가공할 일이 벌어졌다.
츠츠- 츠- 츠-!
섬뜩한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돌연 지표(地表)에서부터 수천 개의 금빛 새끼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병야의 몸을 향해 섬전처럼 다가가는 수천 개의 새끼줄, 화려한 금빛을 번쩍거리는 삭(索).
아아, 자세히 보면 그것은 금삭(金索)이 아니라 금선사(金線蛇)였다.
길이가 커야 일 척 오 촌(一尺五寸). 굵기는 새끼손가락보다도 가는 독사인데,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타액으로 금(金)을 녹인다.
그리고 비늘이 떨쳐질 때마다 독무가 흐르고, 입을 벌리는 찰나 몸 길이의 십 배 길이에 달하는 삼지독설(三枝毒舌)이 채찍줄처럼 쭈욱 쭉 뻗쳐 나간다.
거기 걸려들면 강철 방망이라도 바스러지고 만다.
허공을 덮는 만 마리 금선사군(金線蛇群)!
금빛 장막처럼 마병야의 몸을 뒤덮어 가는 금선사군은 마화성 일대의 마지막 호법이었다.
일컬어 비사추혼괘(飛蛇追魂卦)!
그것은 바로 감춰진 제팔괘(第八卦)였던 것이다.
허공은 새 떼로 뒤덮였고, 주위는 사람의 벽으로 뒤덮였다.
꾸역꾸역 나타나는 마화성의 수비대고수들. 사위를 뒤덮어 버린 설마풍(雪魔風)과, 그리고 찰나적으로 마병야의 그 모진 바람을 가차없이 뚫고 들어가 마병야의 몸을 칭칭 동여매려 하는 만 마리의 금선사!
찢어질 듯한 건곤살조(乾坤煞調)!
"대총수, 그냥 보고 계실 것이외까?"
마병야는 허공에서 처절히 부르짖었다. 그는 사색이 되어 사지를 부르르르 떨며 말했다.
"제발… 비록 늙었으되,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사람된 욕심이외다. 속하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나, 정녕 이대로 죽게 하실 것이외까?"
그가 울부짖듯 말할 때였다.
"그게 아닐세, 노인. 나는 다만 여덟 번째 호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최근 마병야 노인이 사는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해, 권태감을 씻으라고 즐거운 놀이를 보여 주려 했을 뿐이네! 그리고 나는 이 곳의 수비가 어느 정도인지 실전(實戰)을 통해 알고 싶었네."
허공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백수란의 가슴 속에서 흘러 나왔던 그 목소리가 뿌연 그림자 속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결과는 대만족이니 노야의 고생은 값진 고생이네그려. 핫핫…!"
언제 나타났을까? 유룡(遊龍)처럼 날아든 회색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회색 그림자는 짙은 기류를 흘렸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원(圓)을 형성하여 마병야의 몸을 감춰 버렸다.
거대한 안개의 공이랄까?
마병야의 몸이 잠무(潛霧)에 들어가는 찰나, 금선사 떼는 잠무에 부딪치며 더 빠른 속도로 퉁겨 나가기 사작했고… 수천만 관의 화약이 터지는 기세로 들이닥쳤던 설마풍은 벽에 부딪친 듯 거꾸로 퉁겨져서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바위가 위로 날아오르고, 이 리 안의 나무가 모두 뿌리째 뽑혀 날아올랐다.
우지끈- 쾅-!
천지대벽력(天地大霹靂).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천도봉 정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릉- 그릉-!
팔두마차 한 대를 가득 채울 흙이 토사가 되어 쏟아져 내려왔고, 석벽이 비단천이 찢어지듯 갈라지며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거대한 흰 코끼리(白象), 산(山)만한 백상(白象)이 하나 불쑥 솟아오른다.
쩌어어억…! 쾅-!
벼락치는 소리가 잇달으며 절벽이 우그르르 허물어지는 동시에, 이번에는 거대무비한 백룡(白龍)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백상은 서방(西方)에 섰고, 백룡은 북방(北方)에 섰으며, 두 마리의 신수(神獸)가 솟아나는 순간 남방(南方)과 동방(東方)에서도 두 마리의 신수이금이 나타났다.
동쪽에서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백붕(白鵬) 한 마리.
날개 길이만 해도 무려 칠 장, 정녕 하늘을 덮을 날개였고 산을 허물어뜨릴 듯 억센 기세를 지닌 발톱을 지니고 있다.
최후로는 남방에서 거대한 사자(獅子) 한 마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크기는 가히 집채만한 거대한 사자!
갈기로 보아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자인데… 사자의 두 다리는 하늘을 찢을 듯이 높이 쳐들려졌고, 입은 해를 깨물 듯 커다랗게 벌려졌다.
동천신붕(東天神鵬),
서천거상(西天巨象),
남천비사(南天飛獅),
북천신룡(北天神龍).
지축을 끊으며 솟구쳐 오른 네 마리의 신수이금(神獸異禽).
그것은 모두 백옥(白玉)의 조각품이었다.
아아, 보라!
대체 언제 솟구쳐 올랐을까?
네 마리의 신수이금을 수문장(守門將)으로 삼는 거대무비한 철문(鐵門) 하나가 나타난 것을!
너무나도 거대한 성(城)이 하나 나타났고, 네 마리의 신수이금은 성문 앞의 터를 지켜 서는 석장이자 성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 화… 성(魔花城)!
성문 위에는 가로 구 장, 세로 삼 장에 달하는 우내(宇內)에서 제일 거대한 강철 횡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마화성>
지하에서 이백 년을 잠잔, 전 마가의 최후비밀이 드디어 잠을 깨고 그 웅장한 모습을 하늘에 드러내는 것이다.
"어떻소? 장관이 아니오? 고생한 보람에 성을 일찍 보게 된 것이오. 진세가 무너지면 성이 나타나도록 안배되었던 것이오!"
"대, 대총수! 오오, 저… 저것을 이미 아셨습니까?"
"핫핫… 상상은 했소만, 내가 틀렸소. 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열 배 거대하구려!"
마무정(魔無情), 그는 마병야를 기류로 휘감은 채 마화성의 성문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백수란을 비롯한 제사비천검대(第四飛天劍隊) 휘하고수들은 성이 나타나는 순간, 모두 오체투지에 들었다.
"대총수시여! 천천세(千千歲)! 천천세(千千歲)!"
"마의 역사는 이제 시작입니까?"
"오오, 위대한 성이여! 위대하신 대총사시여! 그대를 기다렸소이다!"
아아, 마화성(魔花城)!
성은 수백 년의 잠을 깨고 나타났다. 해가 저물어 가는 깊은 겨울날 밤에.
그 날, 천도봉(天都峯) 위로 십 리(里)의 칠채(七彩)가 뻗어 오르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백 리를 들썩거렸다.
그것은 황산이 대륙의 눈알로 생겨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 꾸역꾸역 모였으나 아무도 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성은 나타난 직후 무너진 것일까?
성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