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7-1편] 지금 있다는 감각 = 늘,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기
에고의 죽음과 부활.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껴안기. (1:06:04)
0:01
이번 장의 주제는 <에고를 극복하는 법 >이에요
에고를 극복하면 <마음치유>가 일어나는 것이고
그 결과 <깨달음>도 이루어지는 거지요.
쉽지는 않은데 이것을 알면 굉장히 희망이 생긴다고 할까,
인류의 에고가 어두움이니까요.
그 어둠을 뚫고 서광이 비치는 그런 극적인 모습이 가능하구나~
에고를 이기는 법이 그렇게 어렵게 보였는데,
이게 참 가능하다는 거
그리고 에고를 극복하는 법에서
기독교 하고 불교가 만난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고 굉장히 기쁨이 많은 공부입니다.
1:42
에고를 극복하는 법 두 가지가 책에서 나오거든요.
⑴ 에고를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
한 가지는 에고와의 탈 동일화예요.
'에고가 내가 아니다'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
매 순간 지금까지 나하고 굉장히 익숙해 있는 것은
사실은 에고예요.
에고를 동일화하면 '아상, 자아', 에고가 나가 되고
에고를 벗어나면 '불성'이죠.
'자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지요.
마음공부는 결국에는
익어 있는 에고는 점점 낯설게 하고
낯선 자기의 본질인 의식은 익숙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마음공부의 요점이다.
우리는 에고하고 딱 붙어 떡이 돼 있어요.
에고가 난 줄 아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에고가 아프면 내가 아픈 거고
에고가 화나면 내가 화나 내가 화난 거고
모든 것이 에고 하고 붙어서 다니는 그 상황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태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죠.
그 에고를 깨어서 에고를 바라봐서
나와 에고 사이에 공간을 자꾸 만들고
그래서 거리가 생겨서 이제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힘,
그걸 길러 가는 게
일반적인 마음공부의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4:48
그다음,
에고와의 탈동일화가
나의 본질인 의식을 내가 자각을 하고 탈동일화하는 것하고
자각을 못하고 탈동일화하는 거는 많은 차이가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내 안에 빛을 깨워서 어둠을 물리치는 거하고
빛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두움을 이기려고 하는 것 하고는
효과면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자기의식을 한번 자각하지 못하고 밝히는 것은
조금 밝아져도 다시 무너지고 자꾸 무너지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딱 의식을 깨닫는데 집중해서
한번 자기의식을 알아채서 빛이 비쳐줘야
어둠을 밝히는 데에 훨씬 수월하다.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솔직히 불가능하다.
이게 가능해지려면 '자각의 빛',
자기의식을 자기가 한번 알아차리기
잠자고 있는 의식이 깨어나서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기',
이걸 먼저 한번 하자.
그때부터 힘이 생긴다. 왜냐하면 빛이 나오니까!
그렇게 되면 훨씬 더 에고가 잘 보이는 거죠.(7:31)
의식은 생각과 감정에 물들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급선무다.(9:21)
진짜 나, 지금 깨어있는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11:20
지금 깨어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be) 감각이에요.
존재의 감각이 이어지는 것.
과거와 미래 등 다른 다른 감각은 전부 인연 따라서 생멸하는데
be는 항상 being(여여, 타타타)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거죠.
이게 '영원한 현재'라고도 표현하는
한국말로는 제가 '늘'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생각이 없으면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이 존재의 감각이 이어진다.
요게 지금 우리의 본질이다.
내가 있다고 하는 being의 감각을 바로 의식이라 부르며
선불교에서는 '본심'이라 부른다.
첫 번째 방법에서는
먼저 자기의 본성을 한번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견성! (본질을 발견 見性)
본질을 발견하여 (본질을 발견하면 에고가 나는 아니므로)
본질의 힘으로 이 에고를 이어나가는 것!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 할 때
본질의 입장이 되어서 계속 처음에는 리마인드를 해야 돼요.
힘이 약해서!
화두를 든다고 표현을 하는데
자꾸 화두를 들어서
서로 낯선 이것을 익혀가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성이 나인 것이 익어지면 익어질수록
에고는 생각 감정으로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그게 에고를 극복하는 법이다.
15:59
부처님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유훈에
'자기에게 귀의하라.' '자귀의(自歸依)'
영원한 현재인 이 자기의 본질에 귀의하라.
그리고 법귀의(法歸依). 이것이 바로 진리다.
자귀의가 곧 진리다. 바깥으로 뭘 찾지 말라.
그 말씀 이후에 돌아가지 직전에 뭐라고 하셨느냐면
깨닫고 49일 동안 계속 숙고한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
이것을 잊지 말고 깊이 참고하라.
무명에서부터 12 연기가 펼쳐지는
'고(苦)'의 내용은
고통이란 무명에서부터 12 연기가 펼쳐지는구나.
'집(集)'이라는 말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고통을 거꾸로 추적해 봤더니 '무명'이 '고'의 원인이더라.
'멸(滅)'은
'무명'이 사라지면, 차례차례 마지막 고통이 사라지는구나.
'도(道)'는 고통이 사라지게 하려면
차례차례 이것들이 생기면 나머지 무명도 다 사라지는구나. (18:13)
〔 * 고집멸도 [苦集滅道] <다음사전>
불교의 근본 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이르는 말
고(苦)는 인생의 고통,
집(集)은 번뇌의 집적,
멸(滅)은 번뇌를 멸하여 없게 한 열반(涅槃),
도(道)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뜻한다. 〕
12 연기가 단순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
지금이 순간
나한테서 한 생각 무명을 통해서 고통이 벌어지는 거
그것을 내가 자각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거
그거를 끊임없이 자꾸 반출을 해보면 12 연기를 보게 된다
순간순간 경계를 대할 때마다 의식하게 되면
무명이 명으로 바뀐다 이겁니다. 익어지면!
그러니까 톨레의 에고를 없애는 법의 1번은
내 안에서
무명의 윤회(무명에서 고통으로 가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그게 무명이며
그것을 의식하게 되면(의식화) 무명이 명으로 바뀐다.(19:59)
20:04
무명의 연쇄, 무명의 윤회
무명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불러요.
그 유전문이
무명이 없어지면 행(行)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識)이 없어지고 명색(名色)이 없어지고 해서
차례차례 생로병사까지 다 없어지는 요거는 환멸문(還滅門).
그러면
지금 내가 무의식 상태면
무명에서 고통으로 가는 유전문이 벌어지고, 내 안에서!
내가 깨어서 무명을 명으로 바꾸면
고통이 사라지는 환멸문(둥글 환環 사라질 멸滅)
이 전체가 다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나한테서 고통의 유전문이 벌어지는가?
고통이 사라지는 환멸문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을 자꾸 하게 되면
익어지면 보이고
경계를 만나서 그 경계에 내가 달려가면
무명의 연쇄가 벌어지는 거고
그것이 일어나지만 나는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어서 명확하게 보게 되면
환멸문의 연쇄를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게 지금 에고를 극복하는 법에서 에고와의 탈동일화.
이것은 역시 '무명을 명'으로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꾼다.
이 말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고통을 일으키고 있는 이 연쇄 작용을
내가 깨어서
그걸 지각해서 보고
따라가지 않는다는 거죠.
그게 에고를 없애는 것의 기본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고 이게 '부처님 가르침의 다다!'
그것이 불교의 전체이기 때문에
불교는 에고를 극복하는 법에서 1번을 가르쳤구나
하고 우리가 알 수 있어요.(22:26)
24:34
톨레가 너무 해석을 잘한 거예요.
무명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무명의 핵심은 '어둡다'잖아요.
'무명, 명이 없다.' 이 말은
자기의식이 깨어있지 않아서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면을 못 보면 밖도 못 봐요.
안팎으로 깨어서 잘 지켜보는 거
이거를 육조스님은 내외명철이라고 그랬어요.
'내' 안이 내 마음에서 생각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명' 빛으로
'철' 깨끗하게 꿰뚫어 본다.
'외'는
지금 바깥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것들
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경계는 인간관계잖아요.
나는 깨어서
밖의 고통체도 보고 내 안의 고통체도 봐 가지고
걔네들의 장난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잠재우는 쪽으로
톨레는 '그런 거 있을 때는 가만히 깨어 있는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의 고통체도 응대를 안 해주면 싹 가라앉는다~
그런 것을 내외가 명철하게 깨어서 파악을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무명 - 무의식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행' 그런 상태가 반복된다 이거예요.
'식' 식은 풀이하자면 하자면 에고네요.(,,,)
고통체를 가지는 에고가 강화되어 있는 상태
그게 식이다.
에고는 관념이라고 하는 네이밍을 붙여서
자기의 관념을 투사해 놓은 관념 세계를 만들어서
그거랑 대응하고 산다.
돼지 눈은 돼지 세계를 만들어 놓고 산다.(,,,)
〔 * 육입은, 육처(六處), 라고도 하며,
눈,, 귀,, 코,, 혀,, 몸,, 뜻,, 의 여섯 가지
인간의 주관적 감각 기관을 말한다. <다음사전> 〕
육입이라는 6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촉' 접촉을 하자마자
'수' 좋다 나쁘다 중립이다 하는 세 가지 감각이 생기고
좋은 것은 사랑하고 나쁜 것은 미워하는 애증이 생겨
애증은 취하고 버리는 것이 생긴다.
그 취하고 버리는 주체로서 완전히 강화된 에고가 등장을 해서
그 에고가 주도하는 삶이
'나는 태어났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죽는다.' 하는 그 주체가 강화된다.
고통, 12 연기라고 하는 이것이
이 순간 나한테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자각해서
거기에 깨어있기!
그게 에고를 극복하는 법의 첫 번째 법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방법론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이것을 정확하게 말을 하고 있다.(30:12)
31:48
⑵ 에고를 극복하는 두 번째 방법
톨레하고 윈프리의 대담에서
자기가 영국의 시골 교회에서 느꼈던 어떤 통찰,
인사이트를 이야기하는데
톨레의 통찰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고
톨레와 통하는 기쁨을 느꼈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더라 이거죠.
그 내용은 2번인데 에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에고의 죽음과 부활이 십자가의 이중상징이다.(,,,)
35:28
부활절 축제 기간(Semana Santa 세마나 산타)을 통해서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집단의식이 고통체를 공유하는 거예요.
그 고통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것을
그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인식을 못 하겠지만
부모들 간에 계속 이 수백 년 간이 전통이 내려오면서
완전히 집단의식이 화합되어 갖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정화시키는
그런 작업들을 이 사람들이 하고 있구나 하는 게
지금 보니까 아주 명확하게 보여요.
완전히 집중해서 피의 세계, '피의 일주일'이에요.
근데 마지막은 부활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것이 이렇게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 거죠.
36:19
각자 가지고 있는 고통체가 정말로 고통의 극한에서 -
톨레가 영국의 시골 교회에서
십자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와,
그런 인간의 모습은 없고
골든 크로스라고 하는 금빛 십자가만 있는 이것이
두 개의 상징이다.
"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저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전해지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의 선택이
나의 의지로 선택하는 거냐?
아니면
나의 의지는 잠재워지고 내 안에 있는 불성이 깨어나서
그 불성이 하도록 내가 허락하느냐?
26살 때의 체험으로, 있는 건 알았으니까!
내가 하느냐 아니면 그 이에게 양보하느냐?
그래서 그이가 하게 하느냐?
항상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평생을
그래도 의식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39:18
그래서 맡겨서 사는 삶.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다.
이거를 노자는 무위라고 표현을 하고
불교에서는 무주 이런 이런 말을 쓰잖아요?
무주, 무념, 육조 혜능 스님은 그런 말을 쓰니까,
'무상'
나의 이미지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상
육조 스님이 법문에 '무상송'을 참 많이 했거든요.
나의 그 에고에 사로잡히지 않는 노래.
그 내용이 다 똑같아요.
무상송의 핵심은 '자기 허물을 봐라.' 이거예요.
자기 의지대로 하려고 하는 그 자기 욕망을 보라.
그것이 고통을 일으키고 있으니까.
지금 두 번째 에고를 극복하는 법에서는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패션 오브 지저스잖아요.
예수님의 수난!
< 에고의 죽음과 부활이 십자가의 이중상징이다. >
핵심은 에고가 저항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수용하기예요.
에고의 속성을 불교에서는 탐진치라고 해요.
이상을 세우고 현실에는 불만족스러운 거예요.
요게 에고의 생존 비법 비법이에요,
항상 이상을 만들고
그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에는 불만족하기.
그래서 지금 현실에는 답이 없는 거예요
나의 행복이 나의 가치가 없어, 현실에는.
그래서 미래의 이상을 세우고
그걸 향하여 그걸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
그게 에고의 생존전략이에요.
놀랍게도 이것이 서양에서는 플라톤 철학이에요.
플라톤 철학은 이데아 철학이야.
이데아는 이상이라고 하는 메타피직(Metaphysic 형이상학)
피직은 현실이에요.
피직이 지금은 물리학이 됐잖아요.
현실을 탐구하는 것이 지금은 물리학이 되었지만
그리스 시대에는 현실학이 피직스였어요.
'메타피직'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을 향하여 메타피직스를 내가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가치다.
이게 플라톤 철학이거든요.
플라톤주의가 2500년간 지금까지도 서구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을 세워서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고
현실을 짓밟는다고 할까?
다른 말로 하면 현실과 싸우기.
왜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요게 지금 에고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에요.
이것이 지금 지배하고 있어요. 이 사회를!
엄연히 지금이 순간에도.
그러니까 에고는 뭐가 싫으냐 하면
고통스러운 현실이 싫어, 에고는.
그래서 에고를 극복하는 방법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때 에고가 죽어요.
고통스러운 현실이 싫고
보상 심리로 미래의 이상을 설정하고
그걸 실현을 하기 위해서 나의 인생을 바쳐.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꿈을 크게 가져라 소년들아.
Boys Be Ambitious! 야망을 가져라!
달려라. 여기는 우리 땅이 아니야
우리의 땅은 저 미래에 있어.
이제 그런 식으로 플라톤주의의 세뇌를 받고 살았다.
그걸 뒤집는 거죠.
그걸 뒤집는 것을 예수가 보여줬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수용하기!
요게 에고가 죽는 아주 즉각적인 방법이다.
여러분, 고통이 어떤 어느 정도의 고통이냐면
죽을 정도의 고통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이런 이야기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심한 고통을
당신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나는 따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을 믿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예수님의 신앙은 정말 철저했다는 거죠.
자기 생명을 내어줄 정도로 신을 믿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대가로 부활을 했다는
그게 기독교의 가장 골수잖아요?
그게 알고 보니까 우리 불교에서 '돈오'
단박에 깨닫는 그 방법하고 굉장히 유사하네요.
불교와 기독교가 통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저는 있습니다.
45:47
에고가 싫어하는 고통스러운 현실,
이것을 받아들이기! 이거 안 쉽죠?
근데 만약에 그걸 받아들이면
그 자리에서 에고가 죽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에고가 부활한다.
에고가 부활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어요?
알고 봤더니 에고가 신이 변장한 모습이라는 거예요.
에고가 나쁜 건 줄 알았더니 신이 변장한 모습이다.
그래서 놀라운 깨달음인 거예요.
본질을 정말 믿는다면
'모든 게 본질의 나툼이다.'라는 말 이해되세요?
그런데 우리는이 나툼을 '촉'하자마자
내면하고 외면이 '촉'하자마자
6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육입을 통해서 '촉'하자마자
'수', 좋다 나쁘다 해 버리는 거예요.
모든 것이 본질이 드러난 것이라는
대승 불교의 가장 기본 핵심이 '중도연기'라고 하는 이 사실,
중도 연기는 간단해요.
'이 삼라만상이 아미타불이 인연 따라 드러난 거'라는
이거 하나잖아요.
이걸 제가 화엄에서는 性起(성기)라는 말 쓴다
성품이 일어난 것이 세계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질이 일어난 것. (성품 성性에 일어날 기起)
이게 대승불교의 요점이거든요.
〔 *성기설(性起說)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모든 존재 사물 그대로가 바로 불성(부처의 성품)이 발현한 것이다.
- 어느 블로그에서 - 〕
그러면 이걸 만약에 믿는다면,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는 그대로 성기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걸 가지고 만나자마자 좋다, 나쁘다
거기에서 안 끝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취하고 버리고
모든 것에서 분별한다 이거예요.
핵심이 '분별'
그러니까 지금 나는 지금 어디에 익숙해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분법이에요.
이분법이 사실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입니다.
메타피직스와 피직스를 나누어서
피직스는 열등하고 싫은 거고 , 메타피직스는 좋은 거고
매사에 그게 플라톤주의 철학이거든요.
여기에 깊이 물들어 가지고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라고 합니다.
보자마자 선악을 나누어 가지고 좋다 해버리는 것.
그걸 지금 우리는 귀신같이 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인 거죠.
이걸 극복하려면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반대로 한다.
49:18
메타피직스(이상)은 버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상은 버려라.
이게 어디에 붙어 있는 푯말인지 아세요?
실제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문이 나오거든요.
베르길리우스가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서
연옥과 지옥과 천국을 순례하는 이야기거든요.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문에 도착했을 때
지옥문에 푯말이 있는 거예요.
지옥문의 현판에 뭐라고 써져 있느냐?
너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이게 지금 이분법의 절정인 거예요.
너의 모든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그러니까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너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근데 지금 오늘 공부에 의하면
너의 모든 희망을 버리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아이러니 아닙니까?
사실 천국인데.
천국문의 이름이 지옥문이 되어 있는.
이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이러니예요.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에 그 푯말 딱 있어요.
'너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너의 모든 희망을 버려라.'
너의 모든 이상을 버려라.
이상이 없으면 지옥이라는 것이 이분법의 철학의 핵심입니다.
근데 지금 거기에 속아 왔다, 우리가!
뒤집으면, 이상은 버리고 현실은 받아들여라 이거예요.
이분법의 철학에서는 현실을 만족해서 안주하면 안 돼.
높은 이상을 세워서 그 이상의 실현을 향해서 뛰어라.
이게 이분법의 철학이에요.
거기에 지금 오랫동안 우리 인류는 세뇌되어 왔다.
이게 선악과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번에 지금 공부하는 내용들은
그토록 싫어하는 현실이 지긋지긋하고 비루하고 남루해서
그렇게 버리려고 애썼거든.
예수님은 어느 정도까지 껴안았는가?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통 그거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당신의 뜻이니까!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처럼
바이런 케이티에 의하면 '신이란 무엇인가?'
고통스러운 현실이 신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은 이미 일어났고 이거밖에 없어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근데 인간은 죽어라고 이 현실과 싸워요.
그리고
있지도 않은 오버 더 레인보우의 이상을 세워 놓고
그걸 향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평생 고로운 거죠.
그거를 뒤집는 게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기.
군말하지 말고 받아들이기.
그걸 보여준 게
십자가에 달린 고통스러운 예수의 모습입니다.
근데 그것이 부활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좀 약간 극적인데
보통 사람이 이거 감당할 수 있겠냐 할 때는
참 참 쉽지 않죠.
지금 여러분께서 여기 왜 오셨어요?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서 왔어요.
우리가 지금 톨레를 공부해 보니까
톨레의 답은 '아니다.'
아니다. 우리가 정 반대로 공부하고 있다.
각자 돌아가서 자기 가정과 직장에서 벌어지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100% 껴안아라.
선사들의 표현에 의하면
'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거 찾아봤자 영원히 평생 도망 다닌다.
더위 속에서 쪄 죽어라! ' 동산의 말이잖아요.
쉽진 않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가장 직통으로 에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54:51
⑶ 결론
결론은
1번 2번을 결국 합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들은 고통상이 있어요
상은 모양 상자. 고통에 대한 이미지가 있어요.
고통에 대한 관념, 고통은 싫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한테 고통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것은 번뇌 아니에요?
'번뇌'는 '오버 싱킹Over Thinking' 너무 생각이 많은 것.
만약에 번뇌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번뇌가 고통이라서 평생 번뇌를 피하려고 하거든요.
마음공부를 번뇌를 피하려고 하고 있거든.
그렇지 않나요?
답은 뭐예요? 놀랍게도 고통을 받아들여라.
번뇌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라.
이게 지금 메시지라는 거예요
그러면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받아들이면 번뇌가 변신한다. 부활한다.
번뇌가 자기 본모습을 보여준다.
본모습은 뭐예요?
번뇌는 본질이 나를 깨우쳐주러 그 모습으로 나타난 거다.
지금 우리는 전혀 공부를 반대로 하고 있다.
번뇌를 피하려고 마음공부를 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렇게 피하면
평생 피하고 끝내 해결 못한다. 이 문제를!
그게 아니라 가슴을 벌려서 그 번뇌를 껴안아라.
고통을 껴안아라.
그러면 그 고통이 내가 수용하는 순간 변한다.
과학적인 변형을.
트랜스포메이션이란 말 쓰더라고요. 톨레가!
57:18
트랜스포메이션 (transformation)
고통(suffering)이 형태를 변형시켜 가지고 트랜스포메이션을 한다.
무엇으로 하는가?
그것이 바로 본질이 드러나는 그게 부처라는 걸 보여준다는 거죠.
57:37
우리가 공부하는 대승불교의 금강경을 번역한
구마라집 스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번뇌 즉 보리'예요.
번뇌는 고통인데
번뇌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보리로 변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일체가 다 아미타불의 나툼이 되어서
우리가 이분법에 의해서 분별하면,
좋다 나쁘다가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의 갈등과 고통이에요.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는.
한번 그것을 참고 수용해 버리면 번뇌가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본모습이 무엇인가?
아미타불의 나툼이에요.
번뇌 즉 보리, 중생 즉 부처라는 이걸 껴안아 버리면.
지금 우리는 부처가 변장을 하고 나타난 그거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거절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있잖아요?
현실 하고!
기독교적 표현하면
현실이 신인데, 어리석게도 인간은 신하고 싸운다는 거예요.
1:00:03
'신과 만난 이야기' 그런 책 있잖아요?
그 책을 쓴 사람이 유명해져서 인터뷰 나갔더니
첫 번째 하는 질문이
'이 책 전체를 압축하면
신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라고 딱 질문한 거예요.
그 사람의 말은
'인간들아, 너희들은 나를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오해하는 게 뭐예요?
또 우리는 분별해서
이상의 자리에 신을 놓고, 신의 반대 자리에 악마를 놓고
악마는 없애려고 하고, 신만 존재하려고 만드는 그 이분법에
뼛속까지 이분법에 물들어 가지고 그 짓을 또 하고 있다는.
근데 신의 메시지는 그 반대라는 그 뜻이겠죠?
그러니까
가장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오로지 그 힘은 믿음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그게 신에 대한 믿음이든
신이든 본성이든 절대라는 말이든 본질이란 말이든 하나 아닐까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지금 깨어있는이 의식이 신 아닌가요?
크기가 얼마만 해요? 완전 무한대잖아요? 없는 곳이 없잖아요?
모든 것이 이것의 나툼이잖아요? 실제로.
그러니까
이거 하나에 대한 믿음이 정말로 있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이것이 나툰 거라면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거라도 받아들일 수가 있죠?
이게 되지 않을까?
1:02:18
'한번 본성을 보고 난 뒤에는 보림을 어떻게 합니까?' 해서
믿음으로 한다
〔 보림(保任)은 선불교에서 깨달아 부처가 된 이후의 수행을 말한다.
- 워키백과 - 〕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거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본성에게 맡겨서.
그런 메시지가 지금 완전히 전부 다 똑같은 거 아닙니까?
톨레가 아주 명확한 그런 언어를 가지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이렇게 해줬기 때문에
마음공부의 핵심이에요.
번뇌가 보리다.
중생이 부처다.
내 눈이 분별하면 중생은 없애야 될 대상이 되지만,
그 분별의 눈이 극복이 된다면
모든 것 티끌 하나조차도 지금 본질의 드러남이다.
1:03:13
자 결론!
여러분 지금 마우스, 이 앞에 있으니까.
약견, 금강경의 한 구절이죠?
약견, 만약에 본다면
제상, 마우스를 보고
비상, 마우스가 본질이 드러난 것이라는 거예요
제상, 모양은 폼이죠?
그리고 톨레가 그런 말 쓰잖아요?
폼리스(formless), 폼을 넘어선 것, 폼을 초월한 것.
만약에 폼을 보고 폼리스가 드러난 것이라는 걸 본다면,
모든 폼이 모든 형태가 좋든 나쁘든
폼리스(본질)가 인연 따라 현상으로 드러난 것임을 본다면,
즉견여래, 색과 공이 하나인 것이 여래예요.
색을 보고 색에서 공을 같이 볼 수 있다면 그게 여래다.
여래는 중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게 모든 마음공부의 결론인 거예요.
만약에 모든 모양으로 드러난 것에서
그것이 인연 따라 본질이 드러나는 것임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게 모든 것이 폼으로서는 자유
폼리스 본질로서는 평등
느낌이 오십니까?
형태로는 다 달라.
모든 것이 다 다른데 본질로서는 완전히 평등한 한 개
본질이 드러나니까,
그걸 볼 수 있다면 그게 그게 여래다.
고통이 상이라고 하는 것에
결론적으로 고통을 한번 넣어봅시다.
만약에 나에게 닥친 고통을 보고
그 고통조차도
본질이 나에게 드러난 것임을 내가 수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고통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이 세상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없어서
모든 시비심 모든 선악과를 극복하는 깨달음과 힘이
거기서 나온다.
그게 지금 이번 장의 에고 극복하기! 그렇게 하자.
이게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 가장 핵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 * 구마라집
Kumarajiva , 鳩摩羅什
출생 구자국(龜玆國), 344
사망 413
국적 인도
구마라집은 현자로서
인도학 및 베다학에 관하여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들 가운데
가장 정평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과 영향력에 크게 힘입었다.
중국 카슈가르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불교의 중관학파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았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인도 전역에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졌고,
후진의 요흥은 그를 국사로 봉하고 소요원에 머물게 하며
승조, 승엄 등과 함께 역경에 전념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403년(후진5)부터
<중론>, <백론>, <반야경> 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 다음사전 - 〕
〔 *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만약 모양이 있는 것은
곧 모양이 아니라 허망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순간 즉시 여래(불성, 참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림자를 보면 저것은 허망한 것이요,
본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지만,
왜 즉시 여래를 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밖으로만 모양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래를 보려면
안으로 먼저 텅 비어 있어야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관념(아상)도 이와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모임으로 생겨난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즉시 여래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밖으로는 모양을 보면서
저것은 부처님이 말씀하길,
진실한 모양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니라.
제상이 비상이구나.
곧 모양이 있는 것이 진짜 모양이 아니라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은 것이구나 ..
이렇게 걸으면서 되뇌이지만,
아직
안의 관념(똘똘 뭉쳐진 아상)이 깨어지지 않으니
밖을 보아도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 어느 불로그에서 - 〕
〔 * 12지연기, 十二緣起
괴로움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열두 과정
연기는 ‘의존해서(緣) 발생(起)한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은
어떤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하고,
어떤 조건에 의존해서 소멸한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6처(處)가 있고,
6처로 말미암아 촉(觸)이 있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取)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有)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生)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 ·
우(憂) · 비(悲) · 고뇌(苦惱)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긴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므로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므로 6처가 멸하고,
6처가 멸하므로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므로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므로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므로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므로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므로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므로 노사 · 우 · 비 · 고뇌가 멸한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한다. - 어느 불로그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