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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네 개의 구절을 이루어야 한다. 첫째 이것은 부처이니, 법성신(法性身)은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성품이 공(空)한 바로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둘째 부처가 아니니,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이 끊어진 그 성품이기 때문이요, 평등한 참 법계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부처이기도 하고 부처 아니기도 하나니, 법성신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 쌍비(雙非)이니, 성품과 성품 없음이 두 가지 다 끊어져 없어지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없음 가운데에 두 가지 없고/두 가지 없는 데에 역시 없나니/3세의 온갖 것이 공이라/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소견이다”라고 했다. |
제2의 모양의 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정(情)이요, 둘째가 무정(無情)이다. 참 마음이 인연을 따라 능소(能所)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은 저마다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무명이 진여에 훈습되어 더러움의 연기를 이루고 진여가 무명에 훈습되어 깨끗함의 연기를 이루며, 더러움은 만 가지 종류를 이루고 깨끗함은 성불하기에 이른다. 깨끗한 인연을 닦아 저 더러운 인연을 끊어야 성불할 수 있다. |
이 두 가지 이치에 의하면 중생과 부처는 같지 아니하며, 깨끗한 인연 중에는 다시 인과가 있고 원인에는 순수함과 뒤섞임이 있으며 결과에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있다. |
순수한 문에서 보면 어느 한 보살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하나의 행만을 수행하되 낱낱의 모두가 그러하며 뒤섞인 문에서 보면 만 가지 행을 다 같이 닦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이며, 원인의 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언제나 그는 보살이며, 결과의 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언제나 그 분은 여래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들을 위하여 생각생각마다 새롭고 새로이 등정각을 이룬다”고 했다. |
쌍변문(雙辯門)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며, 쌍비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곧 참 성품이 같되 앞의 세 가지 문은 자비와 지혜를 둘 다 갖추고 마음과 경계가 나란히 융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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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성품과 모양이 서로 통하는 문에는 자세하게 네 개의 문이 있다. 첫째는 성품이 모양을 따르면 두 번째의 문과 같다. 둘째는 모양에 붙어 있다가 성품으로 돌아가면 첫 번째의 문과 같다. 셋째는 두 가지 다 존재하면서 걸림 없으면 위의 두 가지 문을 다 갖추는데, 이것에 의하면 대비와 지혜가 나란히 옮아가고 성품과 모양이 가지런히 달리며 고요함과 비춤이 쌍으로 흘러서 큰 자재함을 이룬다. 넷째는 서로가 빼앗아 둘이 다 없어지면 성품과 모양이 다 함께 끊어지고 똑같은 결과 바다에 빠져서 이루어짐도 없고 이루어지지 아니함도 없다. |
제4의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는 문은, 모양이 비록 만 가지로 틀리나 성품에 즉하지 아니함이 없고 성품의 덕은 그지없어서 온전히 모양 속에 있으며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여 모양이 성품에서와 같아져서 위의 모든 문으로 하여금 모두가 장애 없게 하며, 원인과 결과가 서로 통하고 순수함과 뒤섞임이 서로 융화하며 일과 일마다 서로 엇갈려서 겹겹이요 그지없다. |
이제 성품의 문의 네 가지 구절 안에 나아가면 이는 바로 부처의 문이요 그 나머지 세 가지는 취하지 아니한다. |
모양의 문안에 나아가 유정의 문[有情門]에서 보면, 이는 깨끗함이요 더러움이 아니며, 이는 결과요 원인이 아니다. 이것은 한 갈래의 이치로서 여기서 쓸 것은 아니다. |
서로 통하는 문에 나아가서 부처면 성품과 모양이 둘 다 융화하고 중생이면 모양에 모여서 성품으로 돌아간다. |
이제 경에서는 바로 제4에 의거한다.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여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부처의 깨끗한 성품이 중생의 더러움에 융화하고, 부처의 한 성품을 중생의 여럿에 융화하며 많은 더러움이 어느 한 참된 성품은 나게 하여 모두가 부처에서와 같이 된 뒤에 성불하면 끝이 난다. 유정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를 서로 회통하고 융화하여 부처의 몸이 되면 모두가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
그러므로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만물을 모아서 자기를 이룩한 이는 저 성인뿐이리라”고 했고, 또 이르기를 “그러므로 성인은 공(空)하여 그 체성이 한가지요 만물은 나 아님이 없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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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성품이 만물에 융화하여 성품이 부처와 같아져서 모두가 이루어지고 물건의 성품이 부처의 모양에 융화하기 때문에 3업(業)이 만 가지 종류에서와 같게 한다. |
지금 이것은 경의 뜻이어서 딴 문의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르기를 “문을 따라 같지 아니하다”라고 했으니, 지금의 이것이 성불의 문이다. |
돈교(頓敎)에서는 대체로 성품에서 보는 네 개의 문이 같고, 종교(終敎)에서는 성품과 모양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 같으며, 시교(始敎)에서는 두 가지 문이 있는데, 환유(幻有)는 곧 공이라 모양에 모여서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마음만으로 나타날 뿐이라 대체로 제2의 것과 같다. |
소승과 사람과 하늘은 모두가 모양의 문에서와 같다. 이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정(無情)도 성불한다”고 한다. 이것은 성품과 모양이 서로 융화한다는 데서 본 것으로 유정의 성품이 무정의 모양에 융화하고 무정의 모양이 성품을 따라 유정의 모양과 융화하면서 같아지기 때문에 무정도 성불한다는 이치를 말한다. |
만약 무정이 성불하지 못한다는 이치가 유정의 모양에 융화되면, 역시 모든 부처와 중생도 성불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
성불과 성불하지 않음과 유정과 무정은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법계는 한없기 때문이요, 부처의 체성은 넓고 두루하기 때문이요, 빛깔과 공(空)은 둘이 없기 때문이요,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10신(身)은 원융하기 때문이요, 연기의 모양으로 연유하기 때문이요, 중생계는 그지없기 때문이요, 단상(斷常)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요, 만법은 비고 원융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요, 무정도 깨닫는 성품이 있어서 유정과 같이 성불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이룩된다고 허락되면, 능히 수행의 원인으로 무정이 유정을 변화시키고 유정이 무정을 변화시키리니, 삿된 소견과 한가지다. |
그러므로 성품은 교묘하거나 서투른 것이 아니고, 아는 것에 상세함과 소략함이 있다. 지혜가 미묘한데도 보는 것은 잠깐 동안에 있고, 근기가 둔한데도 깨치면 티끌만큼의 많은 겁(劫)을 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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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부처의 체성은 오묘하여 색온(色蘊)에 즉한 것도 아니고 색온을 여읜 것도 아니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이 공하여 참 성품이 저절로 나타난다”고 했다. |
『밀엄경(密嚴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금광(金鑛)을 부수어서 가루로 하면/그 금광 안에서는 금을 못 보며/지혜로운 이가 잘 녹이고 불려야/순금은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
모든 물질[色]을 쪼개고 나누되/아주 작은 극미(極微)의 수까지에 이르며/그리고 모든 쌓임[蘊] 쪼개며 구하되/동일하거나 다른 성품이거나 간에/부처의 체성은 볼 수 없으나/또한 부처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
이는 또한 종경(宗鏡) 안에 깨쳐 들어서 성불하되 한 생각을 여의지 않은 것과 같나니, 만약 앞생각은 바로 범부였고 뒷생각은 바로 성인이라 하면 이것은 오히려 별교(別敎)에서 거두어들일 바나 지금은 무명을 움직이지도 않고 온전히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
그러므로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왕위를 가져다 곧장 평범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으며, 마치 꿈에 천추(千秋)를 누리다가 깨고 나자 따라 소멸한 것과 같다”고 했으며, 부 대사(傳大士)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말하기를 “이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가지고 청정하게 해탈하며 시방을 환히 비추면서 광명빛이 미묘하여 생각하거나 말하기조차 어렵기를 바라십니까. 임금께 드리고 싶은데, 만약 받으시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이루시리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만약 한 생각 동안에 결정코 믿어 받으면 찰나도 못 되어서 문득 깨달음의 지위에 오르게 되리라. |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기를 “유마힐(維摩詰)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대들이 이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면 이것이 곧 출가요 이것이 곧 구족계(具足戒)입니다’”라고 했다. |
또 『법화경』에서 이르렀다. |
“그 때 용녀(龍女)가 값어치가 삼천대천세계만큼한 한 개의 보주(寶珠)를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께서 이내 받으셨다. 용녀는 지적(智積)보살과 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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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에게 말하였다. |
‘제가 보주를 바치자 세존께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일이 빠릅니까?’ |
대답하였다. |
‘아주 빠르십니다.’ |
용녀는 말하였다. |
‘그대들의 신통력으로 제가 성불하는 것을 관하십시오. 그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온갖 함생(含生)들의 마음 구슬은 환히 빛나서 도리에 앞뒤가 없음을 알 것이다. |
밝고 어둠은 근기를 따르는 것이니, 혹은 싸우다가 살갗 속에 숨었을 때 밝은 거울을 대하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놀다가 물속에 빠졌을 때 느리게 흐른 데에 있으면 갖기도 하며, 혹은 전륜왕의 상투 속에 있을 때 큰공을 세우면 하사하기도 하고, 혹은 가난한 사람의 옷 속에 매었을 때 지혜롭게 원하면 오히려 있게도 된다. |
종경(宗鏡)에서는 명문(明文)으로 이것을 한 가지로 증명했다. 이렇게 믿으면 마지막에는 남음 없이 되리니, 바로 이 한 생각으로 온갖 법을 알고 이 도량에서 온갖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
이것에 의거하여 모든 성인은 마음과 부처를 분명하게 열어 보였다. 설령 의심을 안고 기가 꺾여 물러나는 이가 있거나 비록 아직은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불하는 도리는 잠시라도 이지러진 일이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진짜 금인 줄 모르고 구리쇠로 오인했더라도 구리쇠라는 헛된 이름만이 있었을 뿐 금의 성품은 잠시도 변한 일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지금 고집하는 이가 본래 그것인 줄 모르고 도리어 지금도 아니요 옛날도 아니었다 하면서 미혹하였다가 비로소 깨쳐 아는 것과 같다. |
위에서 널리 인용하며 간곡하게 증명한 것은, 생사하는 그 속에 부사의한 성품이 있고 진로(塵勞) 그 안에 큰 보리의 몸이 갖추어졌다 함을 보이기 위해서일 뿐인데,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이 듣고 모두 믿지 않고 쉽게 분수가 없다면서 ‘나는 범부다’라고만 말하여 불승을 이어받아 크게 법그릇[法器]을 지니지 못하고 나아가 한결같이 중생의 업만 따르면서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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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합한다면, 생사의 바다가 더욱 깊어지고 번뇌의 농(籠)이 더욱 빽빽해지리라. |
그런 까닭에 조사와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두루 모아서 뭇 의심들을 단박에 풀어 그 자리서 밝아져서는 바로 남[生]이 없는 제 성품을 보며 부처와도 다름이 없고 만법이 본래 같은 줄 알며 비로소 진전(眞詮)을 믿고 여기에 깊이 이익이 있게 한다. |
[문] 육조(六祖)가 이르기를 “선이거나 악이거나 간에 도무지 생각 말라”고 했으니 저절로 마음의 체성에 들게 되는 것이요, 동산(洞山) 화상이 이르기를 “부처의 곁일만 배워 얻으면, 오히려 용심(用心)만 그르친다”고 했거늘, 이제 어찌하여 성불하는 취지를 널리 논하는가. |
[답] 지금 종경록(宗鏡錄)이 바로 이런 이치를 논하고 있다. 마음이 성품에 명합하면 부처의 도리가 진공(眞空)에 계합하거늘, 어찌 마음 밖에서 망령되이 다른 것을 따르며 더 나은 경계를 구하겠는가. |
『화엄기(華嚴記)』에서 “만약 진공을 통달하면 오히려 선조차 짓지 않거늘, 하물며 악이겠는가, 혹은 삿되이 공(空)을 설명하면서 환하며 물건이 없다 하기도 하고, 또는 걸림이 없는지라 악을 지음에도 거리낄 것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 참으로 공을 알아 도리에 잘 따르는 것도 동요와 산란을 내어 오히려 마음에 선을 사모하지 않을까 두렵거늘, 악으로 도리를 등지고 망정(妄情)을 따르면서 어찌 지어야 되겠느냐. 만약 걸림 없다 하여 악을 짓는 데도 거리낄 것도 없다 하면, 어찌하여 걸림이 없는데 선을 닦으면서 악을 끊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지 못하느냐. 선법 닦기를 싫어함도 오히려 마음에 집착이 있을까 두렵거늘, 멋대로 악을 짓는다면 어찌 집착이 두렵지 아니하랴. 분명히 삿된 소견이요 나쁜 중생임을 알겠도다. 진리에 들어서 부처를 관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 일으킴을 두려워하거늘, 다시 나쁜 생각을 짓는다면 특히 진리에 어긋난 것이리라”고 했다. |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렀다. |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
‘앞 성인들이 아는 바를 차츰차츰 서로 전하여 준 것조차 망상이어서 성품이 없나니, 보살마하살이 혼자 하나의 고요한 곳에서 다른 이로 말미암아 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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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이거나 망상을 여읜 것이 아님을 스스로가 깨닫고 관찰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면서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면, 이것을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
또 이르기를 “온갖 것에는 열반이 없고 열반의 부처도 없고 부처의 열반도 없어서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멀리 여읜다”고 했다. |
소각은 바로 모양이요 능각은 바로 소견이니, 능각ㆍ소각을 멀리 여읨을 자각성지라고 한다. 능소가 없어지는 곳에서야 성불하기 때문이다. |
한량 있게 아는 바는 다른 이로부터 배우는 외학(外學)인데, 반야의 바다를 궁구하려 하면 그 근원을 얻지 못하리라. 마치 항하 물 속에 한 됫박의 소금을 넣는 것과 같아서 그 물은 짠맛도 없을 뿐더러 마시는 이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
만약 안으로 비추어서 밝아지고 법의 근원을 꿰뚫으면 본체[理]마다 비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현상[事]마다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생각 없음[無念]의 법 중에 머무는지라 이와 같은 황금빛 몸의 서른두 가지 몸매를 얻었고 큰 광명을 놓아 남음 없이 세계를 비추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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