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우리는 나고야(名古屋)로 갑니다. 예상대로라면 한시간 반여 달려가면, 나고야(名古屋) 북쪽 외곽에 있는 이누야마 시(犬山市)에 도착해야 합니다.
* 그런데, 고속도로로 가고 있는 이 때 도로공사 때문인지, 차가 많이 막힙니다@@ 점심까지 죠안(如庵)이 위치해 있는 메이테츠 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 식당에 예약했는데, 큰일입니다@@
원래는 메이테츠 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의 구내레스토랑 우라쿠(有楽)에서 12시30분에 쇼우카도우(松花堂) 정식을 예약했었습니다. 즉, 가는데 1시간 반 정도 되니깐, 넉넉하게 10시30분 정도에 출발하면 될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시간 가까이 정체되는 바람에 12시 30분 예약은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만 했고, 호텔 구내에 스낵 코너에서 어떻게든 점심을 해결하고 다실 참관하는 것으로 의논해야만 했네요@@여유롭게 도시락 점심을 기대했던 분들께 죄송@@
다음엔 일본 도로사정을 만만하게 안 보는 것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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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보면, 저 멀리 야트막한 산꼭대기에 이누야마 성(犬山城) 천수각이 오똑하게 서 있습니다... 그 왼쪽으로 산자락을 내려오면 다시 멋없는 양식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메이테츠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인 듯 합니다... 죠안(如庵)은 메이테츠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 경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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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호텔 왼쪽 높다락게 보이는 이누야마 성(犬山城) 천수각 꼭대기의 모습이 조금은 이국적입니다... 조금 있다가 들를 곳이기도 해서 더욱 더 관심이 가기도 하는 듯도 하구요...
죠안(如庵)이 메이테츠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 경내의 우라쿠엔(有楽苑)에 있는 이유는, 죠안(如庵)이 나고야철도에 의해 이축된 것과 관련있습니다.
사실 메이테츠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은 메이테츠 그룹(名鉄グループ)에 속해 있는데,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 주식회사를 중심으로 2012년 3월 기준으로 자회사 143곳, 관련회사 27곳을 거느린 꽤 큰 규모의 그룹입니다.
일본정원 우라쿠엔(有楽苑)을 거느리고 있는 메이테츠이누야마 호텔(名鉄犬山ホテル)은 아이치 현(愛知県) 이누야마 시(犬山市)의 이누야마 성(犬山城) 인근에 위치해 있는데, 나름 메이테츠 호텔 그룹(名鉄ホテルグループ)의 중심으로서, 츄부 국제공항(中部国際空港) 기내식을 공급하는 나고야 에어케이터링(名古屋エアケータリング) 등의 자회사도 갖고 있다고 하구요, 원래 나고야 철도 그룹(名古屋鉄道グループ)의 이누야마 유원지(犬山遊園) 터를 활용하여, 당시 나고야(名古屋) 제국호텔(帝国ホテル)이라고도 불렸던 나고야 관광호텔(名古屋観光ホテル)과 합병하면서 출범하여, 나고야(名古屋) 일대의 정재계 포럼 등의 장소로 이용되는 등 메이테츠그룹(名鉄グループ) 내에서는 현재까지도 꽤 서열이 높은 호텔로 간주되곤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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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운전 끝에 우리는 약간은 피로한 상태로 호텔에 들어섭니다... 만약, 예약시간에 제때 도착했다면 호텔 구내 레스토랑 우라쿠(有楽)에서의 쇼우카도우(松花堂) 정식은 요런 정도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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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점심을 먹었겠지만, 하지만 이래야 했던 점심은 이렇게 아래와 같이 바뀌었습니다^^;;; 그나마 죠안(如庵) 참관 예약시간 2시는 맞출 수 있을 정도까지 도착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547-1621)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다이묘(大名)이자 저명한 다인(茶人)이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동생이지만, 나이차는 꽤 나서 13살아래이고, 어릴 때의 기록은 거의 없다네요...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1511-1552)의 열한번째 아들로, 우라쿠사이죠안(有楽斎如庵)이라 불렸고, 후세에는 우라쿠(有楽), 우라쿠사이(有楽斎)라고도 불렸습니다. 센노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배웠고, 리큐 십철(利休十哲)의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나중에는 자신만의 다도(茶道) 우라쿠 류(有楽流)를 창시했습니다.
1574년, 오와리노쿠니(尾張国) 치타 군(知多郡)을 하사받아, 오오쿠사 성(大草城)을 수리하였고, 이후, 노부나가(信長)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5-1582)의 휘하에 들어간 걸로 보이고, 코우슈우 정벌(甲州征伐, 1582, 현재의 시즈오카, 나가노, 야마나시, 군마 현 일대)에도 같이 종군했습니다.
기록에서 보더라도, 신쵸우코우키(信長公記) 권14에서 보면, 1581년 정월 8일, 악귀를 쫓는 불놀이인 사기쵸우(左義長) 행사에서는 노부타다(信忠, 1555-1582)・노부카츠(信雄, 1558-1630)・나가마스(長益, 1547-1621)・노부카네(信包, 1543-1614)의 순으로 언급되기도 했고, 또한 2월 28일에 있었던, 교토(京都) 오우마조로에(御馬揃え, 열병식) 기사에서는,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547-1621)는 노부타다(信忠, 1555-1582)・노부카츠(信雄, 1558-1630)・노부카네(信包, 1543-1614)・노부타카(信孝, 1558-1583)・츠다 노부즈미(津田信澄, 1555-1582)의 뒤를 따라 행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름 오다 가문(織田家) 내에서 꽤 서열이 높았던 셈입니다...
또, 코우슈우 정벌(甲州征伐, 1582, 나가노 현 일대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는 키소구치(木曽口) 방면에서 토리이토우게(鳥居峠)를 공략하여, 키소 세력(木曽勢)에 협조하여 토리이토우게(鳥居峠)를 공략했었고, 항복한 후카시 성(深志城, 지금의 마츠모토 성, 松本城)을 접수하는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1558-1584)・단 타마마사(団忠正, ?-1582)과 함께 코우즈케노쿠니(上野国, 현재의 군마 현, 群馬県)에 출병하여, 오바타 가문(小幡氏)를 항복시켰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오다 가문(織田家)의 몰락의 전조가 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나가마스(長益, 1547-1621)는 노부타다(信忠, 1555-1582)와 함께 니죠고쇼(二条御所)에 있었지만, 자신은 성을 탈출하여, 오우미노쿠니(近江国, 현재의 시가 현)의 아즈치(安土)를 거쳐 기후(岐阜) 방면으로 도망갔다고 하고, 이후 조카인 노부카츠(信雄, 1558-1630)의 편에서, 토지나 수확을 조사하는 켄치부교(検地奉行) 등을 맡기도 했다네요... 두고두고 욕먹는 @@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1584년에 현재의 아이치 현 일대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는 노부카츠(信雄, 1558-1630)의 편의 일원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을 도왔고, 카니에 성 전투(蟹江城合戦, 1584년에 벌어진 전투)에서는 오오노 성(大野城)의 야마구치 시게마사(山口重政)를 구원하여, 시모이치바 성(下市場城) 공략에도 함께 하여, 카니에 성(蟹江城)의 타키가와 이치마스(滝川一益, 1525-1586)의 항복을 이끌어냈습니다. 전투 후 이에야스(家康)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1537-1598)의 강화에 즈음하여 절충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또,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1536-1588)와 히데요시(秀吉, 1537-1598) 사이에 중재를 알선했다고도 하고, 여튼 1588년에는 드디어 토요토미(豊臣) 성을 하사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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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도 전부터인 3월 5일부터 연락하기 시작하여, 날짜와 시간을 조율했던 몇 번의 이메일 교환 끝에 위의 확약을 받았던 죠안(如庵) 참관 예약은, 왕복엽서로 확약을 받아야 했던 다른 다실 참관과 달리, 이메일로 진행되어, 그나마 편했네요^^.
그나저나, 일본을 다니다보면 이런 약간 낯선 풍경이 자주 목격됩니다^^;;;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열씨미 삼삼오오 모여 다니시는 그 분들은 글밥이 많아 꽤 읽기 힘드셨을텐데도, 굳이 텍스트를 피하지 않고 열씨미 설명서를 읽고 계시고, 어쩌다 몇번 대화를 나눠봐도 나름 유연한 사고가 엿보였고, 여튼 전반적으로 문화적 체험에 그닥 열심이지 않은 우리와는 좀 달라서 참 부럽습니다^^;;
그렇게 시간맞춰 이와스몬(岩栖門)을 거쳐 우라쿠엔(有楽苑) 입구로 들어갔을 때, 벌써 꽤 많은 분들, 그것도 연세 70-80은 되어보이셨던 그 분들은, 우리보다도 꽤 일찍 도착하셨을 듯,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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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의 노부카츠(信雄, 1558-1630)의 카이에키(改易, 영지 몰수) 후, 나가마스(長益, 1547-1621)는 히데요시(秀吉)의 오토기슈우(御伽衆)로서 셋츠노쿠니(摂津国, 현재의 효고 현) 시마시모 군(島下郡) 마시타(味舌, 현재의 오오사카 부, 大阪府, 셋츠 시, 摂津市) 일대 2,000 석(石)의 영지를 받았습니다. 이 즈음에는,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楽斎)로 자칭했습니다. 조카인 요도도노(淀殿, 1569-1615)의 비호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츠루마츠(鶴松, 1589-1591) 출산 때에도 보살폈었다네요^^
하지만, 히데요시(秀吉) 사후, 이에야스(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1539-1599)가 대립할 당시, 나가마스(長益, 1547-1621)는 이번에는 토쿠가와(徳川) 저택으로 달려가 경호했습니다. 뭔가 처세의 달인인 듯한 면모가 보입니다... @@
그리고, 세상의 주인을 두고 다투었던 세기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 장남 나가타카(長孝, ?-1606)와 함께 전체 450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참전하여, 적은 병사에도 불구하고 코니시 부대(小西隊)・오오타니 부대(大谷隊)・이시다 부대(石田隊)・우키타 부대(宇喜多隊)에 대항하여 전투하였고, 한때는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1548-1610)의 휘하에서, 오오야마 호우키(大山伯耆, ?-1600) 등 이시다 부대(石田隊)의 측면 공격 부대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가타카(長孝, ?-1606)가 토다 시게마사(戸田重政)의 수급을 베는 등 공적을 세우고, 우라쿠사이(有楽斎) 자신도 이시다(石田) 측의 가신(家臣)이었던 가모우 요리사토(蒲生頼郷, ?-1600)를 격퇴하는 등 부자 모두 꽤 혁혁한 전적을 올렸습니다. 오다 부대(織田隊)는 이와 같이 서군(西軍)의 유력한 무장 둘의 수급을 획득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여, 그 공적으로 우라쿠사이(有楽斎)는 야마토노쿠니(大和国, 현재의 나라 현) 내에 32,000 석(石)의 영지를 받았고, 나가타카(長孝, ?-1606)는 미노노쿠니(美濃国, 현재의 기후 현) 노무라(野村)에 10,000 석(石)의 영지를 받았습니다.
전후, 에도 막부(江戸幕府) 정권에 들어서서는, 이번에는 친연이었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 관계를 유지하여 (의리 ???), 요도도노(淀殿, 1569-1615)를 보좌했습니다. 이 즈음에 은거하기 위해 겐닌지(建仁寺)의 암자인 쇼우덴인(正伝院, 현재의 쇼우덴에이겐인, 正伝永源院)을 중창하여, 경내에 다실(茶室)・죠안(如庵)을 설계했습니다. 현재에도 쇼우덴에이겐인(正伝永源院) 안에는 나가마스(長益, 1547-1621) 내외, 손자인 나가요시(長好, 1617-1651) 등의 묘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멸문을 가져왔던 오오사카(大坂) 겨울 전투(冬の陣, 1614) 당시 나가마스(長益, 1547-1621)는 오오사카 성(大坂城) 안에 있었는데, 화평파(和平派)로서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1569-1615) 등과 함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지지하는 등 중심적 역할을 맡았지만, 강경파였던 적장자 요리나가(頼長, 1582-1620)는 사사건건 화평파(和平派)와 대립했습니다.
겨울 전투가 끝나고, 하루나가(治長, 1569-1615)와 함께 화의를 주도하여 이에야스(家康) 측에 인질을 보내기도 했지만,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1615)를 목전에 두고 전운이 감돌던 어느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젠 성 안에 있어도 소용없다.'하여 이에야스(家康, 1543-1616)・히데타다(秀忠, 1579-1632)의 허락을 받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 오오사카 성(大坂城)를 떠났습니다.
오오사카(大坂)에서 물러나 이후, 교토(京都)로 돌아와 은거(隠棲)하여, 다도(茶道)에 전념하였던 나가마스(長益, 1547-1621)는, 1615년 8월, 본인 몫으로 10,000 석(石)을 남겨놓고, 네째아들 나가마사(長政, 1587-1670), 다섯째아들 나오나가(尚長, 1596-1637)에게 각각 10,000 석(石) 씩 분배하고, 1621년 12월 13일, 교토(京都)에서 75세 나이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파란만작한 인생편력은 결과적으로는 두고두고 민중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는데, 분로쿠(文禄, 1592-1594) 연간에 성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기담집인, '기잔코우카쿠(義残後覚)', 에도(江戸) 센다가야(千駄ヶ谷) 세이린지(聖輪寺) 주지였던 조우요(増誉, ?‐1707)가 지은 '메이료우코우한(明良洪範)' 등 후세의 기록에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노부타다(信忠, 1555-1582)에게 자결을 진언(進言)한 것이 나가마스(長益, 1547-1621)였지만, 그 후 정작 본인은 도망한 사실을 두고, 교토(京)의 백성들은 노래까지 지어가며 빈정거렸다네요^^.
오오사카 전투(大坂の陣) 때는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우라쿠사이(有楽斎)에 비해, 장남 요리나가(頼長, 1582-1620)는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1556-1615) 살해를 모의, 노부카츠(信雄, 1558-1630)를 오오사카(大坂) 측 총대장으로 삼는 등, 과격한 행동으로 막부 측(幕府側)에서 경계했고, 우라쿠사이(有楽斎)와도 대립했고, 또 겨울전투 당시 병을 핑게대고 공격에 가담하지 않는 등 의심스러운 행동이 많았고, 반면에 여름 전투 전에는 '사령관을 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다른 장수들이 반대하자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우라쿠사이(有楽斎)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나와버린 것도, 이와 같이 요리나가(頼長, 1582-1620)가 기행(奇行)을 서슴치 않았던 것과도 관련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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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안내원이 나와 우리를 인솔하여 쇼우덴인(正伝院) 쇼인(書院) 건물로 들어갑니다...
저 멀리 쇼인(書院)이 보입니다...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활발하게 씩씩하게,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입장하시는 어르신들의 굽은 어깨를 따라, 그리고 함께 우리도 참관객 집합 장소로 쇼인(書院) 안으로 들어갑니다... 혹시 할아버지 중에 주기적으로 이 곳을 방문하시는 분도 계실까요 ?? 뭔가 굉장히 낯익은 곳을 반갑게 들르시는 듯한 분위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이 망하기 전에, 오오사카(大坂)를 떠나, 교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는, 겐닌지(建仁寺) 쇼우덴인(正伝院)을 중창하여, 은거지로 삼았었는데,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당시 건물은 쿠리(庫裏)의 북쪽에 쇼인(書院)과 그 동북쭉에 붙어 있는 죠안(如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구 쇼우덴인쇼인(旧正伝院書院)은 1618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집으로, 온화한 외관과 함께, 내부에는 하세가와 토우하쿠(長谷川等伯, 1539-1610)・카노우 산세츠(狩野山雪. 1590-1651) 등의 후스마에(襖絵) 등도 남아 있습니다만, 오늘의 목적은 오로지, 죠안(如庵)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쇼우덴인쇼인(旧正伝院書院)은, 1908년, 건물이 철거되면서, 네 부분으로 나뉘어 처분되었고, 그 중 죠안(如庵), 쇼인(書院), 로지(露地)는 도쿄(東京)의 미츠이 가문(三井家)으로 인도되어 도쿄(東京)로 건너갔고, 1972년 5월, 다시 매각되어 이번에는, 이 곳 이누야마 성(犬山城) 아래 우라쿠엔(有楽苑)으로 이축되었습니다. 이 때에는, 죠안(如庵)의 갓테(勝手)를 쇼인(書院)의 마루에 바로 이어서, 미야코린센메이쇼즈카이(都林泉名勝図会)의 그림으로 미루어 추정하여, 이번에는 남쪽 마루의 동쪽 끝에 죠안(如庵)을 복원했습니다.
쇼인(書院) 자체는 건물 중심으로 세 방향에 마루를 대어, 남쪽으로는 세장한 형태의 디딤돌(沓脱石)을 마루아래에 두었고, 주실(主室) 앞에 난간을, 방과 마루의 경계는 코시다카쇼우지(腰高障子) 문과 마이라도(舞良戸, 미닫이문)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7조(七畳) 넓이의 주실(主室)은 1칸(1間) 데도코(出床)를 갖추고 있고, 서쪽으로는 6조(六畳) 넓이의 츠키노마(次の間)가 있습니다.
사실 우라쿠엔(有楽苑) 경내에는 죠안(如庵) 말고도 겐안(元庵)과 코우안(弘庵)이 더 있습니다.
겐안(元庵)은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가 오오사카(大坂) 텐만야시키(天満屋敷)에 있었던 다실(茶室)입니다. 1972년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가 미츠이 가문(三井家)으로부터 죠안(如庵)을 포함하여 구 쇼우덴인쇼인(旧正伝院書院)을 구입하여 호텔 경내에 이축할 때, 그 과정을 지휘했던 호리구치 스테미(堀口捨己, 1895-1984) 박사가 옛 그림에 기반하여 복원한 것으로, 죠안(如庵) 및 구 쇼우덴인쇼인(旧正伝院書院)의 뒤쪽, 동북쪽에 숨은 듯 지어져 있습니다. 로지(露地)까지는 복원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당시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는 노부나가(信長)의 동생이기도 해서, 오오사카(大坂) 텐만바시(天満橋) 인근에 오오호리 가옥(大豪邸)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 겐안(元庵)의 원형(原型) 바로, 그 오오호리 가옥(大豪邸)에 있었던 다실입니다. 우라쿠사이(有楽斎) 사후, 그 땅은 오오사카(大坂) 텐만 도우쇼우구(天満東照宮)가 되면서, 다실(茶室)은 산내암자인 큐우쇼우인(九昌院)으로 이축되었고, 그 뒤 몇번의 화재로 소실되면서, 결국 메이지(明治) 대에는 그 터에 조폐국(造幣局)이 들어서, 현재는 디딤돌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비록 큐우쇼우인(九昌院)에 있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지만, 옛 그림에는 여러 형태로 묘사되어 있었고, 이름도 당시에는 죠안(如庵)이라 불렸고, 지금의 죠안(如庵)은 은거 당시의 다실이라는 의미로 반대로 겐안(元庵)이라 불렸었다고 합니다. 서로 이름이 정반대였던 셈이죠^^;;;
미처 들를 시간도 여유도 없어 못 들렀지만, 나중에는 천천히 둘러봄직한 곳일 듯 합니다.
아마로 이렇게 생긴 공간을 언젠가는 음미해볼 기회가 있겠죠 ?? ㅎㅎ 그 외에도 경내에는 코우안(弘庵)이 신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다실 바로, 죠안(如庵)입니다.
죠안(如庵)은 챠노유(茶の湯)의 종장,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가 지은 다실(茶室)로, 교토(京都) 야마사키(山崎) 묘우키안(妙喜庵) 내에 있는 다이안(待庵), 다이토쿠지(大徳寺) 료우코우인(龍光院) 내에 있는 밋탄(密庵)과 함께, 현존하는 세 곳의 국보(国宝) 다석(茶席) 중 하나입니다.
물론 죠안(如庵)도 촬영불가입니다^^;;; 그래서 구글링으로 구한 사진으로 대체@@...
죠안(如庵)은 아이치현(愛知県) 이누야마 시(犬山市)에 있는 정원인 우라쿠엔(有楽苑) 내에 있는 다실(茶室)입니다. 원래부터 현재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72년, 나고야 철도(名古屋鉄道)에 의해 현재 위치로 이축되어, 195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죠안(如庵)이란 명칭은, 처음 이 건물을 지었던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의 세례명 'Joan' 아니면 'Johan'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여튼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라쿠사이(有楽斎)는 이전에 죠안(如庵)이란 이름의 다실(茶室)을 오오사카(大坂) 텐만 야시키(天満屋敷)에도 지었었는데, 우라쿠엔(有楽苑) 경내에 '겐안(元庵)'이란 이름으로 복원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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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안(如庵)은 1618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생,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楽斎)에 의해 교토(京都)・겐닌지(建仁寺) 경내의 암자 쇼우덴인(正伝院)이 중창될 때, 지어진 다실(茶室)로, 1873년에 쇼우덴인(正伝院)은 북쪽에 연이어 있었던 에이겐안(永源庵) 터로 옮겨 쇼우덴에이겐인(正伝永源院)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 때, 기온마치(祇園町)의 유지에게 불하되었고, 이후 1908년에 다시 도쿄(東京)의 미츠이(三井) 저택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때, 해체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차량에 실어 도쿄까지 토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운반한 사람은, 교토(京都) 스기야 대목장(数寄屋大工) 히라이 가문(平井家) 4대 타케지로우(竹次郎)였다고 하네요. 당시 미츠이(三井)의 중역으로 저명한 다인이기도 했던 마스다 타카시(益田孝, 1848-1938)가 이 곳을 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38년, 미츠이 타카미네(三井高棟, 1857-1948)에 의해 카나가와 현(神奈川県) 중부의 오오이소(大磯)의 별장으로 이축되었다가, 1972년, 나고야 철도(名古屋鉄道)에 의해 호리구치 스테미(堀口捨己, 1895-1984)의 지휘 하에 현재의 위치로 또 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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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待庵) 참관 때도 비슷했지만, 이 곳도 국보를 유지관리하는 엄정함이 느껴지는 엄격한 규정으로 실내 촬영은 금지였지만, 다행히도 나중에 다실의 외관만은 마음껏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우리는 지그재그로 마루를 거쳐 죠안(如庵)을 참관하러 들어갔습니다. 약간 어두운 복도를 지나 마루바닥을 디디며 서서히 진입하였던 다실 내부는 약간은 더 밝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이안(待庵)의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와 조금은 대조적인 밝기인 듯했네요^^
죠안(如庵)은, 코케라부키(杮葺き) 팔작지붕이 정면을 향한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다이안(待庵)과도 다른 소쇄(瀟洒)한 구성의 2조반 구성의 무코우키리(向切り)의 다실(茶室) 양식인데, 진입하는 정면 좌측에는 유벽(袖壁)이 있는 도마비사시(土間庇), 그 오른쪽에는 니지리구치(躙り口), 정면으로는 히카에노마(控えの間, 코쥬우노마, 扈従の間)에 면해 있어서, 정면 혹은 오른쪽으로 진입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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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통상 이용하는 니지리구치(躙り口)로 다실을 들어오게 되면, 왼쪽 뒤로는 4척(四尺)의 데도코(出床), 그 오른쪽 그 뒤편으로는 갓테(勝手)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인, 챠도구치(茶道口)와 큐우지구치(給仕口)를 겸한 갓테구치(勝手口)가 위치해 있고, 다회(茶會)시 이 문으로 들어오게 될 급사(給仕)의 동선을 따라 비스듬하게 벽을 세워 그 바닥에는 삼각형의 나무판, 즉 우로코이타(鱗板)를 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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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갓테구치(勝手口)에서 들어오게 될 경우, 만나게 되는 곳에 정주좌(亭主座)가 있는데, 그 옆에는 도우코(道庫), 그리고 도코노마(床の間)는 점주(亭主)의 오른 뒤쪽으로 위치하지만, 이 경우 데도코(出床)로 설치하여, 거리가 가까워져 있습니다.
점주좌(亭主座)의 후로우(風炉) 앞에는 기둥을 세우고 판벽(板壁)을 덧대어 놨는데, 기둥에 붙여져 있는 판벽으로, 후로우(風炉) 앞에 있는 쇼우반세키(相伴席)의 반조(半畳)와 점주(亭主)가 앉는 자리를 구분하는 동시에, 벽 아랫쪽에 둥글게 잘라내어 배석한 사람의 시선을 고려하여 답답하지 않게 배려하고 있어, 우로코이타(鱗板)와 함께 통상적이지 않은 이례적인 구성이지만, 나름 합리적인 변칙으로 보이고, 저명한 리큐칠철(利休七哲)과는 별격(別格)으로 일컬어지는 우라쿠사이(有楽斎)의 남다른 실력이 드러나 있다는 평론가들의 평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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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二畳) 구성의 공간이면서도, 여유와 긴장감을 동시에 잃지 않은 듯한 실내공간은, 평소에 '2조반(二畳半), 1조반(一畳半) 구성은 손님을 괴롭히는 면이 있다.'고 단언해왔던 죠안(如庵)・우라쿠사이(有楽斎)에 걸맞는 수작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는 소죽(篠竹)으로 짠 유락창(有楽窓), 옛 달력을 떼어 붙인 레키하리(暦張り)같은 특징으로도 유명하구요, 천정 가운데에는 돌상창(突上窓)이 뚫려 있습니다. 벽면에 총 5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유벽(袖壁)에 있는 도마비사시(土間庇)를 향해 설치되어 있고, 남쪽 방향의 2곳은 직사광선이 덜 들어오도록 되어 있고, 거기에 동쪽의 2곳은 위에서 언급한 유락창(有楽窓)이어서, 전체적으로 빛은 벽으로부터는 충분히 들어오지 않습니다만, 천정 거의 한가운데에 설치된 자그마한 돌상창(突上窓)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어느정도 이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한편 다실 주위로 갓테노마(勝手の間)는 3조(三畳), 이로리(炉)와 미즈야(水屋)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쌍창(無双窓)은 우라쿠사이(有楽斎)의 무인(武人)다운 취향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구요... 단정하면서도, 스승이었던 리큐(利休)의 초암다실(草庵茶室)과는 차별화 된, 무가(武家)의 절도감을 느끼게 하는 명석(名席)으로, 이를 모방하여 지은 다실이 일본 전역에 산재해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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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나름 알차게 죠안(如庵) 다실 참관을 마치고, 우리는 이제 쇼인(書院) 바깥으로 나와 자유로이 우라쿠엔(有楽苑)을 둘러볼 차례입니다...
다른 분들 눈치를 보니, 동선은 아마도, 삼삼오오 여러 해설사 분에 따라 배분되어 그룹 별로 흩어지는 것 같은데, 우리 팀을 맡았던 분은 아마도 그 중에서도 최고령 해설사 할아버지이신듯^^;;; 아래의 돌은 아마도 세키모리이시(関守石)인 듯합니다^^;; 이 길로는 걸어 들어오지 마세요~~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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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스이몬(含翠門)을 통해 나오는 우리들과 다른 참관객들...
원래 이 분들을 담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데, 정자세로 서 있어주시는 어르신을 한 컷^^;;;
이제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세 군데의 다실 중 가장 최근의 다실인 코우안(弘庵)으로 갑니다.
가장 최근 신축된 다석(茶席)으로 그 앞 로지(露地)에 있는 츠쿠바이(蹲踞)는 스이킨쿠츠(水琴窟)이라 불리는데, 음향의 반사가 마치, 가야금 같이 우아하게 들린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시연해보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따라 귀를 기울여 봅니다~
고령에, 보통의 해설사처럼 수능란한 언변을 구사하시기는 버거우셨겠지만,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그리고, 해야할 해설은 모두(??) 마치신 해설사 할아버지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드디어 밖에서, 죠안(如庵)을 스케치할 시간입니다...
이 뿐 아니라, 조금 있다가는 쇼인(書院) 앞마당과 마루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으면, 차례차례로 말차가 제공되는데, 그렇게 다같이 맛을 음미하면서, 참관의 대단원을 내리게 됩니다...
다실 실내를 마음으로 담을 수밖에 없어 아쉬웠던 마음들은, 그나마 지금 밖에서 원없이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나저나 답사를 준비하면서 구글링하다가 본 갤러리에서 수없이 봤던 그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니, 뭔가 새롭습니다^^;;
상대적으로 다이안(待庵) 관리인 측에서는 외관마저도 촬영을 허가하지 않아, 많이 아쉬웠던 점과 비교되기도 하고, 여기는 조금 더 너그러운 편이네요^^
정면이 잘 보이는 명당을 하나 찾아 여기서 단체사진을 찍어보자 의논했더니, 그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신 해설사 할아버지께서 사진 찍어줄까 하고 먼저 제안하시고, 또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시네요^^ 거기에다가 심지어 꽤 근사하게 담아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찍었어도 이보다 잘 찍기 힘들었을 듯^^;;
이 곳에서의 다실 견학의 특별함은, 국보 다실 바로 옆 마루에서, 다실의 옆모습을 보면서 말차를 음미할 수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래 사진의 마루 언저리 어딘가에 걸터앉아, 말차를 대접받아 음미해봅니다...
이제 우리는, 말차까지 다 마시고, 그렇게 예정했던 참관을 마치고는, 가야몬(萱門)을 거쳐 우라쿠엔(有楽苑)을 나서게 됩니다...
원래라면 아래와 같이 죠안(如庵)의 사진을 찍어봤으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겠지만, 남은 시간을 또 시간조절하여 이제 남은 중요한 맛집에서의 저녁 예약 시간만은 꼭 맞춰서 가야 했기에, 슬슬 가자고 하여 서둘러 나섰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옆 이누야마 성(犬山城)으로 갑니다... 우리가 방문하고자 했던 국보 천수각들 중 마지막으로 들르게 될 곳이기도 했고, 이 이후에는 다시 저녁 식사 예약에 맞춰 고속도로를 달려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