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이 기반이 되어 쓰여진 루카의 두 저술, 즉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담긴 선교적 지향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복음화를 성취해 내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를 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의 복음화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다: “전 세계의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신 모든 것에 경탄하면서, 그리고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이처럼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1항).
요한 바오로 2세는 본시 아시아에서 태어난 말씀이 정작 본 고장에서 고작 3% 미만의 극소수 신자들에게서만 받아들여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대단히 안타까워하면서도, 지구 전체 인구의 2/3가 넘는 아시아 대륙에 그 절반 이상이 넘는 다수 인구가 그토록 가난한 현실을 더 안타까워하였다. 그리하여 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한 선교 성공 사례로 찬탄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은 물론 서구교회의 원조도 중재해서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앞장서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의 건의를 받아서 대희년을 앞두고 반포된 교황권고 문헌 「아시아 교회」 후반부 결론에서,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선결과제로서 해결해야 할 아시아의 공동선 열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교회의 사회교리(32항), 인간 인격의 존엄성(33항),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34항), 생명의 복음(35항), 보건(36항), 교육(37항), 평화의 건설(38항), 세계화(39항), 외채(40항), 환경(41항).
5.5.1. 교회의 사회교리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 복음화의 첫 과제로서 사회교리를 제시하였다. 그 근거로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시아 사명으로 천명하신 바 있었던 나자렛 선언에서 유래한, 사목헌장의 첫 머리에 나온 그 유명한 선언을 들었다. “현대인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1항). 그러므로 아시아 교회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돌려져야 할 사랑의 봉사를 특별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 삶의 친교를 살도록 부름 받았다”(아시아 교회, 32항)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교 개념이 전교에서 발전, 그리고 복음화에로 진화되어온 매우 중요한 배경이 있으며, 이는 사회교리적 안목에 의한 결과이다.
공의회 이전에는 선교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베푸는 ‘전교’(傳敎)를 주로 뜻했다. 이는 인적인 선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이교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 세상은 복음화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개념이었다. 여기서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신자들의 수를 나타내는 교세가 복음화의 지표로 작용한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에 사목헌장을 잇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바오로 6세, 1967)이 반포되면서 선교 개념은 ‘발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매우 혁신적으로 진화하였다. 이 회칙에서 규정하는 ‘발전’이란 네 단계로 분류된다(민족들의 발전, 1항). 첫째, 기아와 빈곤, 질병과 무지 등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단계. 둘째, 인간의 자질을 더욱 적극적으로 향상시키고 문명의 혜택을 누림으로써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단계. 셋째, 경제적 발전으로 빈곤에서 벗어나서는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하고자 노력하는 단계. 넷째, 경제적 발전과 정신적 성숙까지 이룩한 경우에는 앞선 첫째와 둘째 발전 단계에서 노력하는 이들을 돕는 단계(민족들의 발전, 81항 참조).
이 네 단계의 발전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기준에 대해서 이 회칙에서는 ‘전인적(全人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발전’으로 제시하였다(민족들의 발전, 14항). 전인적 발전이라 함은 인간은 육신과 영혼의 결합체이기에 경제적인 사정만 배려해서는 부족하고 정신적이고 문화적이며 또 영적인 사정까지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편적 발전이라 함은 인류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신적으로 유식한 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발전의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 되고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까지 포함한 다수에게 발전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우선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병원사업이나 교육사업 등도 전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간접 선교’로 보는 인식이 자리를 잡기는 했으나 선교를 ‘발전’으로 보는 이 개념은 이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인간을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보는 통합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사회교리 철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선교를 주제로 열린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뜨거운 논쟁을 거쳐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선교」(1975)가 반포되고, 사목헌장의 가르침(사목헌장, 90항; 「민족들의 발전」, 5항 참조)에 따른 정의평화위원회가 교황청과 각 교구마다 설립되면서 사회적 환경이 선교의 간접적 요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에 의해 선교가 좌우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복음화’라는 용어가 더욱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가 복음이라는 말씀의 텍스트(Text)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콘텍스트(Context) 즉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것이다. ‘북한 선교’라는 용어가 ‘민족 복음화’ 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애자, 노동자, 빈민 등 예전 같으면 간접 선교의 수혜자로 머물던 이들이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복음화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 흐름도, 전교에서 발전, 다시 발전에서 복음화로 선교 개념이 진화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선교의 개념이 이렇게 「전교–발전–복음화」로 진화해 온 배경에는 ‘현대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부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다. 공의회 초기에 교황청 사무국에서 마련했던 보수적 초안이 비유럽 대륙의 주교들에 의해서 거부된 것을 시작으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회기가 흐르는 동안 유럽 일변도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제3교회를 대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폭넓게 반영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선교에 국한해서만 보더라도, 회기 초반에는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선교교령, 6항)이 선교라고 규정했었으나, 회기 말에 가서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인 것”(사목헌장, 1항)이라고 천명할 정도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전교 차원의 부식적(扶植的) 선교관에서 복음화 차원의 사목적인 선교관으로 바뀐 이 변화는 선교의 중심이 유럽으로부터 선교 현장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같은 자각은 예수의 원 선교에서 당연시되던 강생의 국면이 비로소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강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가난한 처지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회적 강생의 삶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은 공의회 회기가 종료된 후에도 이어졌다. 1974년에 로마에서 선교를 주제로 하여 열린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는,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17-19항)이라고 새롭게 정의하였다.
「아시아 교회」 문헌 제6장에서는 ‘전교’의 개념이 사라지고, 여기서 더 진화된 ‘발전’과 ‘복음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발전을 위하여,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사회교리로써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을 수행해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다(아시아 교회, 32항). 사회교리는 이전의 전교 개념을 넘어서서 새로운 복음화의 지평을 열어 보이는 전망이다.
5.5.2. 인간 인격의 존엄성
세상에서는 ‘발전’을 ‘개발’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물질문명적 차원에서 이해하지만, 사회교리에서 가르치는 ‘발전’의 개념은 인간 발전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교회가 추진하는 발전이란 경제와 기술의 문제 훨씬 그 이상의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기술이 발달하여 이룩된 물질문명의 진보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하여 사회교리의 기초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적 품위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이룩하는 문명의 정체성 역시 “인간 인격의 완전성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아시아 교회, 33항)는 데 있다.
아시아 주교들은, 세계 인권 선언이 선포된 지 5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아시아 대륙에서 여전히 차별과 착취 그리고 가난과 소외로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으며,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모든 활동은 유린되고 있는 인권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그 기본권은 복음화를 실현함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5.5.3.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 증거의 기본은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언행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셨다(루카 4,18-19). 이는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신성을 내다본 예언(이사 61,1-2)을 인용한 것이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서 실제로 이 메시지를 실천하셨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루카의 행복선언이다(루카 6,20-21). 이 행복선언은 이어지는 불행선언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루카 6,24-26).
본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이라는 명제는 ‘선택’이었다. 1968년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가 열린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채택된 결의문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이 제안되었다. 그 후 1979년 제3총회가 열린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는 이 표현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교황청 문헌에도 이 명제가 수용되기 시작했는데, 유럽 이외의 목소리가 교황청 문헌에 반영된 것은 이 명제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편적 메시지로 굳어지자 일부에서는 이 명제가 초래할 현실적 긴장을 완화시켜보려는 의도로 ‘선택’을 ‘사랑’으로 완화시켜 표현하기도 했는데, 문헌 「아시아 교회」에서도 이런 추세가 반영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실천이 현실적으로 매우 긴장을 초래하는 날카로운 ‘선택’이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루카의 선언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행복선언과 부유한 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이 연달아 나오기 때문이다. 부자들에 대한 그 어떠한 긴장을 주지 않은 채 그들의 호의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방도가 예수님께서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이 ‘선택’을 감행할 경우에 어떠한 박해가 초래될 지도 충분히 예상하고 계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2-23). 이러한 복음선포의 십자가는 ‘하늘에서 받을 큰 상’으로 미리 선포되었는데, 이는 이 십자가를 거부할 경우의 벌도 내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선택을 사회적으로 분명히 하시고 나서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 선택에 따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언명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아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위대한 문명들의 대륙이지만 몇몇 국가는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결핍과 가난 그리고 착취로 고통 받고 있는 곳”(아시아 교회, 34항)이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아시아인들에게 정신적 영향을 미쳐 온 고대 문화와 종교 그리고 고대 전통들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취약함을 웅변함과 동시에, 근세 이래 서구 라틴 교회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부식적 선교 시도 역시 실패했음을 아울러 알려주는 것이다. 18세기 제국주의적 식민정복 시대에 서구 열강들은 앞다투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고 억압과 착취 그리고 수탈을 일삼았으며, 그 후유증은 지금도 심각하다. 아시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국토가 넓은 두 나라, 인도와 중국은 가장 먼저,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크고 많이 그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서양의 문물에 대한 저항의식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음은 당연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한국도 이들 서양 열강들의 정책을 흉내낸 일본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식민지배를 받았다. 한국 역시 일제의 식민지배의 그림자를 아직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을 만큼, 식민지배의 악영향은 쉽사리 씻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아시아의 복음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호소하였다: “가난한 이들과 맺는 연대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아 소박하게 살아갈 때 가장 신뢰할 수 있습니다. 소박한 삶, 깊은 신앙, 그리고 모든 이 특히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성실한 사랑은 복음의 빛나는 모범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은 아시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의 가르침과 일치된 생활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교회의 사명에 더욱 충실히 봉사하고 교회 자신이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도록 호소하였습니다”(아시아 교회, 34항).
5.5.4. 생명의 복음
아시아 복음화 과업이 부식적 선교관에 따른 가톨릭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차원의 과업이기에, 아시아 주교들의 건의에 따른 교황의 권고는 인간 문명의 원초적 차원으로서 ‘생명의 복음’을 빼놓을 수 없다. 서구인들이 주도했던 현재의 인류 문명에 오늘날 ‘죽임의 문화’가 드리우게 된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아시아 복음화에서 ‘생명의 복음’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5.5.5. 보건 향상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살아있는 이들의 건강한 생활을 보장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교회는 특히 가난과 소외 때문에 기본적인 의료 혜택에서 배제된 이들의 보건에 투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투신하는 보건의료인들은 격려받고 지지받아야 한다(아시아 교회, 36항).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 인간 발전을 위한 봉사는 생명에 대한 봉사로 시작된다. 잉태의 순간부터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특히 자기 자신을 방어할 목소리조차 갖고 있지 못한 약자들의 생명에 대한 존중은 참된 발전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 약자가 태아이든, 장애인이든, 노인이든 생명은 그 자체로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생명의 복음’이 아시아에서 이룩될 사랑의 문명에 있어 기초가 되어야 한다(아시아 교회, 35항).
5.5.6. 교육 기회의 확대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 가톨릭계 학교들은 신앙을 토착화시키고 개방성과 존중의 길을 가르치며 종교 상호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교육의 기회가 적은 소녀들과 소수 민족들, 시골의 가난한 이들과 그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공식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간으로 양성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 사도직은 더욱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아시아 교회, 37항).
5.5.7. 평화 건설
세계의 평화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으며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국가 간의 분쟁을 전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해결하기를 촉구하며, 분쟁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정의와 평화 그리고 화해를 위한 노력에 투신하고자 한다(아시아 교회, 38항).
5.5.8. 세계화
인류에게 불어닥친 세계화의 바람은 국가 간의 장벽이 제거되어 상품, 서비스, 자본 등이 거대한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어 나가게 만들면서, 국경 없는 세계에서 생산과 금융과 정보 등도 실시간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 추세로 말미암아 부유한 선진국들의 다국적 기업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는 한편 가난한 나라들은 더욱 가난해지며 더욱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그 결과 그렇지 않아도 가난했던 아이사의 많은 나라들은 세계 시장 경제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주변화 추세는 서양 선진국에 속한 거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촉진되고 있어서, 아시아 사회를 급속하게 서구화시키는 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즉, 세속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인 동시에 소비주의적인 서구 문화가 아시아의 민족들을 지탱해 왔던 전통적 가치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 추세의 그늘을 없애고 부작용도 줄이기 위하여, 교회는 인류가 통합되고 연대할 수 있는 세계주의를 향하여 ‘소외 없는 세계화’와 ‘연대의 세계화’를 주창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아시아 교회, 39항).
5.5.9. 외채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의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지고 있는 부채의 무거운 짐과 그로 인한 빈곤의 현실에 대해 아시아 주교들이 표명한 염려에 동의하면서, 성경의 희년 사상에 따라서 임박한 대희년에 무거운 외채를 탕감해 주거나 실질적으로 삭감을 해 주도록 부자 나라들의 주교회의들을 통해 강력히 권고하였다. 아시아 채무국들은 국제 통화 기구들과 은행들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하여 식량, 건강, 주택, 교육과 같은 생활의 필수 영역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아시아 교회, 40항).
외채란 대외채무(對外債務)의 줄임말로서,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지고 있는 외채는 국가 간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주된 요인이며 외채로 인해 정상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가난한 국가에서 부유한 국가에로 이주하는 노동자를 발생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희년을 앞두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근거로 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선진부유국들로 하여금 가난한 국가들에게 빌려준 채무 중에서 상환불가능하거나, 이미 원금을 다 갚고 이자만 남은 채무부터 탕감해 줌으로써, 가난한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주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과중한 외채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들은 지난 세기에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오늘날의 선진국들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던 전통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정상적인 국가 발전을 할 수 있는 길이 가로막혔고,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후에도 왜곡된 경제 구조 탓으로 과거의 식민 모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기형적 발전을 해 오면서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누적되어온 외채가 상환하기 어려운 정도로 문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채권국들에게는 도덕적 채무가 있는 것이다. 대희년을 명분으로 교황이 부유국들에게 최빈국들의 외채를 탕감해 주라고 요구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일방적인 요구 같지만 사실 이러한 외채의 역사적 뿌리에 채권국들의 도덕적 채무가 깔려 있음을 전제한 윤리적 요구인 것이다. 부유한 선진국들이 지고 있는 엄청난 도덕적 채무를 탕감받는 길은 최빈국들의 경제적 채무를 탕감해 주는 것이라는 권고이기 때문이다.
5.5.10. 환경 보전
문헌의 윤리적 요구는 환경 문제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이 환경을 돌보아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으며 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들의 선을 위한 것이고, 또한 환경의 훼손과 오염으로 말미암은 피해는 가난한 나라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더 크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류가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에 대해서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균형에 대해서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또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피조물 전체를 창조주의 뜻대로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아시아 교회, 41항).
이상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에서는 ‘제6장 인간 발전을 위한 봉사’라는 제목으로 가톨릭 사회교리에 근거하여 아시아의 발전을 위한 열 가지 권고를 제시하였다. 즉, 사회교리에 입각한 실천(32항), 인격의 완전성을 위한 사회 발전(33항),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34항) 등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기반적 권고를 바탕으로, 생명의 복음(35항), 보건을 증진시켜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일(36항), 전인적이고 보편적으로 문명의 혜택을 고르게 나누기 위한 교육(37항) 등 사랑의 문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국내적인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실질적 권고를 거쳐서, 평화의 뿌리가 되는 정의를 실현하도록 대화와 협력에 힘쓰는 일(38항), ‘소외 없는 세계화’와 ‘연대의 세계화’(39항), 부유국의 도덕적 채무와 최빈국의 경제적 채무를 동시에 탕감하는 일(40항), 생태계 질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41항) 등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자면 꼭 필요한 국제적 협력과 연대에 관하여 아시아 주교들의 건의를 받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의 권위로 발표하였다. 또한 이 열 가지 권고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일인 동시에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한 길임을 교황은 강조하였다.
특히 교황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투신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 안에서, 이주자들, 본토인과 토착민들, 그리고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가져줄 것”(아시아 교회, 34항)을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 비추어 아시아 복음화에 앞장 서 줄 것으로 교황이 기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살펴보자면, 아시아 출신으로서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이주한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이 꾸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을 다문화(多文化) 가정이라고 일컫는다. 세계화 추세에 따라 국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나라마다 다문화 현상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혼인을 하지 못한 농촌 총각들이 늘어나자, 중국의 조선족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 이주를 해오기 시작하여 필리핀과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많이 이주해왔으며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과 국제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7년에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최근에는 전체 결혼자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자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외국인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한국어 습득 장애를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문화와 풍습, 생활 상식 등을 익히는 데 더디다보니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의 정체성 혼란은 물론 학습 부진과 사회 부적응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고, 부부 간에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탓으로 가정 불화로 인한 정신 건강 문제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원인에 따라 이 다문화 가정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가장 가난한 계층에 속하며 다음 세대에 가서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형편이다. 이들 다문화 가정이 문제 가정이 되면 사회 부적응 현상을 겪은 아이들이 자라서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도 있어서, 교황이 각별하게 호소하다시피 사회의 관심과 교회의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의 관심과 교회의 배려를 받아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 사회에 원만하게 통합될 수 있다면 이들이 지닌 특성, 즉 어머니의 나라인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 사이에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화에 기울어진 나머지 민족 정체성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한 다수의 한민족 구성원들보다는, 비록 소수이더라도 이방인으로서 한민족을 찾아온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음으로써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원만히 통합되고 민족 정체성까지도 갖추게 되면 민족 복음화에는 물론, 아시아 복음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바이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전략으로서,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성경 말씀의 맥락이 이러하다. 다문화 가정의 2세, 3세가 자라나서 이 같은 아시아 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자각하는 이들이 나온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아시아의 이주 여성들과 그들의 어린이들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강조하는 교황의 호소는 이렇듯 아시아 복음화에도 중대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03 05:1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03 0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