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 엘레 - 한 종류, 그들은
내력이니 = 톨레도트 - 후에, 역사, 계보
여호와 = 예호와 - 자존자, 영원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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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ae [428, 엘레] 이것들 these
411에서 유래한 연장형 ; ‘이(것)들’ 또는 ‘저(것)들’ : - 또 (다른) ; 한 종류, 그렇게, 약간,
그같은, 그들을, 이들(같은), 그들은, 이(것), 저(것)들, 그래서, …한 것(사람)
엘레는 지시대명사이며, [제 hz, , 2088 : 이것, 저것]의 복수로 사용되며, '이것들'을 의미한다.
hz, [2088, 제] 이것 this, 이러한 such
기본어 ; 남성 지시 대명사,‘이것’, 또 는‘저것’ : - 그는, ×그러므로, ×여기,
그(자신), ×지금, ×그의, 전자, …후자, ×다른것, 보다더, (×같은), 이같은, 것(사람),
이것들, 이것(이사람), 이편, 저편, ×따라서, 바로 그것, 어느것 2063, 2090, 2097, 2098과 비교
제(지시대명사)는 기본어근이며, '이, 이것 this, 이러한, 이것, 저것 such'을 의미한다.
t/dle/T [8435, 톨레도트] 출생, 후손, 결과, 역사
3205에서 유래 ; (단지 복수형으로만) ‘후에’, 즉 ‘가족’ ; (상징적으로) ‘역사’ : - 출생, 계보
(단지 복수형으로만) '후에', 즉 '가족'; (상징적으로) '역사':- 출생, 계보
1)자손, 결과, 절차, 출생, 계보
톨레도트(명여)는 [얄라드 dl'y: , 3205]에서 유래했으며,
'출생, 후손, 결과, 어떤 사건이나 사람의 역사'를 의미한다.
dl'y: [3205, 얄라드]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
기본어근 ; ‘새끼를 ‘낳다’ ; 사역동사로 ‘낳게 하다’ ; 의학적으로 ‘산파의 일을 하다’
; 특히 ‘혈통을 보이다’ : - 낳다, 낳게하다, 출산(【일】), 태어나다, (어린애, 새끼)를 낳다(낳게 하다),
자라다, 새끼, 어린아이, 오다, 해산하다, 알을 까다, 해산의 고통을 겪다,
산파(의 일을 행하다), 계통을 선언하다, …의 아들이 되다, 산고하는 여인
얄라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아이를)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 진통하다'를 의미한다.
td,l,/m [4138, 몰레데트] 친족, 출생(지), 자손
3205에서 유래 ; ‘탄생’ (복수로는 ‘출생지’)
; 함축적으로 ‘혈통’, ‘본국’, 또는 ‘자손’, ‘가족’ : - 낳은, 태어난, 자식, 자녀, 친척, 본토의
몰레데트(명여)는 [얄라드 dl'y: , 3205 : 아기를 '낳다', 열매를 맺다, 생기다]에서 유래했으며,
'친족, 출생(지), 혈통, 자손'을 의미한다.
hwhy [3068, 예호와] 여호와, 야웨
1961에서 유래 ; ‘자존자’, 또는 ‘영원한 자’
; 유다 민족의 하나님의 명칭 ‘여호와’ : - 여호와, 주님, 3050, 3069와 비교
1961에서 유래, '자존자', 또는 '영원한 자' 유다 민족의 하나님의 명칭 '여호와' :- 여호와, 주님
1)한 분이신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명칭
예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며, '여호와, 야훼'로 음역한다.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히브리어 4자음 문자 '요드, 헤, 와우, 헤(YHWH)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신성 4문자(Tetragammaton)는 하나님의 인격적 이름으로 성경에서 창 2:4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구약성경을 일관해서 총 6,000여회(cf. BDB)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한글 번역본의 개역에서 "여호와",
공동번역에서 "야훼", 영역본에 Jehovah 라고 음역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다.
중세 어느 때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 4문자에 대한 정확한 발음과 기원 및 의미는 상당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왔다 .
hy:h; [1961, 하야]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이다
기본어근【1933과 바교】; ‘존재하다’,즉 ‘이다’, 혹은 ‘되다’,‘발생하다’
(늘 강조적으로 그러나 순전한 접속사나 조동사는 아님) : - 봉화, ×전적으로,
있다 (되다, 달성되다, 위탁되다, 같다),부수다, 되게하다, 발생(하다), 계속하다, 하다, 기진하다,
떨어지다, +따르다, 생기다, ×가지다, 지속하다, 물러나다(스스로). 요구하다. × 사용하다
하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이 일어나다, 발생하다, ~이 되다, ~이다'를 의미한다.
[하야 hy:h; , 1961]는 '되다' to become를 의미하는
다른 히브리어 단어 [하와 aw:h; , 1933], 단지 5회 나옴, 창 27:29, 사 16:4, 전 2:22, 전 11:3, 느 6:6)와,
그리고 아람어 성경에 있는 동일한 동사 [하와 aw:h: , 1934], 71회와 관련되어 있다.
아카드어에 있는 음성상의 상당어 에우(ewu)는 '스스로...이 되다', '...처럼 되다'를 의미한다.
아카드어에서는 존재함을 표현하기 위해 에우(ewu)가 아닌 바슈(bashu)를 사용한다
(우가릿어에서도 이와 비슷하며 페니키아어에서는 군[kun]을 사용한다).
aw:h; [1933, 하와] 떨어지다, 내리다 fall
기본어근【183, 1961과 비교】; 본래 의미는 숨을 쉬다를 뜻하는 듯함
; ‘이다’ (존재의 뜻에서) : - 이다, ×가지다
1. [하와 aw:h; , 1933], 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떨어지다, 내리다 fall'를 의미한다.
2. [하와 hw:h, 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이다 be, 되다 become'를 의미한다.
Hy: [3050, 야흐] 야훼의 축약형
3068의 압축형 ; 뜻은 같음 ; 성호 ‘여호와’
: - 여호와, 주님, 가장, 맹렬한, ‘야’로 끝나는 명칭들과 비교
야흐(하나님의 이름)는 [야훼 hwhy , 3068]의 축약형이다.
창세기 1장을 다시 보게 된다
태초[베레쉬트]는
창조[바라]를 한다
머리[로쉬]안에 이룬다
이것이 사람[아담]이고 마음[레브]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로 ‘[바라]’되고
예수로 ‘[쉬트]’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의 목적이다.
구원(쉐비이;완성)은
창조(바라)
첫번째(에하드;시작)날
두번째(셰니;반복,다양하게,변화)날
세번째(쉘리쉬;강화,회복,존재)날
적용,두다(쉬트)
네번째(레비이;확대,확장)날
다섯째(하미쉬;살찜,증가,견고)날
여섯째(쉿쉬;빛나다,기쁘다,세우다)날
그래야 쉼[나아]이 있게 된다.
‘[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이 삶 속에 적용되는 것이다.
적용되지 않으면 교만의 산꼭대기에 앉게 된다.
결국 무저갱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어
이전보다 더 형편이 나쁜
생각의 귀신들에 사로잡혀서 방황하게 된다.
이스라엘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다스림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바라]’가 되지 않으면
생각의 머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생각의 머리로 바꾸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강권적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바라]’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베레쉬트]’(태초)안에서
육신의 생각들이 잘라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합되어 다스림을 받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구원이다.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애굽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바라]’되어지지 않고
생명 안에 거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육의 생각의 우상들에 사로잡혀
무저갱의 구덩이에 갇혀서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태초가 열려야 한다.
육신의 속성인
생각의 옥에 갇혀서 굳어져버린
마음땅이 열려야 태초가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이
무저갱의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 자체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흑암 속에서 빛을 받지 못하니까
빛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영적소경 상태에서
생명의 나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지 못하면
태초를 열리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태초이시기 때문이다.
태초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없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로 바뀌어 질수가 없다.
그에게는 참 생명이 없는 것이다.
눈이
신령한 눈으로 ‘[바라]’되고
귀가
들을 수 있는 귀로 ‘[바라]’되고
마음이
깨닫는 마음으로 ‘[바라]’되어야 한다.
태초를
자연현상의 세계가 시작된 시간으로만 보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다음으로
‘[쉬트]’를 생각해보면
‘[쉬트]’는 놓다, 두다, 적용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바탕으로 올바르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그 높으신 근본 뜻을 배워서
육의 속성들 생각을 잘라내었다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올바르신 생명으로 놓아져야 한다.
불교에서는
현세의 고통으로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참선과 고행을 한다.
현세의 생각들이 모인 마음을 비우는 것이 목표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라]’가 목표다.
물론 ‘[바라]’는
참선과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바라]’한 것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비웠다면
그 자리에
참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육의 속성을 ‘[바라]’해서 죽였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참 생명으로 ‘[쉬트]’해서 부활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기름부음)로 ‘[바라]’가 되었다면
예수(구원)로 참 생명이 ‘[쉬트]’되어
생명의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성경전체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도덕, 윤리,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 윤리, 철학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인 것이다.
오늘날의 선악과가 있다면 바로 이것들이다.
이것이 다원주의다.
이 시대가 다원주의에 팽배해있다.
왜 그런가?
마음의 문이 열리는 태초[베레쉬트]를
해와 달과 별과
자연현상의 세계가 시작된 시간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도덕, 윤리, 철학의 잣대로
성경을 보려고 시도한다면 넌센스다.
그는 이미 영적인 개념이 상실된 자다.
사람의 생각이 철저하게 ‘[바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산 순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은 그대로 살아있으되
육신에 속한 일련의 속성들을 죽여 나가는 것이 산 순교다.
‘[바라]’해서 ‘[쉬트]’하는
신앙을 철저히 소유하고 있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선악과는 반복해서 먹게 될 것이고
그에 따른 생명 없는 불행은 계속될 것이다.
철학의 잣대로 성경을 보는 혹자는
신약의 새 언약이 성취되었으니
구약은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본질을
똑바로 꿰뚫어보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유교, 불교, 기독교를
달관한 양 착각 속에서 기독교를 모독하고 있다.
‘[바라쉬트]’가 되지 못한 인간의 소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신약에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창세기 내용을 반복해 주신 것이다.
창세기는 성경 65권의 잣대다.
창세기의 잣대가 없으면
성경 65권은 절대로 풀어 나갈 수 없다.
눅 12:49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셨다.
불은 ‘[에쉬]’인데
‘[베레쉬트]’의 핵을 말한다.
‘[바라]’해서
‘[쉬트]’하시고자 오셨다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 땅이 ‘[바라쉬트]’되었다면
더 이상 무엇을 기뻐할 것이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것이 먹는 것이다.
말씀은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배우는 것이다.
먹은 말씀은 육의 속성을 불태워 버리게 된다.
똑바로 확실하게 태워져야 한다.
짐승의 속성이 불태워 번제로 드려져야 한다.
타다 말은 부지깽이가 되면
평생 고난 속에서 신음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