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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두서가 없고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보시고 어떠한 의견도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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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녕사는 ‘맑고 청청한 사찰‘이란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스님들 하나하나가 도량을 정갈하게 가꾼다. 하루는 이른 새벽 4시 도량석 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둠이 아직 짙게 깔려 있는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한다. 새벽 예불을 드리기 위해 대적광전으로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독경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예불이 끝난 후 발우공양을 한다. 이때 나오는 찬은 5첩이 기본이며 나물, 장아찌, 김치, 사과 치즈로 구성되어 있다. 봉녕사는 승가대학 부속건물이 함께 있어서 학인스님들이 4년간 수학하는 교육의 장도 마련되어 있다. 공양을 마치고 아침 7시가 되면 수업이 시작된다. 오전공부가 끝난 후에는 점심 공양을 준비한다. 공양간에서는 재가자와 스님들이 함께 모여 간단한 음식을 만들고 나누며, 감사의 마음으로 오관게를 낭송하고 식사를 한다. 점심을 마치면 청소 시간이 시작된다. 스님들이 맡은 구역을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며 수행의 연장선으로서 마음을 정화한다. 오후 1시부터는 수업이 이어진다. 1학년은 치문, 2학년은 사집, 3학년은 사교 그리고 4학년은 화엄반으로 이뤄져 각 학년마다 배우는 경전이 다르다. 오후가 되면 저녁공양을 하고 예불을 드린다. 저녁이 되면 학년별로 샤워를 마치고 큰방에 복귀한다. 9시 소등 전까지 그날 배웠던 공부를 복습하거나 예습을 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봉녕사의 하루는 이렇게 고요하고 규칙적인 일과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으로 채워져 있다.
스님들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스님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겪을 때가 있다. 절집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먼저 출가한 순서로 위계가 정해지다보니 생기는 감정 갈등,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다온 습관으로 부딪치는 불편함, 견해 차이 등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수행공동체에서 살수 있는 힘은 매달 그믐과 보름에 하는 자자와 포살 때문이다. 자자란 함께 생활하는 스님들이 모여 자신이 지은 죄를 타인 앞에서 고백하거나 타인이 보고 불편한 점이 있던 부분에 대해 상대방에게 말해줌으로써 서로가 참회하는 시간을 갖는다. 포살은 비구니가 지녀야 할 계율 348계목을 모여서 독송을 하게 된다. 이런 의식을 통해 서로가 불편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죄를 지은 당사자는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되는 등 각자의 청정성을 회복하게 된다.
재가자분들이 스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부분은 아마도 스님들의 생계유지 부분일 것이다. 처음 출가하여 정식 스님이 되기까지 4~5년은 수련승 기간이라 생기는 수입원 없다. 간헐적으로 사찰에서 큰 행사가 열리거나 하면 수고비가 간혹가다 생기기도 한다. 대신 절 안에서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다 보니 큰 돈 나갈일은 딱히 없다. 만약에 큰병에 걸린 경우는 어쩔수 없이 절을 나와서 치료하고 회복되면 다시 오는 경우다. 무사히 정식 스님이 되면 각자 직성에 맞는 소임(군대로 말하자면 보직같은 경우)이 정해지는데 첫 보시금(월급같은 개념)은 30만원 부터 책정이 된다. 나 같은 경우도 대학이력이 식품영양학과라는 이유로 공양간으로 첫 소임을 보게 되었다. 연차가 쌓이면 20만원씩 증가하게 되는데 현재 나는 100만원을 받는 나름 짬밥이 생긴 스님이 됐다(에헷)
절집에 분위기는 각기 사찰마다 다르겠지만 유난히 내가 속한 봉녕사는 심히 엄격하다. ‘맑고 청정한 사찰 봉녕사’란 이름에 걸맞게 항상 단정하고 위의있게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승복이 구겨졌거나 운동화 뒤꿈치를 접어서 신거나 팔을 흔들면서 다니거나 큰소리로 말하거나 뛰거나 소리내어 음식을 먹거나 등등 열거하기도 민망할정도로 많지만 이런 행동을 했다면 자자의 대상자가 된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정주는 000를 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위의 부분에서 무던했던 나는 참회자가 되었고 앞으로도 될 것 같다. 어느 날, 핑크색 스파크를 중고로 구입해 온 나는 여러 스님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그 이유인 즉슨, 위의에 어긋나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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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십 삼년이 지났다. 고2였던 동생과 나는 한 살 터울로현실 남매처럼 매일 티격태격하며 다투며 자랐다. 살림을 놓아버린 엄마의 빈자리는 집에 들어서면 맨먼저 코를 찌르는 쿰쿰한 냄새가 나는게 일상이었다. 싱크대에는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음식물 찌꺼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냉장고는 제대로 닫히지 않아 팬에서 윙윙 소리를 냈고, 안에는 곰팡이가 핀 김치가 썩어가고 있었다. 쓰레기통은 이미 넘쳐나서 주변으로 쓰레기들이 흘러나왔다. 거실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수석장이 있었다. 그 위에는 더 이상 놓을수 없을 정도로 중절모와 목도리 그리고 엄마의 꽃무늬 스카프 천이 켭켭이 쌓여 있었다.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방3개중 하나는 창고방으로 사용해 삼남매가 공부하던 낡은 책들과 신문지, 그리고 아빠가 수집해둔 오래된 골동품들이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가 나간 도자기, 녹이 슨 청동 촛대, 그리고 고가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골동품을 수집하게 된 아빠는 집배원 은퇴 이후 재테크 용도로 보험을 든다라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골집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뒤섞여 있었고, 그 안에서 어느누구 하나 치울 엄두를 내지 않았다. 오랫동안 무기력으로 잠식된 공기만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집안의 혼란스러움과 무질서 그리고 불안은 그곳에 사는 우리 가족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투영했다. 한때는 따뜻하고 아늑했던 공간이 이제는 쓰레기와 잡동사니, 그리고 골동품들로 뒤덮여 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래왔다. 가족 모두 외출하고 돌아올때는 굳게 잠긴 대문 사용대신 옆 차고 셔터를 올려 별 생각없이 드나들었다.
친구들을 초대해 컴퓨터 게임도 하고 밥도 먹으며 사교성이 좋았던 동생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은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처럼 동생은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밖으로 놀러나갔다. 나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다. 2001년 12월 27일, 연말이라 부모님 두 분 다 송년 모임에 참석하게되어 집에는 덩그러니 언니와 나만 있었던 저녁 8시. “따르릉~ 따르릉~” 동생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가 울렸다. 경찰은 동생이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차도에 쓰러져 있으니 와서 확인과 함께 부모님을 찾았다. 아침까지 너무나도 건강했던 동생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도로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아직까지 피부는 따듯하고 말랑했었다. 그의 손은 가슴 위로 뻗어 있었고, 오른손 약지손가락은 부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숨을 쉬지 않는 심장은 고요했고, 주변은 유난히 쥐죽은 듯 조용했다. 공기는 무겁고, 차가운 느낌만이 감돌았다.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로 군데군데 피가 묻은 자국이 있었다.
동생의 죽음 이후, 가족은 깊은 슬픔과 허무함 그리고 무기력함에 더 빠져들었다.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고3을 겨우겨우 버텨내며 2002년 W식품영양학과에 입학했다. 새로운 환경과 시작은 영원 할것만 같았던 무기력함과 우울증도 조금씩 나아져갔다. S를 만나게 되면서 CC 대학생활을 즐기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졌다. 어느 날 S는 내 생년월일을 물으며 “엄마가 알아오라고 해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고,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생각했었다. 며칠 후, S는 미래에 내가 목탁을 잡고 있는 스님이 되거나 무당이 된다고 당장 헤어지라고 했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1년이란 시간을 고작 무당말에 관계를 끝내자고 하는 S의 태도에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임태기에서 두줄이 나왔어” 이별을 할 수 없었다. 셋이 만난 날 S의 엄마는 임신중절수술을 권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건 않낳건 내 선택이고 어떤 결정을하든 S와는 다시 만날 수 없을거라 했다. 나와 S 둘다 어리고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낙태를 하는게 여자인 나한테 좋을거라며 회유했다. 병원과 비용은 다 부담할테니 빨리 생각해서 결정을 내달라는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 나는 펑펑 흐느껴 울었다. 내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었는데······.
차마 임신사실을 아빠에게는 알릴수 없고 언니에게 문자로 내 처지를 털어놓았다. 새벽이나 되야 통화가 가능했던 언니는 “ㅈㄴ ㅆㅂ ㄱㅅㄲ네!! 당장 수술해” 라며 긴 통화가 힘들다며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며 끊었다. 일주일동안 고민한 결과 도저히 아이를 낳아서 키울 용기가 나질 않았다. 2주 뒤 나는 S의 모를 만나 시골 구석진 J산부인과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떠나보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전등을 켜지 않고 안방에서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누워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날 병원에서의 기억이 한참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지웠다는 죄책감과 우울감에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바리깡으로 짧게 밀었다. 나는 휴학신청서를 냈다. 강의실에 들어가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서류를 제출하고 학교를 나서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휴학 기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아보자!’. 우선 독립을 결심하고, 지역을 찾아보았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건 50만원 남짓한 돈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수도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은 방값과 식비가 들지 않는 일을 찾아보자’ 그런 면에서 안산 반월공단에 위치한 S기업 베어링 부품 만드는 공장은 위 2조건을 만족하는 일자리였다. 문제가 해결되니 곧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음 날 첫차에 몸을 실어 안산으로 향했다. 부모님에게는 학교에서 연계된 인터십 자리가 생겨서 가는거라고만 했다.
도착한 안산 반월공단의 제조공장은 산업화의 상징처럼 보였다. 아침 햇살이 공장 지붕 위로 비추며 금속의 차가운 반짝임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장 내부로 들어서면, 정교하게 배치된 기계들과 설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속을 가공하는 커다란 프레스 기계들은 일정한 리듬으로 작동하며 쾅쾅 소리를 냈다. 무섭게 느껴졌다.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쉼 없이 움직이며 정밀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 위로는 다양한 부품들이 끊임없이 이동했다. 근무조건은 2교대 출근으로 격주로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첫 출근은 야간부터였다. 저녁6시 30분, 기숙사에서 공장까지는 통근버스로 30분 정도 걸렸다. 야간근무는 저녁7시부터 시작되었다. 공장에 도착하면 먼저 출입 카드를 찍고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카드 찍는 일은 급여와 직결되는 거라 신경을 썼다. 나의 주요 업무는 베어링의 생산 공정 중 하나인 그라인딩 작업이었다. 그라인딩은 베어링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으로, 매우 정밀한 작업을 요구했다. 나는 안전 고글장비를 착용하고, 기계를 점검하고 전 작업자 작업량도 확인하고 시작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순간 방심하면 프레스 기계에 손이 끼어 다치는 부상이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나는 베어링을 하나씩 기계에 넣고, 정밀하게 다듬어진 베어링을 꺼내 검사했다. 작업이 반복될수록 집중력은 높아졌다. 나는 전 작업자가 한 작업량보다 많이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때쯤,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주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며 스몰토크로 피로를 풀었다. 휴식이 끝나면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와, 남은 야간 근무를 이어갔다. 새벽 3시쯤, 또 한 번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시간 정도 눈을 부치고 나면 새벽 6시까지 마무리 작업으로 끝났다. 주간 근무자에게 작업현황을 인계해 주고 식당으로 가서 아침밥까지 먹고서 퇴근했다. 나는 6개월 하고 조그만한 원룸 보증금을 낼 수 있는 돈이 마련되자 그만두었다.
그 후 D무역회사 경리를 거쳐 W 프랜차이즈 수학학원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학원은 3년간 다니고 낮과 밤이 바뀐 출근으로 인해 체력이 안돼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단월드 명상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다. 안산의 고잔동 번화가 빌딩에 위치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입회시 입회등록서를 작성하게 되어있는데 문항은 개인신장정보 이외에 개인질병이력 및 고민사를 꼼꼼히 적는 칸이 있었다. 센터는 깔끔하고 정갈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으며 명상음악이 잔잔히 BGM으로 은은하게 흘러나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침 6시, 센터는 일찍 문을 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들이 명상실에 모여 스트레칭과 단전두드리기를 하며 하루를 맞이했다. 한달이 지나자 명상 지도자인 K는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문제해결책을 제시한다며 집중프로그램 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온화한 목소리와 신뢰감이 쌓였던 터라 나는 점차 그녀의 말에 매료되어 추가프로그램을 등록하게 되었다. 마음치유 프로그램 등록비 100만을 시작으로 고도의 추가 프로그램 등록은 계속 이어졌다. 프로그램 등록비로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모은 전재산 1500만원을 날렸고 등록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K의 행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까지 회유하고 내게 했던 방식그대로 그들에게 프로그램등록을 제안하는 모습을 알게됐다. 나는 점차 그녀의 진짜 목적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단체였다. 서서히 센터방문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낌새를 눈치챈 K는 수시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않자 집까지 찾아오는 둥 그녀의 집요함은 스토커 수준이었다. 그녀가 찾아오면 나는 쥐죽은듯이 하며 사람이 없는 척 했다. “미경씨 문좀 열어봐요. 나 K에요. 먹을거 사왔어요” ‘무서워 어떡하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안돼겠다는 촉이 빠르게 왔다. 나는 지쳤고 공허했다. 탈출을 하고 싶었다.
동생의 죽음, 불안정한 가정 그리고 첫사랑과의 실패는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출가를 결심한 것은 거창한 깨달음의 구도를 구하기보다 내면의 평온을 찾기 위해서였다. 스님의 길을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길 타인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출가 후 변한 점은 나는 매일매일 기도를 한다. 동생이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떠나 보낸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그리고 내가 이 길을 잘 걸어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출가 전 나의 삶은 큰 슬픔과 고통에 연속이었지만, 그 어려움 덕분에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7793자, 원고지 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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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종교도 다르고 주변에 아는 스님도 없어서 정주의 글이 참 신선하고 또 안타깝고 아프고 또 다행스러웠습니다. 앞으로 정주의 글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바램도요. 이런 좋은 글 계속 써주시길.
읽으면서 혼자 제목을 [출가]라고 붙여보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했던 1)출가 이후 비구니 사찰에서의 삶 2)출가하게 된 계기 두 가지를 담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나씩 들여다보면 너무 크고 아파서 압도될 것 같은 일들인데, 정주님의 글에서는 산봉우리를 조감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고통이 멀리서 담담하게 바라봐지는 것 같아요. 아마 꾸준한 수행 덕분이겠죠? 저는 그동안 정주님만의 유머가 담긴 글을 무척 좋아했어요! 꺼내기 쉽지 않은 글감이었겠지만, 이번 글이 글쓰기 수행(!)을 시작하는 정주님에게 더 많은 글감이 퐁퐁 샘솟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스님의 일상이라든가 분홍색 스파크를 둘러싼 이야기 같은 소소한 얘기도 듣고 싶어요. 정주님의 다양한 글쓰기가 기다려집니다.
저는 1)을 읽으면서 필자의 출가 이유가 궁금해졌는데, 2)에서 그 이유가 나오더라구요. 합평을 할 때는 1)과 2)가 너무 다르다(?)였나, 저하고 생각이 다른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1)에서 궁금했던 것이 2)에서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리가 너무 안 돼서 고민인데요ㅜㅜㅜ 정주 님의 글이 많은 내용을 담았는데도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어서, 어떻게 하면 저도 정리를 잘할 수 있을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 큰병에 걸린 경우는 어쩔수 없이 절을 나와서 치료하고" 부분에서 수입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되지 않으면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내용을 각주로 다는 건 어떨까요?
"1학년은 치문, 2학년은 사집, 3학년은 사교 그리고 4학년은 화엄반으로 이뤄져 각 학년마다 배우는 경전이 다르다."는 "각 학년마다 배우는 경전이 다른데, 1학년은~, 4학년은 화엄반으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이 순서를 바꾸면 어떨지요~ 치문, 사집, 사교, 화엄이 낯설어서, 경전이라는 정보가 먼저 제공되면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개인적으로, 단월드에 돈을 쓰게 되신 과정도 글로 써주실지가 궁금한데요
저도 단월드에 돈을 쓰게 될 뻔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쓰게 만드는 그 구조와 흐름이 궁금한데, 회원 수가 많은 것에 비해 굉장히 드러나 있지 않잖아요. 쓰다 보니 여기를 '계속' 다니시는 누군가를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에 빠져있는 분들이 많았는데, 여전히 단월드를 통해 행복을 찾고 계신지, 잘 지내고 계시는지..
정주님의 정돈되고 꾸밈없는 글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정주님만의 귀한 삶을 우리에게 공유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정주님 글을 읽으며 직접 체험하지 않는 글은 허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내어봅니다. 앞으로의 글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