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그리움, 그 시적 체험과 존재의 성찰
― 임태진, 화재주의보(고요아침, 2016) ― 김광순, 새는 마흔쯤에 자유롭다(동학사, 2016) ― 박연옥, 은빛 화답(동학사, 2016) ― 권정희, 별은 눈물로 뜬다(시와소금, 2016)
이송희(시조시인)
1. 그리움의 발화 시점―임태진, 화재주의보
2011년 영주일보를 통해 데뷔한 임태진 시인은 26년차 소방관이다. 그의 이번 시집은 등단 6년차에 내는 첫 시집이면서, “아무리 진화해도 꺼지지 않는” 그리움과 아픔이 담긴 소방관 체험의 산물이다. 이것이 그의 시집이 남다른 이유다. 「화재주의보」, 「봄날은 간다」, 「딱따구리 어머니」, 「바람의 섬」, 「감귤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등 총 5부로 구성된 시인의 시집에는 시적 화자의 체험적 사유와 삶에 대한 고민의 자국이 깊다. 무려 스물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그리움’이란 언어에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기쁨과 슬픔, 인생의 무상과 영속성 등 절실한 시‧공간의 상황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시인이 화재 현장에서 경험한 고통과 상실이 클수록 그의 내면에 그리움이 더 깊어지게 된다. 「화재주의보」 연작은 이러한 고통과 상실을 낳은 화재 현장에서 그리움이 된 시간이 발화한 흔적이다.
누가 진화했는지 발화하는 가을 산 화점은 단풍나무 가연물은 금빛 햇살 원인은 갈바람 추정 서서히 확대된다
산불도 대형 산불 속수무책 번지는데 끄는 사람 하나 없이 불구경이 한창이다 참으로 장관이구나 터져 나오는 탄성들
살다보면 그 누군들 속 타는 일 없으랴 무시로 진화해도 되살아나는 삶의 불씨 한라산 골짜기마다 화염이 분출한다
끄지 마라 끄지 마라 저 불은 끄지 마라 우리 가슴 가슴마다 타오르는 그리움도 최성기 가을 끝자락 자체 진화될 때까지 ― 「화재주의보 10 ―한라산 영실에서」 전문
한라산 영실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과정을 마치 화재 현장을 생중계하듯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적 화자에게 화점은 단풍나무이고 자연물은 금빛 햇살, 원인은 갈바람으로 추정되며 서서히 확대될 전망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화재를 진압하는 사람 하나 없이 저마다 장관이라 탄성을 지르며 불구경이 한창이란 것이다. 한라산 골짜기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가을 단풍의 장관을 화재 현장으로 은유하는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곧바로 화자는 “살다보면 그 누군들 속 타는 일” 있지 않겠냐며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다. “무시로 진화해도 되살아나는 삶의 불씨”를 “끄지 마라 끄지 마라”고 당부한다. 온갖 모진 슬픔과 아픔을 견디며 활활 타올랐을 단풍을 그대로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가슴 가슴마다 타오르는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화재 현장에 무시로 뛰어 들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면서도 “화염 속에 불쑥 내 손 잡던 그 할머니”(「화재주의보2」)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며 매번 출동 때마다 가슴을 훑어댄다. “동기 ‘성민’이가 이슬로 가던 아침”에는 침묵 속에 추시된 간절했던 일 계급 특진”(「화재주의보1」) 소식을 듣기도 한다. “장가 한번 못 갔다며 분신하던 그 사내”를 떠올리면서, “농촌에 태어난 그 죄/ 활활 타는 자화상”(「화재주의보4」)이라며 우리들의 농촌 남자가 처한 현실을 꼬집기도 한다. “다 타버린 살림살이 기어 나온 어린 아이”가 “우리 엄마 어딨어요?”, “우리 아빠 어딨어요?”(「화재주의보5」) 하고 울먹이던 목소리는 여전히 불에 데인 흔적, 그 상처로 남아 있다.
제주도 지도상에 사라진 마을이 있다 별도봉 기슭 아래 쑥부쟁이 터 잡은 땅 역사는 왜 잃어버린 마을이라 하는가
한 마을이 통째로 누명 썼던 1박 2일 육십 여 년 지났어도 불에 탄 집터는 남아 그 흙에 손바닥 대면 불씨 하마 살아날까
용서란 말 화해란 말 비수처럼 박힌다 스물네 개 놋숟가락 그 뒤에 또 연좌제 울음도 마른 바다가 제사상에 뒤척인다 ―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1」 전문
4·3의 아픔을 증언하는 고통의 현장은 시인에게 또 다른 그리움이 된다. 곤을동에는 폐허가 된 터에 양옥집 한 채만이 서 있으며, 입구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에서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곳은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한 마을이 통째로 누명을 쓰고 많은 희생자들을 낳았던 이곳 곤을동 앞에서 화자는 숙연해진다 “육십 여 년 지났어도 불 탄 집터는 남아” “손바닥 대면 불씨 하마 살아날까”하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역력하다. “스물네 개 놋숟가락 그 뒤에 또 연좌제”라니! “죄 없는 죄인으로 한 평생 숨어 살다가”(「사라봉 털바위꽃」) 겨우 이름만 돌아 온 그들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가지 못한 고향” 그 땅에 “때늦은 그리움들이 홀씨 되어 날”린다. “원망도 용서도 다 내려놓은 제주 바다” 앞에서 4.3의 아픈 그리움을 꺼낸다. 시인의 그리움은 “이 세상 하직인사 문자로 대신하고/ 끝까지 제자들을 구하다가 스러져간/ 새내기 선생님 영혼”(「한라산 산딸나무 ―세월호 참사에 부쳐」)을 추모하며 침몰한 세월호에 탑승하기도 한다. 그리고 “누명을 벗었어도 오명을 씻었어도/ 증언하듯, 가슴속에 그리움만 홀로 남아”(「개망초 연가」) 끊임없이 역사의 현장을 호명한다. 그런가 하면 「봄날은 간다」 연작을 통해 “호스피스 병동에도 둥지 튼 꽃”의 비유를 통해 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기도 한다. “찾아갔다 돌아오길 수천 번 반복해도// 그대 마음 열지 않음을 진즉 알고 있었네// 가 닿지 못하는 그리움 부서져라 파도여”(「주상절리」). 가 닿지 못하는 시간들은 모두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서 지독한 그리움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2. 중년의 목덜미를 스치는 기억 ―김광순, 새는 마흔쯤에 자유롭다
1988년 충청일보로 등단한 김광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눈빛도 조그맣고 내 맘도 가느다란// 문필봉 뒤돌아보는/ 계룡, 산자락에// 난 한 촉// 뿌리 내리고// 양달쪽에// 서 있”(「시인의 말」)다. 그녀는 이곳에서 “먼 훗날/ 잊어버릴까” “연필로 받아쓰다가// 놓쳐버린/ 내 스무 살”(「첫눈」)의 기억부터 마흔을 지나, ‘오십 줄 나의 이랑’을 지나는 소중한 순간들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내가 날 부르는 이름은 비정규직
책상에 허리 숙인 무거운 밤길 앞에
또 한 번 몸을 낮추어 작은 귀를 디민다
직선을 앞질러온 하늘도 반백인 걸
지고 온 흰 구름이 우듬지로 흩어지고
이십 년 흔들린 의자가 나를 자꾸 올려 본다
이른 아침 맨얼굴에 눈이 부신 저 햇살
중년의 목덜미에 시리도록 쏟아지는데
시간도 녹이 슨 자리 노루귀를 세운다 ― 「내 안의 노루귀」 전문
계약직, 비정규직, 실직이라는 단어는 김광순 시인의 시집에 여러 번 등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숙명(karma)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며, 결국 삶을 유예당하는 형벌이다. 카르마라 불리는 업보는 스스로 선택한 삶이며 스스로 살아갈 목적이 된다. 업보는 긍정이나 부정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이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이며, 깨달아야할 진리의 편린片鱗이다. 이 시인의 시들에 등장하는 비정규직의 삶은 스스로가 태어난 이유에 대한 부정과 단절, 제한이며 추방이다. 왜냐하면 “내가 날 부르는 이름은 비정규직”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고 온 흰 구름”마저 “우듬지로 흩어지고” “이십 년 흔들린 의자가 나를 자꾸 올려 ”보니 어느새 “중년의 목덜미에 시리도록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실직한 동백’(「동백낙관」)은 또 한 번 몸을 낮춘다. 「자작나무 눈 속에」에서도 “오십 줄 나의 이랑에 계약직을 묻고”사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득한 지평을 지우며 제 발자국도 지워진다. 비정규직 시적 화자의 삶에도 시 「찬밥」에서 처럼 “나,/ 대신/ 자명종이/ 하루 한 번 울어댔지”라는 표현을 통해 찬밥 같은 생의 절망에 대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늘 혼자 숨은 곡조로” 산모퉁이 오르던 화자의 삶은 이제 마흔쯤이 되어서야 “온 세상 어디로든지// 날아가라”고 말한다. ‘새들’에 비유되는 비정규직, 계약직의 일상이 자유를 얻는 것은 실직의 고통이 깊어지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자유는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아’라는 의미가 있다. 바로 내 자신이 원인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의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일까?
한반도 갈꽃 속에 반쯤은 두고 갔을 씨알, 목쉰 울음 이 땅에 풀어 놓고 저무는 하늘 쪽으로 두 손 모아 서성일 때,
내 귓전 울리도록 날 선 그의 육필이 길게 침묵하며 오로지 베풀어온 일순간 먹물 헤치고 환한 세상 밟았다 ― 「씨알 보법步法」 전문
우리나라 근대 철학자인 함석헌 선생은 깨어있는 사상가이자 철학자다. 선지자이자 선구자이기도 하다. 진리나 깨달음을 먼저 얻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함석헌 선생이 한반도의 어두운 길목에 빛을 제시했던 것에 대한 예찬이며, 암울한 시대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죽을 때까지 진리와 자유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함석헌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유신 정권 때는 5·16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글을 발표하며 일평생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학자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했던 그가 남긴 말 속에 길이 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집시다. 칼로도 찍을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고 물로도 빠져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스스로를 믿으십시오” 이 작품 속 화자는 그의 “목 쉰 울음을” 들으며 그의 육필을 듣는다. 긴 침묵의 미학과 배풂의 미덕으로 온갖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먹물을 헤치고 환한 세상을 밟은 그의 대한 그리움은, 정치 사회적으로 암담한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김광순 시인의 시적 배경의 기저에는 어둠, 비정규직, 실직의 아픔이 깔려 있다. “재봉틀 박음 소리로 잇대어 지나가”(「1960년생 ―부라더 미싱」)는 1960년대생들의 삶과 “어머니 버선발 한쪽이/ 거기 멈춰/ 떠/ 있”(「놀뫼 낮달」)던 곳에서 멈춰버린 기억, “머나먼 몽고반점을 지울 수는 없을까”(「불혹의 잎새」) 생각하며 시인은 쓰고 또 쓰는 과정 속에서 한 폭의 안부를 묻듯 기억 속 그리운 풍경들을 호명한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3. 다홍빛 서정을 꿈꾸다 ―박연옥, 은빛 화답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박연옥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은빛 화답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을 우리 삶의 국면으로 읽어가는, 서정시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자연의 움직임을 인생사와 결속시키는 서정시의 일반적인 원리는 결국 자아 성찰과 자기 탐색에 이르는 근원적인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대체로 회상의 방식을 빌려 때로는 자기 고백적 화법으로, 혹은 다짐과 확인의 화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 속에 자아를 들어앉히는, 동일화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박연옥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그녀가 오랜 시간 걸어 온 뿌리 깊은 기억의 지층을 파헤치는 과정이다.
평행선이 흘러내린 분기점 한참 지나 이발관 낡은 간판 눈에 익은 이정표 허공엔 빛바랜 낮달 기우뚱 떠 있고
때로는 고요들도 핼쑥한 날이었다 아이들 떠나가고 마당엔 발자국만 저 앞산 뻐꾸기소리 긴 추억을 동여맨다
한때의 기다림도 한때의 그리움도 봄날의 이팝나무 거품 같은 꽃무더기 녹이 슨 이야기들이 시간 속에 누워있다 ― 「꿈꾸다」 전문
이 작품에 등장하는 ‘추억’, ‘낮달’, ‘발자국’, ‘이정표’, ‘이발관 낡은 간판’이라는 명사와 ‘빛바랜’, ‘핼쑥한’, ‘녹이 슨’이라는 형용사 등은 모두 지나간 그리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시간이라는 감옥에 산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꿈을 꾼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없는 대상에 대한 염원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꿈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것. 과거 시간 너머에 손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꿈을 꾼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감옥이며 시간이라는 환상이 주는 폭력이다. 마을이 핼쑥한 고요를 자아내는 까닭은 아이들이 다 떠나갔기 때문이다. 마당에 남은 발자국은 아이들이 뛰어 놀던 한때를 추억하는 흔적이다. “허공엔 빛바랜 낮달”만 기우뚱 떠 있는 마을의 고요는 화자로 하여금 상실감과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녹이 슨 이야기들이 시간 속에 누워”있는 장면은 “이팝나무 거품 같은 꽃무더기”와 상반된 배치를 이루면서 화자의 상실감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준다. ‘꿈’과 ‘현실’에 관한 동시적同詩的 세계를 펼쳐 놓은 시적 공간에서 시인은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핼쑥한 고요만 남아 있는 시골 어느 골목길을 걷는다. “하나둘 아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가고/ 사진 속 빙그레 웃던 시간마저 희미하다/ 돋보기 건너편으로 다가오는 낯선 여자”(「다홍빛 서정」)가 여기 있다.
한적한 주택가 잡쓰레기 모인 곳 찢긴 비닐 흩날리자 맨몸이 드러난다 아직은 남은 오늘이 딸깍딸깍 숨을 쉬는
가족들 둘러앉아 정적만이 감돌고 그리하여 임종이 초침처럼 서성일 때 남겨둔 짧은 생애가 가볍게 와 머문다
무거운 그림자가 허물처럼 벗겨지고 삶과 죽음의 거리는 저렇게 짧은 건가 누군가 두고 간 시간 혼자서 가고 있네 ― 「두고 간 시간」 전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독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남겨진 시간에 대한 상실감을 곳곳에 펼쳐 놓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경, 지나간 세계에 대한 기억은 이제 시골 마을 어귀를 지나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로 이동한다. “한적한 주택가 잡쓰레기 모인 곳”에 찢긴 비닐 흩날리자 드러난 맨몸의 생은, 일각一刻을 다투는 임종의 길에서 서성이는 삶으로 이어진다. “무거운 그림자가 허물처럼 볏겨지”면 생은 그렇게 끝나는 것인가. “두고 간 시간”이 혼자서 가고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이미 떠난 자가 남겨 놓은 시간인가, 화자는 그 시간 속에서 그리움과 상실감에 또 젖는다. 삶과 죽음은 거리가 짧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다. 반야심경에 불생불사不生不死,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란 말이 있다. 불생불사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으로 지금 여기의 세계와 지나간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은 이미 하나란 뜻이다.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 오직 거대한 변화의 고리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더해지고 빠지는 것처럼 보이며,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떠나간 자가 ‘두고 간 시간’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의 동체성同體性을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연옥 시인의 시조는 자연 사물에 대한 넉넉한 관조를 통해 우리 삶의 무상無常함을 읽어내는 깊이 있는 시각을 견지한다. 그것을 지나간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 여기의 세계에 대한 상실감의 공존 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황톳길 고개 넘어 시냇가 언덕으로// 하얗게 달려온 봄이// 여기서 꽃이”(「찔레꽃 어머니」) 피는 모습 속에서 이미 떠나간 어머니를 떠올리고, “멧새들 떠나간 마을 목련이 피고 있”(「목련 날다 ―철거지역」)는 철거지역의 풍경 속에서 상실감과 공허함에 지나간 시간을 붙든다. “노을에 기대이고 휠체어에 앉은 채// 가만히 눈동자를 저렇듯 내려놓자//생이란 큰 자국 하나 조용히 지워지는”(「요양원에서」) 것인지, “다니는// 발자국마다// 햇빛들이 부서진다”(「아침 산책」) “감춰온 그리움 안고 혼자 피는 수선화”(「4월과 5월 사이 ―공곳이」)처럼,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오래된 풍경이지만 시인에겐 서정을 자극하는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4. 올 터진 붉은 그리움들 ―권정희, 별은 눈물로 뜬다
2015년 계간 ≪시와 소금≫을 통해 등단한 권정희 시인의 첫 시집은 자연 사물에 대한 관조와 이를 통한 존재론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이에 시인은 자연 사물에 대한 천착에 머물지 않고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들로 이미 오래 쓰라리고 아프다. “영혼의 절창/ 다순 시를 풀어”(「붉은 시」)내는 시인의 절창은 “내 행적을 허물고/ 지우고 또 지”우면서 “허세로/ 가득 찬 오만/ 꺾어보고 버리는 일”(「궤적」)이야말로 진정한 생의 구현을 위한 길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처럼 인간 속죄의 길들에 대한 구원의 과정을 자연 사물의 질서 속에서 깨닫는다. 그리고 “올 터진/ 붉은 그리움/ 갈래갈래/ 피”(「상사화 ―꽃무릇」)고, “누굴까/ 밤이면 오는/ 붉은 옷의/ 저 여인”(「야화 ―분꽃」), “마당을 불 지르는 꽃”(「접시꽃」)에서처럼, 자연 사물에 대한 천착을 넘어 인간 정서를 다양하게 은유한다.
거기, 숲에는 나무들이 성자다 묵묵히 숨을 고르며 겨울을 나고 있다 한 세월 굽어 본 세상 고요 속에 던져 놓고
그렁그렁한 눈물 따윈 훌훌 벗어 던졌다 달게 달인 햇살 한 줌 단단하게 감아쥐고 지상에 내리는 은빛세례 의연하게 받고 섰다 ― 「눈 내리는 숲에 들면」 전문
눈 내리는 숲에 들면서 화자는 묵묵히 숨 고르며 겨울을 나고 있는 나무들에게서 성자聖者의 모습을 본다. 성자와 군자를 합해 성인군자라 한다. 노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성자다. 나무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의연하게 몸을 벗어버리고 은빛 세례로 구원을 받고 있다. 눈 내린 숲에 들어가서 눈이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바람에 나무 위에 쌓였던 눈이 흘러내리면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자연 사물의 질서를 관조하면서 시인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지 않고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는 지난날의 단죄와 인간사의 고통스런 길목을 자연의 의연함으로 반성하고 성찰한다, 시인은 이러한 성찰을 「생일손」을 통해 “손끝에서 오는 통증”에서 “누군가의 마음 꽃”을 보고 또 다시 ‘눈물’이었을 ‘너 없는 봄’을 사유하는 과정으로 이어간다. 또한 「관수세심」에서는 흐르는 물에서 “내 영혼을 지나는” 물이 다시 시인의 “몸 안과 밖”으로 드나드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모든 존재론적 고통을 시인으로 하여금 속죄하도록 인도한다. “수묵세상 숲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뭉근히/ 숲을 견디는”(「숲을 견디다」) 언어가 아프다.
낯선 길을 간다는 건 매순간이 떨림이다 갈수록 갈래길만 수없이 보여준다 무수한 저 길 가운데 숨어있는 나의 길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길은 멀고 어둡다 길 아닌 길 위에서 젖어가는 방랑자 오늘도 불빛 그리메 달려오는 저 달빛
꽃이겠지 걸어갈 길 아마도 꽃일거야 그려보고 떠올리며 희망 한 줌 쥐어본다 흘려온 눈물만큼의 꽃은 피고 지겠지 ― 「길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전문
직접적인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길은 이미 겪어왔던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스스로 직접 겪어 봐야 길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낯선 길은 인간의 인생이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은 처음 걷는 길이기에 낯선 길일 수밖에 없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길이든 직접 걸어야 한다. “갈수록 갈래 길만 수없이 보여”주는 이유는 매순간이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때 “숨어있는 나의 길”은 ‘나’이고자 하는 길이다. 나의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길이다. 인생은 하루 앞을 예측할 수가 없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길은 멀고 어”두울 수밖에 없다. 아무도 나의 길을 대신 걸어가 줄 수 없기에, 그 길은 늘 새롭게 걸어가는 낯선 길이 된다. 누구든 꽃길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산다. ‘에로스, 아름다움, 기쁨, 번식, 생에 대한 의지’를 표상하는 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흘려온 눈물만큼 피고 진다. 고단한 방랑의 시간만큼 피고 진다. 끝없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들을 보내왔던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대신 무언가를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산을 품은건지/ 산이 나를 품은건지” 어느새 “세상이 시들해지게 붉디붉게 불 밝”(「산에 물들다」)힌 모습 속에서 ‘천지간의 조화’를 본다. 오랜 시간 걸어왔던 고통의 길에서 “몸 부딪혀” 울던 “늙은 수부의 울음”이 “절망의 공간을 메”운다. 시인은 “수척한/ 노자의 숲”에서 “묵언수행”(「노자의 숲」)을 배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란 말이 있다. 말이 많아지면 곤경에 빠진다는 노자의 말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으면 그것이 결핍과 부족의 상징이다. 뭔가 결핍되고 부족하므로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말이 많은 상태는 만족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곤란한 상황을 자초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시인이나 시인이 쓰는 시나 말을 줄이고 묵언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짧은 말들이 빛나는 것이다.
이송희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활성화지원금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받음,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과 오늘의시조시인상, 무등시조문학상 받음,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평론집 눈물로 읽는 사서함,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등이 있음, 현재 전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 ≪좋은시조≫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