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약도<盟約刀> 보전 논제<保傳 論提>】
〔豊臣秀吉.풍신수길과 加藤淸正.가등청정의 맹약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하사한 지휘검」
Ⅰ. 〔맹약도<盟約刀>의 고찰<考察>〕
1.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에게 수여한
刀에 새긴 명문<銘文> 구절<句節>
「名 正宗刀」 ▶ 「칼 명칭 : 정종도」
칼 명문<銘文> ▶ 칼에 새긴 염원
「國土統治萬世.국토통치만세」 ▶ 「일본국 다스림 만 세대 잇기」
加藤淸正 小國統合治 豊臣秀吉 ▶양인<兩人>을 명인<銘印>한 日本 통일의 다짐 명문으로서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 에게 하사한 지휘도<指揮刀>
「名 正宗刀」는 ‘마사무네’ 보검으로서 도검장인 正宗家에 직접 주문 제작한 칼로 일본국에 존재하는 제 도검류 중에서 일본 천하대업을 이룬 豊臣秀吉<풍신수길>과 동업자인 加藤淸正<가등청정>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도검은 또 달리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그 차원이 다른 칼이 된다.
검<劍>과는 분류하여, 日本의 정서<情緖>로서 <刀.도>의 호칭은 영웅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는 명령계통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正宗<정종.‘마사무네’>家의 제조 刀 와는 자못 다른 의미의 刀가 되는 것으로서 맹약도<盟約刀>라 호칭됨이 정석<定石>의 지휘도<指揮刀>가 된다.
2.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와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가.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히데요시.1537-1598> 이력
오라리쿠니<尾張國.現아이치 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히요시 마루<日吉丸>이다.
후에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 히데요시<羽紫秀吉>, 후지하라 히데요시<藤原秀吉>로 개명하고, 다이죠 다이진<太政大臣>과 간파구<關白>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면서 도요토미 라는 성을 썼다.
풍신수길<豊臣秀吉>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으로서 본래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부하였다. 그는 기지와 용맹이 뛰어나 각 지방을 정벌하여 세력혹장에 공을 세워 오다가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 했으며, 그의 오사카 성에는 늘 오다 노부나가 에게 물려받았다는 천하포부<天下布武>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또 자신의 검<劍>에도 천하포부 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는 1854년에 동부 일본의 큰 세력인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고, 1590년에는 천황의 권위를 빌려, 마지막 남은 여러 영주와 호족을 정복하여 자신의 숙업인 전국통일을 이룩하여 100년에 걸친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이후 그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1592년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1598년 그가 병사하면서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 동안의 조선침략 전쟁은 총퇴각 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고 도요토미 정권은 2대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1562-1611>이력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여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게 된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 중 한 명으로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3,000석의 영주가 주어지게 되었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구<關白>가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 되었으며, 그 해 규슈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의 다이묘<大名.지방 영주.領主>로 임명 되었다.
그가 애용했던 무기는 가타가마야리<片鎌槍.가지극>이며, 일생동안 자신의 상징으로 긴 모양의 특이한 투구를 애용했는데, 장신인 몸을 더 돋보이기 위해서 라고도, 혹은 키를 더 커 보이기 위해 모자를 애용했다고도 하였다.
1592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忠州 도착 후 小西行長 군과 합류<4월29일>, 죽산-용인-한양도성으로, 진격해 와 숭례문<崇禮門>으로 진입 하였는데 숭례문은 도리어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런 무방비 상태를 보며,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라 하였다.
1592년 5월 2일 한양 도성 안에 쳐들어 왔지만, 조선 왕 선조가 도성을 빈 4월 30일에서 5월2일 사이의 3일간에 도성 안 에서는 이미 노비들과 불만을 갖고 있던 자들이 들고 일어나 부수고 불 지르고 일본군이 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훼손되고 불타고 파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충주-여주-양평-한양도성으로, 진격해 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진입 하였고, 성문은 닫혀 있었으니 무사통과에 무혈입성 하게 되었다.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는 조선의 동북쪽 함경도를 진격로로 선택하여 북진 하였다. 이후 小西行長<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도 있었으며, 朝.明 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로 불리해 져 남쪽으로 후퇴하여 1593년 서생포<現 울산 울주 왜성>를 완성하여 거점을 잡아 옮겼다. 1596년에는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귀환 명령을 받고 일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는1597년 최고군장으로서 다시 150여 척의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 침입 하였는바, 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 하였다. 그는 울산에 왜성을 쌓고 지구전을 폈으나 朝.明 연합군에게 밀리게 된바, 1598년 明의 장수 魔貴<마귀>가 이끄는 전력에 패전하였다.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일본으로 퇴각 하였다.
1611년 豊臣秀吉<풍신수길>의 아들인 豊臣秀藾<풍신수뢰.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동부의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친을 알선하고 귀환하던 중 발병으로 1611년 6월24일 구마모토에서 50세의 일생을 마감 하였다.
한편, 1592년 壬辰年 제1차 조선 침입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2군장과 함께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수명 받은 군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군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3군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4군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5군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6군장, 모리 가가야모토(毛利輝元)7군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8군장, 하시바 히데카스(羽柴秀勝)9군장 등과 약 십사만 명의 육군 아장과 병사,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 4개 파 수군장과 약 1만 명의 수군 및 이시다 미나리(石田三成) 등의 군수(軍需)봉행 지원장 등 이상의 군장들이 조선 병탄<倂呑>길에 나섰었다.
Ⅱ. 〔맹약도<盟約刀>의 가치와 의의〕
1. 도<刀>의 명문<銘文>에 나타남과 같이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에게 하사한 맹약 도<刀>의 의의는 중국 통일의 진시황 같이 수많은 소국들 간의 전란이 끊이지 않던 중세 일본의 첫 통일을 이룬 지도자로서 豊臣秀吉은 일본인들의 신격 인물이 아닐 수 없다.
2. 加藤淸正은 豊臣秀吉을 도와 천하통일 대업을 완성하고 조선을 병탄하려 출범한 일본으로서는 천하 희대의 장수 영웅이라 할 수 있으니 중국의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한신<韓信>에 버금갈 수 있는 장수인바, 그 장수의 지휘검 칼인 만큼 그 가치는 일본의 역사문화유산이요 국보급 유물이 아닐 수 없게 되는 판단이 선다.
3. 일본은 무사의 역사 문화를 가진 나라다. 칼은 검<劍>이요, 도<刀>라고 한다.
일본의 해석은 약간의 다를 뿐 의의의 맥락은 같다. 그러므로 칼은 일본국의 정서 문화이다.
일본 정통성 무사도정신<武士道精神>의 자존심이며 일본 국민 정체성의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본 맹약도 한 자루 검에 일본 무사도정신에 관한 전통문화가 녹아 있다.
4. 일본의 혼과 얼이 스민 약 550년 전의 역사가 밴 이 맹약도는 곧 일본국의 국보급 유물이다.
반드시 일본 내에서 국공사<國公私>를 막론하고 뜻있는 누군가의 居士일지라도 보전 계승하여함은 추호의 단서나 이유를 붙일 필요조차 없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 된다.
5. 일본은 무사도<武士道> 정신의 나라다.
무사는 명예의 상징으로 언제나 칼을 지니고 다녔었다. 하시라도 적이나 불의를 만나게 되면 바로 刀와 劍의 결단이 이루어져 짐을 능사의 전통으로 삼아 왔다.
사무라이 신분은 사회 상류계층에 속해 왔었으며 무사로서 생명을 가장 긴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비겁하고 불의의 행동은 금기사항으로 지켜 왔다.
무사의 생명인 명예가 훼손 되었을 때에는 그 죄를 씻음의 방편으로 감연히 할복으로써 그 명예를 지키는 정신으로 계승해 왔다.
6. 무사도 정신, 그 정신이야말로 일본국 도시 저자나 지방에 까지 지금 현재까지도 역사 정신의 전통을 잇고 있는 다수 의리의 보수 신분들은 범 세계 속의 일본의 자존심이요 일본의 주체성과 정체성의 실천정신의 대명사로 추앙해 볼 수가 있다.
Ⅲ. 〔지휘검<指揮劍> 맹약도<盟約刀>를 지닌 加藤淸正의 병탄로<倂呑路>〕
1.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은 조선의 숭례문을 통해 한양 입성 후 왕이 몽진하였음을 알았고, 두 왕자가 의병 모집을 빌미로 함경도로 떠났다는 정보를 취득 하고는 두 왕자를 붙잡기 위하여 곧 조선의 동북쪽 함경도를 징벌 진격로로 선택하여 북진 하였다.
2. 함경도 회령부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조선 선조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둘을 붙잡아 1592년 7월 加藤淸正 에게 넘겨주었다. 정문부는 함경도 전투 초기에 왜군에게 총상을 맞아 부상당하여 한동안 피신하였는바, 부령에서 신분을 감춘 채 거지행세를 하기도 하고, 용성의 한 무당 집에 숨어들어 하인행각을 하기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났으니, 함경도 지방의 의병장이 되어 1592년 9월 함경도 종성을 수복하여 국세필을 처단하고 다시 함북 명천<明川>을 수복하였다.
3. 1592년 11월경 가토 기요마사는 부령군과 경성군에서 전세가 불리해 더 남쪽의 유리한 장소로 옮겨 진을 치고 전황을 파악 중에세설(世說)에 함경도엔 귀하여 없다는데 길주에서만은 용하다는 한 무당을 찾게 되어 전세와 지리파악의 대화에서 좋은 조우(遭遇)의 분위기에 마침 무장을 풀어 심심한 의사소통의 허심탄회하게 지리적으로 전세(戰勢)에 관한 탐문의 자문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순간적으로 조선 의병군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이에 황급히 뛰어나가 접전된 정문부와의 길주성 결전이 개시 되었던 것이다. 휘하 장졸 중에는 동상이 걸리는 등 전세가 불리한데 이어 험악한 산세<山勢>와 폭설에다가 동지섣달 추위와 곳곳의 잠복된 복병들이 전황을 불리하게 만들어 황급히 가늠치 못 할 만큼의 전세로 기울어져 갔다.
무당에게 얻은 정보대로 함경 남북도의 경계 접합선인 마천령산맥을 넘기만 하면 무난하다 라는 그녀의 진로를 택해 함흥과 흥남 및 안변으로 이어지는 남쪽 퇴로를 택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무당 집에 탐문하던 중 잠시 풀어놓았던지라 화급한 기습상황에서 맹약도를 미처 챙길 수 있을 만큼의 촉각(觸角)이 안 되었던 만큼 부득이한 상황이 자신의 생각 밖에서 어쩔 수 없이 이미 벌어진 것이었음을 가토는 잠깐의 시간이 경과된 뒤에라야 깨닫게 되었으니 이미 접전했던 장소에서는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된 뒤에라야 이를 알았다.
4. 1592년 11월-1593년 1월까지 엄동설한(嚴冬雪寒)중의 함경북도 길주<吉州>에서 교전된 加藤淸正과 정문부와의 결전에서 가등청정은 한랭지대인 함경도에 병탄하여 왕자 둘을 포섭(捕攝)하였고 얻어 취득한 것, 파악할 것 등 제반 병탄사항을 초월하여 취득한바, 소기의 목적은 거의 성사시켰다는 내심엔 흡족 사안이 되었다.
그 외에, 이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전황과는 달리 험악한 지형의 산세<山勢>에다가 폭설과 동절기 대한파<大寒波>에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전세가 불리해지고, 지리사정에 밝지 못해 의병장 정문부휘하 의병들에게 곳곳마다 복병과 포위대열로 맞닿게 되는 등 동절기 강추위에 감당키 겨워 어쩔 수 없이 작전상 험악한 지세에서 비켜서야 하는 전황이 전게되게 되었다.
5. 1593년 1월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의 주력 부대는 탐문하여 들은 대로 함경 남북도 경계인 마천령산맥을 동북에서 남서로 걸친 지름길 고개 길을 택하여 넘어서 현장을 이탈, 후퇴를 하였는바, 2월 4일 함흥 도착 이후 다시 안변을 거쳐 2월 말일 경에 비로소 한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함북 퇴로 이미지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군 주력부대는 추격했으나 길주와 접한 마천령산맥을 이미 넘어섰고 더 추격 하였으나 이미 안변을 거쳐 함경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정황으로써 정문부 의병군은 더 이상의 추격을 하지 못하게 되는 전황(戰況)이 되어 있었다.
6. 정문부 사후 43년 만인 1666년 현종에 의해 신원(伸寃)되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追贈)되니, 1707년 북관대첩비가 길주군에 세워졌고, 1713년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함경도 경성 창렬사(彰烈祠)등 4개 사당과 남한의 진주 충의사(忠義祠)와 의정부 충덕사(忠德祠)에 배향 되었다. 정문부 사후 43년 만인 1666년 현종에 의해 신원(伸寃)되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追贈)되니, 1708년 북관대첩비가 세워졌고, 1713년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함경도 경성 창렬사(彰烈祠)등 4개 사당과 남한의 진주 충의사(忠義祠)와 의정부 충덕사(忠德祠)에 배향 되었다.
7. 정문부의 전과<戰果>비문인 북관대첩비는 1905년 노일전쟁 때 일본군 이케다 쇼스케 소장이 일본으로 가져간 뒤 오랫동안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되었다가, 2005년 10월 양국 간 정상의 합의로 한국에 반환, 2006년 3월 다시 북조선으로 인계 되었다.
함북 퇴로 이미지
Ⅳ.〔맹약도<盟約刀>의 경과사항〕
1. 위 Ⅲ.항 〔지휘검<指揮劍> 맹약도<盟約刀>를 지닌 加藤淸正의 병탄로<倂呑路>〕를 참고함에,
2. 이상 전후항의 내용대로 일본 천하대업을 이룬 풍신수길과 동업자인 가등청정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보물 검<劍>인 가등청정이 항시 지참하였던 지휘검<指揮劍>인 맹약도<盟約刀>가 조선의 함경도 지역에서 발득(發得) 되었음이 위 일련의 내용 확정사안으로써 그간 중국의 지린성에 옮겨졌다가 각고의 소장권 인수로써 한국이 관리하게 된 약 437년이 경과된 역사 속의 한 시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3. 일본의 조선침략 1592년도 이후 과거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살던 K某氏 집안이 강점 하 말기 인 1940년도 중국 지린성 연변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바, 역시 함경도에서 이주해 살던 현지 처갓집에서 소장하여 전해 내려오던 본 가등청정의 보검 「名 正宗刀」를 인계받게 되어 소장자가 되게 되었다.
4. 2010년 6월 18일 日, 아사이<朝日>신문 북경 특파원 古谷浩一이 취재, 동년 7월10일 아사이 신문에 게재되던 일자에 맞춰 당시 소장자인 K某氏가 일본 동경에 가서 일본 측 상담인 에게 기증 의사를 밝혔는바, 대화창구가 잘 못 선정 되었는지,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일본 측이 기증받는 데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5. 본 전항의 내용 의미는 일본의 역사유물 임으로써 원래 소유국에 반환한다는 선의적인 발상이었다.
6. 반면에 위 Ⅲ.7항.의 내용 중 북관대첩비 문화재의 환속 반환 의미와는 매우 상반되는 경우가 된다. 즉 북관대첩비는 일본이 수치감<羞恥感>을 탈피하려 한국 땅에 소재해 있는 것을 무단으로 일본에 가져갔으되, 추후 한국에 반환한 사례를 본 맹약도에 비교하여 유추(類推)해 보아야만 할 사안이다.
7. 加藤淸正이 소지하였던 맹약도는 함경도 길주에서 조선 의병군의 갑작스런 기습전투를 받게 되자 화급한 가운데 접전에 대응하다가 부득이하게 발생한 촉각(觸角)의 정신적 훼망(毁忘) 사안에 대하여 망실(亡失)이라든지, 패주(敗走)의 시각이라든지 라는 자국 일본의 시각에서 일축(一蹴)하거나 거부감을 갖는다면 졸미<拙未>한 발상에 해당 한다 라고 여길 수가 있다고 사료 된다.
8. 한편, 본 Ⅳ.4항 2010년 7월 사안과 같이 일본의 인수 거부 결과에 봉착된다면 본 맹약도의 일본국 인수 뜻에 미리 지례<知禮>하여 수치감<羞恥感>등의 은익(隱匿)의도로써 마땅히 일본국 소유품으로 귀속되어야 함을 망각하거나 외면하게 되는 등의 예(例)가 된다면 재차(再次) 부끄러운 일면이 도출되는 사안이 부각될 수도 있다.
9. 일본국이 2005년 10월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의 훌륭한 이심전심<以心傳心> 적 사례처럼 맹약도는 한국의 현 소장인이 과감히 일본국에 인계하여야 하되 마땅히 인수함을 고무적 의미로 받아들여 인정해야 할 사안이 되게 된다.
10. 지금은 지구촌 21세기의 비전에 처해있는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 사고에 접해 충실하되 역사와 문화유산은 산물국<産物國> 자체에서 따로 존중 유지되어야 하는 의미가 중시 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Ⅴ. 〔「名 正宗刀. 맹약검」 의 보전 계승 논제〕
1. 豊臣秀吉이 본인과 일본국 통일의 동업자인 加藤淸正의 이름을 동시에 명문<銘文>된 「名 正宗刀. 맹약검」은 중세 일본 천하대업을 이루는 증표로서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보물 보검으로서 전 세계 속에 일본국의 긍지이다.
2. 「名 正宗刀. 맹약도」는 귀중한 보검으로서 일본의 긍지인 무사도 정신의 지표가 내포된 보물로서 세계만방 중의 유일한 일본국 문화유산이 되게 된다.
3. 「名 正宗刀. 맹약도」는 2023년 9월 일본국 문화재 국보급 유물로서 공개된바, 동 유물의 숭고히 원래 있던 곳인 일본의 보전 처로 전유 되어야 할 사안임을 논제<論提> 하게 되었다.
4. 加藤淸正이 항시 소지 지참하였던 지휘검<指揮劍>인 맹약도는 함경도 현지에서 험악한 산세<山勢>와 악천후 한파로 작전상 퇴각해 피신하다가 훼실<毁失>된 당시 현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려 벗어나려함에, 퇴각해 피신한 장군의 칼이라 하여 일본에서 외면하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보전계승이 거부당한다면 그것은 북간대첩비와 비교할 때 상반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매우 미졸<未拙>한 판단의 착상 되게 되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5. 한국의 경우 모 임의의 박물관은 육고초려<六顧草廬>를 상회 하면서 까지 일본으로부터 반가사유상을 순수 민간차원으로서 유가<有價>반입으로써 반환 받은 사례가 있다. 또 다른 민간 박물관 역시 중국으로부터 월인석보옥책을 유가<有價>반입으로써 환수 받는 등 실제 순수 민간차원으로 애초 출전된 국가에게 보전 계승이 이루어진 실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성이 크게 요구 된다.
6. 국보급 문화재 유물은 마땅히 동 유물의 당초 원래의 생산국에서 인수 보전 계승 관리하여야 함이 국제적 국가 간의 필요성으로써 나타나야 함을 매우 고무적으로 독려 되어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7. 일본은 무사도 정신의 나라다. 명예의 상징으로 칼을 지녔었던바, 刀, 劍의 결단의 이룸을 능사의 전통으로 삼아 왔다.
8. 사무라이 신분은 사회 상류계층에 속해 왔었으며 무사로서 생명을 담보로 그 명예도 가장 긴요하게 지켜 왔으니, 무사도 정신, 그 정신이야말로 일본국 도시 저자나 지방에 까지 지금 현재까지도 전통을 잇고 있는 다수의 신분계급들은 세계 속의 일본의 자존심이요 주체성과 정체성의 실천정신의 대명사로 존앙해 볼 수가 있다.
Ⅵ.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의 감정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감정
Ⅶ.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소장
1. 일본의 조선침략 1592년도 이후 약 348년 뒤 과거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살던 K 모氏가 일본의 조선 강점기 말엽 1940년도 중국 지린성 연변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바, 현지 처갓집에서 소장하여 전해 내려오던 본 加藤淸正의 보검 「名 正宗刀」를 2009년 인수받아 감정기관인 중국수장가협회<中國收藏家協會> 학술연구부 과학검측실험실 결과에서 진품으로 판명 되었다.
Ⅶ.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미디어 내용
1. 2010년 6월 18일 日, 아사이<朝日>신문 북경 특파원 古谷浩一이 취재, 동년 7월10일 아사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아사이 기사
아사이 기사
Ⅷ.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양도.양수〕
1. 감정평가시 고적 유물가는 논의되거나 표시치 않는다. 단, 거래 시 양도, 양수인 간의 거래 시담가 에서 당사자 간의 직접 미팅 결정가로 양도.양수 됨이 고적 문화 유물계 양도.양수의 관례로 봄이 타당하다.
2. 국내 대기업계열의 유수 박물관에서 「名 正宗.맹약도」가 전 세계 및 국내 단일 문화유물로서 약 (000억 원) 호가의 가치관에 해당한다며 평가가로 내정되게 되어, 임의의 하향가로서 예정가로로서 거래시담의사 표시를 중간추천인들을 통하여 전해온 바가 있었기에 소장인도 이를 용인한 바이다.
3. 확정 인계인수 거래 경우, 문화유산 보물계 관례에 따라 본 건에 대하여만은 추정거래시담 특정 양도.양수가를 위 2.항의 임의 예정 내정가로서 (000억 원)의 제시에서, 양도자 측이 도일(渡日)하여 양자 간 실제 접촉으로 만난 협의 하에 결정짓는 시담 최종가로서 계약 체결함의 거래방식으로써 본 건 인계.인수 계약 체결로써 결언에 이르게 됨을 정석으로 하였다.
4.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소장인은 과도한 욕심이 없이, 양수인이 문화유물인 본 「맹약검」을 보전함이 일본국 고유 국민들 스스로에게 보전 계승한다는 의도에 비중을 두게 되는 사안에 역점을 둠을 부각케 하며, 예정 양도. 양수자는 상호 내정 예정가 에서 시담 결정가를 비롯함에, (000억 원) 임의의 하향가로서 양측이 직접 만나, 최종가를 협의, 결정짓게 됨이 고무적으로 사료 된다 하였다.
Ⅸ. 추정 양도.양수 관련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1. 감정평가시 고적 유물가는 논의되거나 표시치 않는다. 단, 거래 시 양도, 양수인 간의 거래 시담가 에서 당사자 간의 직접 미팅 결정가로 양도.양수 됨이 고적 문화 유물계 양도.양수의 관례로 봄이 타당하다.
2. 국내 대기업계열 임의 유수 박물관에서는 「맹약도」가 전 세계적으로 단일 문화유물로서 (약 000억 원) 호가의 가치관에 해당한다며 자체 양도 측 소견 평가가로 규명되어, 동 하향가로서 (000억 원) 의 거래시담의사 표시가를 추천인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해온 바가 있었으나 현전 소장인도 이를 용인한 바 있다.
3. 확정거래 경우, 문화 유물계 관례에 따라 본 건에 대하여만은 추정거래시담 특정 양도.양수가 (000억 원)을 제시하는바, 양수자와 양도자 간에 실제 접촉으로 만나는 협의 하에 최종가를 결정짓고, 그 즉시 계약체결 및 일시불 거래 하는 것으로써 본 건의 시담 건을 결정짓기로 하는 결언에 이르게 됨을 정석으로 하였다.
4.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소장인은 과도한 욕심이 없이, 양수인이 문화유물인 본 「맹약도」를 보전함이 일본국 고유 스스로에게 보전 계승한다는 의도에 비중을 두게 되는 사안에 역점을 둠을 부각케 하며, (한화 000억 원)의 양도.양수 예정가 에서 양도, 양수 양측이 직접 만나, 실거래 최종가를 협의, 결정짓게 됨이 고무적으로 사료 된다 하였다.
첨부 : 사진지료 /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名 正宗刀.맹약도〕 사진
가등청정의 맹약도
명문
풍신수길이 가등청정에게 하사한 맹얃도
명문
손잡이 끝 명문
손잡이
명문
손잡이
Ⅹ. 기타
豊臣秀吉과 加藤淸正의 맹약도에 관하여
이상과 같이 「맹약도」에 대한 연구, 논조, 고증에 관하여
imtv.독도문학신문에서 취재, 기사화 서술하였다.
온라인은
IMTV-독도문학신문 | 【맹약도<盟約刀> 보전 논제<保傳 論提>】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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