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의 좌절과 깊은 상처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실 하느님!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실체요 근원이신 분, 사랑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신 분,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강을 다니다가 때로 교우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신부님들을 만납니다. 교우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하루 해가 짧습니다. 머릿 속에는 언제나 교우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그것을 실현시키려니 몸은 또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한갓 인간인 사제들도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데, 사랑의 본질이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사랑이 얼마나 더 뜨겁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좋은 풀밭으로 양떼를 데려가 살찌울까 고민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좌절과 깊은 상처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실 하느님, 언제나 용서하시고, 언제나 받아 들여주시는 속도 밸도 없는 바보 같은 하느님....
하느님께서 지니신 속성 가운데 가장 우세한 속성은 아무래도 한없는 너그러움이요, 세상 말랑말랑한 부드러움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하느님의 속성과는 크게 대비가 되는지 씁쓸하고 서글픕니다. 하느님께서 총애하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보시고 크게 개탄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이 워낙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 보니, 부드럽고 섬세한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목디스크로 뻣뻣해진 제 목도 크게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마음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 진정성이 배제된 그들의 예배에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우리의 죄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중재자 모세의 당부에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즉시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내가 누구인지는 이것으로만 증명된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는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삶과 모험을 연대기로 기록한 논픽션 책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워싱턴 D.C.의 부유한 교외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자 운동선수지만, 그의 가족의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그들의 표면 관계 아래에서 긴장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실력으로 아들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1990년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맥캔들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버지에게 받은 24,000달러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참 ‘자유’ 찾아 미국 횡단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알래스카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그는 시간과 돈, 경쟁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이 가장 자유롭다고 여겼습니다.
여행 중 자유를 향한 그의 탐구와 자연 세계와의 강렬한 연결에 감동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우스다코타에서 곡물 엘리베이터 운영자를 위해 일했지만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고, 자기 부모처럼 떠나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집시 아주머니도 만나고 또 만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양자로 삼고 싶어 하는 가족을 잃은 할아버지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992년 4월, 맥캔들리스는 알래스카에 도착해 버려진 버스(Fairbanks 버스 142번)에 캠프를 세웠습니다. 그는 땅에서 살아가고, 작은 사냥감을 사냥하고, 식용 식물을 찾고,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려고 시도합니다.
여름이 진행됨에 따라 식량이 고갈되어 갑니다. 실수로 독초를 먹게 되어 몸이 약해지고 식량을 모을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합니다. 눈이 녹아 불어난 강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의 사망 4개월 후였습니다.
사람은 꼭 일해야만 살수 있을까요? 맥캔들리스처럼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맥캔들리스는 꼭 일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자녀를 키워야 하며 자녀는 부모의 기대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맥캔들리스가 깨달은 것은 결국 일해야 행복이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유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결국 자연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렸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당신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성경 또한 당신이 하시게 될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가죽옷이 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집안을 구원할 어린 양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불만에 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끝까지 갈 힘을 주기 위한 구리뱀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심이 바로 성경에서도 증명하는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은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두 어린 딸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배를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아빠는 겨우 몸을 추슬러 물에 뜨는 작은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배를 만드는 세 시간 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사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의사는 치료를, 선생님은 가르쳐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습니다. 반대로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결국 내가 하는 일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분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일이란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작은 배 하나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감정의 평화를 얻습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5,31-47: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37절).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다(42절).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에”(46절)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양귀자).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40)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글자만 보지 말고
그 속 깊이
감추어진 신비를
읽어내야 한다네.
성경 속에 숨겨진
삶의 지혜와
그분의 권능과
정의와 사랑을 읽어내며
영적으로 순수해져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내 안에 살아있는 말씀이 곧 증언입니다.
교우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성경 공부를 하기 전에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말씀이 감동이 없이 전해 옵니다.
그럴 때는 말씀이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정말 잘하는 사람은
노래를 갖고 논다는 표현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친숙해지면
말씀을 가지고 노는 수준이 됩니다.
기도는 매일매일 묵상을 통해
성령을 깨닫게 되었고
성령의 이끌림으로 나를 맡기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말씀과 친숙해지는 것이고
매일 묵상을 하는 게
밥을 먹듯 일상이 되는 겁니다.
아직도 말씀의 소중함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젖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삼아
하느님께 진실되게
나를 봉헌할 수 있는 사제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복음 말씀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