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 사고는 이상화에서 출발하지만, 그 질문의 특색은 가장 객관적인 설득이 가능해 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신앙과 관계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서 수학을 사용하였다. 수학의 논리는 개인적인 견해보다 앞서는 논리를 누구든지 인정해 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질문이 올바로 되어야 한다. 올바른 질문이란 어떤 것인가? 우선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6개의 질문 을 던져야 한다고 배웠다. 그 6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이 6가 원칙 중에 자연과학의 질문은 우선 “언제, 어디서, 누가” 보던 지 모두 찬성할 수 있는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역성, 시간성, 관찰자(해설자) 의 주관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질문은 무엇이, 왜, 어떻게 라는 질문 으로 국한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과학적’인 질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이 중에서도 ‘언제, 어디서’ 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문에는 연계되어 있는 상황이라 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거론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었다. 또 한 ‘무엇이’라는 질문도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양자론’은 말해주고 있 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답하면서, 상대론과 양자론에 부합된 대답이외 에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우리의 모든 질문은 그 질문에 대한 한계영역 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를 먼저 인식하고 그 범위에서 정당한 풀이를 제시하는 것 이 과학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뉴턴은 운동의 원칙을 이해하는데 다음과 같은 상상으로 이상화를 실현한다. 만일 우주 에 단 하나의 입자만 있다고 하자. (또는 아무 다른 것과도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외로 운 입자하나가 내 앞에 있다고 해도 된다.) 이 입자의 상태는 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물질이 이 입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원래의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어떤 것이 원래의 상태인가? 정지되어 있는 것이 그대로 정지되어 있다 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면 어떨까?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다보면, 조금만 밀어도 훨씬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물체가 점점 정지하는 것은 마찰에 의한 것이고, 이는 다른 물체와의 접촉에 의한 것이니, 만일 이런 접촉이 없다면, 정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상태도 입자의 지속적인 상태 즉 외 부의 영향이 없으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음을 뉴턴은 알았다. (실은 갈릴레이가 이를 먼저 알았다.) 이것이 바로 뉴턴의 운동 제1 법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변하려면,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져야 하는데 이 자극을 힘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힘이 주어졌을 때, 그 결과는 입자의 운동 상태를 변화시키게 된다. 즉 속도가 변해야 한 다. 따라서 힘은 속도의 변화로 나타나니까, 그 속도의 시간에 대한 변화를 ‘가속도’라 고 하면, 힘은 가속도와 비례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법칙이 뉴턴의 제2 법칙이다. 제 2 법칙은 외부에 다른 입자 또는 영향을 줄 수 있는 물질이 있어서, 우리가 대상으로 쳐다보는 입자의 상태를 변화시켜 주고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하지만, 어떤 입자든 지 여러 개의 다른 조각으로 분해가 된다면 어떨까? 그 조각들 하나하나를 다시 하나의 입자로 간주해도 위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외부에서 힘이 없으 면 그 (큰)입자는 상태를 변화하지 말아야 하는데, 조그만 조각들 사이에 서로 작용하는 힘들이 있어도 변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조각들 사이의 힘들은 서로 상쇄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뉴턴의 제3법칙이다. 예를 들어 보자. 두 사람이 마찰이 없는 얼음이 덮힌 호수 한가운데 있다. 그들은 서로 고무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자. 이 두사람이 서로 밀 치고 당기면서 이 호수를 벋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사람은 크고 다른 사람은 작다고 해도 밀고 당기고 해 봐야 호수를 벗어날 수는 없다. 두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부의 힘이 없기 때문에 둘을 한 덩치로 보았을 때,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이 덩치가 있는 위치를 벗어 날 수 없다. 만일 벗어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뉴턴의 제1법칙은 틀 인 법칙이다. 이 덩치 즉 두사람을 하나의 큰 포장으로 싸서 하나의 입자라고 한다면, 이 입자는 외부에서 어떤 작용 즉 힘이 없다고 해도 자신의 위치를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제1법칙이 틀리게 된다. 제 1 법칙이 맞는 이론 이라면, 위의 가정은 잘못된 가정이었 다.
위의 과정에서 뉴턴은 갈릴레이에서 우리가 보았던 이상화를 계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이상화를 통해서 현상의 복잡함 뒤에 숨겨져 있는 원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뉴턴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물리라는 학문이 자연의 법칙을 알기위해 어떻게 접근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물리는 간단해야 한다. Physics should be simple."이라는 주장 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속칭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그 상태를 계 속하려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인데, 즉 힘이 없으면 유지되는 양을 관성이라고 부를 수 있 다. 이 표현은 데까르트가 처음 했다고 하는데, 뉴턴은 이를 ‘운동량’이라는 단어로 표 현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운동량은 변화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뉴턴의 제1법칙은 홀로 있는 입자 즉 힘이 없는 상태의 입자는 자신의 상태를 변화하지 않는다고도 표현된다. 이 때, 그 상태를 정량화시켜 말한다면 그것이 ‘운동량’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관성의 법칙이 잘 쓰여진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커브를 돌때, 몸이 밖으로 쏠리는 경우, 승객은 모두 쏠리는 방향으 로 힘을 받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오히려 승객은 커브를 돌기 이전의 상태 즉 직진하 고 있는 운동량을 가진 상태에서, 적당한 힘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직진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으로 쏠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바깥쪽으로 쏠리는 것은 관성의 법칙 인 것이다. 그런데 승객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힘이 바깥쪽으로 주어지는 것을 느끼지 않 았던가? 이런 힘을 ‘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뉴턴의 법칙은 그 입자의 운동을 관측하는 관측자가 정지되어 있거나, 또는 일 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경우에 성립한다. 속도가 변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현상을 관찰한다고 하면, 그 현상에서는 뉴턴의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 동차가 가속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의자에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 그렇다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앞으로 튕겨나가지 않는다. 그냥 의자에 앉아 있게 된다. 힘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힘은 느껴도 뉴턴의 법칙에 의한 운동 즉 가속도를 만들지 않는 힘을 ‘가상적인 힘’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것들은 대부분 ‘관성’에 의해서 발생되는 영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