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 꿈을 실현하는 합리적인 집 짓기
집에 관한 한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전문가지만, 가족이 부대끼면서 함께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세심한 부분까지 완전히 설계에 반영하기란 쉽지 않다.
건축가이자 건축주로, 남편과 아내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정성껏 지은 구리시 아치울마을의 ‘수오재守吾齊’.
경주의 수오재처럼 ‘세상의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집’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한옥처럼 창살문을 달고 툇마루를 연결한 1층 한실.
마당 밟고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위한 공간으로 다실로 활용할 수 있다.
일본의 주택 전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는 수많은 건축물을 탐방하며 유독 건축가가 사는 집 중 걸작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건축가는 자신의 집 을 설계하면서 이상이나 지식, 경험, 기술, 아이디어, 감각, 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을 남김없이 드러낼 뿐 아니라 건축주의 안색을 살필 필요 없이 자신의 신념대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걸작’의 기준은 무엇일까? 독창적 구조미, 괜찮은 마감재, 편리한 동선 등 여러 요건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사는 이의 만족도다.
3대가 따로 또 같이 생활 하기 편리하고 친환경적 재료로 숨 쉬는 집을 짓고 싶었다는 부부 건축가 권병협・
이선희 씨. 건축가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 만족하는 집을 짓기 위해 설계를 1백 번 고쳐 완성한 ‘수오재’는
보통 사람의 보통 집 짓기를 실현했다는 의미에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계단실은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어 적삼목 패널을 난간으로 설치했다.
2 3층 자녀 방에서 2층 거실로 내려가는 계단.
천장의 박공 라인, 서까래 등 이 집의 입체적 구조와 사용한 재료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3 2층 부부 침실. 한쪽은 TV장, 한쪽은 선반 수납장으로 활용하는 파티션으로 침실과 드레스룸 공간을
분할했다.
가족 모두의 라이프 사이클을 분석하라
“‘늘 남의 집을 설계하면서 정작 우리 집은 언제 짓나?’ 대부분의 건축가가 갖고 있는 바람이자 아쉬움일거
예요. 지난해 단독주택을 리모델링하면서 유독 그런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더 이상 ‘언젠가는’으로 미루지
말자며 설계를 시작했죠.
설계 시공사를 운영 하는 남편이 큰 설계를 맡고, 제가 세부 설계를 맡아 구체화했어요.”
구리시 아천동, 부부 건축가가 지은 집은 예상을 깨는 수수한 빨간 벽돌로 뒤덮여 있었다.
이른바 집 짓기도 유행이 있게 마련인데, 높고 넓은 공간이 중심이 되거나 고급스러운 재료로 마감한 갤러리
같은 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집을 설계할 때 모토가 ‘생활하기에 합리적인 집’이었기 때문이죠.
보통 집을 짓는 것만으로 좋아서 평소 마음에 둔 멋진 공간을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디자인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가족 구성원의 라이프 사이클을 분석하고 필요한 요소를 설계에 차곡차곡
반영하는 일이에요.”
어머니와 부부, 두 자녀 등 다섯 식구 모두가 원하는 것을 반영하기 위해 설계도만 1백 번 정도 고쳤다는
이선희 씨.
무엇보다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포인트였다.
1층은 가족실 겸 주방, 어머니 공간으로,
2층은 부부 침실과 작은 거실,
3층은 자녀 방과 옥상 테라스로 구성하는 등 층별로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층별로 방은 한 개뿐. 대신 각 층 모두 가족이 모이는 공적인 공간에 중점을 두었다.
먼저 1층 현관 왼편의 어머니 방은 창호 문을 열면 작은 툇마루 너머로 소담한 마당이 펼쳐진다.
한식으로 꾸며 추후에는 다실로 용도 변경이 가능하다.
안쪽의 주방 겸 가족실은 가족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2층은 크게 자녀와 함께 사용하는 공적인 거실과 사적인 부부 존으로 구성했다.
부부 존은 말 그대로 침실과 드레스룸, 서재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파티션
을 사용해 공간을 분할한 것이 특징이다.
복도는 책장을 중심으로 안쪽은 드레스룸, 바깥쪽은 아일랜드를 설치해 책상 겸 간이 주방으로 활용.
침실 파티션 안쪽은 남편 옷을 수납하는 선반장으로, 바깥쪽은 벽걸이 TV를 거는 용도로 활용하는 식이다.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큰딸과 대학원에 진학한 둘째 딸은 함께 생활할 시간이 많지 않아 3층 역시 방을
하나만 두었다.
“아파트는 한 층에서 모든 게 이뤄지는 수평적 공간이잖아요.
여기는 밥을 먹으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하고, 조용히 쉬고 싶을 때는 2층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서로 꼴 보기 싫을 때는 반강제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요.(웃음)
층이 나눠 있다 보니 운동량도 많아졌어요.”
1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주방과 다이닝룸(가족실)이, 왼편으로 어머니 방과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펼쳐지는 구조. 설계와 시공은 남편 권병협 건축가가, 세부 설계는 안주인 이선희 건축가가 진행했다.
주방은 천장 마감재를 달리해 시각적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2 창가에 자신의 수집품을 조르르 장식한 딸아이 방. 자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벽면을 칠했다.
3 3층은 철 지난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다락방을 구성했다.
4 2층 부부 존 입구. 동선의 편의성을 위해 간이 주방을 만들었다.
친환경 재료만큼 중요한 것은 친환경 설계
이 집은 마치 건축자재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듯 다양한 건축 마감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우선 집 전체적으로 나무 마감재의 비중이 높다.
바닥재와 2층 거실 천장, 계단, 아트월과 창문에 덧댄 루버셔터까지 무늬목이 아닌 원목을 기반으로 한
마감재라 전체적으로 안온한 느낌이다.
벽은 모두 안티스타코로 도장했다.
VP의 스무디 페인트를 사용했는데, 시공 후 냄새가 전혀 없고 포름알데히드 지수를 측정했더니 0에 가까울
정도다.
주택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단열과 냉난방 효율성을 위해 창호는 모두 3중 로이유리를 사용. 침실 통창과
주방, 테라스 창호안쪽에는 빛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루버셔터 덧문을 시공했다.
“빛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해 동쪽 창을 적극 활용했어요.
동쪽 빛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빛이기 때문에 옆으로 긴 창보다는 길이로 긴 창이 온 종일 빛을 받기에 효과적
이죠. 빛이 칸칸이 들어올 수 있도록 루버셔터를 덧대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까지 미국에서 건축 회사에 다니는
큰아이의 조언이 보태졌죠.”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친환경적 아이디어는 물론,
평소 살면서 느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 아이디어도 엿볼 수 있다.
거실장과 침대 사이드 테이블로 사용하는 무지주선반이 대표적. 공간이 넓어 보일뿐더러 바닥 청소하기도
간편하다.
침대는 물론 가죽으로 감싼 헤드보드, 서재 테이블, 책장 등 가구 대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
책장은 금속으로 프레임을 짠 뒤 나무 상판을 얹어 견고하게 제작했다.
욕실은 모두 건식으로, 창을 내어 한결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문과 벽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대신 마감재, 맞춤 가구, 레벨의 차이로 공간을 구분한 것도
특징이다.
예컨대 1층 주방과 다이닝 공간은 아일랜드 조리대 라인에 맞춰 천장 마감재를 달리하고 아일랜드 위쪽으로
천장에서 랙을 내려 시각적 분리 효과를 높였다.
“처음 남편의 설계에 보조 주방을 추가했죠.
남자들은 보조 주방에도 왜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있어야 하는지, 팬트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해요.
옷 수납 선반장 안쪽에 다림질하기 편리하도록 슬라이딩 테이블을 설치하고,
그러려면 벽과의 간격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이처럼 세세한 설계는 실질적으로 써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답니다.”
평생 살던 아파트를 떠나 ‘맞춤 집’으로 이사하고 일상에 찾아온 변화가 즐겁다는 이선희 씨 가족.
우선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새소리에 기상 시간이 달라졌다.
자그마한 텃밭과 과실수를 가꾸는 기쁨도 크다.
아파트에 살 때는 드레스룸, 서재도 따로 있었고 마트도 가까웠지만 이사 온 후 편리했던 아파트 생활이 전혀
아쉽지 않은 이유다.
취재 중 문득 룸서비스를 도입한 아파트를 분양한다는 뉴스 보도가 떠올랐다.
입주민의 편의를 위한 새로운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사는 이가 자신의 생활 방식에 맞춰 공간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구조에 여지를 주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솔루션이 아닐까?
물론 콤팩트한 설계를 따지자면 아파트가가장 효율적이라는 점에 이의는 없다.
단지 벽식 구조를 철골조로 전환해 식구수가 많지 않은 가구는 벽을 터 스튜디오처럼 활용하거나,
주방을 집의 중심에 두고 싶은 이들을 위해 싱크대 배관과 배수의 옵션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작은 평수도
답답하지 않도록 천장 높이를 확보하는 등의 여지 말이다.
반대로 주택 설계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은 멋있지만 내 몸에 맞지 않은 불편한 설계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생활에 대한 진중한
관찰이 필요할 터.
아파트에 살면서 내 집 짓기를 꿈꾸는 이들, 내 집 짓기를 꿈꾸면서도 대부분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위한 ‘보통 사람의 보통 집 짓기’를 보여준 수오재. 아파트와 주택 설계의 현실적 절충안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1 리넨 패브릭 소파와 고재 나무와 금속으로 제작한 테이블, 반닫이가 조화를 이루는 2층 거실.
꼭대기 층도 아닌데 박공 구조를 살린 것이 특징이다.
벽면의 액자는 배치까지 생각해 스틸로 제작하고 바 형태의 조명등을 설치해 작품이 돋보이게 했다.
2 딱 관리하기 편한 만큼의 소담한 마당에 소나무와 과실수를 심었다.
3 다용도실로 통하는 벽 일부를 뚫어 반려견이 드나들 수 있게 했다.
4 습기에 약한 히노키 욕조를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욕실에 창문을 설치했다.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출처 : 디자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