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자본과 기계의 풍경, 그리고 신화적 상상력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로 등단한 임채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야생의 족보』가 시인동네 시인선 171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의 근저에는 자본/인간, 문명/야생, 반생명/생명의 이항 대립의 구조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물화하는 자본-기계의 어둡고 황량한 풍경을 목도하면서, ‘야생의 족보’에서 출구를 찾는다. 야생의 족보는 신화적 상상력에 의해 더욱 보강되며, 이 황폐한 세계에 생명성의 건강한 집단 무의식을 소환한다.
출판사 서평
엘리엇은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서 도시의 황량한 저녁 하늘을 “수술대 위의 마취된 환자”라고 은유한다. 그런 저녁은 “반쯤 버려진 거리”, “하룻밤 싸구려 여인숙”, “굴 껍데기와 톱밥이 깔린 식당”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임채성이 『야생의 족보』에서 그려낸 풍경의 한쪽은 이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그것은 ‘탈진 사회’에서 지치고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들의 모습인데, 그들의 삶은 무한 경쟁, 완강한 계급 구조, 저임금, 주거 불안, 출구가 없는 인생 속에서, 속수무책이다. 열린 사회는 틈새와 탄력이 살아있는 사회이다.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시대만 하더라도 시스템의 족쇄는 상대적으로 헐거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엔 빈틈이 없다. 그것은 자본-기계의 촘촘한 격자(grid)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고 이윤의 스위치를 올린다. 사람들은 무한 경쟁, 최대이윤을 극대화하는 회로 안에서 로봇처럼 움직인다. 기능만 남은 삶 속에 다른 출구는 없다.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구호는 먼 옛날의 잠꼬대가 되어버렸다. 잘살고 못살고는 개인의 근면성이 아니라 시스템이 결정한다. 시스템의 상부에는 극소수의 운 좋은 인간들만이 들어가 있다. 나머지는 뛰어봐야 벼룩이다. 임채성은 이 살벌하고 쓸쓸하며 돌이킬 수 없는 탈진 사회의 끔찍한 현실에 주목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찬물도 쌍둥이도 위아래가 있다던가, 상하좌우 뒤집기가 금지된 욕실에서 목과 허리 굽혀 얻은 몸속의 찌끼들을 정화의식 치르듯 아래층에 쏟을 동안,
누구냐?
내 머리 위에 똥물을 끼얹는 이
- 「층층시하-다큐와 르포 사이·3」 전문
이 시집의 첫 작품은 이렇게 요지부동의 수직적 계급 구조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효율만 중시하는 사회의 인간관계는 ‘위아래’만 있고 ‘옆’이 없다. 수직의 절벽 같은 계급 구조는 사람의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 계급-절벽의 최상부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은 “머리 위에 똥물”을 이고 산다. 자본-기계를 가동하는 계급의 이 촘촘한 구조를 시인은 “층층시하”라 부른다. 계급의 층위마다 특별한 역할과 차별적 소득들이 부여되고, 이 위계의 “상후좌우 뒤집기”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시인은 이 살벌한 풍경을 “다큐와 르포 사이”라 부름으로써, 사실성을 강화하고 비유성을 약화한다. ‘제발, (비유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이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자동차 그림자가 컵밥 그릇 밟고 간다
동공을 쏘는 불빛 편두통을 일으키고
가슴엔 타이어 자국
문신처럼 새겨진다
불면이 홰를 치면 찾아드는 짙은 허기
태양에 가까워지려 밤을 밝힌 도시에서
별은 또 빛을 잃은 채
어둠에 묻혀간다
나는 법을 잊어버린 고시원 비둘기가
이력서에 쏟고 쏟는 빙점 밑 강물 소리
무궤도 별똥별 하나
한강으로 떨어진다
- 「이카로스의 날개」 전문
“컵밥”은 최소한의 기능만 남은 음식이다, 거기에 향유의 즐거움은 없다. 값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으므로 시간에 쫓기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애용한다. “자동차 그림자”는 폭주하는 자본과 계급의 상징이다. 그것은 가동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의 가슴을 뭉개고 그것에 “타이어 자국”을 문신처럼 남긴다. “고시원”은 자본-기계가 무력한 하위주체(subaltern)에게 허락한 “층층시하”의 한 공간을 상징한다. 자본-기계는 하위주체들이 정해진 컨베이어벨트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수히 써대는 “이력서”는 자본-기계의 선택과 배제 기제의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날개가 녹아 내려버린 이카로스처럼, 탈진 사회의 하위주체들에겐 상승이 허락되지 않는다. 자본-기계가 정해놓은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으므로 그들은 사실상 “무궤도”의 삶을 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수직적 탈진 사회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추락’밖에 없고, 그들의 쓰러짐은 “별똥별”의 사라짐처럼 덧없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목차
제1부
층층시하ㆍ13/스무 살의 사지선다(四枝選多)ㆍ14/이카로스의 날개ㆍ15/선녀와 나무꾼ㆍ16/송아기와 송아지ㆍ17/나는 댕댕이로소이다ㆍ18/호상(好喪)ㆍ20/대치동ㆍ21/스타벅스, 스타벅스ㆍ22/하현달ㆍ23/둥지ㆍ24/땅의 연대기ㆍ25/카인의 땅ㆍ26/18시 33분ㆍ27/달팽이의 주소ㆍ28
제2부
딸랑딸랑ㆍ31/아메바ㆍ32/꽃마니ㆍ33/호모 포에티쿠스ㆍ34/대왕암 앞에서ㆍ35/청동검의 노래ㆍ36/웰컴 투 헬ㆍ38/졸피뎀의 시간ㆍ39/혼술ㆍ40/옹이박이ㆍ41/배, 탈ㆍ42/그렇게, 남자ㆍ43/무임승차ㆍ44/사나이의 바다ㆍ45/종이컵ㆍ46
제3부
69ㆍ49/겨울 지오피ㆍ50/경의선 북행 전철ㆍ51/4·19탑 앞에서ㆍ52/울돌목 노을ㆍ53/겨울 정동진ㆍ54/청령포ㆍ55/묵언화법ㆍ56/월정리역에서ㆍ58/두루미마을에서ㆍ59/욕지도ㆍ60/백야의 숲ㆍ61/박혁거세의 불ㆍ62/봄, 2020ㆍ63/절집 이야기ㆍ64
제4부
야생의 족보ㆍ67/개찌버리사초ㆍ68/달맞이꽃ㆍ69/남방큰돌고래ㆍ70/연어처럼, 여우처럼ㆍ71/이팝꽃ㆍ72/낙지ㆍ73/민달팽이에게ㆍ74/아무르장지뱀ㆍ75/강아지풀ㆍ76/버자이너 모놀로그ㆍ77/보금자리ㆍ78/백두 가솔송ㆍ79/달과의 대화ㆍ80/날아라, 두루미ㆍ81/들개ㆍ82
제5부
코로나 시대의 사랑ㆍ85/폭염주의보ㆍ86/홀로코스트ㆍ87/폐곡선의 하루ㆍ88/말복(末伏)ㆍ89/다시, 광복절ㆍ90/제주 동백ㆍ91/성산봉 일출ㆍ92/백록의 눈물ㆍ93/한모살ㆍ94/빌레못굴 연대기ㆍ96/가시리ㆍ100/목시물굴의 별ㆍ102/달하 노피곰 도다샤ㆍ103/사랑이 사랑에게ㆍ106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ㆍ107
작가 소개
임채성
시인경남 남해(창선도)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시선집 『지 에이 피』가 있다. 정음시조문학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신인상, 한국가사문학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21세기시조〉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