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스토리문학＞ 겨울호 인터뷰

[포럼대표]

2011년 <스토리문학> 겨울호 인터뷰/김순진 김묘숙

끊임없는 도전과 작품적 자아성찰 - 정종명 소설가

정종명 소설가를 만나러 간 날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낙엽이 비처럼 흩날리던 날이었다. 플라타너스 큰 잎사귀들이 푸르렀던 꿈들을 애써 지우기 위해 도로에 뛰어들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한 여름동안 살아온 푸른 목숨에 대하여 아무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약간의 안개비를 뿌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는 여전히 연극공연장 삐끼들이 나와 우리 일행을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하며 연극마당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이미 100년 동안 공연되는 연극의 주연을 맡은 바 있었기에 공연관람을 뿌리치고 드라마틱한 연극과 스펙터클한 영화의 스토리를 써 오신 정종명 소설가를 만나러 한국문인협회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은 정종명 소설가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당선하여, 금년부터 밤낮으로 우리 문인들의 위상과 처우, 그리고 자존심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정종명 이사장님께서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춥지 않느냐’ 물으시곤 따끈한 녹차를 손수 대접해주신다. 필자와 은평문인협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장수현 한국문인협회 감사께서도 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몇 번 와본 사무실이지만 말이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이지 그저 작은 개인사무실 정도에 준하는 평수에 새삼 놀랐다. 한국문인협회의 위상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문화한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문화의 최선봉에 선 문인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나 소홀하다고 생각하니 서운함이 밀려온다. 다행히 조만간 목동에 건립한 대한민국예술인센터로 이하기 위하여 이삿짐 정리가 한창이라는 말씀에 한시름 놓인다.

정종명 소설가는 지난해까지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으로 기관지인 <월간문학>과 <계절문학>, 그리고 문인들의 단행본 출간을 총괄하던 분이었다. 그렇게 문인들을 위한 일에 잔뼈가 굵어 이제 한국문인들의 수장이 되어 문인들의 권익신장에 앞장서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믿음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명예가 있더라도 문인은 작품으로 말하여야 한다. 정종명 소설가는 그간 수없이 많은 작품을 끊임없이 써오면서 한국문단의 기둥으로 성장하였다. 한국소설문단에서 이제 그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쩐지 무엇인가 빠뜨린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가 그만큼 철저하게 문학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문우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소문은 익히 문단에 알려진 야화다. 오늘 인터뷰는 그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인들에게는 꿈을, 그리고 중견작가들에게는 책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여쭤 보려고 한다.

정종명 소설가는 1945년 아버지 정봉수(鄭奉守), 어머니 박임득(朴任得) 사이에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해방둥이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거친 물결을 거슬러 오른 연어라 해도 좋겠다. 그는 1950년에 도계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6 ․ 25전쟁으로 고향인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독점동으로 피난, 그곳에서 수식초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1960년 강원도 태백시로 이주했다. 태백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강릉고등학교에 입학해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 경력을 쌓는다. <학원>에 작품을 투고해 싣고 전국의 여학생들로부터 편지 받는 재미에 빠져 대학 입시공부는 뒷전이었다. 국어는 수준급이었는데, 수학이 너무 어려웠다. 1965년 한 ․ 일 회담 반대데모 주동자로 낙인 찍혀 퇴학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조기방학 중에 쓴 단편소설 「도주(逃走)」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주최한 전국고등학생 문예콩클대회에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김동리 선생께서 그의 문학콩클의 심사위원으로 계셨고, 김년균 시인 등 많은 시인들과 교우하면서, 그는 문단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꿈과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면 이쯤에서 정종명 소설가와의 대담을 대화체 형식으로 옮긴다. 호칭과 극존칭을 생략하며 정종명 소설가는 정종명, 김순진 발행인은 김순진, 김묘숙 편집장은 김묘숙으로 표기한다.

김순진 : 오늘 바쁘신 데도 이렇게 저희 <스토리문학>을 위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에 다른 장소에서 선생님을 뵌 적이 있지만 오늘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서 이사장님으로 뵈오니 감회가 또 다르군요. 수없이 들어오신 말이겠지만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을 뵈면 어쩐지 고향의 큰형님을 뵙는 듯 편안해집니다. 저희 사촌 큰형님도 해방둥이시거든요.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정종명 : 저를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토리문학>은 이제 10여년 쯤 된 중견 문예지로서 문단에서 좋은 평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두 발행인께서 그동안 정도를 지키면서 좋은 잡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신 결과로 생각하고 먼저 치하드립니다. 저는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지만 강원도 삼척에 있는 도계광업소 기술자로 일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6·25가 터졌고 다시 봉화로 피난을 내려왔죠. 당시 아버지는 입대를 하신지라 장남인 제가 고사리 손으로 땔감을 마련하며 시골 생활을 해야 했어요.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를 때는 위풍당당하지만 나무를 한 묶음 짊어지고 내려올 때는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넘어져 울기도 많이 울었죠. 또 농사철이 되면 모내기 등 일손도 거들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김묘숙 : 어려서부터 남다른 책임감이 있으셨군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께서 작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해주신 것 같아요.

정종명 : 저희 아버지는 겨울밤이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책을 읽어주셨습니다. 저도 잠자는 척하면서 귀동냥을 하던 생각이 납니다. 이야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동네 아낙들은 소매깃으로 눈시울을 훔치기도 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저 역시 거기에 동화돼 눈시울이 더워졌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 세상에는 눈시울을 적시게도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중에 그 이야기가 소설이고, 소설은 작가가 쓴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한번은 동네 사랑방에 책이 한 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읽기 시작했어요. 표지가 찢어져 제목도 몰랐지만 너무도 재미있어서 확 빠져들게 됐죠. 그 책을 읽고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사랑방에 방치되었던 그 책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생애 최초로 장차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의 불씨를 가슴에 지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작가로서의 꿈과 열정을 키울 수 있는 거름을 뿌려주신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선택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공과대학을 나와 월급 많이 받는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셨죠. 1966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장차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께서는󰡒다리 밑에 가 보면 거지들이 더러운 거적을 덮고 산다. 작가란 그런 거지들하고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어야 하는데, 너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지요.

김순진 : 아버지께서 가장 큰 스승이셨군요. 구체적인 문학수업은 어떻게 하셨나요?

정종명 : 중학교에 다닐 당시에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학원>이라는 잡지가 나왔어요. 나름대로 산문을 써서 투고를 했더니 운 좋게도 가작으로 입선돼 잡지에 제 이름이 실린 것 아니겠어요? 친구들은 그런 제게 한국의 셰익스피어가 될 것이라고 추켜세웠고, 저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가적 꿈을 키우게 됐죠. 강릉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원영동(元永東) 선생님이 국어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세상에 태어나 만난 최초의 문인이었지요. 그 선생님의 지도 아래 문예반에서 활동했어요. 춘천에서 열린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 입상하기도 하고 <현대문학>같은 잡지도 헌책방에서 많이 사서 모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한 ‧ 일 협정 반대 데모가 일어났는데 어찌하다 보니 제가 주동자로 몰리게 된 겁니다. 초여름 데모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조기 방학이 실시되어 태백시 친가로 돌아갔습니다. 그해 무덥고 지루한 50여 일의 방학 동안 저는 원고지 약 1천매에 가까운 장편과 70여 매짜리 단편을 썼는데, 「도주」라는 그 단편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주최 고등학생 문예콩쿠르대회에서 당선되었어요. 그 소설을 뽑아준 분이 김동리(金東里) 선생님이었습니다. 데모 주동자로 낙인이 찍혀 가까스로 퇴학을 모면했던 요주의 문제아가 이 일로 해서 하루아침에 의기양양한 스타가 되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허허. 저의 문학 수업은 대충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등학교 시절이고, 두 번째는 대학 시절,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가졌던 문학수업기이지요. 제가 작가의 한 사람으로 문단 말석이나마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우둔한 문학적 재능을 일깨워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베풀어 준 몇몇 고마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무늬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제가 바로 그 견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묘숙 :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는 전국의 수재 문학도들이 많이 들어간 학과로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정종명 : 맞습니다. 지금은 문예창작학과가 많지만, 제가 입학할 당시만 해도 문예창작학과는 전국에서 그 학교밖에 없었습니다. 시인,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선호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대학의 국문과 학생들이 도강(盜講)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요. 저는 특기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저는 약간의 우월감에 젖어 있었어요. 예를 들어 바로 위 학년에 작가 이동하, 시인 김형영 형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1년 후면 저도 그들처럼 학생 작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리라는 터무니없는 시건방을 과시했던 것 같아요. 약 50명이 함께 입학을 했는데, 그 동기생들 가운데서 나중에 문단에 나온 문우를 손꼽으면 김년균,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이우선, 김희원, 장경호, 이남진, 이옥희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정희 씨와 이경자 씨는 나와 동인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작품합평회를 통해 잠시나마 호흡을 맞추었던 친구들입니다. 두 사람은 학교 앞에다 정한 내 하숙집에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각자 써 가지고 온 작품합평회에 들어가면 당돌하리만큼 꽤나 신랄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합니다.

김순진 : 김년균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님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서요?

정종명 : 네,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던 해에 학교를 졸업했으나 직장 잡기가 난감했습니다. 비싼 하숙비 조달이 어렵다고 해서 다 뿌리치고 시골 친가로 내려갈 처지도 아니었지요. 어떻게든 서울에 빌붙어 뭉기적거려야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을 것 같았습니다. 그 구세주가 시인 김년균 형이었어요. 그 무렵 김년균 형은 <월간문학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미아리 달동네에다 방 하나를 세들어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문예창작학과 동기생이기는 하지만 군복무를 마치면서 대학에 들어온 그 형이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일단 자기 집에다 거처를 정해 놓고 차차 진로를 모색해 보자고 제의했습니다. 나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호의였지요. 끼니는 대개 미아리 길음시장에서 매식(買食)으로 때웠고, 형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어두컴컴한 그 빈방에서 혼자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작품을 쓴답시고 고심했지만 여름날 뿌리 뽑힌 고구마 줄기처럼 심신이 고루 시들어 버린 나머지 이렇다 할 진척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당시에 쓴 약 5백매의 중편 하나를 기념 삼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면 어디에도 내놓을 형편이 못 되는 엉터리 작품이었습니다. 그 엉터리 작품을 싫증도 안 내고 끈기 있게 읽어 주면서 “잘 썼다. 넌 틀림없이 작가 될 거야.”하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김년균 형의 그 무던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김묘숙 : 그러셨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 돕고 함께 해온 우정이니 정말 부럽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동인활동도 활발하게 하셨다면서요?

정종명 : 김년균 형의 방에서 두어 달을 버티고 나서 이동하 형이 소개해 준 월간 <스포오츠> 잡지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잡지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근 6개월 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고 말았지요. 이동하 형이 다시 소개를 해서 이번에는 작가 김원일 선배가 부장으로 재직 중인 <국민서관>이라는 출판사에 입사했습니다. 아동물 출판사인데 거기서 4년 6 개월을 근무했습니다. 거기를 그만두고 글을 쓰다가 결국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 김문수 작가가 재직하는 출판사에 연줄을 대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몇 사람과의 교우가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처음 만난 사람이 윤후명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유익서, 황충상, 이채형을 만났습니다. 윤후명은 이미 기성 시인이었지만 유익서, 황충상, 이채형은 나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는 문단이란 대문 앞에서 문전 축객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만년 문학도였어요. 동병상련의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지만, 하여간 우리는 월 1회 습작품에 대한 합평회를 갖는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약 1년 정도 그런 작품합평회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했고, 다소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네 사람 모두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작단(作壇)에 얼굴을 내밀게 됨으로써 그 지루하고 암담하고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던 힘겨운 문학수업기에 종지부를 찍기에 이르렀습니다. 1978년 <월간문학> 10월호 신인작품상에 당선되어 등단하게 된 것이지요. 등단하고 나서 1년 남짓 지났을 때 제 생애를 통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손영목, 서동훈, 유익서, 김원우, 김채원, 유홍종, 표성흠 등 쟁쟁한 젊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동인>을 결성한 겁니다. 1980년 8월 15일, 한국문예진흥원 뒤뜰 잔디밭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이어서 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작가동인> 1집을 냈습니다. <작가동인>은 4집까지 냈는데, 나중에 강석경, 김상렬, 김인배, 정소성, 최학, 황충상 등도 참여했습니다. 이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좀 쓰는 젊은 작가’로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았지요.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내력도 어쩌면 그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순진 : 정말 좋은 문우들을 만나서 그동안 끈끈한 연을 쌓아 오신 것이 문인의 수장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에 당선하신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서 포부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종명 : 젊은 협회를 만들어 문인들의 창작욕구를 일으키는 활력소가 되겠습니다. 지역문학 발전을 위한 문예지 <지역문학>(가제)을 창간하고, 협회 소속의 평생교육원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은 1만 1천여 명이나 됩니다. 그간 소설가 출신 이사장은 김동리 선생 이후 처음으로 25년만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씨줄 날줄입이다. 인생이 끝날 즈음 그 씨줄 날줄에서 어떤 무늬가 나타났는지 알 수 있는 게 문인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공정한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문인협회는 정치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문인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직함을 지녀야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도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각종 산업 쓰레기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각종 쓰레기들을 방치해 두면 반드시 큰 재앙이 따른다는 것이 해양 전문가들의 견해고 보면 지금의 우리 문단이 그와 같은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문인들은 문사(文士)나 선비라는 이름으로 그들 나름의 자긍심을 지니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뜨거워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오로지 창작에만 매진하는 문인다운 문인, 선량한 회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스스로 뼈아픈 반성을 통해, 감추고 싶은 치부들을 과감히 도려내야만 그 치유가 가능합니다.

김묘숙 : 문단의 문제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가요?

정종명 :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만, 문단 내적인 문제로 국한해 다섯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표절의 문제입니다. 문학작품은 작가(문인)의 혼(魂)을 불어넣는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고도의 ‘창조적 예술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표절’은 그런 ‘치열한 예술혼’이 타락했다는 이유로 문단에서 타기(唾棄)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표절’이란 의혹을 받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붓을 꺾고 벼루를 향해 이마를 찧는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이 문인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타인이 창작한 작품을 은밀히 양도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표절보다 오히려 죄질이 더 나쁜 사례에 속한다고 질타 받아 마땅합니다. 처지가 궁색한 대필자에게 일정액의 사례금을 지불했다고 해서 자신의 부적절한 행위가 상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로는 문학상의 매수입니다. 기관 및 기업의 지원금 및 기부금으로 주관하는 문학상을 시상하는 과정에서 사례비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원금이나 기부금을 받아 낼 때 올곧은 문인들을 담보로 삼았기 때문에 심사위원 선발이나 심사과정에서 당연히 객관성과 공정성이 엄정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도 수상자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비방, 모함, 협박,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동료 문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문단활동을 침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아량과 포용력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내용증명이나 배달증명을 보내어 동료문인을 핍박, 문단활동을 저해케 하는 문인이 문단 내부에 도사리고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사안이라도 문인은 가능한 한 송사(訟事)를 경계하는 덕목을 겸비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문단을 대표하는 한국문인협회나 국제펜클럽한국본부는 임원선거를 우편투표로 치릅니다. 그러다 보니 문인으로서 차마 언급하기 낯간지러운 모습이 도처에서 연출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투표자를 상대로 한 향응 및 금품 수수, 지지 서명 유도 및 대리투표 자행 등, 오염된 정치판에서나 있을 법한 민망한 모습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문단을 정치판으로 오인한 일부 ‘정치 문인’이 저지르는 유치한 작태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리란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갈 덕목과 책임감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릇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만인 앞에서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김순진 : 그렇군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가장 많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앞으로 한국문인협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실 건가요?

정종명 : 제가 취임사에서 말했던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월간문학>의 원고료를 인상하겠습니다. 문협 회원들에게 작품 쓰는 자긍심을 드높이고, 연회비 부담을 다소나마 덜어 드리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는 새 문학지 <지역문학>(가제)을 창간하겠습니다. 한국문협에서는 현재 <월간문학>과 <계절문학>을 발행하고 있습니다마는 회원들의 작품 발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지역문학>은 특히 적잖은 소외감을 갖고 있는 지방 문인들에게 작품 발표 지면을 대폭 할양하고, 장차 전자문학지로 변환하여 회원들의 작품 발표 지면을 무제한으로 확대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문협 소속 평생교육원을 만들겠습니다. 시인, 작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을 상대로 차원 높은 문학강좌를 개설하겠습니다. 기성문인들은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새로운 자세로 공부하고, 문협에 가입하는 신입회원들은 일정 기간의 연수교육을 통해 문인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을 터득하는 다양한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한국문협 홈페이지를 대폭 개편해야 합니다. 한국문협 홈페이지를 열면 개개인의 회원 정보는 물론이고, 작고 문인들의 정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대대적으로 구축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걸 요즘 알았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또 지회ㆍ지부 홈페이지를 연계하여 중앙문단과 지방문단의 균형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지난 10월에 국회 의결을 거쳐 발표된 ‘예술인복지법’입니다. 우리 문인들은 이 예술인복지법에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현재 겉으로 드러난 예술인법지법은 좀 실망적입니다. 시행령이 공표되기 전에 우리 문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이 밖에도 한국문협에서는 해야 할 과제가 참 많습니다. 소멸 위기에 처한 한국문인협회 60년사를 서둘러 정리해야 합니다. 임원선거 관리규정 등 정비해야 할 제반 행정 규정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창간호를 내면서 신인당선작을 게재하는 문학지 발간이 허용되는 황당한 문단 풍토를 더 이상 모른 척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문협에서 시행하고 있는 각종 문학상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젊고 재능 있는 신입회원을 영입해서 보다 젊은 한국문협을 만들어 나가야할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하여간 꼼꼼히 챙기고, 회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서 보다 발전하는 한국문인협회가 되도록 성심성의껏 일하겠습니다.

김묘숙 : 이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힘이 생깁니다. 새로 문단에 나오는 신인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정종명 ;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내력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의 훈련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 중에는 함부로 외출도 못합니다. 코치나 감독의 허락 없이는 자기 집에도 못 갑니다. 음식도 정해 주는 것만 먹어야 합니다. 코치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최연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우승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였습니다. 그때 14살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매스컴은 코마네치가 허공을 선회하는 모습을 보고 ‘극치의 예술 작품’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가질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코마네치는 “훈련받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훈련이 얼마나 고되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1992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 때, 마라톤에서 우승한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그는 “훈련 도중 그만 물에 빠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의 말을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쓰러질 정도로 최선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우승을 했다고 봅니다. 글쓰기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쓰다가 만족한 작품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쓴 작품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쓴 작품은 명작이 되지만, 쓰다가 적당히 만족해 버린 작품은 결국 태작이 되고 맙니다. 태작을 스무 편 백 편을 쓴들 무슨 소용입니까. 명작 한 편이 그 작가의 이름을 문학사에 오래 남깁니다. 목숨 걸고 작품을 써야 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왕비 세헤라자드도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런저런 글 많이 쓰는 작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는 작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쓰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작품을 써야 합니다.

김순진 : 오늘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저희 스토리문학을 위하여 시간을 할애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저것 여쭙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여기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스토리문학 신인상 및 동인지 출판기념회가 12월 3일 오후 4시에 문학의집 서울에서 있습니다. 그날 오셔서 축사 한 말씀해주세요.

정종명 : 그러지요. 가서 축하의 말씀도 드리고 스토리문학 회원들과 두터운 정을 쌓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를 취재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취재가 끝났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종명 소설가의 단편 1편을 책 내부에 함께 싣기로 한다. 일독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