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된 지 30년 가까이 되어 재건축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이 아파트를 처음 보았을 때 디자인 파트너스의 이은령 소장은 조금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가치를 상실한, 그러나 한 세대를 풍미했던 오래된 아파트. 그녀가 싱글 라이프를 즐길 이곳에 활기를 부여하자면 분명 특별한 비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구조 변경을 포함해 기본 요소들을 흔들기에는 부담감이 뒤따랐고, 마감재로만 변화를 주자니 아쉬움이 남을 터였다.?
집주인이자 디자인을 맡은 이은령 소장 본인의 결론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됐을까.? 우선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도어 디자인이다. 짙은 버건디 컬러의 도어, 그 위에 프린트된 대형 플라워 모티프는 방문객에게 그 어떤 요소보다 강렬하게 다가선다.
이는 X-레이 촬영한 백합, 로즈, 튤립의 섬세한 모티프를 스프레이 래커 도장한 목문 위에 직접 프린트한 결과다. 다음 거실로 들어서면 실평수가 25평 밖에 되지 않는 34평의 이 오래된 아파트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디자이너의 노력이 감지된다. 거추장스러운 가구들을 피하고 심플하게 구성된 거실과 주방은 뚜렷한 구분을 두고 있지 않은 대신, ㄱ자형 싱크와 연결된 4인용 식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식탁 위에는 빛을 반사시키며 끊임없이 반짝이는 가로 샹들리에가 시각적인 경계를 보여 준다. 거실은 모던한 소파와 스탠드, 라운지 체어 정도만 두어 여유롭게 구성하고, 전면의 PDP 박스를 산화된 듯한 느낌의 골드 석재 타일을 활용해 연출, 간접 조명의 효과까지 부여했다. 화이트 주방 가구의 모던함으로 일관하고 있는 주방은 레드 컬러 백페인티드 글라스, 그레이 톤 석재 타일의 사용으로 느낌 있게 연출됐다. 이처럼 구축물 등 기본 요소들의 디자인은 최소화하면서 컬러와 오브제 등을 통해 공간 캐릭터를 결정 짓는 방식은 최근 주거 공간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도어 디자인으로 상기시켰던 그래픽 디자인의 파워는 침실과 욕실, 게스트 룸 등 집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병원과 사무 공간 등 다양한 상공간을 디자인해온 디자인 파트너스의 공간에 대한 그래픽 노하우를 보여 주는 결과다. 그리하여 주거 공간인 이 집에 적용된 그래픽은 벽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침구, 거울, 문, 커튼 등 다양한 공간에 사용되면서 결과적으로 공간 전체의 일체감을 이뤄낸다. 침실 내에서 볼 수 있는 침장에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벽면을 타고 오르는 꽃과 줄기 패턴은 공간 그래픽 디자인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코레이션이야말로 실내 디자인에 있어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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