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侍
문화 가치의 측량 Ⅰ.
<맹약도<盟約刀> 보전 논제<保傳 論提>후술 댓글Ⅰ.>
문화는 정치개념과 무관
1. 임진왜란,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의 역사를 돌이켜 봄에,
동북아 삼국의 전쟁은 꼭 일본과 중국이 주인공을 해왔고, 필경 우리는 그 중간에서 싸우는 장소와 군사, 병함(兵艦), 물자 등을 피동적으로 제공되는 셈이 되어 온 형국 이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 중간의 사이에 끼는 식으로써 그런 단역 급에 아직도 우리는 머무르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 땅에 가서 싸워야 할 판인데 왜 꼭 우리 땅에서 그들로서는 남의 땅인 우리의 산하와 들판에서서 싸워도 괜찮아 하면서, 우리는 항시 제3자의 입장처럼 살아온 태세를 취한 셈이 아니던가?
우리야 말로 이제껏 남의 싸움을 이 땅에 불러들여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 오사카 성 전시실의 왜란 때 조선을 쳐들어오며 그들이 떠나는 군대의 모습을 그린 “조선출병도”를 보라! 왜란은 우리들에게 혐일(嫌日)의 원점(原點)일지 모른다.
우리가 허약하니 우리 땅에서 싸워 주시요라 한 것이며, 우리는 빈약하니 우리 강토에서 싸워도 좋다 라 한 간접적 허용인 것으로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주변의 싸움을 불러들이는 아주 습관성 체질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도돌이표로써 반복의 노래를 되풀이 해 부르게끔 되는 실태를 한 번쯤 곰곰이 따져봐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망각하고 살면서 그것도 아무런 생각 없이 마냥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 하면서 태평세월로 지금도 거듭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일본은 1945년 까지 765년간이란 근 1세기에 걸쳐 긴 기간 동안을 세계사 상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는 행운의 나라가 되었으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의 군국주의란 바로 ‘착각속의 건방진’ 격 ‘신풍(神風)’을 철없이 입히고 씌워 ‘카미가제’ 띄워 내보낸 것이다.
세계사 상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는 그 “가미카제”의 신봉이란 국민적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자리 잡혀 있었으므로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신(神)의 나라”라 하는 군국주의의 앞에 하나의 주술(呪術)로 남아 있게 되었어야할 “카미가제”를 일본은이를 승화시켜 천황(天皇), 신사(神社) 등을 지금도 거론하여 외쳐왔던 그것이 오늘의 일본인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에 죽은 오다 오부나가(織田信長,1534-1582)는 수천 정의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의 측실(側室)에서는 서양의 풍금을 치면서 포도주를 유리잔에 마시는 등 서양의 풍물이 이미 몸에 배어있듯이 서구화가 몸에 밴 정도를 보고 있는 등 개화가 되었었다.
조총은 임란이 일어나기 49년 전인 1543년 포루투칼인이 전해준 화승총을 개량하여 일본은 저희 것으로 하여 쓰는 개화기였으나 조선 조정은 갖다가 손에 쥐어 주어도 총기를 관군에 보급치 않고 정파싸움에 몰두하기에 바빴다.
우리의 습성 중, 기득권 행세와 제 자리 지키기 사조만큼 나라를 위해하는 사안은 없을 것이다. 그 직위와 위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오히려 상대의 흠집을 들춰내는 데에 급급함은 천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만도 못하였으니 조정의 관료들은 정파에만 눈독을 들이고 대의적 국가관을 다 상실한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공식으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인구는 500만에, 저희는 2,200만이라 했으나 조선은 800만 정도에 왜가 1,900만 명 정도를 그들 특유의 왜곡근성을 들어내어 조선을 얕잡아 다루려는 저의로 그렇게 통계하여 유포 했다는 것을 또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역사에 초점을 두고 몸은 자손(子孫)의 출산장려 등 인력의 증가가 국력의 증강 이라는 것에 역점을 둬야 하지 않을까 라고도 여겨진다.
북관대첩비
2. 일본의 북관대첩비(碑) 반환 역사 기록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반환의 발의(發議)와 그 일정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1909년 조소앙 선생이 소해상(嘯海生)이란 필명으로 대한흥학보에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된 “북관에 대한 아의 소감(北關에 對한 我의 所感)”으로 기고하면서 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8년 동경한국연구원장 최서면 선생이 조소앙 선생의 글을 읽고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비를 확인하였다.
1978년 해주정씨 문중이 한일친선협회를 통해서 야스쿠니 신사 측에 처음 반환 요청하였다.
1979년 정부가 비.碑 반환의 공식 요청에 북한과 협의가 있을시 일본이 반환 입장을 발표 하였고,
2003년 12월 18일 남북 간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을 시에 반환가능을 신사측이 표명하니, 2005년 6월 23일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비.碑 반환을 위한 공동 노력을 포함한 합의사항을 발표,
2005년 6월 28일 정부는 일본에 비 반환을 공식 요청 하였다.
2005년 10월 12일 ‘비.碑 반환합의서’서명식 개최(야스쿠니 신사)을 체결하였고,
2005년 10월 20일 100년 만에 북관대첩비를 환수 하였다.
2005년 10월 28일 비.碑 환국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게 전시 공개 하였고,
이듬해 원래의 함경북도의 북한으로 존치 하자는 의미 부각에 의해 대한민국 측의 주선으로 북한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2006년 판문점을 통하여 육로로써 이동되어 북관대첩비는 제자리 본고향에 잘 존치되게 하였다.
원위치 북관대첩비
3. 문화적 가치개념의 측량
문화는 정치개념과 무관하다
현존, 세계최초 금속 활자본 불경 직지심체요결은 고려 말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간행, 구한말 프랑스가 약탈해 갔으나 서양의 최고 금속활자본인 쿠텐베르크 성경(1455)에 비겨 178년이나 앞서, 저희 보물로 삼고서는 반환치 않는 사실과 1999년 중국이 처음 ‘한류’를 언급함으로써 소위 'K 브렌드‘로 비약된 지금의 우리들 경우와, 2002년 겨울연가가 2004년 일본 지상파에 방영되면서 명실상부한 욘사마 신드롬까지 발생한 것 모두 문화적 차원의 단면들이다.
일본으로부터 반입된 북관대첩비와 ‘반가사유상’ 과 중국으로부터 반입된 ‘월인석보옥책’ 등의 국보급 문화재는 모두 애초부터 민간차원의 문화교류에서 성사된 일이되, 정치는 사후 입증자로서의 행새를 한 것에 불과 하다..
한 편 일본과 대만 및 중국이 혐한류를 하든지, 일본 수상 부인이 욘사마에 애착하든지 문화라는 개념 면에서는 지배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순수 민간인들끼리 상통되는 특징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류문화, 사무라이문화 외 세계 각국의 정신문화는 무엇을 막론하고 민간차원에서 출발하여 끝 매듭짓게 되는 것으로서 지배정치와는 별개의 사안으로 두게 되어 있다.
강점이나 침략에서 문화재를 약탈, 강탈하는 등의 행위는 지배정치의 말로행위로써 그 증표를 위한 한 수단이 될 수는 있되, 문화의 혼과 얼이 배어있는 문화재와 문화정신은 한 인간에게서 명이 유한함과 마찬가지로 지배정치란 한 낟 창조주에게는 한 게임놀이의 과정에 해당된다.
최근 피라미드가 지금까지의 본질에서 초월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과학적임이 지구갱생 차원상승의 성지 메카의 대명사로 급 부각 되고 있능 새로운 경탄을 불러오고 있는 현 실정에 서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실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기도 하다.
진정, 문화는 우리들 민간차원의 정신과 교류이지, 이념과 정치와는 전혀 별개의 차원으로 다루어 져야 함이 위와 같다 라 할 수 있다.
한편, 2023년 6월과 7월 중 아래와 같이 ‘반가사유상’ 과 ‘월인석보옥책’ 두 문화재급의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민간차원으로 반환되어 우리에게 입국된 사실에 관하여 각각 취재, 서술한 바가 있다.
대전환 통로
IMTV-독도문학신문 |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보전 논제】 - Daum 카페
IMTV-독도문학신문 | 【월인석보옥책 보전논제(保全論提)】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