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60:1-6
2019년도 첫 주일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2019년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셔서 송구영신예배 때 말씀드린 대로 올해가 여러분의 생애에 최고의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31일 우리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해돋이 명소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천, 수만 명이 모여서 새해 첫 해를 보기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해는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와 빛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었을 때 밤에 매복을 나가면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아무리 무장을 단단히 해도 낮은 영하의 추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밤새 추위에 떨면서 한 가지 희망은 빨리 해가 뜨라, 해가 뜨기만을 기다립니다.
밤새 추위에 떨면서 잠을 자야 했던 사람들에게 해는 따뜻함의 희망입니다.
추위에 떨면서 보초를 서야 했던 군인들에게 아침 해는 안도의 희망입니다.
밤새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 밝은 햇빛은 평안의 희망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얍복강 가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그 밤은 정말 고통의 밤이요 근심의 밤이요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20년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었고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가족이 죽을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 야곱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축복하신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형에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데,
성경은 야곱이 형에서를 향해 나아갈 때 ‘아침 해가 돋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해와 빛은 언제나 희망을 상징합니다.
해가 떠오름으로 추위가 물러가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어둠이 물러갑니다.
2019년도에 소망의 빛이, 생명의 빛이, 축복의 빛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어둔 그늘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외로움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힘들게 춥게 만드는 모든 요소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의 해방은 제2의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만큼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은 회복에 대한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기대를 갖고 고국에 돌아온 그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열심히 성전을 지었습니다.
주변의 시기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4년간이나 중단되었었지만 그러나 학개와 스가랴를 통한 하나님의 독려하심으로 성전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다시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삶은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상황이 우리 가운데도 그대로 나타나는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기대를 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힘든 가운데 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이제는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지파가 다 그쪽으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려운 암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안정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수석장로가 교인들을 모아 가지고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고 건축만 되면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성장은커녕 오히려 교회가 더 어려워지는 경우를 흔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낙담하고 낙심만 하고 주저앉아 있어야 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선지가가 외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주저앉아 있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참고 인내하며 천신만고 끝에 그 순간을 극복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을 때는 절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절망은 도무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처럼 쇠약해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지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주저앉아 있지는 않는지, 무능력한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는지, 소망도 기대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은 아닌지,
주어진 사명과 목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안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는 자신의 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인으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기르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겨우 연명하면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을 살펴보니 이것은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기대했던 모습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하나님이 기대했던 모습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일어서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솔직한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까?
여러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신 하나님이 이렇게 살기를 정말 바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사는 모습을 진정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생각되시면 여러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실망하고 원망하며 살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게으름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변명과 핑계의 자리를 박차고 이제 내가 먼저 일어서서 주님이 기대하시고 주님이 바라시는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농어촌 교회에서는 한 동안 개정된 것을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 나는 옛날 것 사용하다가 하늘나라로 갈랍니다.’ 반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든 어르신들이 새로운 것을 외우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면 ‘목사님 저는 이대로 살다가 죽을랍니다.’ 대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비록 몇 년, 몇 달, 아니 며칠밖에는 새로운 삶의 축복을 맛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잘못되었으면 일어서야 하고요 아니다 싶으면 일어서서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체면, 습관, 관행 때문에 그대로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때 빛을 발할 수 있고 복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일어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빛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면서 그 이유로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기 때문에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빛을 발할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빛보다는 어둠이었고 빛을 발하기 보다는 어둠을 발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빛으로 빛을 발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빛 되신 주님의 빛을 받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러 가다가 담 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남루한 노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노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기에 테레사 수녀가 그 노파에게 말을 붙였으나 아무 대꾸도 없이 한 번 힐끔 쳐다보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설득을 하여 그 노파의 집에 가보니 다 쓸어져 가는 오두막인데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등잔에 먼지가 너무 쌓여있습니다.
그 등잔을 깨끗하게 닦으면서 "오랜 동안 등잔을 밝히지 않았군요."라고 말을 하자 "등잔불을 켜도 올 사람도 없고 볼 사람도 없는데, 불을 켜면 무엇 하겠느냐?"고 반문 했습니다.
그 때 수녀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불을 밝혀야 사람이 불을 보고 올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보아야 할머니를 돕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불을 받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 마음의 등불을 켜 두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불을 밝혀야 하고 마음에 등불을 항상 켜 두어야 합니다.
이 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불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빛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 되신 주님과 늘 동행해야 합니다.
내 안에 빛 되신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빛을 받지 않으면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빛 되신 주님께 나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힘써야 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실 것이고, 우리가 빛을 받으므로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눈을 들어 사방을 보아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눈을 들어 사방을 보았을 때 어떤 모습이 보였습니까?
무리가 다 예루살렘으로 모여 드는 모습이었습니다.
바다의 부가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오는 모습이었습니다.
허다한 낙타가 금과 유황을 실고 오는 것을 보았고 많은 양무리가 모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모습은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실망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이스라엘이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그림으로 비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방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지금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 즉 하나님의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비전, 바다의 부가 이방나라의 부가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낙타 가득히 금은보화를 실고 오는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도 이런 축복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몰려오는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하시는 성도들에게 물질이 몰려오는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직장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에게 기쁨과 놀라움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7절)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6절)
이 나라가 세계 속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미래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현실이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힘들다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다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이런 비전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을 잃고 이곳저곳을 방황하면 절대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이 비전을 가지고 어렵고 힘든 현실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없는 살림 속에서도 공부를 시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잘되는 것을 꿈꾸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참고 인내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있을 때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비전을 보는 자, 비전을 보고 같이 꿈꾸는 자 그래서 오늘의 삶을 열심히 사는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무거운 다리를 주저앉히는 현재의 삶의 무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사람들을 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륙을 해야 합니다.
이륙을 하지 않으면 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일어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변하면 다른 사람이 변할 수 있고요 내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빛을 발하면 다른 사람도 빛으로 오게 됩니다.
내가 변하면 우리 가정이 변할 수 있고요 우리 교회가 변할 수 있고 이 사회와 민족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을 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사랑의 빛, 소망의 빛, 믿음의 빛, 사명의 빛 축복의 빛을 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대들 하나의 촛불일진대/ 이 세상 어두운 구석 찾아가서/ 조용히 비추는 빛이 되라
그대들 한 떨기 꽃일진대/ 메마르고 쓸쓸한 곳 찾아가서/ 곱게 피어나라
그대들 한 알의 밀알일진대/ 떨어진 그곳에서 말없이 썩어/ 새 생명 위한 거름이 되라
그대들 한 송이 백합일진대/ 더럽고 냄새나는 곳 찾아가서/ 진한 향기 날리라
그대들 한 움큼의 소금일진대/ 상하고 병든 곳 찾아가서/ 말없이 녹아 없어지라
그것이 곧 영생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