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사무라이 모델
문화 가치의 측량 Ⅱ.
맹약도<盟約刀> 보전 논제<保傳 論提>후술 Ⅱ.
Ⅰ. 사무라이 문화
도입
일본의 문화, 사상, 군사, 역사의 상징인 사무라이, 그들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중심적인 존재였다. 서구의 기사 문화의 발전사처럼, 최초의 사무라이들은 싸움을 잘하는 무사들을 모아 귀족들을 경호하는 수준에 그치는 단순한 무사 집단 정도였었다.
일본의 센고쿠 전국시대에서는 다이묘 정권이 들어서서 400여 년 넘게 서양의 기사와 가까운 계급으로 부상해 그 격과 수준도 높아졌었으니 오랜 기간 동안 이끌어온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 이었다
소위 무사도가 생겨났으며, 사무라이들 역시 단순한 무사에서 영지를 받고 싸우는 준 귀족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더욱 발전 하였다.
기원
사무라이란 말의 시작은 헤이안 시대에서 출발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을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천황의 황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해이해져갔다.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사무라이는 한자로 '모실 시'(侍)를 쓴다.
귀족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부른 것이 시작이다.
구체적으로는 시중들다 의미하는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 당시 표기로는 さぶらふ)였다.
사모라후/사모라우(さもらふ)라고 썼던 것이 말이 변해 사부라우가 되었다
'사부라우'의 명사형(시중드는 사람)이 사부라히(さぶらひ)인바,
다시 변형되어 사무라히(さむらひ)로 되었다가 1946년 정서법 개정에 따라 さむらい라고 썼다.
신분
사무라이라 하여 군대에게 갑주입고 칼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었다. 당초 사무라이는 칼에 특화된 게 아니라 단지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이었다. 신식 군대처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몇 년 사용법 교육받는 평민과는 다르게 10년 이상 사격술을 익혀, 당대 총기사용에 가장 중요한 대열에 뛰어났다. 무기 입수를 방해하지 않는 한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유럽무기를 들여오는 일도 많았다. 단지 구체제인 막부체제와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외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센고쿠 시대의 서열은 다이묘 > 고케닌 > 하타모토 였는데, 에도 시대로 오며 역전되어 고쿠다카 200석 미만으로 쇼군을 알현할 수 없게 바뀌었다. 도보로 다니는 무사들로 칼을 쓰기도 하고, 총을 쓰기도 하는 등 경력 있는 말단 보병 역할이었다.
아시가루처럼 도보로 다니기는 하지만 무장도 있어 보이고, 삿갓 대신 투구다운 것을 쓰고 있으면 카치 사무라이, 말 타고 있으면 기마무사가 되었다.
고케닌(御家人:도보 사무라이(카치: 하급무사)의 수는 제일 많으나 인지도가 없는 무사로서, 도보는 일본말로 카치로 '카치 사무라이'라고도 한다.
기마 사무라이(키바)들은 수명 내지 몇 십 명 씩 거느렸으나, 사무라이의 일종이라 고쿠다카를 받는데 겨우 10석이었다.
쇼군의 직속 고케닌이 약 1만 7천명에 달했으며, 다이묘나 하타모토의 부하들은 카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전국시대까지는 이러한 도보 사무라이도 1명씩 종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는데 에도 시대에는 기마 사무라이 자체가 도저히 군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짐과 마찬가지로 도보 사무라이(카치) 역시 종자를 거느리는 경우가 없어졌다.
뇌인牢人과 낭인浪人 : 뇌인은 섬기는 주인 집안을 스스로 떠나거나 혹은 잃어 봉록을 못 받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로 무로마치 시대에서 에도 시대 초까지 주종 관계를 맺은 무사와 사무라이들에게만 쓰이는 말이다.
에도 시대에, 부랑자(浮浪者) 이미지가 아니라, 주종 관계가 끊어져서 실직한 무사 계급으로 나름 품위를 유지했다.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오랜 가신들은 원로 대접을 받으며 후다이라고 불렸고 중용되었다.
무기
1. 일본도 (日本刀): 우치가타나(打刀.약칭으로 카타나 라고 부른다) 2. 야리(창), 3. 나기나타(치도薙刀), 4. 유미(활), 5. 뎃포(조총), 6. 타치(태도太刀. 장검이자 큰 칼), 7. 금쇄봉(金砕棒 철퇴형태) 등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사상자 비율은, 화살 87%, 칼과 나기나타 8%, 투석 3%, 창 1%로 나타났고, 또 화살 61%, 칼 35%, 창 3%이며, 사람은 화살 73%, 칼 25%, 창 2%라는 연구결과도 있으며, 백병전에서 칼에 의한 부상 비율은 92%라 하였다.
무기에 따라 카타나 사무라이, 야리 사무라이, 나기나타 사무라이, 뎃포 사무라이, 유미 사무라이, 다치 사무라이 등으로 나뉘어졌다. 보조무기로 카타나 보다 짧은 검(길이 50cm 정도인 와키자시가 있다)은 적군과 싸울 때는 물론 할복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카타나(일본도)와 함께 허리띠에 찼다.
사무라이 이미지는 전신에 갑옷을 입고 말 타고 칼로 싸우는 모습이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부터는 일본 내에서 말 수급도 어렵고 양성기간도 긴 기병들은 쇠퇴하고 대신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보병들로 주력 병종이 대체되었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무라이들도 보병화 되었으며 이들은 칼과 활, 쇠뇌를 주력으로 가지고 다녔다.
등급
제 무사의 정점 = 최대 다이묘 =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장군 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의 준말) : 최대의 다이묘로 '무사'이긴 하나 사무라이는 아니다.
쇼군은 높으신 분 그 자체이며 사무라이는 아닌 뜻이다. 쇼군을 무가의 동량 이라고 했다.
에도 시대 기준으로 쇼군 아래로 270명 내외의 다이묘가 있고 다시 쇼군 직속으로 8만여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사무라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전쟁에 나갈 때 말 타고 나갈 자격이 있는 중급 기마(騎馬, 키바) 무사이고 그 밑에 하급 도보(徒, 카치)무사가 있었다.
사무라이의 다음 계급은 '아시가루'라 이며, 최하급 사무라이로 번역하기도 하고, 농민과는 엄연히 신분이 다른 무사의 일종인바, 경보병 이다. 임진왜란 때 삿갓을 쓴 경보병인 이들이 바로 아시가루 였다. 센고쿠 시대의 무사들은 현대의 인상과 달리 엄밀히 말해 철따라 조건 따라 직장을 옮기는 봉급자에 가깝기 까지 하였다.
다이묘(大名) 관계
다이묘(大名.지방 영주) : 전국시대에는 고쿠다카가 1만석 이상은 다이묘, 그 이하는 쇼묘(小名)라고도 했었다. 전국시대에는 영지가 큰 다이묘의 경우 휘하에 다이묘를 여럿 거느리기도 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속번'이라는 형태로 다이묘 휘하에 다이묘가 존재하였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대충 1만석 당 병력 250명씩을 동원해야 했는데, 임진왜란의 경우 장거리 원정의 한계상 보급부담, 농사 일손 부족 등의 문제로 그 1/2이나 1/3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도 시대의 1만석 다이묘는 235명(기마사무라이 14기, 보병 90명, 나머지는 짐꾼 등 잡졸)의 병력을 동원 했다. 당시에는 270여명의 다이묘가 총 1,600만석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50만석 이상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10만석 이하였다.
하타모토(旗本)는 다이묘와 대등한 독립영주
키바, 카치, 아시가루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것이 상급 무사라고 할 수 있는 하타모토이다.
고쿠다카가 200석인 하타모토에서 9000석인 하타모토까지 다양했다.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라고 칭했다.
일렬 순서화 해 보변 : 아시가루 < 카치 < 키바 < 하타모토 < 다이묘 순이 된다.
가문의 격 자체는 다이묘들보다 오하려 높은 하타모토 들도 있었다.
다이묘들과는 원칙적으로 서로 도노(殿) 혹은 도노사마 라고 존칭하는 관계였고 막부의 실질적 재상 직, 노중(老中)을 맡는다거나, 축성이라든지 교토조정 칙사의 대접이라든지 조선통신사의 대접 등과 같은 막부의 일을 맡길 때 다이묘가 하타모토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타모토의 경우 전국시대에는 주군의 군기를 지키는 무사단으로 시작해 일종의 근위부대였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며 쇼준 직속의 석고 1만석 미만의 무사를 뜻하게 되었다. 약 1,700명이 있었고, 각자 부하들을 거느려 총 5만여 명이었다.
가끔씩 개별 다이묘의 가신들 중에서도 석고가 1만석이 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무리 일개 번의 번사가 영지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하타모토 보다는 낮은 신분이었다.
하타모토는 아무리 석고가 적다고 하더라도 다이묘와 동등한 도노사마 라는 극존칭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는 존재였다. 영지는 쇼군의 700만석 중 400만석을 고쿠다카에 맞춰 나누어 받았다. 기마 사무라이(키바)는 다이묘들의 하타모토 격으로 각자 고쿠다카를 받았으며 군역이 부과되었다.
고쿠다카가 5,000석만 되어도 동원 병력 125명(기마 무사 7기, 보병 40명, 기타 잡병)을 거느리는 작은 다이묘였다. 큰 규모의 하타모토는 적었고, 대부분이 500석(보병 4명)이나 1,000석(기마 사무라이 1기, 보병 8명, 기타 잡병)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하타모토의 하한선인 200석의 경우 부하로 달랑 도보 사무라이(카치) 1명, 아시가루 1명, 짐꾼 3명 뿐 이었다. 에도시대 평화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군역은 명목만 남아서 막부 말기에서는 사츠마. 조슈 번의 반란에 몇 만석의 다이묘들이 각자 몇 백 명씩 동원하는 게 전부였다.
다이묘 아래 있는 기마사무라이의 경우 200석 이하도 있어, 고쿠다카가 달랑 120석이었다. 그러나 어딜 가나 벼슬아치라고 대접 받긴 하는데 말단 관료 생활만 할 수 있고 태생적으로 중신까지는 오를 수 없었다.
각 무사들은 고쿠다카(石高, こくだか)라고 하여 영지를 지급받는다. 1석이 1,000홉이고, 인간이 1년 365일 동안 1홉씩 3끼를 먹으니 대략 고쿠타카 1석당 1명은 인간을 부양할 수 있다고 본다. 고쿠다카가 1만석짜리 땅이면 1만 명의 영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고쿠다카 생산량 중 70%를 다이묘의 몫이었다.
고쿠다카를 바탕으로 각자 군역(軍役)이 정해져 있어 전시에 정해져 있는 병사를 데리고 집합하여야 한다. 대충 200석은 5명, 1,000석은 25명, 1만석은 250명씩이다. 고쿠다카 200석 사무라이라고 해서 각자 병사 5명이나 짐꾼 5명씩 데려오면 되는 것은 아니고, 고쿠다카에 따라 병종 비율이 정해져 있어 각자가 소규모 부대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관습, 지역에 따라 각각이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야 통일성을 갖춘 동원기준이 마련되었다.
경외 스러운 냉혹과 잔인 문화
사무라이에 허용되었던 특권의 하나인 부레이우치(無礼討ち)가 있다.
딴 말로는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 베어도 면죄)이라고 하였다.
대표적 예로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날붙이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물체(사람, 동물)를 베어보는 행위인 타메시기리(시험 삼아 베어보기)가 있다.
츠지기리(쓰지기리-辻斬り-つじぎり)라 함은 예전의 일본에서 칼이 완성되면, 그 품질을 가늠하기 위해 밤중에 지나가는 행인을 베던 일을 말한다. 베어버리고 지나간다는 의미에서 토오리마(通り魔)라고도 하였다.
여성에 야만적 충격 당혹 문화
1. 사무라이는 여자를 강간할 권리를 갖는다.
2. 여자는 사무라이에게 반항할 권리가 없다.
3. 강간이 되어도 여성은 좋은 신음을 내야한다.
4. 아내가 강간되어도 남편은 사무라이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5. 남편이 반항할시 사무라이는 남편을 죽일 권리를 갖는다
6.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강간되어도 사무라이에게 고개를 숙인다
7. 사무라이에게 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
의리, 충성의 결정체
사무라이 문화 정신은 의리와 충성심의 결정체다.
한자로는 '모실 시'(侍), 한 번 충성에 배신치 않는다
동료와 팀웍 속에서 의리는 배반할 수 없다
신의와 충성을 저버리면 스스로 베어 자결 한다
조직에 흠결을 초래했거나 다이묘가 패배하면 자결 한다
민간 속담에 ‘신데모 오도꼬 쿠사테 모다이( シンデモオドコクサテモダイ)는 ’썩어도 준치 죽어도 남자!‘다
한 번 맺은 결의는 결코 배신할 수 없다
사무라이
쇠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의 농업 종사를 금지시킨 이후 주군 가문의 가이에키 등으로 봉토가 없는 사무라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죠닌들의 밑에서 막노동을 한다든지 상인들을 호위하는 일을 하기도 했으며, 대만, 마카오, 필리핀 루손, 동남아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태국에서 전쟁에 참전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치뤘고, 100년 간 진행되었던 전국시대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잠깐 평화가 올 것 같았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과 싸움에 기질이 있는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 시기에 들어서도 사무라이들은 일본의 지배계급으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일본의 상징인 사무라이도 시간과 세월, 시대가 바뀌고 흐르면서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사무라이들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종결되다시피 해 왔다. 사무라이들의 계급을 유지시켜주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웠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토지 개혁 정책에 따라 사무라이들에게 지급되던 영지가 사라지자 큰 반발이 일었다. 또한 메이지 유신 당시 군인과 경찰이 아닌 사무라이, 민간인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법인 폐도령과 단발령이 실시되자 불만이 더욱 쌓여갔다.
사무라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센고쿠 시대의 지방 분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무라이들의 문화도 중앙 집권 체제에 맞도록 변질되어 갔다. 일본 내에서 전쟁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민 계층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 그 위세가 크게 줄었다.
사무라이나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을 거치며 결국 신식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세이난 전쟁을 마지막으로 1870년대에 들어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는 거의 소멸했고 현재는 과거의 명문가 정도로 남아 있다.
전국시대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여름의 진과 겨울의 진이 지나 사무라이가 관료화 되는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전투가 필요 없어지자 칼 자체를 정장의 소품화 되기도 하고 칼을 두 개 차고 다니는 사무라이 행색 표현 장르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의리, 충성의 모델 전이
의리와 충성의 결정체로서 후대에 대내외로 이전되어 가고 있다
남성 정신세계의 팀웍 내에서 배반할 수 없는 정신세계로 전이되다
신의와 충성을 지켜 자책치 않는 정신으로 발전,
조직이 패배하면 은거 한다로 전이되다 등
맺은 결의는 결코 배신할 수 없다는 정신 확산 경향
시
사무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