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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필요한 것 한 가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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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필요한 것 한 가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이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살다 보면 필요한 것이 많지요.
가난을 살 때 많이 부닥치는 문제가 필요의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회칙에서 가난을 살라고 일껏 얘기하고는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에” 필요한 것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시비할 것이 못 되는데
문제는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어떤 사람은 최소한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필요로 하는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가난이 갈리는데,
가난을 잘 사는 사람일수록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고
가난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이 행복하고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한 사람은 더 필요한 것이 없는 반면
이것으로 충분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하기에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돈이 아닐 것입니다.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명예도 아닐 것입니다.
염려도 아닐 것입니다.
걱정도 아닐 것입니다.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사랑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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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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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활동에 앞서 기도를!
구역 반모임을 위해 가정 방문을 하면 먼저 기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기도를 드리고 말씀 나누기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손님 대접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대접에 소홀함이 없이 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나머지는 다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적인 정이 우선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마르타의 집에 예수님을 모셨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 갖가지 시중을 드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시중드는 일을 거들어 주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몫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그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두 역할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훌륭한 분에게는 어떻게 하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받기보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보고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실 주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 했으면 마리아가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기쁘게 했어야 옳습니다. 자기가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주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좋은 일을 열심히 해 놓고 마음 안에 화를 쌓아놓는다면 그만큼 보람도 없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6장 1절 이하를 보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일을 그만하고 그 일을 부제들에게 맡겼습니다. 말씀의 선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모든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중을 드는 일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면 마음 안에 화를 담을 수밖에 없고 바른 활동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고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활동하셨지만,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활동할 힘을 기도에서 얻었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활동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활동,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이루되 먼저 기도하시길 희망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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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바시’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줄임말입니다. 산보 중에 가수 ‘김수철’ 씨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입니다. “못다핀 꽃 한 송이, 일곱 색깔 무지개, 정신 차려,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와 같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우리의 국악을 공부하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국악을 40년 넘게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우리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주었던 영화 ‘서편제’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는 들었지만, 그가 ‘국악’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대중음악을 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늘 허전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악을 공부하고, 작곡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늘 기쁨이 컸다고 합니다. 김수철 씨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꾸준히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론’이었습니다. 사제에게 강론은 교우들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신자들에게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좋은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 주일을 지낼 수 있는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지루한 강론은 교우들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주님을 모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강론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게 되니 학사논문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를 썼습니다. 석사논문은 ‘설교와 선교’를 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강론에 필요한 4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 모든 강론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시작됩니다. 좋은 강론을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좋은 강론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현대인의들 슬픔과 기쁨, 희망과 고통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좋은 강론은 ‘실천’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없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김수철 씨는 50년 넘게 자기가 좋아하는 ‘국악’을 한다고 합니다. 저도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몫을 택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나의 말을 들었던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의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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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마르타는 거침이 없습니다. 오늘도 손님이신 주님께 다가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이러한 마르타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청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말하고 그것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빨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도록 마르타처럼 우리도 힘주어 기도합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마르타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는 매우 다릅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더 잘 시중들기 위해 기도합니다. 즉 기도의 중심이 주님입니다. 마르타 개인이 바라는 소원이 아니라 주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한 청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는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분명 마르타는 주님 섬김에 대한 청원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또한 불필요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어떻게 모실까보다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까가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청원은 무의미하며 그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하는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번 들어 보세요.
말은 적게 하며 마음을 집중해서 들어 보세요.
주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래에 적금 넣느라
지금을 탕진하지 마라.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우리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안타까운 모습도 만납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망치거나 소홀히 하는 모습들 말입니다.
미래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넣어버리면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기쁨을 누릴까요.
미래에 지금이라는 소중함까지 넣지 마세요.
지금은 미래를 위한 투자자산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야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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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평소에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반짝이는 생각들이 묵상 글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강의할 때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홀로 여행 중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라도 녹이려는 마음과 더불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근처의 카페 들어갔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나면서 이를 글로 남겨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평소에 항상 들고 다니던 메모지와 펜이 가방에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카페 직원에게 펜을 빌렸고, 테이블에 놓은 냅킨에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냅킨 두 장에 빼곡하게 글을 적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고, 이 내용을 다음 피정 강의 때 꼭 사용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쓴 글은 그 어디에서도 쓰지 못했습니다. 글쎄 카페에 나올 때, 글을 적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녁에 도착한 숙소에 가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지만 지나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이렇게 후회할 일은 삶 안에서 계속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후회를 줄여야 행복의 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죄에 매여서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향하면서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마르타가 약간 화가 났나 봅니다. 자기만 일하고 동생 마리아는 편하게 말씀만 듣고 있으니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몫과 마리아의 몫에 차이가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마르타가 시중드는 것도 중요하고,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단지 이 안에서 어떤 판단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분주하게만 지낸다면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주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했다면, 시중을 들면서도 크게 기쁠 수 있고 또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금에 충실할까요? 혹시 어떤 판단으로 인해서 마르타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후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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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신랑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습니까? 그것은 당신께 말씀을 건네시는 그분을 경청하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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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
-회개, 경청, 환대-
오늘 강론 제목은 “환대의 영성-회개, 경청, 환대-”입니다. 정주서원을 하고 수도가정을 이뤄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환대영성은 핵심적 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치유, 환대의 평화,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으며 환대는 영성의 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 사랑을 닮은 환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세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정주 요셉 수도원의 환대의 영성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환대의 집으로,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좌우명 기도 한연도 환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래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는 환대를 통한 선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환대는 베네딕도 규칙 53장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환대 영성의 놀라운 점은 손님들의 환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맞아들이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의 반대는 냉대나 박대입니다. 환대의 치유와 반대로 냉대의 상처와 아픔은 참으로 오래 갈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수도원도 섬김의 직무로서 학교나 병원, 음식점처럼 서비스업에 속한다 봅니다. 정말 서비스업에 속하는 분들이라면 친절하고 따뜻한 환대는 기본이어야 할 것입니다. 불친절하고 냉대하는 차거운 분위기의 서비스기관이라면 손님은 절대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환대하면 오래전 그러니까 23년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정말 신기한 얼굴입니다. 활짝 웃는 환대의 얼굴이 꽃같은 사람 얼굴이라면 화로 이그러진 얼굴은 때로 괴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의식적 의도적 미소나 웃음의 훈련과 습관도 필요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가 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 참 편안하게 수시로 찾았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같습니다.
여러분도 피곤하고 지쳤을 때 언제든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그리운 환대의 집이나 환대의 사람이 있으신지요? 저에겐 언제나 여기 환대의 집인 성전과 환대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두 자매는 모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는데 환대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오늘 복음의 해석은 관상의 마리아와 활동의 마르타로 분류했는데 틀린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관점은 관상과 활동이 아닌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환대의 방식에서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르타처럼 제 좋을 대로의 음식준비의 환대가 아니라 손님인 예수님의 의중에 따른 환대를 한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분주하게 음식준비하다 화가난, 좀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두분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마르타의 내면이 참으로 시끄럽고 산만했음을 봅니다. 화와 짜증이 가득하고 내적평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내적회개와 내적평화의 회복이 화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요나의 회개선포에 니느베 사람들의 거족적, 전격적, 전폭적 회개가 이뤄지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제 기후재앙과 온갖 전쟁을 야기한 전세계인들이 영적혁명과 같은 더불어의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절체절명의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도 병도 많은 각자도생의 세상이요 흡사 공동의 집인 지구가 불타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니느베 백성들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틱한 회개만 있는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회개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이며 바로 활동에 치우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관상기도와 회개였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정확하며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부드럽고 따뜻한 호칭에 주님의 애정이 가득담겨 있습니다. 우선적인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마르타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말 잘 경청해야 맹목적인 활동으로 일에 중독되지 않고 깨어 올바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의 방향을, 일의 완급을, 일의 우선순위를 분별하고 절제할 수 있는 힘은 관상과 경청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환대영성의 원리가 자명히 드러나니, 회개-경청-환대의 구조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가 이런 구조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미사시 참회 고백기도 자비송으로 시작하여 말씀전례에서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이어 성찬전례에서 성체의 주님을 모시는 환대로 참된 환대 영성의 실현입니다. 회개와 경청, 환대의 정신으로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은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수행하는 공동전례기도는 주님을 환대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영적훈련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공동전례를 통한 주님의 환대는 일상에서의 형제들 환대에로 그대로 전환되어 주님을 환대하듯 형제를 환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우리는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참된 치유와 구원의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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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사랑>
내가 사랑하는
님 곁에
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 있어도
내 마음 오롯이
그 아닌 님에게
그와 나 함께
님께 사랑을
나를 사랑하시는
님 곁에
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이 있어도
내 마음 오롯이
그 아닌 님에게
그와 나 함께
님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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