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영도 다리를 아십니까?
내가 태어난 곳.
도시와 섬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일제시대 때 지은 것으로 부산의 명물이기도 하다.
또한 본인도 어릴 때 여동생이 말 안들어면 "너 영도다리에서 줏어왔어"라고 놀리기도 한 곳이다.
오늘은 이곳 부산의 영도다리에 대한 전설따라 삼천리를 소개할까 합니다.
"영도 다리 아래 빠져 죽는다"는 말은 부산에서는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쓰인다.
그만큼 영도 다리는 시민들의 만만한 무의식적인 "한풀이"대상이다.
서민 삶의 애환에 관한 한 이 다리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1931년 착공 때부터 많은 노무자들이 매립공사로 인해
죽어 밤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까지 나돈 것부터 벌써 범상찮은 이 다리의 운명을 예고했다.
1934년 완공시에는 다리가 들어올려진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의 다리"로 알려져
당시 부산인구가 16만명이었는데 6만명이 몰려 일대 소동이 빚어졌다.
이후 놀랍게도 일제 수탈에 시달리거나 망국의 한을 품은 자들이 투신자살하는 단골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 다리가 국민적 다리로 승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6,25 전쟁 때문이다.피난살이 고달픔의 상징이 돼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다리 난간 위에 달을 보며 망향의 한과 처량한 신세를 읊는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까지 나왔겠는가.
전쟁의 사회 혼란상으로 인해 희한하게 자살의 명소로 더욱 굳건히 자리잡은 것은 몰론이다.
따라서 생활고에 지친 피란민이나 실연당한 연인들이 초개같이 몸을 던졌다.
그래서 한 때 "잠깐만"이란 자살방지용 팻말이 곳곳에 붙기도 했고 경찰관까지 감시에 나섰다.
이 다리의 전성시절은 불과 약 32년.
1966년 폭주하는 교통량 때문에 당시 하루 두번 들어 올리지던 기능마저 중단됐다.
살아 숨쉬던 영도다리의 맥박이 끊긴 것이다.
평범한 여느 다리와 같은 신세로 전락돼 버려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흔적조차 없어질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다행히 영도다리는 죽지 않을 것 같다.
부산시가 존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영도다리의 보존 쪽으로 방향의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영도 다리는 그 가치를 값으로 따질 수 없다.그 구구절절한 사연과 역사는 일부러 만들려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영도다리의 "한"을 국민들은 같이 인정하고 공유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아무리 경제적 효율성을 앞세우는 세상이라 해도 영도다리는 이제 지워질 수 없는 우리의 한 부분이 돼 버린 것이다.
<글 펌>
첫댓글 영도다리 건너 태종대 참 좋지요 건너기전 광복동, 창선동, 자갈치시장 일본인도 많이 찾던곳이고 서울에서 가장 빨리 일본문화가 전수되는 동네같더만요 이젠 롯데 초대형 건물이 들어서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네요
다리는 넓게 새로건설[롯데에서]하고 껄떡이던 다리토막[철재다리]은 어덴가[시민공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에다 보관한닥합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 수많은시민들이 구경나왓었고요,
저다리 마지막들던날 나도 구경갓었죠[1966 년 6 월 10 일 오전 10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