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사순 판공 성사는 보셨나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적어도 두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강력히 초대하는 판공성사 문화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만이 지닌 특별한 전통입니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사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지내던 교우들을 연 1~2회 정도 방문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런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는 각 교우 앞으로 판공성사표가 배부되는데, 이는 교우들의 성사 생활 실태를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성사를 강요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모든 교우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게 되게 되어있는데, 따라서 판공성사만 빼먹지 않아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제나 의무로서의 판공성사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그것이 참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마치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해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고백하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알게 해주는 책, 고해성사에 대한 가치와 지평을 넓혀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비니 플린 저, 전경훈 역, 성바오로)
저자의 고해성사에 대한 은혜롭고 감미로운 체험들과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니, 빨리 고해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햇살을 비추어 빛과 열을 전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빛과 열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과 그분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갈라놓을 때에도 하느님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란 바로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를 동굴 속으로 데려갑니다. 고해성사는 나를 동굴 밖으로 꺼내줍니다.”
“사제는 단지 사죄(赦罪)를 선언하기 위해 고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적 안내자, 스승, 교육자의 역할을 맡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풀려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해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이미 고해성사를 받았음에도 계속 되돌아와 머릿속을 맴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가 정말로 용서받은 것인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예수님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나”(I AM)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의 본성이 되어 죽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왜 죽음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TV레셀’ 유튜브 채널에 이미 전이가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받은 600억 자산가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고 의사는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배를 열어보았는데 암이 온몸에 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냥 닫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상황은 태중에 임신한 딸의 탄생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왜 아픈데 일만 계속하세요?”라는 질문에 “누워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로 대답합니다. 이분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 죽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며 10년을 매일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채널 대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시한부 판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더 기분 좋죠. 아픈 거 뭐 이런 거를 떠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요.”
이 사람은 죽음이란 것이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이 끝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자녀의 탄생 기쁨보다 작습니다.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가리옷 유다와 같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만들지 않고 삶이 끝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죽음의 가치를 아직 삶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작은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이웃을 위해 쓰였다면 그 마지막 죽음의 가치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죽음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두 개의 산』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사는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4년 전에 21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시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내면적인 성찰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했고 또 각성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성장한 것의 정말 많은 부분이 아내의 죽음에 따른 결과였다는 깨달음에 나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파커 파머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장이 활짝 열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활짝 열리는 이미지는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추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의미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삶과 단절되는 절망적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 오신 유의배 신부님의 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8,51-59: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며, 그 빛을 꺼뜨리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는 사람은 결코 어둠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53절)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보다 높다고 하신다고 비난하면서,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53절) 한다. 예수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54절) 하시며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을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55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분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그들이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다. 우리도 그분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57절)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57절)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절). 하느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이 바로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항상 계신 분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시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59절)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셔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다. 볼 수 있는 이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를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도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따르며 그분을 올바로 보고 알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제리 올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강의할 때,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촬영한 사진의 양으로만 성적을 매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100장 낸 학생은 A학점, 90장은 B학점, 80점은 C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촬영한 사진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줄 것이기에,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A 학점을 받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최고의 작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양에 치중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실수를 반복했고 이 실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혀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이 많습니다. 참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생각뿐이지 행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기도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신앙만을, 그리고 완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하고 놀라운 기적 체험을 통해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하느님과의 만남 시간을 늘리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최고의 사랑, 완벽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 갇혀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만의 최고 가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말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대변할 것이다(존 플래쳐).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네.
말씀이라는
보물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대대손손
영원히 지켜나가기로
결심한다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산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말씀이 살아있다면
성전 밖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안이 쓰레기와
온갖 오염으로 썩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몸을 피해 성전 밖으로 나오신 겁니다.
그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 마음에
말씀이 살아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 세속주의>는
성전 안을 썩게 만듭니다.
말씀이 썩는다는 의미는
말씀을 자기식대로 받아들이고 묵상하고
삶의 변화에로 이끌지 못하고 있을 때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조금 알고
지적인 허영심으로 교만을 부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똑같이 지니고 살아갑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는 삶
말씀이 생동감 있게
매일 내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얘기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말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