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평 작은집을 즐기는 법
과연 나도 서울에서 마당 있는 단독 주택에서 살 수 있을까?
집 짓기 열풍이라지만 대출받아 장만한 아파트가 전부인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로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서 아파트 정도의 비용으로 몇 배는 풍요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가족이 있다.
건축 면적 10평의 작은 집이지만 작업 공간과 카페, 다락방, 갤러리까지 마련한 복합 공간
‘디자인 구루루’. 주거 공간과 숍, 취향을 향유할 수 있는 공방까지 갖춰 일하고 보여주고 즐기고
돈까지 버는, 작지만 강한 집이다.
누하동의 복합 문화 공간 ‘디자인 구루루’.
다섯 층 수직 구조의 집이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일반 상업 공간에서는 뭔가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건축주가 지향하는 것들을 한 지붕 아래에서
펼칠 수 있으니 집으로서도, 일터로서도 만족스럽다.
4층 지붕 아래 덤으로 구성한 다락방에서 내려다본 4층 공간.
계단은 한쪽에 두면 경사가 가파르고 자칫 지루할 수 있어 2단 스텝으로 구성했다.
2~3층 미만의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조용한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는 서촌.
20평 남짓한 땅에 길쭉한 건물이 들어서자 동네 사람들이 술렁인다.
누하동 벚꽃 길에 위치한 이 건물은 정재이・박경필 씨 부부가 운영하는 문화 공간이자 미래의 주거 공간
으로, 한 지붕 아래 핸드메이드 숍과 카페, 전시실, 목공실이 사이좋게 둥지를 틀고 있다.
어디든지 마음 가는 대로 굴러간다는 뜻의 ‘구루루’는 부부의 성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름이다.
목공・조각・애니메이션과 사진 찍기를 즐기는 남편 정재이 씨는 하고 싶은 일도, 실제 하는 일도 많아 늘
“대체 뭐하는 분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단다.
텍스타일을 전공한 아내 박경필 씨는 리사이클링 아이디어를 접목한 패브릭 아이템을 선 보이는 핸드
메이드 작가로 작업실과 판매 숍, 전시 공간이 필요했다.
신혼 초부터 10여 년 동안 서촌에서 쭉 살았다는 부부는 이곳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고 가꿔가는
삶의 놀이터라 설명한다.
“이 동네가 이렇게 뜨기 전, 이 자리에 있던 아주 자그마한 한옥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낡은 길, 낡은 집이 품고 있는 고유의 느낌이 좋아 필요한 부분을 조금씩 고쳐가며 살았는데,
한쪽 벽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자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이 불가피했죠.”
정재이 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높은(!) 건물을 짓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한옥을 유지・보수하고 싶은 마음에 구청에 대수선 허가를 요청했더니 대지 경계선과 건폐율 모두 신축할
때의 원칙을 적용하더라는 것.
서촌의 한옥들은 작은 땅에 꽉 채워 지은 집이 대부분인데,
50% 건폐율을 적용하면 33㎡(10평)도 채 안 되는 그야말로 ‘반토막’ 한옥이 되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부부는 오래된 골목길, 낡은 집들이 주는 운치가 좋아 이 동네에 터를 잡았으나,
정작 한옥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민망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이왕지사 짓는 거라면 대충 짓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단위 면적 10평짜리 집이지만 여유가 느껴지고 쓰임새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길 바랐으며,
동네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건축적으로 가치 있는 집을 원했다.
작은 집이 밀집해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집 짓기의 좋은 사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컸다.
1 지난해 10월 준공한 후 5개월간 손수 꾸민 ‘디자인 구루루’의 가족들.
2 디자인 구루루 1층 숍에서는 재활용 원단으로 작업한 다양한 핸드메이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3 2층 카페의 계단 왼쪽 공간에서 계단 오른쪽 공간을 바라본 모습.
4 지붕 아래 남는 공간을 알뜰히 다락방으로 사용한 아이디어.
조밀한 주택가에서 협소 주택을 짓는다는 건
정재이 씨는 2010년부터 1년 넘게 직접 집을 지은 사람들의 블로그도 보고 일본의 협소 주택 사례도 공부
하며 집 짓기를 구상했다.
하지만 작은 집이라도 흔쾌히 맡아줄 건축가를 찾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윤이 남지 않으니 선뜻 하려는 건축가도 드물었고,
또 한다고 해도 일반 빌라나 다가구 주택 스타일을 제안할 뿐이었다.
소형 주택 시공 사례를 찾다 우연히 알게 된 유니트유에이units ua의 이승윤 소장은 무엇보다 부부가 공간
에 담고 싶은 스토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건축주는 기존의 한옥 아틀리에를 수공예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저가 또는 무료로 대여하고 그 작품을
판매하는 숍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젊은 작가를 지원하며 자생적으로 유지하는 게 가능한 작은 공방이라는 점이 매력이었죠.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가되 새로 건물을 짓는 데 비용이 발생하는 만큼 건물 유지비가 나오는 수익
시설(카페)과 주거 공간을 더하는 게 설계의 중요한 포인트였죠.”
작은 건물에 주거 공간, 갤러리, 카페, 작업실 등 다양한 기능을 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하는 건축가
이승윤 씨.
그는 10평 남짓한 협소한 공간의 단조로움을 완화하기 위해 공간을 과감히 반으로 나눠 스킵 플로어를 적용
했다.
몇 단이라도 바닥 높이가 상하로 어긋나면 벽이나 가구로 공간을 구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효율적이다.
시선이 대각선 상하로 확장되기 때문에 좀 더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다.
또 협소 주택은 단위 면적이 작기 때문에 위로 올릴 수밖에 없고,
여러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한다.
이승윤 씨는 이를 보상해주자는 차원에서 계단마다 작은 창을 내어 재미를 더했다.
건축주 정재이 씨는 집이 한 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어디에 앉아서 어디를 바라볼지 하나하나 계산하면서
창문 위치를 조정했단다.
2층과 3층 약간 앞으로 돌출된 공간은 건물이 조금 틀어져 있는데,
이 역시 내부에서 바라보이는 전망을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다.
5 1층에 있는 카페 주방은 정재이 씨가 건축 후 남은 자투리 나무와 그간 모은 재활용 재료로 뚝완성한
공간이다.
6 그간 모은 나뭇조각들을 보기 좋게 정리한 정재이 씨의 목작업 공간.
7 지하 목작업 공간 맞은편은 갤러리로 활용한다.
현재 디자인 구루루의 설계를 맡은 건축 사무소 유니트유에이의 작은 집 관련 드로잉과 건축 모형을 전시
중이다.
8 3층 작업실은 창을 작게 시공해 아늑함을 더했다. 길쭉한 창을 통해 채광을 충분히 확보했다.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남편 정재이 씨의 작업실, 오른쪽은 아내 박경필 씨의 작업실이다.
벽면, 계단 프레임 등은 화이트 도장으로 통일하고 낮은 가구를 배치해 작지만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방과 벽이 없는 집
건물은 한번 지으면 최소 30년은 유지한다고 생각하면 공간 구조와 기본 창호, 단열, 설비 등 나중에 바꾸기
힘든 부분에 예산을 많이 배분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이때 마음에 맞는 건축가를 만나 제한된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집 짓기의 기본중
기본. 디자인 구루루는 이 원칙을 200% 실현한 공간이다.
내부 마감까지만 시공한 뒤 인테리어는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정재이 씨는 준공 후 5개월간
1층 카페 주방, 목공실과 숍의 수납 시스템을 비롯한 카페 인테리어까지 한 땀 한 땀 셀프로 완성해나갔다.
“생활을 하면서 군데군데 매만지거나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부족한 걸 채워나가는 재미가 쏠쏠해요.
하얀 마감이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데,
재활용 나무로 만든 주방 가구와 창가 선반 등이 이를 중화해주지요.”
이 집에 없는 것은 두 가지, 바로 방과 벽이다.
방을 벽으로 나눠 닫힌 공간을 만들기보다 중앙 계단과 단 차이를 두어 구획을 나누는 식으로 계획한 것.
이렇게 공간을 나누니 언제든지 용도를 바꿀 수 있어 유용하단다.
현재 지하는 갤러리&목공실로,
1층은 핸드메이드 숍&카페 주방으로,
2층은 카페로 사용. 3~4층은 개인 공간으로 작업실과 가족실로 사용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온전한 주거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대학 시절부터 일터와 카페, 공방과 집이 함께하는 공간을 막연히 꿈꿔왔어요.
저 역시 젊은 시절에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개인 작업을 할 때 작업실이 없어 전전긍긍했죠.
지하 목작업 공간은 전시할 형편이 안 되는 젊은 작가를 위해 내줄 계획입니다.
카페 역시 멀리는 인왕산까지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우리 가족만 즐기는 게 미안한 마음에 출발한 거고요.
전 여행 가기 전에 짐 싸는 걸 더 즐기는 사람이에요.
이 집을 짓기까지 끊임없이 계획하고 구상하는 과정을 즐긴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결혼 후 아이 키우고 생활하면서 무뎌질 수 있는 꿈을 위해 25년간 허리띠를 졸라매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순도 100% 공간을 완성한 정재이・박경필 씨 부부.
‘디자인 구루루’는 정성과 취향이 있으면 기성품 같지 않은 나만의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집이다.
작은 공간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개조 팁
1 최대한 담백하고 미니멀한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독립 조명등 대신 천장 매입형 조명등을 선택했다.
날개벽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와 천장이 높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
2 창문도 가구가 될 수 있다!
문을 짜고 남은 조각 합판을 창틀에 선반처럼 설치해 테이블로 활용한다.
3 계단에서도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창.
하루에도 몇 번씩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에 대한 작은 보상이다.
4 몇 단이라도 바닥 높이가 상하로 어긋나면 벽이나 가구로 공간을 구분하지 않아도 되니 공간 활용에
효율적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에폭시로 마감해 관리의 편의성을 높였고,
3층과 4층은 바닥 난방을 하는 층이라 단풍나무 재질의 온돌 마루를 선택했다.
5 협소 주택이라면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높이 제한에 여유가 있다면 다락방 구성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