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
요즘은 지구로 언제 귀환할지 정해진 일정도 없이 혼자 보내야 하는 우주인으로 살고 있다. 다행히 내가 ‘우주선’이라고 이름을 붙인 공간은 꽤 넓은 편이지만 거의 모든 통신선이 끊어졌다. 하지만 외계에서도 생명유지시스템이 작동하는 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분간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최소한도의 연락만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오늘을 주심에 감사하며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제는 엄청나게 큰, 검은 파도가 밀려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피아노를 두드린다. 그리고 지난 삶이 문학으로 승화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쓴다.
우주선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실제 얼굴보다 좀 큰 석고상인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텅 빈 마음 한쪽을 채워 준다. 잊고 살다가 조용히 나를 생각하며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작은 서랍장 위에 두툼한 잡지책을 받침으로 삼아 올려놓았는데 수십년 전 한순간의 표정이 하얀 흙으로 굳어졌다.
주로 면도할 때 거울로만 보던 내 얼굴을 돌아가며 전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큰 얼굴에 작은 귀와 두툼한 입술을 가졌는데 큰 입이 코 아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옆에서 보면 더 확실한데 코는 작고 납작한 편이고 눈도 큰 편이 아니고 이마는 좁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다. 데생하기에도 개성이 없는 얼굴이 조소 작품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드문일일 것이다. 앞으로 내 얼굴을 어떻게 빚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저 흉상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교사로 재직할 때 조소과 지망생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조각 레슨 과정의 하나로 나를 모델로 제작한 흉상인데 학생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염지’, 이름이 특이해서 잊지 않고 있다. 염지가 속한 예체능반은 다른 반에 비해 분위기가 밝았다. 장난끼 심한 한 학생이 주도하여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염지 학생도 밝은 성격에 적극적이었는데 나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제의했을 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사양했지만 간곡한 부탁에 허락했다.
첫 과정은 직접 모델로 앉아 있는 대신 조각 강사가 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정면, 측면 등 조소에 필요한 여러 방향으로 찍은 사진을 보고 염지 학생이 실기 시험을 위한 마지막 조소를 했던 것이다. 어머님도 내 얼굴을 그렇게 세밀하게 관찰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흙 반죽을 떼어 붙여 내 모습을 그대로 빚어낸 후 석고상으로 부어 만든 과정을 생각하면 고된 작업이었으리라.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흙으로 다시 태어난 또 다른 나와 함께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염지가 고맙다.
40여 년 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막내 동생이 서울대 조소과 실기 시험 준비 과정으로 어머님 모습을 조소한 것이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전시회에 출품 자격을 얻었지만 동생은 막상 서울대 입시에는 실패했다. 재수 끝에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로 전공을 바꿔 조각과는 멀어졌고 '뚜라미' 회원으로 활동을 하며 노래했지만 작사와 작곡도 많이 했다. 나중에 신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가서 목회자로 살고 있는데 미국 가기 전에 어머니 석고상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알지도 못한다. 아들인 나도 어머님의 석고상을 중히 여기지 않았는데 내 것을 누가 거두어 주길 바라겠는가.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영구 전시할 작품으로 선정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요즘 뒤늦게 노후의 내 얼굴을 빚는다는 마음으로 읽을 만한 소설을 써서 개성이 강한 인물을 그리겠다는 꿈은 가지고 있지만 진척은 더디다. 뭐든지 어린 나이에 시작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부정하며 주어진 시간 앞에서는 노소가 없다는 시간 평등주의를 주창하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워낙 늦은 출발이라 결과를 확신할 수도 없다. 집사람의 명언대로 '노력하면 되는 게 없다'라는 말-우리 집에서만 통용됨-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동력으로써 여생을 조금은 풍요롭게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제 몇 해 더 기다리다가 내 석고상을 지구의 한 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고이 묻으려고 한다.
첫댓글 구러네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우주선이고 우주인이겠지요. 음악에 미술의 분야까지 두루 갖추어져 소설을 서나가는 재료들이 되어 감을 느낍니다. 노익장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나도 이곳 엘살바도르 출신 미녀 세시아가 그려준 내 초상화를
우리 이명구 집사님이 액자에 담아줘 벽에 걸었습니다
어쩌면 사진과 똑 같이 그렸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첩경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