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itimes.co.kr%2Fnews%2Fphoto%2F201401%2F510399_67267_1744.jpg) | | ▲ 박문협회 활동사실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
1890년대 말부터 개항장 인천에서는 근대 교육과 계몽자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1896년 7월 설립된 독립협회(獨立協會) 영향 아래 인천에서도 활발한 신교육열과 계몽운동이 확산된 것이다.
1898년 6월에 설립된 인천박문협회(仁川博文協會)가 바로 그러한 운동의 중심을 형성했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博學於文 約之以禮'이란 구절에서 차용한 '博文'이란 이름으로 결성된 인천박문협회는 고조기에 들어선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이자 지방지회 역할을 맡아 한말 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던 단체였다.
독립협회는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참여해 광범위한 개혁운동을 벌였다.
자강(自强)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교육을 제1차적 사업으로 추진하는 게 맞다는 취지였다.
'협성회회보' 보도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 운동 영향 아래 1898년 6월9일에 설립됐다.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신문, 그리고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구해놓고, 날마다 모여 강론하고 연설·토론하면서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고자 설립됐다고 한다.(이희환, '백문학교 100년사', 인천박문초등학교, 1990 미출간원고 참조)
협성회회보 1898년 7월2일자 잡보란에는 박문협회 회원 구성과 그 조직 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30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박문협회는 매주 일요일 통상회를 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연설회장 앞뒤에 각각 쌍으로 배치하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행한 후에 거행된 박문협회의 통상회(通常會) 풍경은 구한말 계몽운동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임시회장이었던 인천해관 방판 강준(姜準)은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거니와, 추후 회장으로 임명된 이학인(李學仁)과 부회장 나동한, 그리고 회원 유한식, 김기범(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목사) 등은 당시 인천의 대표적 계몽지식인들이었다.
이러한 조직과 활동으로 볼 때 개항장 인천에 설립된 박문협회는 문명개화와 동시에 외세로부터 자강을 표방한 단체임을 알 수 있는데, 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으로 이어졌다.
"인천 박문회에서 공의하고 본 회관에다 사립영어학교를 설립하기로 작정됐는데, 학교장은 본 회장이 겸하고 학도는 본 회원으로 해서 월연금을 이전보다 배로 내 등유비를 보용케 하고 다른 학비는 없으며 교사도 월급이 없고 명예로 하는데, 회원 중에 영어를 하는 해관 방판 이학인 강준 양씨가 교사를 해 이달 25일부터 매일 오후 7시에 영어를 가르친다더라."('학교 설립', 독립신문, 1898. 7. 25)
박문협회는 설립 직후부터 매주 통상회를 여는 한편 주요 사업으로 학교 개설을 준비했다.
위에 인용한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협회 창설 한 달여 만에 조직적으로 야간 영어학교를 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별도의 협회 회관을 가질 정도로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협회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일 저녁 7시에 영어를 가르치는 박문협회의 야간학교는 보통 교육을 벌이는 초급 학교라기보다는 지역 사회를 이끌어 나갈 학식 있는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한 외국어학교로서 성격을 갖고 있다.
인천박문협회 회관을 학교로 삼아 회장이 곧 교장이고 교사도 회원인 박문협회 내 서클과 같은 성격의 학교였던 것이다.
인천박문협회에서 설립한 이 사립 영어학교가 바로 1900년에 세운 인천항사립박문학교(오늘날의 박문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사립박문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 오늘날까지 이어진 박문초등학교과 박문여자중고등학교 학교 명칭은 바로 독립협회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자랑스러운 학교명인 셈이다.
박문학교는 1900년 9월1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항사립박문학교는 천주교 제물포본당과 샬트르 성바오로 인천분원 수녀들, 그리고 강준으로 대표되는 인천박문협회 협동으로, 조선인 신자들의 자녀와 무산아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립학교였다.
감리교회가 세운 인천영화학교와 함께 박문학교는 제물포본당 에우제니오 드뇌(全學俊) 신부의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일제시대 내내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인 자제들을 길러내는 민족학교로서 면모를 유지해왔다.
민족계몽사학 박문학교 설립을 이끌었던 인천박문협회 활동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것 같다.
독립협회 해산과 함께 인천박문협회도 활동을 중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외세 영향이 강했던 개항장 인천에서 민족계몽운동 흐름이 인천박문협회를 통해 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천박문협회의 선구적 계몽운동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지부장 정재홍)를 비롯한 여러 계몽단체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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