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존성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소재지 뒷산인 봉수산(鳳首山) 일대의 산성이다.
주류성과 더불어 남부여 부흥군의 2대 성지로 불리고 있다.
임존성은 봉화산 남쪽 두 봉우리의 8부 능선을 감싼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가 2.4km인 거대 산성이나 포곡식이 아닌 테뫼식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거대 산성은 포곡식이나, 임존성처럼 테뫼식으로 축조된 경우는 더물다.
포곡식 보다는 테뫼식 산성의 외벽 규모가 높아 방어에 유리하다.
그런데 산정에 쌓은 테뫼식인 경우 물이 부족하여 장기적인 싸움에는 불리하다.
그런데 임존성은 봉우리 8부 능선에 우물지가 있어
물 부족은 해결할 수 있어 굳이 포곡식으로 산성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산군 광시면 장전리에서 바라 본 임존성
광시면 마사리로 가면 남문 입구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남문 좌측의 남벽
남문에서 좌측 성벽 길로
임존성은 성벽따라 완전히 한바퀴 돌 수 있다.
우물지
남벽 중에서 고성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서벽 오르는 구간
산성 서쪽의 홍성읍 방향
예당호 상류
남벽 구간
남벽 마시리에서 올라오는 임도도 보인다.
홍성읍 일대
봉수산(467m)
북벽 가는 길
북벽 산책로
되돌아본 북벽
계속 북벽 구간이다. 임존성은 남벽과 북벽이 긴 타원형 테뫼식 산성이다.
북동벽 모퉁이에는 산불감시 초소가 있다.
임존성 북쪽의 평야와 구릉지대.
전남의 나주평야, 전북의 호남평야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곡창지대이다.
예당호 상류
북동벽 모퉁이
봉수산
동벽 산책로 길이다.
동벽의 석축 흔적
되돌아본 동벽구간
동문지 대련사 가는 산책로이다.
동문지 부근의 석축
동문지 입구
동문지
대련사 계곡과 무한천 상류
남벽 복원 구간 일대가 조망된다.
동남벽 모퉁이 부근의 석축 잔재들
남벽 전경
마사리 계곡과 마사리 일대
사비 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에서 의자왕이 항복하였지만,
남부여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주류성에서는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인 복신이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남부여 부흥의 기치를 내걸었다.
소정방(蘇定方)이 百濟를 평정하니,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를 두려워하여 주위의 추장(酋長) 10여 인과 함께 달아났고
도망친 이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태종무열왕 7년(660) 8월 26일에 임존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흑치상지는 남부여 서부 사람으로 달솔 겸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지만, 소정방의 의자왕에 대한 처우와
당나라 군대에 의한 노략질에 분개하여 10여 명의 부하 장수를 이끌고
임존성에 주둔하며 3만의 군사를 모았다.
이에 놀란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도, 무열왕의 신라군도 임존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작은 방어 목책만 깨뜨리고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치상지는 주류성의 복신과는 달리 결사항전의 태도는 없었다.
결국 당나라 황제의 회유에 넘어가 661년 무렵에는 유인궤에게 투항하고 만다.
흑치상지가 떠난 후에도 임존성은 남부여 부흥전쟁의 철옹성으로 남아 있었다.
복신의 부흥군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근거로 하여
부흥 전쟁이 끝나는 663년 10월까지도 나당군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즉 백강전투와 이은 주류성 함락에도 불구하고 임존성은 굳건히 버틴다.
이때의 장수가 바로 지수신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5월>
五月, 震<靈廟寺>門. <百濟>故將<福信>及浮圖{浮屠} <道琛>迎故王子<扶餘 >,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使{刺史} ,
統{將} 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井{幷} 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
與之合攻<豆陵[一作<良>.]尹城>·<周留城>等諸城, 皆下之. <扶餘 >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 率其衆降, 獨<遲受信>據<任存城>, 不下.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 不克,
至十一月四日, 班師, 至<舌[一作后.]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
백제의 옛 장군 복신과 중 도침이 예전 임금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유진 낭장 유 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 황제는 인궤에게 검교대방주자사를 시켜 전
도독 왕문도의 무리를 통솔하고 우리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싸울 때마다 진지를 점령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은 인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임존성을 수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에 그의 무리를 병합하고,
또한 그를 배반하고 도망했던 자들을 불러 모아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유 인궤는 유 인원과 군사를 합친 후,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대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는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 인사로 하여금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왕은 김 유신 등 28명[30명이라고도 한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쳐서 두릉['릉'을 '량'이라고도 한다.]윤성·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도주하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혼자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는 회군하여 설['설'을 '후'라고도 한다.]리정으로 왔다.
공훈의 정도에 따라 논공행상을 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진에 머물고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의복을 만들어 주었다.
이후 당나라 군대가 임존성이 위치한 예산과 홍성 일대(지금의 내포 지역)에 지심주를 두고
끊임없이 공격한 후 어렵게 임존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한 임존성은 바로 내포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쉿! 우리동네]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예산 임존성'
나당 연합군에 나라 잃은 민초들 봉기..'의병운동'의 뿌리
충남 예산 봉수산 임존성 전경
서기 660년 신라 5만, 당나라 10만 등 15만 군사로 구성된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과 웅진성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의자왕이 신라 태종무열왕과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술을 따르는 치욕스러운 항복식을 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는 찬란했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항복식을 지켜보던 일부 장수들은 밤에 몰래 봉수산에 오른다.
그들은 백제 부흥의 깃발을 꽂고 봉화를 올려 잃어버린 백제를 되찾기 위해 나선다.
백제가 패망한 660년부터 백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흑치상지 장군 등을 중심으로 벌인 백제 재건운동의 시작이다.
봉수산서 바라본 예당호 전경
서기 663년까지 진행된 이른바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곳은
다름 아닌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이다.
나라를 잃은 '민초'들이 나라를 지키는 의로운 일에 뛰어든 '의병운동'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부흥운동의 깃발을 꽂자마자 3만여 명의 백제 유민들이 모여들어 멸망한 나라는 되찾으려 힘을 합친 것이다.
흑치상지 장군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에서 나당 연합군과 붙어 승리했고,
이를 기반으로 백제 전역에 해당하는 200여개의 성을 순식간에 회복하기도 했다.
부흥운동은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지도자들의 분열로 인해 비극으로 마감하게 된다.
백제 부흥운동 기간 왕성(王城)인 주류성이 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버텨내던 임존성이
내부 갈등 요인 등으로 결국 663년 무너지면서 4년에 걸친 항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흑치상지 장군이 적군이던 당나라에 항복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더욱이 선봉에 서 자신의 동족에게 칼을 들이대며 임존성을 직접 공격해 함락시킨 것이다.
이렇게 백제 부흥의 깃발을 꽂고 패전으로 항쟁을 마무리 지은 곳이 바로 임존성이다.
임존성은 백제 부흥운동에 참여한 민초들, 군사들의 함성과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이 만나는
해발 484m의 봉수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6개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돌과 흙을 다져 쌓았다.
둘레가 2천468.6m, 면적은 55만3천697㎡에 이른다.
성내에는 문지(門址) 2곳,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적대(敵臺) 1곳과 치(雉) 4곳,
배수구(排水口) 1곳, 우물 3곳과 여러 곳의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우물 터 부근에서는 지금도 물이 솟아난다.
부흥군은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 물을 성안에 모은 뒤 적이 공격할 때
물꼬를 터뜨려 일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공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산 임존성 내 '석축 우물터'
충남 예산군이 백제 부흥 운동의 거점인 임존성(사적 제90호)에 대한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우물터 주변에서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 2동, 축대,
새로운 석축 우물터 1기, 기와·토기·자기 조각, 석제품 등이 발견됐다.
성안에서는 삼국(백제)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토기편, 자기편, 기와편 등도 출토됐다.
특히 '임존'(任存) 또는 '임존관'(任存官)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곳이 바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인 임존성임을 뒷받침한다.
임존성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에도 나온다.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 등에 따르면
"백제의 장수 흑치상지가 임존산에 울타리를 쌓고 당나라에 맞서 싸운 곳"이자
"백제의 왕자들이 모두 항복했으나 장수 지수신(遲受信)만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지켜낸 곳"이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해진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도 알려졌다.
예산군은 임존성 내 우물터에서 '대흥 임존성 백제 부흥군 위령제'를 열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장수와 민초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예산 임존성 백제 부흥군 위령제
예산군은 임존성 내 우물터에서 '대흥 임존성 백제 부흥군 위령제'를 열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임존성과 이웃한 충남 홍성 장곡면 산성리에는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장곡산성이 있다.
1998년 7월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60호로 지정된 장곡산성은
돌로 쌓은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1천352m에 이른다.
성내에서는 방대한 건물터와 주춧돌,
사시(沙尸)·사시량(沙尸良) 등의 글자가 적힌 기왓조각, 백제 시대 토기가 발견됐다.
임존성과는 12.6㎞ 떨어져 있어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였던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서는 이곳을 비롯해
충남 서천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청양 정산(定山), 전북 부안 우금산성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홍성군은 매년 10월 장곡산성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재조명하고
의병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부여군도 백제 부흥운동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은
복신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은산별신제를 지내 넋을 위로해주고 있다.
충남도는 '내포문화숲길' 가운데 한 노선으로
예산∼홍성∼당진을 잇는 29.2㎞ 구간의 '백제부흥군길'을 조성했다.
백제 패망 후 나당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백제 부흥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점이 연결됐다.
홍성 오서산 장곡산성, 봉수산의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아미산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총 8개 코스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임존성 아래에는 2009년 9월 국제슬로시티연맹이
국내 6번째로 지정한 충남 '예산 대흥 슬로시티'가 있다.
이곳은 예당평야의 젖줄로, 전국 최대 규모의 저수지인 예당호를 품고 있다.
그만큼 넉넉하고 여유롭다.
전통과 자연 생태를 슬기롭게 보전하면서도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간다는 슬로시티 이념과 딱 들어맞는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를 찾으면 충남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고풍스러운 이 나무는 높이 19m, 둘레 7.5m로 추정 수령(樹齡)이 1천50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동네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를 '배 맨 나무'라고 부른다.
슬로시티를 산책하며 볼 수 있는 '배 맨 나무'는 660년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 부흥군을 치기 위해 대흥에 들어올 때 타고 온 배를 묶어 둔 나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예산군 관계자는 "당시에는 물이 마을 주변까지 들어왔고
소정방이 배를 맸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며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나무가 그만큼 오래됐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슬로시티에서는 임존성 등을 둘러볼 수 있는 '느린 꼬부랑길'을 걸으며,
삶의 무게와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이곳에는 매년 1만여명이 찾고 있다.
먹거리도 놓칠 수 없다.
어죽, 붕어찜, 곱창, 산채 정식, 한우 등은 예산을 대표하는 먹을거리이다.
어죽은 예당저수지에서 잡은 붕어를 통째로 고아 국수와 쌀을 넣어 끓여낸다.
시래기를 밑에 깔고 붕어를 2∼3마리 올려 쪄내는 붕어찜은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예산전통 소갈비는 엄선된 한우를 전통방법으로 제조한 양념 육수를 부어
일정 시간 숙성시킨 후 숯불에 구워 먹는 것으로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한다.
인근에 조성된 국내 유일의 황새 공원을 둘러본 후
찾으면 좋을 '광시 한우거리'에서는 명품 암소 한우 맛을 느낄 수 있다.
정육점·식당에서는 업주 스스로 키우거나 인근에서 공급받은 신선한 1등급 암소만을 취급한다.
예산 황새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