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여가의 일종이다.
여가(餘暇)는 우리말로는 '겨를'로 풀고 라틴어로는 'Schole'이다.
이 Schole이 영어권 소굴로 기어 들어가서 'School'이 되고
우리는 이 말을 어이없게도 '학교'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라틴어 'Schole'은 '재미'와 '교양'을 공유하는 여백의 공간인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담을 넘고 세월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School'로 옷을 바꿔 입게되면서 그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재미'는 일찌기 조퇴를 당하고
'훈육'과 '교육'만 남아서 오늘날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데,
장담하건대, 우리네 학교에 '재미'와 '여백'이라는 원래의 틈새(겨를)를
다시 만들어 넣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재창조라는 생각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런 창의로운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이렇듯 해를 넘겨 '재미'있는 '여백'의 '틈새'를 부지런히 찾고 있는 까닭이다.
즉 내가 끊임없이 여행을 주장하는 대의명분이다.
세상의 모든 길은 대표적인 여백의 공간이다.
특히 산을 에둘러 빚어 놓은 길은 여백과 여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남도의 대표적인 우리네 길,
또 다시 그 길을 간다.
지리산 둘레길 16코스.
아침부터 지리산의 기운이 상서롭다.
이미 지리대간의 성간(聖幹)이라고 할 수 있는 불무장등(不無長嶝/佛母長嶝)을 넘었다.
반야(1,751m-삼도(1,499m)-불무장등(1,446m)-통꼭(904m)-황장(942m)의
기나긴 장등(고갯마루)을 개미걸음으로 넘고 이젠 왕시루봉(1,212m)의 슬하를 지날 차례다.
둘레길 16코스의 시작점 송정마을.
구례 읍내의 택시 기사들도 잘 모르는 16코스의 시작점,
작년 가을에 토실토실 알밤을 지천에 깔고 걸었던 결실의 15코스를 마감했던 곳.
그 때는 온 몸에 진액이 빠져 미처 보지 못했던 이정표도 오늘은 새롭다.
온통 파김치가 되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계절이 바뀌면 항상 그렇듯 거짓말처럼 다시 그 자리에 왔다.
흡사 그리운 이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가지 않으면 어느 누가 체벌이라도 내릴 것처럼...
이정표는 말한다.
정해진 코스에 연연하지 말고 원하는 만큼 원하는 길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미리 정하고 왔다.
송정-오미 구간으로.
여기 송정마을을 출발, 의승재를 넘어 파도마을, 내죽마을을 거쳐
오미마을에 이르는 총 10.5km의 길.
둘레길 안내서에는 다섯 시간이 걸린단다.
혹자는 4시간이면 충분하단다.
하지만 여백에 시간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여백이 아니고 여유가 아니다.
내 체력만큼 내 보폭만큼 세월을 등지고 걸어야 비로소 여유이며 여백인 것을.
나는 항상 길 위에서 시간이 나를 쫓아왔지 내가 시간을 쫓아간 적이 없다.
더러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탓에 땅거미를 따라 달린적은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처음은 지나칠 정도로 창대하다.
보무도 당당하게 지리산 들레길 16코스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신록의 숲향을 폐부 깊숙히 밀어넣으며 친구야,
우렁차게 약진 앞으로~!
포장도로에서 시작한 들머리는 처음부터 고개를 치켜든다.
단풍나무와 고로쇠 나무 그리고 떼죽나무가 초록을 드리운 채
뱃살을 뒤집으며 배꼽인사를 건네지만 숨찬 나그네는 응답할 겨를이 없다.
모둣길 부터 이방인의 진땀을 후려내던 길은 어느메 쯤에서 솔가릿길을 내어준다.
딱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길은 부드럽다.
딱 이맘때의 길섶은 아늑하고 싱그럽다.
철부지 나그네들에게 적당한 부피와 질량으로 훈육을 과시한 지리산은
산객이 땀흘린 그만큼의 그늘로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그래, 이래서 해마다 지리산을 못잊는 게야...
이 맛으로 이즈음이면 어김없이 길봇짐을 싸는게야...
갈참나무와 떡갈나무, 상수리 나무들이 채색을 하고 틈틈이 솔향을 버무렸다.
초록은 더없이 향기롭고 솔향은 절묘하게 푸르다.
그래, 이 시절의 지리산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어...
간혹 발길에 채이는 야생 고사리.
수족에 여유가 내려앉고 호흡에 평화가 장착되면 시야가 열린다.
비로소 길녘이 보이고 급기야 숲이 보이기 마련이다.
쉬임없이 지구 중력을 체감시키던 오르막이 마감될 무렵,
반갑게 나타난 첫번째 고갯마루인 의승재.
정유재란때 여기 구례 사람들이 의병을 모아
이 곳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승전의 흔적이란다.
길은 다시 나그네들의 체력에 은근한 조율을 가한다.
산행중에 만나는 꾸준한 내리막길은 또 다른 부담이고 공포이다.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오르막으로 응징을 하려고...
우리네 세상살이도 그렇지 않던가.
혓바닥 위에서 달콤하고 기름지고 찰진 음식은
때부분 혈관에 가서 독이 되고 살이 되듯이...
편백나무 열매가 지천이다.
불면증, 살균 효과에 아토피에 요즘은 항암 효과까지 더해져 베개용으로 인기를 더하는...
생각같아서는 두어 시간만 할애하면 베개 두어개는 충분히 만들겠는데.
상상만으로 이미 베게는 나의 침실로.
여기서 친구가 말하는 팁,
흔히 편백 나무 열매를 소금물에 삶아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편백나무의 고유향과 피톤치드가 소멸되므로
그냥 깨긋한 물에 세척, 건조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불길하게도 내리막길이 지나칠 정도(?)로 오래 지속 되는데...
까짖거 원래 산길이란 애시당초 그런 것 아니던가,
오르막으로 데리고 가면 올라주면 될 것이고,
내리막으로 이끌면 길의 모습대로 울퉁불퉁 굴러주면 되는 것,
저 물처럼 흘러흘러 산이 시키는대로 가듯이...
물처럼 살아야 하는데...
산에 있는 물은 산의 모습대로 흘러가고,
들에 있는 물은 들판의 모습대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우리도 세상의 모습대로 세월의 모습대로 살다가
그렇게 구름처럼 흩어져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으니...
낯선 곳에서 낳선 상념에 넋을 놓다가 발견한 낯선 이정표,
난데 없이 둘레길 표지판이 아닌 낯선 표지판 등장.
백의 종군길...
그 길 언저리에 있다는 석주관.
저 길을 가 봐, 말어?
친구는 작정한 우리 길만 고수하자고하고 나는 보고 가는 걸로.
결국 친구와 실랑이 끝에 친구의 멱살을 잡고 가보는 걸로~!
여기까지 와서 발품 조금 더 들이면 되는데...
그래서 둘레길을 잠시 벗어두고 석주관으로...
구례 석주관성.
이 성은 고려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들이 왜적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노고단에서 왕시루봉(1,212m)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장등(長嶝)에 위치한 석주관성은,
맨 윗부분이 칠봉상 정상 20m 가량 아래부터 이어져 있다.
이 성은 돌로 된 곳과 흙으로 된 곳, 그리고 돌과 흙을 혼합하여 만든 곳이 있으며
혼합하여 만든 성 부분은 섬진강변 도로와 칠의각 후면까지 이어져 있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가 남은 길을 이어 걷는다.
고집 피워 삭주관 보려고 19번 국도까지 줄기차게 하산했다가
원래의 둘레길로 복귀하는 데는 극심한 참회의 땀방울이 필요했다.
즉,엄청난 체력 고갈을 감내하며 이른바 전문 산악 용어인 알바를 했다는...
이 날 친구에게 두고두고 밥이며 술로 속죄의 배상을 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길라잡이의 권한까지 양도하고야 말았다는...
우여와 곡절, 참회와 눈물, 그리고 지리산길이 연출해 놓은 부침의 행간에
기진해가며 당도한 꿈결같은 파도 마을.
지리 산중에 웬 파도 마을?
한 술 더 떠 옛날 옛적의 마을 이름은 바다 마을이란다.
마을 어귀에 내려가서 구멍 가게라도 찾아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개 먹고 가자고 친구의 옆구리 찔렀다가 맞아 죽을 뻔 했다.ㅜㅜ
전체 여정의 60% 정도 이른 지점.
개미 걸음으로, 쓰잘데 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알바를 무릅쓰고도 여기까지 왔다.
내 스스로 대견하다.
하지만 가야할 40%의 거리는 절망이다.
그래서 절망의 늪에서 헤쳐나오기 위하여
남겨진 40%를 수행할 재충전의 에너지를 마련해야만하는
이쯤에서 화려한 점심 식사를 하기로 결정.
파도 마을과 섬진강이 밥상처럼 한 눈에 펼쳐진 곳,
흡사 우리만을 위하여 만들어 둔 그늘막의 정자를 이고.
걸으면서 친구의 예리한 레이다로 발견했던 고사리, 방아잎 등을 라면에 투하.
소량이라면 생고사리도 그다지 몸에 나쁘지 않다는 친구의 지론을 믿고.
방아잎이 가미된 라면의 향기,
게다가 그 장소가 산이라면...
상상이나 설명은 엄동설한의 선풍기요, 삼복날의 오리털 파커다.
제 딴에는 요리깨나 한다는 친구가 그렇게 끓여낸 풍미 작렬의 라면,
그것은 결코 라면이 아니다.
라면이라고 쓰고 환상이라고 소리쳐 불러야한다.
친구야,
무거운 계곡물 담아서 여기까지 지고 온다고 수고했어~
네가 빠지면 많이 섭섭하지~
나의 지론, 그 곳에 가면 그 곳 막걸리,
그래야 그 곳에서 일용할 신토불이의 에너지가 될 터이니.
파도마을 너머로 오산(530m 鰲山-자라산)이,둥주리봉(690m)이 구례 벌판을 지키고있다.
지난 가을에는 저 곳 오산에서, 사성암에서 지리 산자락을 조망했는데...
이런 맛은 글로써, 말로써 감히 표현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날의 그 바람, 그 날의 그 향기, 그리고 그 날의 그 분위기만
혼자 살짝 불러내어 감미롭게 추억할 뿐이다.
그 맛은 남과 공유할 맛이 결단코 아니라는 말이다.
내장을 채우고 주(酒)님을 배알 했다는 것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길의 끝에서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해가 지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게 나그네의 숙명이니.
지리산 둘레길 16코스에는 포장 임도(林道)가 너무 많다.
임도 가장자리의 푸서릿길만 골라 걷기에도 불현함이 따른다.
그리고 그늘이 다소 부족하다.
임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니...
오뉴월 뙤약 불볕을 고스란히 머리에 이고 간다.
또 똑 같은 후회가 판토마임처럼 시작 된다.
무슨 고관대작의 벼슬을 얻을거라고 집 나와 이 고생을...
식사를 끝내고 난 직후의 걸음은 더 무겁다.
에구~ 한 젓가락만 덜 먹을 걸...
하지만 눈앞의 신록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늘의 공기도 더없이 곱고 시리다.
이런 계절 풍경은 집을 나와야만 불 수 있는 것.
모처럼의 그늘을 만나면 걸음은 자동으로 정지모드.
온갖 핑계와 사유를 섞어 시간을 붙들어 맨다.
더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세월을 낚는다.
이미 예정시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다섯 시간은 훌쩍 넘었다.
예정 시간이라는 것은 이 곳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의 시간이지
여백과 여유를 찾아온 사람의 시간은 아니기에.
이 길 위엔 다소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집들이 있는데...
이름하여 전원 주택 마을이란다.
제나름대로의 귀농귀촌의 단 꿈을 찾아 근향 각지에서 흙과 숲으로 들어온...
소망했던 여유와 여백을 추구하고 행복을 향유할지,
아니면 불편과 낯섦을 등에 업고 원점회귀를 할지,
그것은 오롯이 제각각의 몫...
길이 편해진 나그네는 또 인세도 안들어오는 삼류 소설을 쓴다.
솔까끔 마을...
토속적 내음 그윽한 아름다운 마을 이름을 달았다.
'까끔'은 남도 사투리로 작은 언덕이라는 말이다.
뒷산 지형과 그 아래 꼬막같이 엎드린 마을에 썩 어울린다.
'소나무가 있는 언덕 마을'
댐에서 시원스레 물이 방류되고 있는 이곳은 내죽마을.
생전 처음 와보는 초면 부지의 내죽 마을,
반가울리도 전혀 없는데 격렬하게 반갑다.
왜냐고?
이 마을이 나타나면 오늘의 나의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므로.
지리산 둘레길 16코스는 문수저수지를 지나간다.
호수를 특히 좋아하는 친구가 호수 한바퀴 둘러보고 가자는데,
이 번에는 내가 몽둥이를 들었다.
너, 시방 제 정신인겨?
지금 무릎에 파리만 한마리 앉아도 쓰러질 판인디...
내죽마을.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나무의 대(竹)자와 문수천의 시냇물을 따서 '대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안쪽에 있다하여 내죽(內竹)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그 연유가 어찌 되었건 알 바 아니고 나는 무조건 반갑다.
먼 길 걸어온 쇠락한 나그네에게 그 날 저넉 베고 잘 베게가
가까이 있다는 것 만큼 반가울 일이 또 있을까.
어쨌건 나의 준비된 정보로는 여기서 베개가 멀지않다.
어디선가 개소리가 나는데...
사방을 휘둘러 한참을 찾았다.
그런데...
머리만 보인다.
아마도...
얼마 전에 상연된 어느 SF 영화가 이녀석을 보고 모티브를 찾은게야.
하죽마을...
조선 영조 중엽 (1754년) 경주이씨 이기명이 길지를 찾아 조선 팔도를 헤매다
아들 삼형제를 거느리고 정착한 마을.
그 후 택리지의 가거지(可居地) 6처 중 가장 사람 살만한 곳으로 소개되자,
숨겨져 있던 땅 구례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와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문수천에서 흘러온 물이 마을을 따라 흘러 흡사 마을을 보호하는
해자(垓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맑다, 수량도 풍부하다, 청량한 물소리는 덤이다.
신발 벗고 뛰어들어 먼 길 걸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데,
길가는 사람들 다 물리치고 베잠방이가 흠뻑 젖도록
깨벗고 한바탕 뒹굴고 엎어져서 물장구라도 치고 싶은데.
친구만 안 말렸어도...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오미마을... 지리산 둘레길 트레킹은 6코스부터 시작하여 이미 열한 코스를 완주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온전히 건강한 몸으로 그 날의 목적지에 도착한 날이 없었다. 방전된 몸, 흐느적거리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그 날의 베개를 베곤 했었다. 그런데도 계절이 바뀌면 감쪽같이 망각하고 다시 이 길에 선다. 아이러니다. 이해가 안간다. 우리 민족이 그렇듯 너무 쉽게 잊어서 일까, 오늘도 수십번 후회했다. 내가 뭐하러 여기와서 땡볕을 맞아가며 이러고 있을까, 미쳤어, 미친 게야, 비도 안 오는데 이렇게 중얼거리며...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또 다시 계절이 바뀐 화창한 어느날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비슷한 베낭에 비슷한 막걸리를 짊어지고 조금 더 진화된 여유와 여백을 찾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똑 같은 모습으로 후회와 푸념을 중얼거리면서...
첫댓글 무거우신데 저까지 짊어지고 다니시다니...^^. 지리산 작년 10월에 다녀왔는데, 구례도 한바퀴 돌고... 정말 김작가님은 동에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거 같아요. 건강 조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지리산둘레길 코스가 이리 좋군요 더운데 힘든여정을 완주하셨네요 좋은구경 잘했네요
읽다가 "목마와 숙녀"님의 글인줄 잠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글속에서 힘든 숨소리가 느껴져요.
ㅋㅋㅋ 제가 산을 하도 잘 다니니까 말이죠..
지리산 둘레길도 돌고 싶고, 제주 올레길도 돌고 싶고...
다닐수록 갈 곳이 왜 더 많아지는지요?
여행과 행복은 동의어이니 부지런히 쏘다닙시다!!
6코스에서 시작하셨으니 이젠 8개 구간 남으셨군요...
한참 동안 고생하시면 금방 도착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