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보내는 편지(115)
요즘 가장 비중있는 소식은 사람들의 자살소식일지도 모릅니다. 삶의 무게, 그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에 눌려 세상을 하직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더는 어쩌지 못하는 절망에 몸서리치겠지요. 사람마다 자신들의 삶의 무게를 잘 견디어 내는 것밖엔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에 할 말을 잃지요.
문명의 발달속도가 빠를수록 오히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다지 신중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 시대의 슬픔이기도 하고요. 더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의 세상이 더 혼란해지리라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경시라고 말하기는 너무도 무책임한 윤리교과서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저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왜 우리는 늦게서야 그걸 알아차리는지, 그들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장치 아니 왜 저에게는 그런 혜안을 주시지 않았는지 하소연 해 보지만 저에게 들리는 것은 그런다고 ‘네가 할 사람이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따져보면 끝나버렸으니 하는 말이지 설령 지금 보인다고 해도 ‘내가 왜 그 일을?’ ‘좀 더 있다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과 상관없이 살아온, 살인 방조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두 책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은 사고를 당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재활과정과 그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은이의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는 책으로 이미 여러분에게 설교시간에 수없이 말씀드렸기 때문 잘 아실겁니다.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란 책은 제목에서도 느끼실 수 있듯이 채규철 박사님의 삶의 목표와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책입니다. 책 전반부의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부분도 감동적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정의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강변하는 모습은 특히 감동적입니다.
두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뭐가 이렇게 감사할 게 많아'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 만큼 책의 곳곳에서 지은이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가발이 아닌 진짜 머리칼이 난다는 것이 감사하고, 귀는 사라졌지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놓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제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유명인이 되어 만나는 많은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하나님이 이들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위한 삶은 우리가 가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루어 내어야 할 목표이지 우리에게 편하게 예비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채규철 박사님은 젊은 시절에는 농촌계몽의 꿈을 안고 덴마크로 유학을 가시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전신인 '청십자운동'을 벌이기도 하셨으며 강연과 글쓰는 일로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가평 두밀리 자연학교'를 열어 어린이들에게 자연을 배우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돕고 힘없는 노인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려고 하십니다. 이지선님도 아직은 배움을 시작한 단계이고 젊은 나이지만 앞으로의 삶을 남을 위해 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가 이들에게 이러한 꿈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이들의 꿈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실현되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들의 위대한 삶의 소식들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가끔씩 예 예 그래요 하고 대답을 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화려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분명 빨강이나 파랑 노랑 보라 같은 화려한 꽃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심만 가진다면, 그리고 마음만 열어 놓을 수 있다면 청초하고 자신이 돋보이는 존재는 아니지만 안개꽃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개꽃은 어떤 빛깔의 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화려한 빛깔이 더해지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멋진 꽃다발이 됩니다. 조용하지만 안개꽃만으로 만든 꽃다발도 실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랑과 풍성함이 넘쳐나게 하기에 충분하듯이, 조용하게 미소짓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엊그제 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브루스올마이티’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라면 전지전능한 브루스란 뜻인데다, 특히 모건 프리먼의 하나님역할은 자칫 신성모독이라느니 시비의 건덕지가 될 수도 있어서 솔직히 좀 꺼림칙하기도 하지만 어떤 교리를 주장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믿음에 관한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유쾌하고 신나는 유머라는 양념을 듬뿍 뿌려서 만든 어디까지나 영화 그것도 짐 캐리(마스크란 영화의 바로 그 사람)의 뛰어난 연기력이 바탕이 된 코미디물이기 때문에 시종일관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브루스란 한 남자의 불평을 신이 듣고서는 그 남자에게 신의 능력을 부여해서, 주인공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로, 예를 들어 강아지에게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게 한다든지 지나가는 여자 치마가 저절로 올라가게 한다든지. 이렇듯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본 브루스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가 됐음을 알고, 마음대로 손가락을 휘둘러대기 시작하지만 사랑하는 여인(그레이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기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영혼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멋진 영화랍니다.
늘 투정만 부리고 불평만 하는 브루스를 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불평만 하고 있는 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만, 특별히 신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주인공 부루스가 식당에서 수프를 시켜 그 수프를 홍해를 가르듯이 가르는 장면과, 브르스가 자신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관리하기 위해 '야훼'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이메일 형태로 기도를 받는 기발한 발상, 그리고 B.E.A.UTIFUL.! 비.이.에이. 유티풀(솔직히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이란 말과 “그게 그래서 그렇고 그렇단 겁니다“ (That's how [the way] cookie crumbles.= 그런게 바로 인생이죠)란 관객을 향해 던지는 그의 멘트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너무나 쉽게 대답해 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첫째,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 보았음직한 ‘내가 하나님이라면’ 또는 ‘나도 맘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란 가설에 대한 대답을 보여줍니다. 둘째,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은 이렇게 어두운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가? 보통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의문에 대해 연출자는 “인간의 기도는 이기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모든 기도가 응답이 된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는 비교적 뻔한 대답을 재미있는 장면들로 연출해서 대답하지요. 셋째,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형체도 없고 표정도 없고 그저 하늘에서 울리는 에코가 섞인 그런 음성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반하여(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 신성 모독이라고 하기 쉽지요) 하나님도 인간처럼(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깜짝 놀라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또 하나 감동받은 것은 신이 부루스의 재치있게 농담하는 능력을 칭찬하며 “그게 자네의 장점일세,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내가 자네를 만들었으니까. 그걸 살리게”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순간 하나님이 저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고 찡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만드실 때 '얘는 이런 장점, 또 얘는 이런 장점을 가지게 만들자'라고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가 알아차리게끔 영화에서처럼 우리 옆에서 코치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을 하니 든든함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축구교실에 보내는 것, 젊은 학생이 마약을 선택하지 않고 공부를 선택하는 것, 이런 것이 기적일세'라고 신은 이야기를 합니다. 평범한 우리의 삶이 사실은 엄청난 능력과 기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부루스가 평범한 소시민들의 작은 능력의 결과들(이를테면 헌혈단체 같은)을 취재하며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이 기적과 같은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데에 회의적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좀 더 자기 욕심을 버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일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현실적인 답을 들려줍니다. 잠깐동안이라도 세상사는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해 준 흐뭇한 영화. 진정한 사랑과 기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 기도를 왜 모두 들어줄 수 없는지 설명해주는 영화,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절대자사이의 사랑을 그린 영화, 영화 보는 내내 유쾌한 웃음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설교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똑같은 뜻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담담하면서도 진정한 마음으로, 꼬지 않고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되어지길. 그래서 어느 시인(?나중에 찾아서 밝히겠음)의 고백처럼 큰 바다 파도가 이유 없이 몰아치며 때려도 거대한 갯바위처럼 흔들림 없이 때리는 파도를 너그러이 받아주는 큰마음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바닷가 작은 물결이 계속 밀어내고 흔들어도 해안의 모래알처럼 상처받지 않고 일렁이는 물결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큰 믿음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장마철 큰 홍수에 많은 물이 넘치게 흘러 와도 깊은 바다처럼 넘쳐나지 않는 겸손함으로 청지기의 넓은 가슴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작다고 무시하고 거대한 발로 짓밟아도 잔디처럼 짓밟고 무시하는 자에게 미움대신 도리어 쉬어갈 자릴 내어 주는 큰 아량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가꿔주지 않았어도 아름답게 피어나 웃어주는 소박한 들꽃 한 송이 무참하게 마구 꺾어도 원한대신 도리어 향기로 갚아주는 큰사랑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