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의 왕자다.
신라 말 무진주 서일동(현 전남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한다.
그 후 고려 태조가 그를 광산부원군에 봉하고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흥광이 서일동에 터를 잡은 후 고려조에 와서 그의 후손들 가운데 8명의 평장사가 배출되자 사람들이 그곳을“평장동”이라 불렀다.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는 광산김씨의 집성촌이다.
사계 김장생이 광해군을 피해 은거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19대 김약채 대부터다.
이 마을의 내력에서 김약채의 큰 며느리 허씨의 이야기를 빼면 안 된다.
김약채의 맏아들 김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일찍 죽었다.
그 부인 허씨가 17세에 홀로 되자 친정 부모는 딸을 개가시키려 했다.
허씨는 이를 끝내 거절, 아들 김철산을 데리고 시가인 고정리로 내려와 아들을 키우며 수절한다.
이후 김철산은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 김겸광 등 4형제를 낳았다.
김국광의 5대손에서 김장생이 태어났으니 오늘의 고정리 마을은 정경부인 허씨의 정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은 광산김씨 가문의 정신적인 지주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은 예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다.
김장생은 이율곡과 송구봉의 수제자이며 기호학파의 대가다.
그는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에 맞는 윤리강령과 행동규범인 예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저술이나 독서를 하면서 의심나면 따로 메모해 두면서 후에 책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에는 경서판의, 근사록석의, 의례문해 등“의(疑)”자가 많이 있다.
조선시대에 모두 38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2000년 현재 837,008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