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김씨 제주 인맥
나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나주군 김운발(金雲發)을 시조로 받들고 있으니, 계림 김씨계에 속하며 그 맥을 같이 한다. 경순왕은 대보공 김알지(金關智)의 27대손이므로 시조 김운발은 원조 김알지의 29대손이다. 국운이 기울자 경순왕은 56대를 이어온 신라의 천년사적을 고려에 이양하니 서기 935년의 일이다.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태자 일(鎰)과 계자 황(湟)을 두었다. 태자 일은 망국의 한을 달랠 길 없어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마의와 초식으로 여생을 보낸 마의태자였고, 계자 황은 가야산 법수사와 해인사에서 불교 화엄종에 귀의하니 곧 범공(梵空) 선사이다. 범공선사가 입산 전에 두었던 아들형제 운발과 우발(雨發)을 고려에서 예우하여 나주군과 경주군에 각각 봉하니, 장자 김운발이 곧 나주김씨의 관조이다.
나주군 김운발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에 등용되어 많은 명신을 배출했고, 특히 15세손 월당 김대경(月塘 金臺卿 문충공)은 고려 충숙왕 13년(1326) 문과에 올라 그 벼슬이 봉익대부 보문각대제학에 이르렀다. 문장이 빼어나「동문선」과「여지승람」에 그의 시가 전한다. 한 때 목은 이색과 함께 나주 안로현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벼슬한 이는 문충공의 손자인 김정준(金廷儁)으로 정종때 왜구토벌에 공을 세우고 그 벼슬이 가정대부 중군도총부부총제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장이 하사되었다. 그의 둘째 김증(金增)은 김종서의 사위로 김종서가 단종조 좌의정이었고 계유정난(1453)때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김정준의 손자 김취장(金就章)은 문과에 오른 후 단종조에 의성현령을 지내다가 외조부 김종서의 화를 애통히 여겨 금군대군 유(瑜)와 더불어 단종복위를 꾀하다 실패,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중에 숨어 버렸다.
이밖에 중종때 무과에 급제한 김경석(金景錫)은 명종 10년(1555) 호남지방에 1차 침입(을묘왜란)한 왜구를 격퇴하여 이름난다. 그는 이 공으로 정국(靖國)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특히 시부에도 뛰어나「여지승람」에도 등재됐다. 당시에 중장군이 되어 영암포에서 왜적을 무찔러 광주목사로 승계한 김적(金適)은 김경석의 종숙이다. 무과출신은 아니었지만 19세손 김성조(金成祖)는 제주에 2차 침입(을묘왜란)한 왜구를 갑사(甲士) 선봉장으로 자원하여 통쾌히 격파, 건공장군(建功將軍) 증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을 수직했다. 또 병진왜란(1556, 명종11)에는 그의 아우 어모장군 김성지가 수훈을 세웠다.
김적의 아들 김충수(金忠秀)는 호조참판을 행임했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됐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인 나씨(羅氏)와 함께 순사, 그 이름을 남겼다.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이 있다. 부총제 김정준의 후손 중에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은 무신과 학자가 배출됐으며, 전국에 있는 나주김씨 대부분이 월당 김대경의 후손들이다. 선조때의 학자 김덕수(金德秀), 인조 때의 목사 김수신(金守信), 임진왜란때 진주에서 순사한 김예수(金禮秀), 인조때의 수사 김진(金鎭), 현종때의 현감 김소하(金韶夏), 숙종때의 예조좌랑 김초보(金楚寶) 등이 이 가문출신이다. 또 김진의 자 김흥운(金興運))은 제주판관(1647)과 제주목사(1672)를 역임했다.
제주의 나주김씨 입도 시조는 14세 영장공(營將公) 김인충(仁忠)으로 나김시조 김운발의 13세손이며 고려조 벌문 출신이다. 부는 진사 김처연(金處淵)이며, 백부는 문과은청광록대부 김수연(金守淵), 조는 유림낭장(儒林郎將)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요선(金堯瑄), 증조는 대장군 금성군 김극순(金克淳), 고조는 대장군 김득장(金得章)이다. 김인충은 고려말의 충신으로 강화진 좌령낭장(江華鎭左領郎將)을 역임하다가 제주도로 명(明) 영락(永樂)년간(1403 태종3 ~1424 세종6)에 낙향한 것으로 족보에 전해온다. 고려가 국운이 다하자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1392)에 이은 신흥 이씨왕가의 치열한 갈등을 지켜보면서 고민 끝에 충의에 따른 판단이 서서 영도(榮途)를 초리와 같이 버린 것이다. 인충공 이래 계보 20대 600여년을 유추해보면 영락년 초(1403)에 제주에 입도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대대로 많은 양장(良將)과 문인을 배출했던 가문의 혈통은 제주에서도 면면히 계승됐다. 제주에 들어온 후 가장 빛을 남긴 인물은 예의 19세손(입도 6세) 김성조(金成祖)이다. 1527년 애월면 엄장리에서 출생한 김성조는 유년 시부터 총명하고 천품이 강직했다. 의기남아로 주위의 촉망을 받았던 그는 문장과 기마 궁술 등 무예에도 뛰어나 생원진사 출신의 교수 김양필(金良漏)의 자원사위가 되었다. 명종10년(1555) 6월 27일 왜구들이 제주도를 넘봐 벌떼처럼 침입해오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목사 김수문(金秀文)과 더불어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이를 격파하고, 다시는 이 땅을 노리지 못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왜구가 남기고 간 이수는 무려 1천이 넘었다 한다. 이때의 전공으로 그는 명종 임금으로부터 건공장군을 수직하고 충훈원에 등록되었으며 그 내력이 『탐라지』와 김석익의『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에 사적이 자세히 나온다.
나주김씨는 입도조 김인충 이래 5대까지는 독자로 내려온다. 김성조의 무훈으로 고조 김계전(金季全)은 천호를, 증조 김여수(金麗水)는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조부 김지손(金智孫)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부 김윤형(金允亨)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증직된다. 20세 김용호(金用瑚)는 무신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순천의 방답진첨절사(防踏鎭僉節使)를 행임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이 있었다. 그의 아우 김용련(金用璉)은 승의부위를 지냈다. 21세(입도7세) 김위남(金衛南)은 봉직랑 수례빈시 첨정을 역임했고, 김수남(金秀南)은 그 벼슬이 승사랑 제용감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김두남(金斗南)은 장사랑에, 김진남(金珍南)은 만호에 올랐다. 한편, 어모장군 성지공의 자 20세 장사랑 김경기(金景麟)를 거쳐 현신교위 김동남(金仝南)도 가문을 빛낸 각 계파의 선조를 이룬다.
인충공파종친회(舊 제주도종친회)가 발족하기 이전에는 20세 용호(用瑚) 이하 종친들을 동파(東派), 용연(用璉) 이하 종친들을 서파(西派)로, 13세 수연(守淵)공의 후손들을 후김(後金)으로 통칭했다. 그러나, 동남(仝南)공계 종친들이 종친회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각 계(系)에서 자손이 번창함에 따라 동서의 개념으로는 계열을 밝히기에는 불합리하자 파(派), 계(系), 가지(家支)의 개념을 새로 설정했다. 나주김씨 계파(系派)는 21세에 이르러 위남(衛南) 수남(秀南) 두남(斗南) 진남(珍南) 동남(仝南) 공계로 분계하고, 그 이하에는 현조(顯祖)를 줄기삼아 가지로 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13세 수연공의 10세손 재수(載秀, 자는 載南, 23세손, 증직 통훈 軍資監正)공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참판 충수공 내외분의 순절을 계기로 벼슬에 뜻이 없어 선조33년(1600) 초 가솔과 함께 제주에 낙향하여 머물러 버리니 그를 입도조로 삼은 22세 후대를 취암공파(鷲巖은 載秀의 부 진사 適의 호)라 한다.
위남공의 자 22세손(입도 9세) 김여할(金汝硈)은 선교랑훈도 유향별감이며 김여지(金汝砥)는 선무랑, 두남공의 자 김여기(金汝錡)는 도훈장, 동남공의 자 김내근(金鼐根)은 적순부위(迪順副尉)를 각각 지냈다. 23세손(입도 10세)에 이르러서는 김정구(金鼎九,위남 손)가 유향별감, 수남 손으로 김중일(金重鎰)이 통정대부, 김원보(金元寶수남 손)가 향공진사, 김내보(金乃寶)가 통정대부를 했고, 두남 손 김시해(金時海)가 통정대부, 김정실(金鼎實)은 향공진사에 도훈장, 동남 손 김석주(金碩柱)가 어모장군에 오르는 등 제주의 나주김씨는 문무겸전한 씨족으로 등장했다.
24세에 이르러서는 별감 도훈장을 지낸 김우담(金遇聘)을 비롯하여 가선대부 부사과 김흥석(金興錫), 향해도훈장 김욱(金礇), 절충장군첨지 김상중(金商重), 향공진사 김화중(金華重), 성균관 전적 선무랑 김형중(金衝重), 전력부위 겸 사복 김덕해(金德海)의 이름이 엿보인다. 특히 입도 11세 김형중은 두남공의 증손으로 드물게 문과에 올라 학문과 덕망이 당대를 풍미했다.
25세손은 유향별감 김덕후(金德厚)를 위시로 김덕기(金德器) 김덕욱(金德旭) 김만집(金萬緝)이 가선대부, 김보온(金寶蘊)이 병절교위 용양위부사과가 되는 등 많은 후손들이 통정대부 가선대부 등의 지위를 수직하여 가문의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26세손 위남공계 김취원(金就元)은 김덕후의 자로 향공진사이며 유향별감, 김취전(金就銓)도 유향별감을 했고, 김취감(金就鑑)은 가선대부, 김덕하(金德夏)와 김덕중(金德重)은 통정대부로 향당에 그 명성을 떨쳤다. 그밖에 수남공계 김성택(金聖澤)은 유향별감, 두남공계 김취옥(金就玉)은 통정대부, 김영조(金榮祖)는 장사랑, 진남공계 김진웅(金振雄)은 유향좌수로 이름난다.
27세손(입도 14세) 김만겸(金萬兼, 취원 자)은 빈흥에 입격하여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김상휘(金尙輝)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납읍에 사는 두남공계의 김종협(金宗協)과 김종준(金宗駿)은 형제로서 나란히 유향좌수에 올라 세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김익겸(金益兼, 위남공계)과 김세로(金世老, 두남공계)는 가선대부를, 위남공계의 김남로(金南老) 김경택(金慶澤), 수남공계 김성안(金成安)과 김재필(金才弼), 김종윤(金宗允, 두남공계) 두남공계 김일근(金日瑾)은 통정대부를 지냈다. 용양위부사과에 오른 김중명(金重命, 수남공계), 사과 김창발(金昌發, 위남공계), 두남공계 김명원(金命元) 유향별감도 입도 14세손이다. 특히 김창은(金昌銀)의 부인 경주김씨는 효열로 이름을 남겨 서귀포시 중문리 열녀동산에 정문이 전해진다.
28세손 김영집(金英集) 김영업(金英業) 김영락(金英樂) 삼형제는 순조조인 1814년 향시동문급제로 전무후무한 등룡례를 남겼다. 김영집은 화북태생으로 1814년 문과에 오른 후 방력직강(榜歷直講)을 받았고 통훈대부로 예조좌랑과 은계찰방을 역임하여 그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우 김영업(金英業)은 같은 해에 문과에 올라 사예 경릉영(司藝敬陵令)과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그는 뒤에 제주판관이 되었는데 그 공덕을 기리는 청덕비가 세워겼다. 영업의 아우 김영락 역시 빈흥 도훈장을 지내며 「귤림원지」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또 김상국(金尙國)은 향공진사인가 하면 납읍진사로 유명한 김성호(金性昊)는 성균관 생원진사에 올라 문명을 떨쳤다.
그리고 김정로(金晶魯)는 향대부, 김성찬(金性燦)은 빈흥훈장, 김영동(金英東)은 장사랑을 각각 지내고, 김항유(金恒柔)와 김응정(金應貞)은 통정대부 절충장군을 하였으며, 김경득(金景得) 김수민(金秀民) 김순항(金順恒) 김성룡(金性龍) 김영홍(金永弘) 김영걸(金永傑) 김차걸(金次傑) 등이 통정대부이며, 김영록(金永祿)과 김순항은 가선대부를 하였고, 김상채(金尙彩)는 동지사과에, 김운경(金雲鏡)은 병절교위로 용양사과를 행임했으며, 김천룡(金千龍)은 사과에, 김진은(金鎭殷)은 좌수에, 김항병(金恒柄)은 별감과 통정대부에, 김달수(金達洙)는 좌수판윤 겸 참판에, 김영채(金永采)는 장사랑에 각각 올라 날로 가세가 번창하고 많은 후손들이 작(爵)을 받았다.
29세 훈장 김경방(金慶方, 위남공계) 이후는 모두 가시나물에 세거하면서 종가 가지로 분화하여 종가를 지키고 있다. 김상옥(金相玉)은 삼성서원 재생으로, 그의 아들 종문(宗文)은 귤림서원 재생으로 귀감이 되었던 이들이다. 김종문은 수81세에 통정대부 절충장군 부호군의 교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9세 가운데는 김계옥(金啓玉), 김종업(金宗業) 김상봉(金尙鳳)은 통정대부를 하였고, 김영집의 아우 영동(英東) 영채(英菜)와 조카 종운(鍾運) 종온(鍾溫) 종건(鍾健) 종인(鍾仁) 종신(鍾信) 종간(鍾侃) 종준(鍾俊) 종량(鍾良)이 모두 장사랑에 올랐다. 김종운은 향해통정대부로 도훈장이 되었다.
중추원 의관을 지낸 김언택(金彦澤)과 독립운동가 김후곤(金厚坤)은 29세손이다. 납읍태생 김후곤은 약관 19세에 판임주사를 지낸 수재로서 한말의 풍운이 몰아치던 서기 1904년에 청운의 뜻을 품고 출륙, 충남 공주에서 서당을 열어 훈장을 하다가 사립인 신명학교 교감으로 후진양성에 진력하는 한 편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편 애국지사였다. 다시 충북으로 옮긴 그는 일신을 불살라 독립운동을 계속, 항일투쟁으로 일관하였고, 1915년 북간도로 건너가 동지들과 활약하다가 그후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한 후 소식이 끊겼다. 그의 구국운동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30세손(입도17세) 가운데 예조참판을 행임한 김귀언(金貴彦 진남공계)이 유명하다. 위남공계의 김종서(金宗瑞)와 진남공계의 김귀량(金貴亮)은 가선대부, 김종수(金宗洙)는 향대부를 했다. 위남공계의 김종진(金宗鎭) 김재호(金在好부) 김대황(金帶黃) 김종수(金鍾秀) 김은록(金隱祿), 수남공계의 김여신(金汝信) 김오겸(金五謙) 김기호(金基浩) 김원국(金元國)등은 각각 통정대부가 되었다. 위남공계의 김양도(金良道) 김달황(金達黃) 김영근(金永根), 수남공계의 김영훈(金永訓) 김원준(金元俊) 김기행(金基行), 두남공계 김시언(金時彦), 진남공계 김여종(金呂鍾), 동남공계김화일(金華一) 등은 유향별감을 했다.
위남공계의 김종해(金宗海) 김언룡(金彦龍) 김종반(金宗磐) 김종엽(金宗曄) 김인수(金仁壽) 수남공계의 김치환(金致煥)과 김기현(金基鉉), 두남공계의 김영관(金英琯) 김려득(金麗得), 진남공계의 김귀화(金貴化) 김귀량(金貴亮 가선대부) 김귀현(金貴鉉)은 유향좌수를 했고, 위남공계의 김규호(金奎昊) 김규윤(金奎允) 김규화(金奎華) 김규방(金奎昉) 김규명(金奎明) 김규휘(金奎輝) 김규대(金奎大) 김규삼(金奎三) 김규칠(金奎七) 김규일(金奎鎰)은 장사랑에 올랐으며, 김규문(金奎文 도훈장) 김규창(金奎昌 좌수) 김규승(金奎昇) 김규오(金奎五)는 통정대부로서 장사랑을 역임했다. 김규현(金奎賢)과 김규원(金奎元)은 유향별감으로 장사랑을 했다.
김종문(金宗文)은 귤림서원 재생과 대소직을 거치면서 유학진흥에 전념했는데, 수81세에 통정 절충장군부호군의 교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중추원의관 김인욱(金仁旭 유향별감), 참봉 김두규(金斗圭), 천별장(千別將) 김시탁(金時卓) 김시혁(金時赫), 판임주사 김인평(金仁平 수남공계) 김영춘(金英春 두남공계) 등이 이름을 남겼다.
31세손(입도 18세)으로 나주김씨 가문을 빛 낸 역대인물은 다음과 같다.
위남공계에서는, 김상룡(金相龍)은 도훈장으로 귤림원지에, 김계항(金啓恒)은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금석문의 일가를 이뤄 호남지에 올라있다. 신암 김치용(薪菴 金致鏞 1832~1901)은 영평리 출신으로 갑술증광사마 생원시(1874)에 급제한 진사 태학사로 1875년 귤림서원 터에 경신재(敬信齋)를 창설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신암김선생유허비’가 남아있다. 김치전(金致銓)은 영릉참봉을, 김규화(金奎化)는 참봉을, 김원영(金遠榮) 김계선(金啓先) 김이녕(金履寧) 김창수(金昌洙)는 판임주사를, 김이형(金履珩)은 판임교원을, 김병휴(金秉烋)은 중추원 의관을, 김항간(金恒侃)은 별감 가선대부를 지냈다. 무과급제한 김이선(金履璿)은 장사랑 제주도관찰부 주사를, 김경원(金景源)은 선달을 행임했다.
김좌현(金佐鉉)과 김치성(金致聲)은 절충장군 통정대부로, 김병수(金秉洙)는 통정대부로, 김연원(金淵源)은 가선대부로, 김치공(金致恭) 김치선(金致銑) 김치억(金致億) 김원명(金遠明) 김이진(金履鎭)은 훈장 통정대부로, 김흥원(金興源)은 유향별감 통정대부로, 김우현(金佑鉉)은 향대부로, 김원석(金遠錫)과 김인원(金仁源)은 유향좌수로, 김이경(金履慶)과 김이긍(金履兢 향교반수)은 장사랑 훈장으로, 김치석(金致錫)과 김치일(金致鎰) 김치백(金致百) 김치윤(金致潤) 김계원(金啓源) 김계흡(金啓洽) 김계욱(金啓旭) 김계홍(金啓弘) 김병묵(金秉黙) 김세간(金世侃) 김이용(金履庸 장사랑) 김이중(金履仲) 김치원(金致元) 김려원(金麗源) 김만평(金萬平) 김명리(金明利) 김달원(金達源) 김이조(金履兆)는 유향별감의 존칭을 받았다.
장사랑으로는 김이혁(金履赫 유향좌수) 김이철(金履喆 유향별감) 김이찬(金履璨) 김이묵(金履黙) 김이열(金履烈) 김이연(金履然) 김이환(金履桓 주사) 김이징(金履徵) 김이오(金履五) 김이해(金履海) 등이 이름난다.
수남공계에서는 김용규(金龍奎 판임) 김규화(金奎和 판임주사 중추원의관) 김규보(金奎保 참봉 가선대부) 김규해(金奎海 판임주사) 김재형(金在亨 유향별감) 김두천(金斗千 유향별감) 김재호(金在浩 유향별감) 김재철(金在哲 훈장 통정대부) 김재인(金在仁 판임주사), 두남공계에서는 김병효(金柄孝 성균관전교) 김봉규(金奉圭 유향별감), 진남공계에서는 김태휴(金泰休 통정대부 좌수) 김봉구(金奉九 감찰주사 유향별감) 김봉훈(金奉訓 유향별감), 동남공계에서는 김명례(金明禮 통정겸 오위장) 김상득(金相得 가선대부 동지중추겸오위장) 김순득(金順得 통정 오위장) 김정윤(金正允 유향별감) 김정홍(金丁弘 별감)이 이름난다.
32세손(입도19세)으로 통정대부는 김성익(金聲益 유향좌수) 김재철(金在喆 유향별감) 김기규(金基圭 유림반수) 김최영(金最英 훈장) 김성갑(金成甲) 김기남(金基南 유향좌수) 김기주(金基朱 절충장군) 김몽득(金夢得 절충장군) 김중근(金仲根)은 학무위원 성균관전교) 김계인(金季仁 동남공계) 등이다. 김기선(金基先)은 가선대부를, 김재팔(金在八)은 향대부를, 김성진(金聲振) 김시백(金是伯 수남공계)은 유향좌수를 했다.
김민섭(金旻燮)은 통훈대부사헌부감을, 김경섭(金敬燮)은 후릉참봉을, 김원근(金元根)은 종사랑으로 충의참봉을, 김봉근(金奉根)은 종사랑 참봉을, 김재성(金在成) 김지근(金芝根) 김재섭(金才燮) 김기성(金基成)은 중추원의관을, 김춘국(金春國)은 승정원의관을, 김흔섭(金昕燮)은 고종때 전화국주사를, 김성효(金星疇 유향별감)는 통신사 주사를, 김윤근(金允根) 김봉섭(金奉燮) 김인근(金仁根) 김장근(金將根 재일나김친족회 초대회장) 김완근(金完根) 김기조(金沂祚)는 판임주사를, 김중근(金仲根)은 통정대부 학무위원 성균관전교 유림반수를 지냈다.
김최선(金最先) 김명학(金命學) 김명구(金命球) 김명윤(金命允) 김명훈(金命勳) 김성로(金星老) 김재경(金在鏡)등은 유향별감을 했다. 김문선(金文先)과 김성두(金星斗)는 별감주사를 했다.
특히 난파 김재첨(蘭波 金在添)은 유향좌수·도훈장·제주군향장·중추원의관·통정대부를 했던 이로 문장이 뛰어나 문하생이 많았으며 전국 명승고적을 두루 살피고 희귀목인 계수나무를 제주에 전종했다. 김재빈(金在彬)은 아라동에 한문서당을 개설하여 훈학하니 아라초등교의 발판이 되었다. 영은 김기섭(瀛隱 金基燮)은 귤림서원 재생, 제주향교 훈장을 지냈으며 귤림서원유림안에 등재됐다. 김성종(金性鍾 1915~1945)은 평대 김려원(金麗元)의 2남으로, 1938년 일본 대판에서 성심야학을 차리고 교포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11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11월 징역2년을 선고받아 대판堺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타계했다.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경렴(金景廉)은 제주도주사를, 김무근(金茂根)은 검사 변호사를, 김호근(金皓根)은 지방참사관 금윤조합연합회과장을, 김태근(金泰根)은 일본복강현농업기술원 기사를, 김창근(金昶根)은 구좌면장을, 김형근(金亨根)은 제주시수협 상무를, 김길웅(金吉雄)은 제주도의회의원을, 김귀현(金貴鉉)은 동경에서 음식업조합장을, 김남수(金南秀 수남공계)가 서울종암은평경찰서 총경을, 두남공계로는 김치형(金致炯)이 道화물자동차운송조합장을, 김행옥(金行玉 향토사학가)이 중등교 교장을, 김창옥(金昌玉)이 도종친회장을, 김종현(金鍾炫 육군소령)이 육본행정참사관을, 김병욱(金昞昱)이 초등교 교장을, 진남공계 김표길(金杓吉)이 道사무관을 역임했다.
김태옥(金太玉) 김덕우(金德祐) 김용우(金容祐) 김만홍(金萬弘 두남공계) 김충희(金忠熙 인헌무공훈장 수상. 두남공계) 김운길(金韻吉 진남공계) 등은 국가유공자이다.
33세손 이후는 타계한 이들을 중심으로 약술한다.
인충공파의 주손으로 통정대부 중추원의관과 제주목주사를 역임한 김기수(金基銖)는 입도19대손으로서 종문의 당대를 대표한다. 그는 16세에 관덕정 중수의 동량을 쾌척하였고 18세에 이미 시입향사하여 좌수와 중면면장을 역임했으며, 장년에 도훈장, 반수, 문묘직원 등 제주향교 운영의 중책을 맡아 유림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그는 사원 향청 삼성사의 철폐국유화에 대치했던 최후의 보루로서 의연히 고수하여 오늘의 명맥을 잇게 했으며 목사나 도사도 반드시 그에게 도정을 자문했다. 한말과 왜정의 어려운 시기에 그는 종문과 일가의 지주로서 평생을 임하였고, 기유수보를 성사시켰다. 말년에 영평리 보성학원, 제주향교에 대동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을사이후에 의병거기를 위한 집의계 결사에 김이중(金履仲 31세손)과 더불어 가담 활약했다.
김기원(金基源)은 향교반수, 김경석(金景錫)은 장릉참봉과 한성부 주사, 김영수(金永洙)도 참봉, 김경석(金庚錫)은 제주향교 전교, 김구언(金玖彦)은 제주목 주사, 김민수(金玟洙) 의사, 김성수(金晟洙)는 한의사, 김신수(金紳洙) 초등교 교장, 김형수(金炯洙)는 대판중소기업진흥협동조합 이사장, 김양수(金良洙)는 남일화성 사장, 김태수(金泰洙 일명 勝濟)는 제주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경도(金景道) 부인 현신생(玄辛生)은 도종친회 효열상을 받았다(2004)
위남공계 김경식(金景軾 1870~1940)은 훈장 김최영의 자로 자는 경지(敬之), 호는 시은(時隱)이다. 무극대도교 교도로 포교활동을 통해서 일본왕은 물러나고 한국은 독립된다고 설파했다. 1940년 71세에 옥사했다.
김형수(金炯洙, 개명 金弘明 1905-1988)는 민단 단원으로, 무정부주의 항일결사 우리계(宇利契)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32세 김중근의 아들로 화북동 거로 출신이다. 1928년 4월 독서회를 조직했다가 1929년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6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1988년 광복절날 타계했고,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4세손 김병혁(金柄赫)은 제주목 주사, 김병기(金柄琪)는 제주향교전교 道종친회장을 역임했고 국가유공자이다. 김병용(金柄庸 34세)의 부인 강을생(姜乙生)은 향교효열상을 받았다. 김동우(金東雨, 이명 金柄蕆 34세) 김병칠(金柄七 34세)은 의사, 김병모(金柄謀 34세)는 道연구관, 김수현(金守賢 수남공계 34세)은 건축사, 김규희(金圭熙 35세)는 중등교장을 하였고, 김승용(金丞容 전사 수남공계 33세) 김병석(金柄石 해군소령 34세) 김병렴(金柄濂 육군대령 34세) 김순경(金順璟 전사 34세) 김석희(金碩熙 참전 35세) 김두희(金斗熙 육군소령 근로감독관 35세)는 국가유공자이다. 35세 김순선(金淳善)은 성균관장의를, 김순오(金淳五)는 용진회와 대판에서 공익사를 창립 청년운동을 했다. 36세 김대진(金大珍)은 새마을문고제주시지부 회장을 역임했다.
한편, 취암공계 입도조 23세 군자감정 김재수(金載秀) 이래 24세손 김경한(金景漢)은 공조참의를, 25세손 김시천(金時天)과 26세 김석구(金碩九)는 무과에 급제하여 각 가선대부를 증직 받았고, 특히 김석구는 중추부사 겸 경복궁 오위장을 행임했다. 27세 김낙성(金洛城)과 김낙민(洛敏)도 가선대부를, 28세 김재모(金才模)는 종사랑을 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 30세 김유돈(金有墩 부인은 여교장 金瑞玉)은 제주농업학교와 경성의전을 졸업한 의사로서 1918년 제주읍에 처음 개원하여 제주도 민간의료기관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의 장남 31세 김종철(金鍾喆)은 언론인이요 산악인으로 오름에 관한 한국최초의 보고서인 『오름나그네』를 내기도 했다. 32세 김치선(金致先)은 제주취암공파종친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나주김씨는 입도조 김인충이 그 뿌리를 내린 후 꾸준히 번창을 거듭했다. 오늘날 제주시를 중심으로 도 전역에 걸쳐 그 인맥을 형성하는 가운데 관계·법조계·교육계·문화예술계·실업계 등에 그 진출이 두드러진다. 한편 재일친족회장을 역임한 김영화(金永和 33세) 김경인(金景仁)을 비롯, 부회장 김태원(金泰元) 김태수(金泰洙) 등 일본 교포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4.3사건이라는 미증유의 혼란기를 맞아 나주김씨 가문에도 많은 희생자와 실종인이 발생했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이도동으로 이거했던 33세 김영해(金永海 1900~1973)는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부모형제가 흩어지고 친족들이 갈라지는 비극을 개탄하고 문중의 재건을 위해 흩어져 있는 친족들을 규합하여 1966년 종친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서 그 기반을 확립했다.
그 뒤를 이은 김성춘(金成春 34세) 김창옥(金昌玉 32세 두남공계) 김순원(金淳元 35세) 김병기(金柄琪 34세) 김창근(金昶根 32세) 김병읍(金柄俋 34세) 등 역대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노형동 고사모루에 종친회의 입도조 3대에 대한 선역(墠域)을 마련하고 선조의 유덕을 추념함과 동시에 수보(修譜)사업을 완료하고 종친회 결속을 다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세장지 환경정리사업, 장학회 창설, 청년부 육성, 김성조장군의 동상건립과 이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전개 중이며 상부상조의 협동심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있다. (김정택 記)
첫댓글 뿌리를 찾아 돌아볼 수 있게 가지런히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