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公州市)]
면적은 940.90㎢, 인구는 13만 2584명(2002)이다. 동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연기군, 서쪽은 예산군·청양군, 남쪽은 논산시·부여군, 북쪽은 아산시·천안시와 접한다.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북동에서 서남으로 뻗어 무성산(茂盛山:614m) 등 여러 산을 형성하고 있고, 남동부에는 계룡산(鷄龍山:845m) 지괴가 있다. 그러나 대개 해발고도 200∼300m의 구릉성 산지가 많다.
금강이 중앙부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많은 지류와 합류하고 하천 양안에 약간의 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지질은 선캄브리아대에 속하는 변성암류·편마상화강암류, 중생대의 화강암류, 경상계 퇴적암류·안산암반암류 등으로 이루어졌다. 토양은 금강 북쪽은 갈색·담황갈색의 양토 및 세치양토이며, 남쪽은 암색의 양토·치양토이다.
내륙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1.8℃, 1월 평균기온 0℃, 8월 평균기온 24.1℃, 연평균강수량은 1,373.9mm이다.
[연혁]
공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었고,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1) 이후 538년(성왕 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중국 당(唐)나라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670년(문무왕 10) 신라가 차지한 후, 686년(신문왕 6)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할하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웅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공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 2)에는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었다. 그뒤 1895년(고종 32)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에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1938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공주시와 공주군으로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다시 통합되어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공주시로 되었다. 1998년 봉황동이 중학동에 통합되고, 금흥동이 신관동에 통합되었다.
2003년 현재 유구읍과 계룡면·반포면·사곡면·신풍면·우성면·탄천면·의당면·이인면·장기면·정안면, 중학동·산성동·웅진동·금학동·옥룡동·신관동 등 1읍 10면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의 문화재]
백제의 고도 공주(公州)
계룡면
갑사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하고 있다.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정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써, 백제 구이신왕원년(久爾辛王元年,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후의 통일신라시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왜군의 대항하는 승별궐기의 거점이 되어 당시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시던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800여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선생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셨고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의 임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갑사는 조선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鍾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에는 대형의 이동은 임난후(壬亂後)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主要文化財)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象), 배살입상(菩薩立象),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등 5개의 부촉암(附屬庵)을 거느리고 있다.
- 갑사 강당(講堂) [지방문화재 제95호]
갑사의 해탈문(解脫門)과 대웅전(大雄殿)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강당(講堂)은 원래 승려들이 법문(法文)을 강론(講論)하던 건물로 맞배지붕에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이다. 기단(基壇)은 자연할석으로 낮게 쌓고 입구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주초(柱礎)도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중앙의 어칸(御間)에는 3구, 양쪽 협칸(夾間)에는 2구씩의 공포를 배치하고,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이며 포작(包作)의 구성은 앞뒤면이 같다. 기둥은 배흘림을 주어 안정감이 있다. 단청은 완전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며, 창틀은 개수되어 원형이 아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架構)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朝鮮時代) 건축이다.
- 갑사 대웅전(大雄殿) [지방문화재 제105호]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本殿)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에 중건(重建)하였다.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부근으로 보이며, 중건시 이건(移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간격은 가운데 3칸을 협칸(夾間)보다 넓게 잡아 공포를 2구씩 배치하고, 협칸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쇠서는 완만하게 휘어 있고 대체로 조선시대(朝鮮時代) 중기(中期) 양식(樣式)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초각(草刻)도 눈에 띈다. 내부는 우물천장에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석가여래불상(釋迦如來佛像)을 안치(安置)하고 있다.
- 갑사 동종(銅鐘) [보물 제478호]
이 종은 갑사 해탈문(解脫門)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안에 있다. 이 동종의 종신부(鐘身部)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龍)이 네 다리와 몸체로 유(종을 매다는 꼭지)를 이루어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며, 용통(甬筒)은 없다. 각부의 표현이 웅건(雄健)한 수법으로 조성된 우수작이다. 종의 어깨부분에는 물결 모양의 꽃무늬를 원형으로 두르고 바로 밑에는 위·아래로 구획하여 위에는 연꽃무늬, 아래는 범자(梵字)를 촘촘히 배치하였다. 이 횡대(橫隊)에 거의 붙어 있는 방형(方形)의 유곽(乳廓)안에 9개의 유는 연꽃무늬 가운데 원형으로 튀어 나왔다. 이 네모난 유곽띠 안은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되고 유곽은 대칭되게 4개가 있다. 당좌(撞座)는 구름무늬로 받쳐진 원형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을 잡은 늘씬한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다. 밑부분 종구(鐘口)에서 14cm위에 연꽃무늬와 보상화(寶相華) 무늬를 교대로 한 당초문(唐草紋)띠가 있다. 몸체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朝鮮) 선조(宣祖)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이름도 당시는 갑사사(甲士寺) 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9cm이다.
- 갑사 부도(浮屠) [보물 제257호]
이 부도(浮屠)는 원래 갑사(甲寺)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으로 팔각(八角)의 지대석(地臺石)위에 팔각(八角)의 기단(基壇)을 만들고, 사자(獅子)와 권운(圈雲)과 용문(龍紋)을 조각(彫刻)하였으며, 중대석(中臺石)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과 탑신(塔身) 양면에는 호형(弧形)을 조각하고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식(彫飾)하였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세부양식을 번안하여 우아하게 조성하였다. 각부양식(各部樣式)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건조(建造)로 추정된다.
- 갑사(甲寺) 사적비(寺蹟碑)
현종(顯宗) 원년(1659)에 세워진 이 사적비는 자연 암반의 중앙에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대리석(大理石)의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비신위에 옥개형태(屋蓋形式)의 비개(碑蓋)를 놓고 정부(頂部)에 별석(別石)의 보물(寶物)을 올렸다. 비문(碑文)은 비신의 상단(上端) 전후면(前後面)에 전서체(篆書體 )로「公州 鷄龍山 甲寺事碑銘」이라 횡서하였다. 비문의 일부는 손상되어 판독이 불가능한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碑石材)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실측치는 다음과 같다. 비신고(碑身高) 225cm, 폭(幅) 133cm, 두께(厚) 49cm, 비경고(碑莖高) 112cm, 비문자경(碑文字徑) 3cm.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지방문화재 제50호]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지방문화재 제50호] 갑사 동쪽 계곡의 약 100m 지점에 자연암석으로 된 동굴 안에 남쪽을 향해 전체 높이 141cm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안치되어 있다.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머리는 육계(肉界)가 크며, 백호(白毫)가 뚜렷하고 얼굴은 좀 길며 눈은 가늘고 입은 다물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쳐 좌우로 무릎 부분까지 늘어졌고, 가슴 앞 옷은 반원형으로 흘러내렸다. 오른손은 들어 가슴 부분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어 약사여래임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중엽(中葉)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갑사 철당간 및 지주(甲寺 鐵幢竿 및 支柱) [보물 제256호]
이 철당간(鐵幢竿)과 지주(支柱)는 현재 기단부(基壇部)의 대석(臺石)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고 장대한 두 개의 장방형(長方形)의 기단석만이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두 개의 기단석에는 각면에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여 장식하였는데 그 수법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안장 장식 기법과 같다. 동서(東西)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支柱)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지주로서 맨 위의 정상부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죽여 활모양(弧形)으로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이라는 구멍이 윗부분 한 군데에 장치되어 있는데 이곳에다 철제(鐵製) 당간의 다섯 마디 철통을 철띠로 세 번 돌려 고정시켰다. 철제 당간의 직경은 50cm로 현재 철통 24개를 연결하여 세워져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래는 28개의 철통이었으나 대한제국말기(大韓帝國末期)인 고종(高宗) 30년(1893) 7월 5일에 네 마디가 부러져 없어졌다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초기(初期)인 문무왕(文武王) 20년(680)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중기(中期)의 당간지주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 대적전(大寂殿) [지방문화재 제106호]
420년대에 창건된 갑사(甲寺)의 금당(金堂)으로 전하여 온다. 조선 선조 37년에 건축한 것이며, 임진왜란시 전사찰(全寺刹)이 병화(兵禍)로 1,000년 문화재가 불타버렸다. 이 건물은 선조(宣祖)37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 선조 2년간 월인석보판목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쳐 엮은 책으로 석가의 일대기와 공덕을 찬양한 내용이다.
- 표충원(表忠院) [지방문화재 제52호]
선조(宣祖)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승려의 몸으로 승병을 모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14년(1738) 이 분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
갑사계곡 충남 공주시 계룡면 - 계룡산국립공원에 있는 7개의 계곡 중 가장 빼어난 갑사계곡은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가을을 느끼게 할만큼 시원하고 가을에는 '춘마곡', '추갑사'라고 할 정도로 가을에는 단풍이 뛰어나다. 특히 5리숲이라고 불리는 갑사 진입로는 가을이면 단풍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갑사입구인 용추교에서 약 5km에 달하는 이 계곡중 폭이 넓고 물이 많은 용문폭포(10m)까지의 1.5km 구간이 물놀이를 즐기기에 알맞으며 갑사계곡 옆으로 난 좁은길은 계룡산에 오르는 등산길로 곳곳에 맑은 시냇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신원사 소재지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이며 갑사에서 남쪽으로 2.6km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갑사와 마찬가지로 계룡산 기슭에 자리한다. (공주에서 20km)
신원사의 창건은 백제 의자왕 11년인 651년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세운 것으로 전한다. 창시에 이어 중수는 고려성조기에 여괄화상이 대웅전을, 충열왕 24년인 1298년에 정암화상이 다시 중건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인 1394년에 무학화상의 중창이 있었고 고조13년인 1873년에 조연화상, 1940년에 만호허화상의 중건에 이르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란때 소실된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의 건물지는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전개된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금당지를 중심으로 신원사의 원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나 조사의 결여로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금당지로 믿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오층의 석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본래의 사역이었음을 쉽게 알게 한다. 이와같은 원금당지를 중심으로 석탑이 있는 이외에 현재의 신원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의 우측에 독성각이 좌측에는 영원전이 있는데 이들은 최근에 신축 혹은 개수가 이루어져 있다. 한편 대웅전에는 전내에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하여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좌측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한 경내의 유적이외에 대웅전의 남측에는 중악단이 있다. 중악단은 본래 계룡산 산신제단이던 것을 고조대에 중악단으로 바꾼 것이다. 이 경은 계룡산 신원사의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2층으로된 기단부와 4층의 탑신부만이 남아 있는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31호이다. 탑은 총 높이 310cm인데, 기단부의 지대석은 4매의 화강석을 조립하여 가구하였으며 그위에 하대의 면석을 올렸는데 이 면석에는 2품씩으로 나누어 안상을 조각하고 있다. 하단갑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에 상단면석의 받침을 몰딩으로 처리하여 조출하고 있다. 하대갑석상의 상대의 면석은 4매의 화강암 판석을 세워 조립하고 있는데 각면에 우주, 탱주를 조각하고 있으며, 상대갑석은 2매로 조립되었으며 흥형 및 각형의 조출로 2단의 옥신받침을 만들고 있다.
탑신을 구성하는 옥신은 모두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초층의 것에 비하여 2,3,4층의 것은 길이가 갑자기 작아지고 있다. 옥개는 4단의 층급받침을 나타내고 있는데 전각의 반전이 심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탑은 1975년에 해체·복원된 바 있는데 해체당시 층의 옥신 사리공에서 외대와 내대를 갖춘 사리패를 비롯하여 개원통보, 성원통보, 황조통보 및 파수와 주구가 결실된 자기 주전자와 녹색유리제의 긴 병이 발견된 바 있다.
- 대웅전
백제 의자왕 12년(652) 보덕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1875년 조연화상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 국제선원(國際禪院)
이곳은 매년 30여명의 카나다, 독일 등 서방 승려들이 운집하여 3개월간 수도하는 곳이다.
- 오층석탑[도지정유형문화재 제 31호]
이 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5년에 해체, 복원된바 있으며 석탑이 서있는 자리가 현재의 절 건물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으나 원래는 이곳이 신원사의 중심이었다.
- 중악단(中嶽壇)[도지정유형문화재 제 7호]
원래 계룡산신제단 즉 계룡단이던 것이 조선 고종때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에 하악단(下嶽壇)을 두고 있으므로 개칭한 것이라 한다. 옛부터 기우제 터로, 산신 기도처로서 국가의 위기때마다 큰몫을 하여왔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기 전에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기도를 하여오다가 조선을 개국하고 즉위 3년에 무학선사의 선몽에 의하여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을 성역화하고 그후에 누각을 건립하여 대대로 산신기도를 올리던 곳으로 고종 16년(1879) 단주화상이 중수하여 고종왕후도 친히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린 곳이라 전해진다.
- 석가여래진신사리탑(釋迦如來眞身舍利塔)
이탑은 1990년에 미얀마에서 4과 태국에서 3과 동합 7과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셔다 봉안하고 있는 탑이다. 이 곳에 가람을 세우고 탑을 세우면 천년만대로 국익을 도모한다는 옛말에 따라 현 주지 운담대사의 원력으로 세우게 되었다. 밤이되면 탑주위에 촛불을 켜놓고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 신원사괘불(新元寺掛佛)[국보 제 229호]
제작년대는 미상이며 조선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바로자나 불화로서 길이 9.76m 폭 6.17m로 마포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대법회시 밖에 내걸었던 행사용 불화이다.
금성동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 - 무령왕릉은 백제 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무령왕릉을 비롯해서 7기의 고분이 있다. 백제멸명후 8백년이 지난 15세기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공주의 왕릉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공주에는 두 곳에 왕릉이 있으며, 하나가 시내로부터 서쪽 3리에, 다른 하나가 동쪽 5리 능현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들 기록중 앞쪽의 "서쪽 3리 지점"에서 1971년 7월에 발견된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역사적 사건도 때로 '우연한' 작은 계기가 그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 무령왕릉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말하자면 그러한 일에 속한다.
자료2) 공주시청 자료
1971년 7월 5일 송산리 제5 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어 약1500년만에 처녀분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조사된 무령왕릉은 봉토가 마치 작은 봉우리 같은 외형을 한 원형으로 봉토의 직경은 약20m이며, 높이는 바닥에서 7.7m에 이르고 있으나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유실이 심하였던 것으로 보여 원래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봉토는 석회를 혼합한 흙을 사용하였으며, 능의 동남 기슭에서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호석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형태가 불규칙한 잡석을 4-5층씩 올린 것으로 처음부터 설치된 것이 아니라 뒤에 보수공사 같은 형식으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축의 단실묘(單室墓)로 평면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형태를 지닌 묘실(墓室)은 중앙에 연도(年度)가 부설되어 있다. 벽면은 남쪽과 북쪽인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동쪽과 서쪽은 상부에 이르러 차츰 곡률(曲律)을 주어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묘실 내부의 규모는 남북길이 4.2m. 동서 너비 2.72m이며, 천장중앙까지의높이는3,14m이다. 왕부부가 함께 모셔진 합장 무덤으로서는 낭비공간이 별로 없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벽체의 전축(電蓄)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 쌓기를 되풀이한 방식으로 길이모 쌓기는 전(電) 4개를 눕혀서 포개고 작은모 쌓기는 1개를 세워서 배열한 4편1수(4平1竪)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벽돌은 모두가 아름다운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문양은 사용된 위치에따라 몇종으로 구별되는데 길이모 샇기에 사용된 벽돌에서의 문양은 중간에 사격자(斜格子)의 망상문(網狀紋)을 두고 그 양단은 네모나게 구획하여 대각 십자선(十字線)의 중심에 6판(6辦)의 소형 연화문(小型 蓮花紋)을 하나씩 배열하였다.
작은모 쌓기 벽돌에서는 세 종류의 문양이 사용되었다. 벽체 하부를 구축한 전에는 주위를 네모나게 구획하고 그 내부에 팔판연화문을 반절한 것과 그 양면에 인동문을 하나씩 나타내고있다.이것을 좌우로 맞대고 구축하였으므로 벽면에는 만개된 팔엽연화문의 전형이 이루어지게되어 아름답게 배열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연꽃이라는 불교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고안의 명복과 내생을 기리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무덤의 구조는 크게, 들어가는 입구(入口)와 왕과 왕비를 모시는 현실(玄室)의 방(房)과배수구(排水口)로 나누어진다. 현실의 벽면에는 등잔(燈盞)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 서벽에 2개씩 모두 5개소의 작은 벽감(壁龕)을 두어 내부에 청자 등잔을 배치하였다.
등(燈)밑에는 각각 창(窓)을 상징하는 모양을 시설함으로써 방안에는 조명과 함께 영원으로 향한 창문(窓門)들이 갖추어진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바닥구조는 먼저 암반을 평탄하게 깍아냄후 그 상면에 벽돌을 삿자리 모양으로 배열하고, 벽돌 사이에는 석회(石灰)를 발라 암반(巖盤)에 고정시켜 깔았다.
묘실(墓室) 남벽의 중앙에서 시작된 연도(年度)는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의 규모이며, 천장은 완전한 아치를 이루고 있다. 돌의 문양과 구축방법은 묘실 내부와 흡사하나 팔판연화문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바닥의 높이는 묘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棺臺)와 동일하게 하였다. 발굴당시 명문전(銘文전)이 발견되었는데 "…士 壬辰年作(…임진년작)(512년)이라고 기록이 있는바 무령왕이 승하(523)하기 11년전인 512년에 축조 또는 준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능에서 출토된 유물은 사용된 재질로만 분류해도 석조물, 목제품, 금은제품, 청동기류, 도기류등 다양하며, 모두 108종 2,906점으로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이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서 현제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무덤중 유일한 벽돌 무덤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하겠으며 백제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매우 소중한 능이다.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 -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봉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지하에 많아 사적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구릉 중턱 남쪽 경사면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세 채와 네채로 갈라져 고분이 모두 일곱 채가 뚜렷이 남아 있다. 동북쪽에 1호부터 4호까지가, 서쪽에 5호와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인 1927년부터 발굴되어 왔으나, 1971년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 고분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그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1~5호분은 자연할석으로 돌방을 쌓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인데 벽면에는 강회를 발랐다.
반포면
계룡산도예마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555번지 - 계룡산도예마을은 반포면 계룡산 밑에 18여명의 도공들이 모여 토담집을 짓고 흙을 빚어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작품 도자기 (창작)와 환경조형물을 대상으로 도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각 도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 언제라도 제작과정을 관람할 수 있으며, 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나 단체객의 현장 실습교육으로 적합한 곳이다. 주요 도예문화 활동으로는 도예 예술작품의 창작 및 전시, 생활공예품 제작 및 판매, 주민 (일반인)을 위한 도예문화 교육, 도예문화 순례 등이 있다.
은선폭포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국립공 - 쌀개봉과 관음봉으로 감싸인 동학사 계곡 상류의 옥처럼 맑은 물을 받아 20m의 암벽을 흘러내리는 은선폭포는 동학사 계곡의 유일한 폭포다. 폭포앞의 기암절벽은 아름다움의 극치이고 절벽가에로 멀리 보이는 쌀개봉의 위용이 경이로우며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속에 신선이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은선폭포라 불리운다.바위틈에 의연히 자라는 소나무와 온갖 수목으로 어우러진 폭포주변의 4계절은 항상 새롭기만 한 녹음과 바위에 부딪치는 시원한 물은 산수가 조화되어 자연미의 극치를 이루며 비온 뒤의 풍경이나 달빛 또한 퍽이나 아름답다.
사곡면
마곡사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주의 서북방 약 24km거리에 해당한다. 이곳은 태화산의 지맥에 의해 둘러 쌓인 곳으로 예실의 수덕사와 더불어 충남지역 사찰의 본사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마곡사의 일지는 계곡이 깊기 때문에 택리지, 정감록등의 지리서나 비기에서도 병란(兵亂)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로 꼽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普徹和尙)이 설법(說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麻田)의 삼[麻]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마곡사가 충남에서는 훌륭한 절집들은 한꺼번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의 28본산의 하나이며 충남의 모든 사찰을 관할하는 큰 절이다.
절에는 전해오는 이 얘기로는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여 고려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그후 범일, 도선, 각순대사가 중수한 내용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행행하여 "영실전"(靈山殿)이란 3자를 특별히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전하기도 한다. 이 사찰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이 풍부하다.
마곡사의 연혁 및 건물의 역사를 밝혀 주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과 겸사입안원문의 내용이 전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처음 연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전하는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곡사의 가람배치는 경내를 가로 지르는 계곡을 경계로 하여 양분되고 있다. 계곡사이에 흐르는 천류를 경계로 남측에는 사찰의 입구에 해당하는 천왕문, 해탈문이 있고, 계곡냇물의 다리를 건너 5층석탑, 대응전이 자리하는데 석탑의 좌·우로 종무소, 요사체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입구에는 천왕문 해탈문이 서쪽에는 영산전을 비롯한 명부전 국사당이 있다. 한편 마곡사는 경내의 諸建物이외에 많은 부속암자가 사찰의 주변에 산재하고 있다.
마곡사의 경내에는 대웅전격(大雄殿格)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대광보전(大光寶殿)이 있는데 대광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다포팔작집으로 건축의 화려함에 치중한 건물이다. 전내에는 주존물인 비로자나불(昆盧那佛)이 지원민의 변형으로 왼쪽엄지가 오른손안에 놓이고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왼손 검지를 감싼채 대광보전의 정면이 아닌 동쪽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후불화(後佛畵)로는 영산회상도가 갖추어져 있다. 대웅보전은 현재 보수중이어서 내부의 자세한 형상은 알 수가 없으나 산경사면에 1.5m높이의 기단을 조성하고 정면5칸 측면 4칸인 다포팔작의 중층건물이다.
한편 대광보전의 우측에는 응진전이 있는데 중앙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안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선정인을 한 가약과 우측에는 현존불을 협시하고 있는데 이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 다포팔작집이다. 더불어 대광보전의 기단아래에는 쾌불지주석이 2개 있는데 1m높이에 폭 62m로 중앙에 지름 20cm의 지주공이 뚫려 있으며 이 지주석의 전면즉 대광보전의 앞에 다보탑이라 불리는 5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입구주변의 유적중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영산전인데 이 건물은 조선전기의 건축물로 영산전의 현판에는 세조대왕 어필이라고 세필로 종서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익공양식이 가미된 주심포계통이다. 전내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좌우에 본존보다 작은 석존뷸울 모시고 있다.
국사당(國師當)에는 자강율사, 보조국사, 범일국사, 도전국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우측의 벽면에는 태화산 산신이 모셔져 있는바 이 영정들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기타 건축물로서는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여성루가 있는데 문에는 사천왕상 및 금강역사상이 배치되어 있고 여성루는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마곡사에는 이들 건축물이외에도 종과 불화가 있는데 이중 불화는 이곳에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 천왕문 [문화재자료 제62호]
입구에서 해탈문을 거쳐 두 번통과하는 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해탈문과 같은 규모이나 해탈문이 팔작집인데 비하여 맞배집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중앙 칸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안치 하였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나 내부에 걸린 연액에는 1910년에 중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오층석탑 [보물 제799호]
이 오층서탑의 최정상부에는 라부식 보탑과 유사한 청동제의 장식물로된 상륜부가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이다. 2층탑신부 4면에는 4방불인 아촉불·보상불·아미타불·묘성불이 조각되어 있다. 원나라 영향을 받은 고려 말의 작품으로 임진왜란때 무너져 그 속의 귀중품은 이미 없어졌다.
- 해탈문 [문화재자료 제 66호]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벗어나 법계에 들게 되고 해탈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양쪽 협칸에는 흙으로 구워만든 금강 역사상 2구씩을 안치 하였다.
- 김구선생의 은거지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1836-1949)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민씨시해에 대한 분노로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 후 은거하여 도를 닦던 곳이다. 조국 광복 후 선생이 이곳을 찾아 대웅전 주련에 却來觀座間猶如夢中事(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 같구나)를 보시고 더욱 감개무량하여 그 때를 회상하며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 대광보전 [보물 제7802호]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다. 비로자나르는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지며 이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 또는 대적광전 등으로도 부른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13년(1813)에 다시지은 덧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기둥위 추녀 밑으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또 장식도 겸해 짜맞춘 포가 많이 배치된다. 포형식은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불단을 서쪽에 배치시켜 비로자나불을 동향으로 모셔져있다. 불상 위의 섬세한 조작 단집과 기둥위의 용머리 조각, 천장의 연화봉과 문학문 단청등 장식적 특성을 잘 살린 조선후기 건축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 대웅보전 [보물 제801호]
대웅전은 석가부처님을 봉안한 곳이다. "법화경"에 석가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석가 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현재 전각안에는 석가·약사·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집이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이며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위 처마 밑으로는 처마 하중을 받으며 장식도 겸해 누무쪽을 짜맞춘 포를 여러 개 설치한 다포식으로 조선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 온다. 임진 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조선효종 2년 (1651)에 각순대사와 당시의 공주목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응진전 [문화재자료 제65호]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이건물은 조선 철종3년(1852)에 중수하였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사용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추녀 밑에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도구를 여러개 배치한 다포계의 팔작집이다. 이건물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 불단에는 석가의 제자인 나한상을 봉안하였다.
- 영산전(靈山殿)[보물 제 800호]
일명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러 오기도 하는 이 영산전은 조선 효종 2년(1651) 각순대사(覺淳大師)가 중수한 바 있는 전각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웅진동
곰나루국민관광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440번지 -곰나루국민관광지는 사적 제 12호인 공산성은 총연장 2,660m의 고대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웅진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하여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있다.
중 동
국립공주박물관 충남 공주시 중동 - 공주박물관은 1940년 공주사적현창회가 조직되어 충청도 감영청이던 '선화당'을 옮겨 그 건물에 공주지방 유물들을 전시함으로써 시작되었고, 1946년 국립박물관을 공주분관으로 개편되었으며, 무령왕릉 발견을 계기로 1972년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박물관의 소장유물의 본 바탕은 공주사적현창회의 수집품과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품 중 백제시대 유물과 조선시대 공주 관계 일부 유물의 이관품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1971년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의 눈부신 유물 전시로 한층 주목받게 되었다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
공산성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 산성으로 둘레 2,660m. 면적 21만m이며 남으로 시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 형태를 띄고 있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 인조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도성이기는 하나 백제시대 뿐만아니라 역사의 변천속에서 시대별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각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성의 명칭은 백제시대 축조 당시는 웅진성이라 하였으나, 고려시대이후에는 공주산성·공산성, 조선시대 인조인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의 구조는 석축이 약 1,925m, 토축이 약 753m, 동문지 밖의 토성 467m까지 포함하여 저네가 2,660m이며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높이 약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 보수되어 있고,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져 이다.
성내에는 진남루·공북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성사적비·영은사·연지·임류각·군창지·동문·서문등의 유적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의자왕(백제 마지막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창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대왕이 피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동학사
소재지는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이다. 공주에서 동쪽으로 20km거리의 계룡산 상봉 산계곡간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성덕왕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하고, 고려 태조 4년(921년) 도선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는데,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으로 있던 유차달이 이곳에서 신라 시조와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이해 동학사로 이름을 바꾸어 학장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름에 대해서도 절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고려말의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으로 원조인 정몽주를 제사 지냈으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조선중기에 병란으로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순조14년에 월인선사가 사옥을 중건하고 고종원년에 보의선사가 구사를 철거하고 중창하였다.
이와 같은 사찰의 연혁으로 미루어 동학사(東鶴寺)의 유적은 고종년간이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중창되었음에도 현재 사성에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병년에 이루어진 것들로 문화재의 유존은 대단히 빈약한 실정이다. 1860년 강원(講院)을 개원한 승가대학은 전국의 많은 비구니(여승)들이 이곳을 거쳐가지 않은 분들이 없을만큼 니승(尼僧) 교육의 전당이다. 지금까지 500여명의 스님들이 졸업하여 전국 타 강원의 강주스님들로 후학을 담당하고 있다.
- 천진보탑(天眞寶塔)[문화재자료 제 68호]
이 탑은 인공으로 만든 탑이 아니고, 탑 모양을 한 자연 바위이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한 후,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많은 양의 부처의 사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를 시방세계에 나누어 줄 때 사천왕 가운데 북방을 담당한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을 계룡산에 보내어 이 천연석탑 안에 사리를 두었는데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 사리를 발견하고서 천진보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 동학사 강당
- 삼성각(三聖閣)[문화재자료 제 57호)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모신 곳이다. 가운데 칠성, 왼쪽에 산신, 오른쪽에 독성탱화를 모셨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고 있으며, 독성은 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는데 재물을 담당한다. 각 도교, 불교, 토속신앙의 한 표현으로,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앙요소가 합쳐진 형태이다. 불교 이외의 신앙대상을 모셨으므로 건물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하였다.
- 숙모전 [지방기념물 제18호]
세조에 의해 왕위를 강제로 빼앗겼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성삼문등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조 2년(1456)에 처음 마련된 제단이다.
영조 4년(1758)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고종원년(1864)에 만화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였고, 1924년에 숙모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 삼층석탑(三層石塔)[문화재자료 제 58호]
이탑은 규모가 작은 것으로 고려시대 작품이며 청량사(남매탑이 있는곳)의 암자에서 옮겨진 것이다.
- 대웅전(大雄殿)
공주시 우성면
천불 대참회 도량 고불산 성곡사는 공주시 우성면 방문리에 있고 관묵 주지스님께서 1983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1995년에 회향식을 가진 사찰이다. 이곳 성곡사의 천불 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청동좌불은 국내에서 가장 큰 좌불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을 둘러싸고 반원형으로는 부처님의 상수10대 제자 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는 동판에 새긴 금강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길이 210m에 이르는 말굽형, 10개의 계단에는 1천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높이는 190cm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전국최대규모를 자랑하여 이 고장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 청동좌불
청동좌불은 국내에서 가장 큰 좌불로 높이만 해도 12.5m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좌대를 포함할 경우 18m에 이른다.
- 1천 입불상
석가모니 청동좌불의 좌우에 모셔진 높이 190cm의 입불상으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최대규모이다.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한국 고유의 전통 양식을 이어 외 7포와 내 11포의 웅장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옥내에는 닷집을 조성하였으며 특유의 목조건축양식으로 건립하였다. 주불은 현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보처는 미래세의 미륵보살님과 우보처는 과현미 삼세의 제반업장을 소멸제도 하시는 제화가라 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다.
- 야광 여래불
현재 1천 부처님을 모신 곳 뒤편에 333,333개의 야광 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 포대화상(布袋和尙)
중국 봉화현의 명주 사람으로 이름은 계차이며 모집이 뚱뚱하고 배는 느러져 이상한 모양을 하였으며 아무데서나 자고 지팡이에 자루를 걸머지고 모든 물건을 자루에 담고 남에게 보기만 하면 무엇이든 달라고하여 자루에 넣고는 하여 별호를 "장 정자"라 하고 또는 포화대상이라 하였다. 사람의 길흉화복을 말만하면 신기하게 백발백중이니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이라 칭하기도 하고 십왕전이라고도 하고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중앙에 지장보살님과 왼쪽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고 좌·우로 십대왕을 모시고 동남동녀와 판관 2인에 녹사(錄事)좌우 2인과 걸영신 좌우 2인이 있으며 망자의 선악을 조명하는 업경대가 좌·우에 안치되어 있다.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십일면관세음보살 상은 각각 화관을 쓰고 화관 위에는 아미타불이 있으며 십일면관세음보살의 좌수(左手)에는 정병을 잡고 연화가 솟아나오게 하며 우수에는 영락 금불과 주옥같은 구슬을 장엄하게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의 팔을 들고 다섯손가락을 펴고 있는 형상으로 그 높이는 69m에 이를 것 이라고 한다. 현재 십일면관음보살을 조성하고있는 중이다.
공주 석장리구석기유적지[公州石壯里舊石器遺蹟地, 사적 제 334호]
석장리는 공주시 장기면의 금강 북안(北岸)에 있는 마을이며, 1963년 지표조사시 처음 깬석기가 채집되어 유적의 존재가 알려졌고, 1964년부터 1992년까지 13차에 걸쳐 연세대학교 및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최대의 선사문화 유적지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타제석기와 아울러 노지등의 유적이 밝혀졌다.
이곳 석장리구석기유적은 선사시대 전기, 중기, 후기의 다양한 문화층이 형성되었으며 집터, 불땐자리, 사람의 털과 짐승의 털, 불에탄 곡식낱알등 주거가 발견되었고 글개, 찌르게, 자르게, 주먹도끼, 주먹대패등 타제석기 3,000여점이 발굴 출토되어 선사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배밑바닥 모양의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약 3만년전~1만년전) 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아시아, 베링해, 알래스카, 북미대륙에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어 동북아시아에서 북미대륙으로 사람들이 이주한 과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결과 지층은 27개의 층위로 형성되어 있으며,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층도 11개 층 위에 이르고 있슴이 밝혀졌다. 제 1층의 문화층은 구석기시대 전기 즉 민델(Mindel)빙하기, 제2~6층의 문화층은 구석기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시기로 리스(Riss)빙하기에서 제 3간 빙기까지에 해당하며, 2층위의 문화층은 구석기시대 후기 및 중석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출토된 문화유물인 석기에는 제1~4층에서 초퍼(Chopper, 외날도끼), 초핑툴 (Chopping tool, 쌍날도끼) 등이 있었고, 제5~6층에서는 스크레이퍼(scraper, 밀개), 주먹도끼 등이 있었으며, 제7~10층에는 스크레이퍼, 그레이버(Graver)등이 있었다. 그리고 제 11층에서는 그레이버,스크레이퍼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유럽의 유석기시대 후기문화의 하나인 오리냐크(Auriqnac)문화와 유사한 점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 석장리유적은 중기,후기까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서식한 동물의 화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유적지 일대는 모두 전답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이 경작지대는 해발 약 13m~17m상의 단구에 놓여 있는데 과거 60년 전부터 벌채가 심하여 산사태가 잇달아 일어났고 매년 항우기에 따르는 토사의 퇴적으로 하상면의 상승으로 초근에는 심한 홍수시 해발 15m까지 수위 가 높아져 1~2주동안은 유적지가 완전히 물속에 잠겨버리는 일도 있으며, 겨울에는 지층이 얼었다가 봄에 녹으면서 부분적으로 문화유적이 붕괴될 우려가 있어 유적지 보존대책수립이 요구되고 있다.
- 돌날
후기구석기시대
길이 8.7cm
충남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 몸돌과 맞붙는 격지
중기구석기시대
길이 5.0cm
충남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 밀개
후기구석기시대
길이 3.0cm
충남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효(孝) 관련 유적
- 효자이복정려비(孝子李福旌閭碑)
공주시 옥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공주목(公州牧) 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이복(李福)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셨는 바, 홀어머니의 봉양이 지극함에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명정립비(命旌立碑)를 세우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공주 옥룡동에는 비선거리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비석이 죽 늘어져 있었답니다. 비석들 중 아주 아주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 있었는데, 이른 바 이복의 효행을 기리는 비랍니다. 시대는 고려때, 이 비선거리 마을에 어린 나이에 아비를 여의고 살아가는 소년 이복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미는 장님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려서 부터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하고 그 품삯으로 음식을 얻어 눈 먼 어미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바람이 몹시 불고 아주 추운 겨울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밥과 국을 얻어가지 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러 집으로 가는데 길을 걷다가 그만 미끄러져 며칠을 굶주린 소년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 가져다 드릴 밥과 국을 땅에 쏟아져 버렸답니다. 효자 이복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통곡을 하였습니다. 집에 계신 굶주린 어머님 생각에 더욱더 서럽게 통곡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이복이 넘어진 그 자리를 갱경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후에 국고개라 불리게 되었답니다. 또 어느해 겨울에 앞을 못보시는 어머님이 병이 들게 되었답니다. 백방을 약을 구해 지극정성으로 써 보았으나, 차도가 없어 이복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동네사람들도 이복을 도우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이복의 어머님의 병에는 잉어피가 효험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엄동설한에 이복은 잉어피를 구하여 금강변으로 나갔으나, 모두 얼음으로 뒤덮혀 있었습다. 먼저 천지신명께 잉어를 잡을 수 있게 제를 올리고 나서 빙판을 깨고 낚시를 드리우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신기하게도 큰 잉어가 잡혔습니다. 며칠 후 어머님의 병환이 씻은듯이 나았답니다. 동네 사람들 또한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복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게 되고 이복지리란 비석을 세우게끔 하였습니다. 현재는 옥룡동 양수장 중턱에 새비석과 더불어 구비석도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 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 도지정유형문화재 제 99호]
공주시 소학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비는 효자 향덕(向德)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 때 웅천주(熊川州)사 람으로 동왕 14년(755)에 흉년과 유행병으로 부모님이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으로 모셨다. 왕은 이 사실을 알고 향덕에게 벼 300석과 집 한 채와 토지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바각 안의 구비(舊碑)는 부러져 밑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 에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비(新碑)는 영조 17년(1741)에 향덕의 효성을 기리는 비문을 쓴 관찰사 조영국(趙榮國)이 세운 것 이다. 이 비는 우리나라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전 가난하게 살았지만 마음이 착하고 무엇이든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을 잘모시기 위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향덕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아버님의 병세가 처음에 대단치 않았는데 날 로 그 병세가 악화됐더랍니다. 이리저리 좋다는 약과 용하다는 의원은 다찾아 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때, 지나가던 고승이 향덕의 어버님의 병세를 진찰하더니 방법을 알 려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향덕의 허벅지 살을 고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향덕은 허벅지 살을 도려 내어 그 다음날 그 허벅지를 고아드렸더니 아버님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 했답니다. 그런 데 몇해 뒤에 이번에는 어머님이 병이 나셨습니다. 온몸에 등창이 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생각끝에 향덕은 그 어미의 등창에 입을 대고는 그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루종일 고름을 빨아 내니 그 고름을 뽑아낸 자리에 큰 구멍이 생기고 뽑아낸 고름은 한주발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비와 어미를 구한 향덕의 이야기가 온나라에 퍼져 마침내 임금님의 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답니다. 향덕의 효 심에 감동한 임금님은 향덕에게 큰 상을 내리고 그 이듬해 정문과 비를 세워 향덕의 효성을 후세에 남기도록 하였고 또 향덕이 살던 마을에 효가리 또는 효포리로 부르도록 하였습니 다. 지금도 효가리에 가면 향덕이 자기 허벅지를 베어 가지고 냇물에서 씻을때 흐른 피가 냇물을 붉게 만들었다하여 혈흔천이라는 시내가 있답니다.
- 말티(마티)고개이야기
동학사가 있는 반포면에서 공주로 넘어오자면 고개가 하나있는데, 옛날 옛날에 그 고개에는 가난한 농부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무척 가난해서 산에 올라가 나무도 져다 팔곤 했습니다. 무척이나 가난한 농부는 장가가는 일도 잊은 채 부모님만을 잘 봉양하는 아주 효성이 지극한 농부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부의 아버님이 머루를 먹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 총각은 온 산을 다 뒤졌으나 서리내린 산 속에 머루가 있을리가 만무였습니다. 이런 농부의 마음도 모른채 아버님은 또 다시 소의 간을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루는 못 구하더라도 소의 간은 나무 몇짐만 더하면 된다는 생각에 흥겨운 마음으로 평소보다 두배나 더 많은 일을 했더랍니다. 이렇게 며칠간 일을 하다보니 가난한 농부도 몸져 눕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꿈속에 한 신령이 나타나 "너의 효성이 지극하구나, 내일 너의 병이 나을것이며 일어나거든 뒷산의 큰 바위앞으로 가보면 말이 있을 터인즉 그것으로 어버이를 잘 섬기도록 하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날 농부는 잠에서 깨어 뒷산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 속았구나 그러면 그렇치'하고 돌아서는데 잠시후 바위가 쩍 갈라지 면서 이히힝하고 홀연히 말 한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에구머니 진짜네! 농부는 그 말을 데리고와 일을 시켰더니 힘도 세고 일도 곧 잘해 농부는 금방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부는 장가도 가고 부모님도 잘 모시고 자식도 많이 낳아 잘 길렀다고 합니다. 현재는 마티고개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 우금고개이야기
옛날 이곳 뱁새울에는 김서방이라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가 착하고 효성이 지극했답니다. 가난하긴 했어도 부모 모시는 일에는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모든 효자들에게는 부모가 큰병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비가 큰병이 들었습니다. 생각끝에 김서방은 깊은 산속에 약수를 떠다드리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날마다 약수를 떠다 드렸는데, 어느날 밤 꿈에 한 늙은 노인이 나타나 어디어디로 가면 금송아지가 있으니 그것을 팔아서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려라는 말만 남긴채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김서방은 늙은 노인이 말한대로 그곳으로 갔더니 금송아지가 있었습니다. 김서방은 금송아지를 내다팔아 아버지의 약을 지어드리니 아비의 병도 낫고 남은 돈으로 새집을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건너마을 심술궂고 못된 박서방의 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박서방은 늙은 아비에게 고되게 일을 시켜 이내 몸져 눕게 만들고는 김서방이 한 것처럼 약수를 떠다 드린 것이 아니라 박서방 자신이 먹었 습니다. 그렇게 하자 김서방과 마찬가지로 신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올것이 왔다고 생각한 박서방은 김서방과 마찬가지로 금송아지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는데 박서방은 금송아지를 팔아서 생길 돈을 생각하며 공상에 잠겼는데 아니 금송아지가 시냇물처럼 콸콸 똥을 싸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에 박서방은 똥에 묻혀 죽고 말았답니다. 이리하여 그곳이 우금(牛金) 고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김서방과 박서방이 약수를 떠오던 곳을 샘골이라 부르게 되었 습니다.
김종서 장군 생가지
2.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인물 소개】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거쳐 33년(세종 15)에는 함길도(咸吉道)관찰사로서 6진(六鎭)을 설치, 조선의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확정시켰다. 이듬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帝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野人)들의 정세를 탐지하여 보고하고 그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40년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46년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49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총책임을 맡아 51년에 간행하였다. 그 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우의정에 올랐으며, 52년(문종 2)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때 총재관(摠裁官)이 되었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이해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서 황보인(皇甫仁)·정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으로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된 뒤, 대역모반죄(大逆課叛罪)라는 누명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복관(復官)되었다. 시조 2수가 전한다. 저서에 《제승방략》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
【유적 내용】
◆ 김종서 장군 생가지
소재지 :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작품 소개】
◆ 작품
朔風은 나모긋쯡 불고 명월은 눈속에 쏅듸
萬里邊城에 一長劒 집고셔셔
긴쿁람 큰 한소?에 거칠 ?시 업세라
▷ 쌀쌀한 북풍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고, 중천에 뜬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을 비쳐 싸늘하기 이를 데 없거늘, 이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국경의 성루(성루)에 한 장수가 올라 긴 칼을 힘있게 짚고 서서 긴 휘파람과 외치는 고함소리 앞에는 감히 거치는 것이 없구나.
▷ 일명(一名) 호기가(豪氣歌)라고도 불리는 작품으로 무인(武人)다운 늠름한 기개가 넘치는 시다. 이 호기(豪氣)는 지용(知勇)을 겸비한 한 장군의 개인적 기상이라기 보다는 신흥 이조(新興 李朝)의 생기찬 호흡이며 새로운 시대의 세찬 입김이라 할 것이다. 개인을 초극(超克)한 시대의 입김이 되기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그마한 사사(私事)에 공사(公事)의 명분(名分)을 도용(盜用)하는 오늘날엔 …….
◆ 작품
長白山에 旗를 곳고 豆滿江에 물을 싯겨
서근 져 션?야 우리 아니 꿁나희냐
엇덧타 *往閣?像을 누고 몬져 폁리오
▷백두산에 우리의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기니 (남을 모함하고 시기만 하는) 썩어 빠진 선비들아, 우리는 사내 대장부가 아닌가. 나라에 공훈이 많은 신하의 얼굴을 그려 건다는 기린각에 과연 누구의 화상이 먼저 걸리겠느냐.(우리 같이 나라를 지킨 대장부의 그것이 먼저일 것이다.)
* 인각화상 : 당나라 때 국가에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의 화상을 그려서 걸었던 집임.
475년
1. 고구려의 장수왕이 쳐들어와 수도를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임.
2. 문주왕이 즉위함. 수도를 웅진으로 옮김
476년
1.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이북(漢江以北)의 민호(民戶)를 이주시킴.
2. 송(宋)에 사신을 보냄.
3. 탐라국(耽羅國)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이에 왕이 사신에게 은솔(恩率)의 직책을 줌.
4.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음.
477년
1. 궁실(宮室)을 중수함.
2.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음.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삼음.
3. 흑룡(黑龍)이 웅진(熊津)에 나타남.
4. 내신좌평 곤지가 죽음.
5.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정치를 마음대로 함.
6. 해구가 사냥나간 문주왕(文周王)을 살해함. 삼근왕(三斤王)이 즉위함. 군국정사(軍國政事)를 해구에게 위임함.
478년
1. 일식. 봄.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더불어 대두성(大豆城)에서 반란을 일으킴. 덕솔 진로(眞老)가 해구를 토벌하여 해구는 살해되고 연신은 고구려로 도망함.
479년
1.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냄. 봄·여름. 크게 가뭄.
2. 대두성(大豆城)을 두곡(斗谷)으로 옮김.
3. 삼근왕이 죽고 동성왕(東城王) 이 즉위함.
481년
1.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함.
482년
1. 진노(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고, 내외(內外)의 병마사를 맡김.
2. 말갈이 한산성(漢山城)을 침입함.
3. 큰 눈이 옴.
483년
1. 남제에 사신을 보냄. 남제에서 삼근왕(三斤王)에게 관작을 보냄. 봄. 한산성(漢山城)의 군민(軍民)을 위로함.
2. 왕이 웅진(熊津)의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록(神鹿)을 잡음.
484년
1. 남제에 사신을 보냄.
2. 신라와 교빙함.
3.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서해에서 고구려의 저지로 되돌아옴. 485년
1. 신라에 사신을 보냄.
486년
1. 백가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삼음.
2. 남제에 사신을 보냄.
3.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쌓음.
4. 궁성 남쪽에서 군사를 열병함.
489년
1.가을. 풍년이 듦.
2.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냄.
3. 왕이 남당(南堂)에서 군신들과 연회.
490년
1.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을 쌓음.
2. 사비 벌판에서 사냥함. 연돌(燕突)을 달솔(達率)로 삼음.
3. 얼음이 얼지 않음. 이해. 국경에 침입한 북위군 수십만을 대파함.
491년
1. 홍수로 왕경(王京)의 200여가가 표몰됨.
2. 기근이 심하여 600여호가 신라로 도망함
492년
1. 눈이 내림.
2.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힘.
3. 왕이 우명곡(牛鳴谷)에서 사냥함.
493년
1.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함에 신라에서는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냄.
494년
1. 신라와 고구려가 살수에서 싸우다가 신라가 패하자 구원을 요청하여 원병을 보냄.
495년
1. 일식.
2. 고구려가 쳐들어와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함.
497년
1. 병관좌평(兵官佐平) 진로(眞老)가 죽고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음.
2. 큰 비가 와서 민가가 떠내려 감.
498년
1. 웅진교(熊津橋)를 가설함.
2. 사정성(沙井城)을 축조함.
3. 탐라(耽羅)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정벌하려다가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그만둠.
499년
여름.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자 기근으로 도적이 생기고 고구려로 도망하는 자가 2.000명에 이름.
1. 유행병이 발생함.
500년
봄. 궁성(宮城)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음.
1. 우두성(牛頭城)에서 사냥함.
2. 가뭄. 왕이 임류각(臨流閣)에서 밤새도록 연회를 즐김.
※이무렵. 부여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상. 서산마애삼존불 등 만들어짐
501년
1. 서리가 내려 보리농사 피해.
2. 가뭄이 계속됨.
3. 탄현(炭峴)에 책(柵)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함.
4. 가림성(加林城)을 쌓음.
5. 왕이 사비의 동원(東原)에서 사냥함.
6. 웅천(熊川)의 북원(北原)과 사비의 서원(西原)에서 사냥함.
7. 백가가 동성왕을 살해함.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함.
502년
1.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에서 반란을 일으킴. 봄. 기근과 유행병이 발생함.
2. 양(梁)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3.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함.
503년
1.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에 침입한 말갈을 격퇴함.
2.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침범함. 겨울. 얼음이 얼지 않음.
506년
봄. 전염병 발생.
1. 가뭄으로 기근이 발생하여 구휼함.
2. 말갈이 쳐들어와 고목성(高木城)을 깨뜨림.
507년
1. 고목성(高木城) 남쪽에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함.
2. 고구려 장수 고노(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을 공격해 와 이를 격퇴함.
508년
1. 탐라(耽羅)와 처음으로 통교함.
509년
이해.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옴.
510년
1. 제방(堤防)을 쌓고, 유민(遊民)을 농업에 종사케 함.
512년
1.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
2. 고구려가 침공해 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함.
3. 왜에 사신을 보냄.
513년
1. 일본에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를 파견함.
516년
1. 일식 이해. 오경박사(五經博士)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냄.
520년
1. 무령왕비은천(武寧王妃銀釧)을 제작함
521년
1. 홍수(洪水) 발생.
2. 누리가 있어 곡물을 해침. 기근이 심하여 신라로 도망하는 자가 많음.
3.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
4. 양나라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522년
1. 왕이 호산원(狐山原)에서 사냥함. 10. 지진(地震) 발생.
523년
1. 왕이 한성(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15세 이상자를 동원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음.
2.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함. 시호법(諡號法) 시작. 이해. 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만듦.
524년
이해. 양(梁) 나라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525년
1. 신라와 교빙함. 이해. 무령왕릉(武寧王陵) 축조. ※이무렵. 정읍 은선리고분군 유적 형성.
526년
1.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움. 이해. 승려 겸익(謙益)이 인도에 감.
527년
이해. 대통사(大通寺), 대도사(大島寺)를 창건함.
529년
1. 고구려 안장왕(安臧王)이 쳐들어 와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함. 이에 오곡원(五谷原)에서 이를 물리침.
532년
1 유성이 떨어짐.
534년
1.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
2. 혜성이 나타남.
538년
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함.
1.일본에 태자상(太子像) 관불기(灌佛器) 등을 보냄. 이해. 일본에 불교(佛敎)를 전수함. 공주 송산리 5호분 만듦.
※공주의 지명의 유래와 변천
-웅진, 웅천, 웅주등으로 불리었다.
★. 공주(公州)
곰의 전설이 깃든 백제의 고도(古都)로 공주는 본래 웅천(熊川)이었는데 백제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는 웅진이라 하였고, 백제가 망한 뒤에는 당나라에서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두었었다.웅진이라는 이름은 금강가에 있는 나루터인 고마나루(곰나루)즉,곰웅(熊), 나루진(津)의 뜻을 취한 것으로 구마나리,고미나루등의 어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이 곰나루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한 사내가 하루는 인근에 있는 연미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고 배가 고파서 바위 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났다.사내는 처녀와 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그 후 처녀는 사내가 자신의 정체가 곰이란 것을 눈치챈 것을 알고 사내를 바위 굴 속에 가두어 놓았으며 사내는 암콤과 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았다. 어느 날 암콤이 없는 틈을 타서 사내는 도망을 나와 금강을 헤엄쳐 건넜다. 뒤늦게 이를 알고 쫒아 나온 암콤이 멀리서 자식을 들어 보이며 마음을 돌리도록 호소하였지만 사내는 냉정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암콤은 어린 자식들을 안고 금강에 뛰어 들고 말았다. 그후부터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일이 많았으므로 나루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실제 1972년 이 나루에서 돌로 새긴 곰상이 발견되고 그 자리에 곰사당인 웅신당을 지어 모시고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공주시청자료 및 네이버 지식검색